[응? 갑자기 무슨 소리야?]
[기억이 엿보이기 시작했어.]
나의 새로운 능력.
많아서 다 설명하기도 힘들지만, 이것만큼은 자랑하지 않을 수 없다.
흡수한 생명체의 기억을 엿보는 것.
싸아~
머릿속에 기억이 스친다.
푸른 머리의 지배자 세리아스.
이 녀석이 어떤 고초를 겪고 성장했는지와, 아칸벨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까지. 사념이 얽힌 굵직한 기억이 느껴진다. 덕분에 아칸벨리의 대략적인 정보를 알아냈다.
[아칸벨리는 101층에 본거지를 두고 있어. 다행히 드워프 왕국의 정보를 다른 곳에 퍼트린 것 같진 않네.]
[뭔… 설마 흡수한 녀석의 기억을 읽은 거야? 그렇게 쉽게?]
[계승과 원리가 비슷하거든. 큼지막한 사건을 엿보는 것 정도지만, 이것만 해도 필요한 정보는 충분히 얻을 수 있지.]
세리아스의 기억을 쭉 살펴보았다.
옛날에도 흡수했던 생명체의 강한 사념을 엿보았던 적이 있지만, 아주 찰나에 불과하며, 지금은 의도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심지어 범위가 다르다.
단순히 엿보는 게 아니다.
계승이라고 할까.
감정까지 알 수 있다.
살펴보는 걸 넘어 체험할 수 있다.
완벽하게 기억을 파헤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녀석에게 큰 영향을 끼친 사건들은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굉장한 능력이다.
이제 정보를 캐내겠다고 누군가를 고문할 이유도 없다. 죽이고 흡수하면 그만이니까.
따라서 세리아스 뿐만 아니라, 방금 흡수한 자들의 기억까지 잠깐 살펴보았다.
아칸벨리가 뭐 하는 곳인지 알겠다.
대충 야망 넘치는 신생 세력이다.
흡수한 자들의 기억을 보니 대체로 질 나쁜 놈들이 많은 듯하다.
사람을 모으고.
크게 한탕하고.
몫을 조금 배분하고.
만약 사건이 터지면 책임을 떠넘기고 세력은 모른척한다.
뭐 이런 얍삽한 세력이 다 있지.
다만.
[…조금 두통이 오네.]
너무 방대한 정보.
기억에 담긴 감정.
계승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기 때문인지, 단순히 엿보는 것만으로 내게 큰 영향이 온다.
[야. 괜찮냐? 안색이 조금 별론데?]
[잠깐 부작용이야. 기억을 엿보면서 많은 놈들의 감정을 단번에 체험했거든.]
[흐음?… 그거 위험한 거 아냐?]
[방금처럼 막 쓰지만 않으면 돼.]
가능하면 텀을 두고 써야겠다.
방대하게 남의 기억을 엿보면 내가 이상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잘만 응용하면… 꽤 재밌는 일을 할 수 있을지도.
우선.
[돌아가자. 정보도 전부 알아냈으니, 시리안이랑 벨칸에게도 알려야지.]
[그래그래. 혹시 모르니 조심하고.]
[물론.]
일렁일렁~
한 손을 뻗었다.
공간문이 열렸다.
그만 돌아가자.
*
스르륵.
슈화아아!~
전쟁은 끝.
나는 샤엘라와 함께 차원 틈새를 벗어나 드워프 왕국으로 복귀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한 드워프가 다가왔다.
우리는 다크레아와 이어진 드워프 왕궁 포탈로 이동했기에, 벨칸을 만나려면 다시 위층으로 찾아 올라가야 했다. 그걸 알기 때문인지, 벨칸도 미리 부하를 대기시킨 듯했다.
터벅~
“감사합니다. 고귀한 엘프시여. 당신이 아니었다면, 우리 가족이 위험했을 겁니다.”
안내인 드워프는 걸으며 감사를 표했다.
우리의 활약이 벌써 전해졌는지, 정말로 존경이 담겨 있었다.
“별것 없어. 그보다 궁금한 게 있는데.”
대충 드워프 상황을 물었다.
들어보니 소집된 군대는 이미 해체되었고, 벨칸이 나를 기다리고 있단다. 지체할 것 없이 벨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오오! 왔는가.”
“오셨습니까. 신목님, 여신님.”
예전에 대화 나눴던 응접실.
그곳에 벨칸과 시리안이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지 차가 끓여져 있었다. 내가 시킨 대로 둘이서 양국 동맹과 미래 방향성에 대해 얘기 나누고 있었던 듯하다.
리키아드는 어디 가둬둔 모양.
대충 일 처리는 다 끝난 듯하다.
“이제 다 같이 얘기나 나눌까.”
“물론이지. 어서 앉으시게나.”
