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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9

       “이곳을 연구하고 싶어.”

       ​

       “연구?….”

       ​

       무덤덤한 표정.

       그러나 호기심 깃든 눈빛.

       계속 입으로 들어가는 줄기 조각.

       지배자 레이븐은 어째서인지 연구를 목적으로 이곳에 머무르고 싶단다.

       ​

       여러모로 당황하게 만드는 녀석이다.

       차원 틈새에선 바로 항복하질 않나.

       집에서 내 줄기를 먹고 있질 않나.

       이젠 여기 머무르게 해달라?

       ​

       혹시 어디 모자란 건가?

       아니, 자기 상황을 너무 잘 알고 있다.

       모자라다기 보단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범주의 사고를 가진 것 같았다. 문제가 있다면 뻔뻔하다는 것 정도.

       ​

       원래 적이었을진대.

       내게 흡수됐을진대.

       그랬을 녀석이 다른 지배자들과 달리 아무런 자존심 없이 항복을 선언하고 뭐든 해주겠다고 하는 것부터가 뻔뻔하다고. 거기서 왜 더 나아가 머무르게 해달라는 건데.

       ​

       단순히 학구열 때문인가?

       그런 기벽을 가진 건가?

       ​

       샤엘라가 질문했다.

       ​

       “레이븐아. 뭐 때문에 여기가 연구하고 싶다는 거니?”

       ​

       “너희는 여기가 분리된 공간이라고 했어. 그리고 이런 좋은 냄새가 나는 곳에서 정순한 마나를 받아먹을 수 있는 것도 좋아. 이곳도, 줄기도, 너도 전부 궁금해.”

       ​

       “오호… 줄기의 맛도 알고 냄새까지 느낀다라. 뭘 좀 아는 녀석이군.”

       ​

       끄덕끄덕.

       ​

       어째 샤엘라는 벌써 동의하는 눈치다.

       아니, 저 녀석도 냄새를 맡는 거냐고.

       ​

       뭐….

       솔직히 나쁘진 않다.

       다크레아엔 마법사가 부족하니까.

       녀석을 머무르게 하고 이쪽의 전력으로 삼으면 크게 도움 될 것이다.

       ​

       차라리 잘 됐다.

       이참에 길들여 봐야겠지.

       우리 전력으로 써먹을 수 있게끔.

       ​

       “너 마법 잘 쓰냐?”

       ​

       “모든 마법에 정통해.”

       ​

       “운석도 떨굴 수 있어?”

       ​

       “시간만 주어진다면 어렵지 않아. 다만, 운석의 크기를 유지해 지상에 도달하기 위해선 큰 집중력과 마나가 필요해.”

       ​

       “호오. 그거면 충분하지.”

       ​

       메테오 가능한 마법사.

       그 이상의 검증은 필요 없다. 지구 인간이었던 내겐 로망이니까.

       ​

       레이븐은 재차 확인 질문했다.

       ​

       “그럼 여기 머물러도 돼?”

       ​

       “물론. 대신 몇 가지 일을 해야 해.”

       ​

       “어떤 일?”

       ​

       “다크 엘프들에게 마법을 전수하는 거야.”

       ​

       어떻게 써먹을 진 방금 구상했다.

       다크 엘프에게 마법을 가르치는 것.

       다크 엘프는 정령과 자연 마법에 약하다. 

       그래서 인간의 마법을 주로 쓰지만, 깊이 또한 매우 빈약하다. 

       ​

       물론, 시리안은 예외.

       자세한 경지는 모르지만, 레이븐에게 밀리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녀석은 바쁜 몸이라 엘프를 가르칠 수 없다. 여기서 레이븐이 그녀를 대신할 해결책이 되어줄 터.

       ​

       “지금부터 넌 엘프를 가르쳐. 그러면 네가 바라는 대로 머물게 해줄게.”

       ​

       “…하루에 몇 시간 정도? 혹시 모든 지식을 전수하도록 부려 먹을 생각?”

       ​

       “응? 아니. 대충 하루에 한두 시간 정도면 충분할 거야. 여긴 마법 지식이 얕아서 네 진도를 따라가기 힘들게 뻔하거든.”

       ​

       “한두시간? 그게 전부??”

       ​

       “네 재량껏 더 가르치고 싶으면 더 가르쳐. 대신 수업할 때만큼은 엘프들에게 진심으로 가르쳐야 해. 이해했지?”

       ​

       “…정말 그게 전부?”

       ​

       “참. 네가 뭘 연구하는지는 모르지만, 그 결과도 내게 알려줘. 그 정도면 충분해.”

       ​

       “……진짜 정말 그게 전부?”

       ​

       “왜 자꾸 묻는 거야? 혹시 계속 부려 먹을까 봐 두려운 거냐? 그럼 어느 정도 도움 됐다 싶으면 내보내 줄게. 네가 침략이 목적이 아니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대신 우리 정보가 새지 않도록 조치는 취할 거야.”

       ​

       “아니…….”

       ​

       “왜 또.”

       ​

       “아니, 알았어.”