나와 샤엘라는 시리안 옆에 앉았고, 벨칸과 테이블을 두고 마주 보았다. 잡다한 건 시리안이 알아서 할 테니, 나는 아칸벨리에 대해 알아낸 것부터 바로 얘기했다.
“적을 심문해보니 이곳을 침략한 건 아칸벨리라는 세력이더군. 규모가 크진 않아서 아마 다시 침략할 여력은 없을 거야.”
“아칸벨리라… 혹시 그들이 어떻게 이곳을 알아냈는지는 아는가.”
“너희 드워프 중 하나가 고문당한 것 같아. 정확한 건 나도 모르고.”
“……그렇군. 바깥에선 그리 조심하라 가르쳤거늘. 누군가 모진 고문이라도 당했나 보군. 하지만 복수할 여력도 없어 분하구나. 내게 볼카누스님의 망치만 있었더라도….”
“망치? 그게 있으면 좀 달라지나?“
“혁명이 일어날 걸세!… 하지만 지금은 그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니군.”
“혹시 대응책이 있나?”
“모르겠구려. 적들이 침략할 여력이 없다지만, 그게 더 큰 문제일세. 다른 곳에 정보를 팔면 더 강한 세력이 침략해올 테니.”
당장의 전쟁은 승리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다.
우리는 격퇴한 것이지, 적들의 본거지를 끝장낸 것이 아니다. 분명 다시 공격하거나, 정보를 팔아넘길 것이다.
세리아스의 기억도 그랬다.
마지막에 정보를 팔 속셈이었다.
아무런 대처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결국 누군가 또 침략 오겠지.
남 일 같지 않다.
이건 나도 당해본 일이다.
폐기장에서도 맨 처음 노예 사냥꾼을 잡았다가 이후 카르델피온이 왔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초기 대응이 제일 중요하다.
고로.
“일단 아는 정보를 전부 말해줄게.”
벨칸과 시리안에게 정보를 전부 알려줬다.
대응책도 뭘 알아야 세울 수 있는 거니.
“이곳을 침략한 지배자는 셋이었어.”
리키아드.
세리아스.
레이븐.
세 명의 지배자와 500명의 인원은 아칸벨리의 약 7할에 해당하는 전력이며, 101층 본거지를 둔 세력이다. 그리고 아칸벨리 본거지는 또 2명의 지배자가 있고, 거기에 더해 반신급에 해당하는 세력 수장이 있다.
여기서 문제는 적의 본거지 위치다.
당장 101층에 갈 방법이 없어 이쪽은 쳐들어갈 수도 없다. 당연히 나와 다크레아의 활동 범위는 고작 20층 초반에 불과하다.
그건 드워프 왕국도 마찬가지.
“허어… 이건 또 어찌해야 할지.”
고심 깊은 벨칸의 목소리.
시리안이 기죽지 말라며 위로하곤 있으나, 상당히 절망적인 모습이다.
그래도 벌써 기죽을 것 없다.
이쪽은 드워프를 포기할 생각이 없으니.
“너무 걱정하진 마. 다크레아 숲은 이곳 도시보다 넓으니까. 정 안되면, 최후의 수단으로 너희 모두 수용해줄 수 있어.”
“허허… 그나마 위안이 되는 소리군. 백성이 비참한 일을 겪진 않을 테니.”
찜찜한 미지의 적들.
달콤할 수 없는 승리다.
벨칸으로선 착잡할 수밖에 없겠지.
사실 세오른에 도움을 청하는 방법도 있지만… 아직 확실하진 않으므로 말하진 않았다. 리리스가 거절하거나 손댈 수 없다고 판단하면 더 큰 절망이 될 테니까.
아니, 아칸벨리를 처리해도 문제다.
세력원 7할이나 동원한 원정이었다. 세력원의 충성도가 높진 않았으니, 원정이 시작된 순간 정보가 어딘가로 새어 나갔을 수 있다.
벨칸도 그걸 생각한 걸까.
녀석이 휙 고개를 들었다.
“혹시 당장 이주해도 되겠는가.”
“응?”
“애초에 이 도시도 본래 세계를 버리고 숨어든 곳이라네. 두 번 못할 것 없지.”
“그 말은….”
“이번에는 그 장소가 다크레아일 뿐이네. 그대가 허락해준다면, 우린 그곳으로 이주할 준비를 할 걸세. 만일이 사태가 터져도 언제든 도망칠 수 있도록. 아니, 가능하면 일이 터지기 전에 이주를 마치는 게 좋겠지.”
“그렇게 갑작스럽게 정해도 괜찮겠어? 이렇게 잘 발전된 도시를 버리고 오겠다고?”
“내 백성의 목숨보단 소중하진 않네. 가능하다면 지금부터 준비하고 싶군. 그대들에게도 꼭 나쁘진 않을 거야.”
정말 과감한 결단이다.
생각해보면 매번 볼 때마다 판단이 기가 막히도록 빠른 녀석이었다.
날 처음 만났을 때도.
이번 침략에 도움을 청한 것도.
다크레아와 깊은 동맹을 맺은 것도.
그리고 도시를 버리고 다크레아로 이주하겠다는 것까지.
뛰어난 예측과 과감한 결단력.
이건 시리안보다 한 수 위인 듯하다.
과연 일국의 왕이 가진 짬은 무시할 수 없군.
나야 나쁜 것 없다.
그만큼 다크레아의 기술 발전은 무지막지하게 빨라질 테니까. 문제는 도시를 버리는 드워프들의 가슴 아픈 심정이겠지.
“정말 괜찮은 거 맞지?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함이네. 불만 가질 백성은 아마 없을 걸세. 차차 시간 들여 직접 모두를 설득할 생각이니. 그대만 괜찮다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즉시 옮길까 하네.”
“그럼 시리안과 대화 나눠 봐. 가능한 원조는 다 해줄 테니.”
잠시 시리안과 눈을 마주쳤다.
녀석은 알아서 해결하겠다는 듯 미소와 함께 꾸벅 고개를 숙였다.
“네. 저와 대화 나누시지요.”
“허허허. 정말 고맙네.”
슥.
“대충 용건은 끝났네. 난 이만 가 본다.”
“오늘 일은 절대 잊지 않을 걸세.”
“나중에 보고드리겠습니다.”
둘의 배웅과 함께 일어섰다.
왕국 간의 협정 이야기는 머리 아픈데다가, 내가 끼어들 일도 별로 없으니까.
이제 다시 복귀할 시간.
“샤엘라. 그만 갈까?”
“흐흐흐.”
“…왜 웃고 있냐.”
“너무 훅 커버려서.”
“…?”
“가자~”
다시 공간 문을 열었다.
우리는 만능 시리안에게 뒤처리를 맡기고 다크레아로 복귀했다.
*
사르륵.
다크레아 세계수 집.
공간 문을 타고 복귀하자 다소 예상치 못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뭐 하냐…….”
“응웃?”
레이븐이라고 했던가.
보라색 머리의 마법사가 집구석에서 내 줄기 일부를 뜯어내 오징어 다리를 먹듯이 뜯고 씹고 맛보며 즐기고 있었다.
질겅질겅.
꿀걱.
“…깨끗한 마나가 맛있어. 이렇게 정순한 마나는 흔치 않아. 보약 같은 기운도 느껴져. 먹을 수 있을 때 먹어야 해.”
“……내 몸을?”
“………?”
녀석이 문제 있냐는 듯 고개를 갸웃한다.
다른 지배자들은 험악했는데, 이놈은 혼자 다른 세상을 사는 것 같았다.
다만.
“흠… 무찬의 줄기도 나름 괜찮았지. 옛날엔 보약처럼 먹었으니.”
샤엘라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인다.
넌 왜 수긍하고 있는 건데….
하아~
잠깐 한숨 후 레이븐에게 물었다.
“지금 네 처지는 알고 있지?”
끄덕.
“전부 이해하고 있어. 나는 아칸벨리가 너희를 침략하는 데 일조했고, 혼자 목숨을 구걸하고 살아남은 상태야.”
“…그래. 알면서도 도망치진 않았네.”
“난 약속을 지켜. 그리고 날 가만히 방치할 리가 없었을 거야. 분명 내가 도망치지 못하게 무슨 장치가 있겠지. 아쉽게도 뭐가 있는지 알아낼 수 없었지만.”
“마법사라 그런가. 예리한데?”
“알려줄 수 있어? 궁금해. 호기심에 나가 보고 싶은 걸 계속 참고 있었어.”
“뭔… 호기심을 참았다고?… 보통은 도망가고 싶어서 나가려 하지 않나?…….”
“참았으니까 알려줘.”
“참 이상한 놈이네… 별거 없어. 분리된 차원이라 어디로든 도망칠 수 없거든. 그리고 이 집을 벗어난 순간 내가 알아차렸을 테고.”
“분리된 차원?…….”
“그런 게 있어. 그것보단 네 걱정이나 하지? 내가 이제 널 어떻게 할지 모르잖아?”
“아… 이제 날 어쩔 생각? 살려준다면 원하는 것 뭐든 해줄 수 있어.”
“솔직히 뭘 생각하진 않았어.”
“그럼 날 여기 머무르게 해줘.”
“응?”
잘못 들은 걸까.
보통 이런 상황에선 내보내 달라고 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그런 내 생각을 부정하듯.
레이븐은 다시 한번 말했다.
“이곳을 연구하고 싶어.”
그러면서 녀석은 집에서 뜯어낸 줄기 조각을 입에 쏙 밀어 넣었다. 나와 대화하는 짧은 시간에 벌써 4번째 반복된 행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