       ​

       레이븐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응이 애매하지만, 딱히 거부할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

       가능하면 녀석을 써먹을 생각이다.

       왜냐하면 세리아스의 기억 속에 레이븐은 정말 아칸벨리에서도 제멋대로였고, 연구 투자 사이로 맺어진 관계였거든. 적이라기보단 굴러들어온 보석인 셈이다. 

       ​

       일단 이 정도 대우면 충분하겠지.

       ​

       자, 그럼.

       ​

       “샤엘라. 잠시 이 녀석 집 좀 짓고 올게.”

       ​

       “그래그래~ 다녀와.”

       ​

       “레이븐. 넌 따라와. 머물 집을 내어줄 테니.”

       ​

       “응.”

       ​

       머무르고 싶다 하니 집을 줘야겠지.

       후딱 일을 맡기고 치워버리자.

       ​

       ​

       ​

       *

       ​

       ​

       ​

       ‘이상한 엘프네….’

       ​

       레이븐은 속으로 그리 중얼거렸다.

       사실상 인질로 잡힌 입장인데,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는 걸 떠나서 큰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보내 주겠다고 했다.

       ​

       ‘싸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

       뻔뻔한 요구들.

       사실 그냥 질러본 거다.

       성공하면 좋은 거고, 아니면 예정대로 부딪치는 거니까. 의외로 잘 통해서 거래 가격을 40% 깎아본 적도 있다. 즉, 레이븐은 자신의 상황을 매우 잘 이해하고 있으며, 일부러 뻔뻔한 요구를 하는 것에 익숙한 것이다.

       ​

       그녀도 혼자 고층을 등반한 실력자다.

       당연히 이런저런 사건 전부 겪어봤다.

       자기 상황도 모르고 철없는 요구를 한 것과는 다르다는 뜻이다.

       ​

       남이 보기엔 같을진 모르지만….

       어쨌든 레이븐은 이런 상황에서 상대가 어떻게 대응하는지 대략 알고 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항복한 자를 깔보고 이것저것 부려 먹거나, 추잡하고 굴욕적인 짓도 서슴지 않는 자가 많다. 만약 그리되면 모든 힘을 다해 맞설 생각이었는데.

       ​

       ‘왜 통하는 거야? 이들에겐 난 인질이나 다름없는 입장인데. 가둬놓고 못된 짓을 할 줄 알았는데. 잘 마무리돼도 내게 불리한 요구를 할 줄 알았는데… 내 요구를 들어줬어.’

       ​

       무찬은 달랐다.

       항복을 편견 없이 받아들였다.

       심지어 요구를 들어주고, 나중에 그냥 보내주겠단다. 그 말이 사실인지는 검증할 수 없으나, 무천의 입장에서는 굳이 그런 호의를 베풀 이유가 없다는 걸 알고 있다.

       ​

       원래는 흥미가 떨어지면 몰래 떠날 방법을 찾을 셈이었는데, 저 말이 사실이라면 그럴 필요도 없게 되었다.

       ​

       무엇보다.

       ​

       ‘아칸벨리에선 연구 지원을 핑계로 하기 싫은 연구까지 온종일 시켰었는데… 여긴 한두시간을 제외하곤, 연구하고 싶은 걸 하면서 지원까지 받을 수 있는 거야?’

       ​

       왜인지 기분이 좋아졌다.

       무덤덤한 표정에 1mm만큼의 미소가 잠깐 보였다가 사라졌다.

       ​

       허나.

       ​

       ‘수상해. 속임수가 있을 거야.’

       ​

       탑에서 의심은 기본 덕목.

       레이븐은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속으로 수없이 의심했다.

       ​

       하지만 그것도 잠시.

       ​

       “저기에 네 집을 지을 거야.”

       ​

       “오. 오오….”

       ​

       다크레아 세계수 집 밖.

       그녀는 문을 열고 나온 뒤에 자신이 있던 곳이 거대한 세계수 안이었음을 깨달았다.

       ​

       ‘이건… 엘프의 성지. 세계를 구성하거나 생명을 창조했다는 여러 가설의 집합체인 신비롭고 풍요로운 생명 결정체. 세계수!!’

       ​

       반짝반짝!!

       ​

       레이븐의 눈동자에 별이 나타났다.

       방금까지의 모든 생각이 날아갔다.

       ​

       ‘내가 먹은 줄기는 세계수. 정순한 마나와 청량한 기운은 세계수였기 때문이었어!’

       ​

       벅차올랐다.

       세계수는 매우 보기 힘들다.

       탑에선 이상하게 세계수를 찾아보기 힘들며, 다른 세상으로 간다 할지라도 없거나 멸종됐거나, 딱 하나 남아서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게 엘프가 목숨 걸고 지키곤 한다.

       ​

       보는 것조차 매우 어려운 존재.

       잎과 가지부터가 귀중한 재료.

       존재 자체로 마법계의 신비.

       그것이 바로 세계수다.

       ​

       ‘드디어 보았어.’

       ​

       흥미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당장 세계수의 모든 것을 연구하고 파헤치고 싶어졌다.

       ​

       그렇기에.

       ​

       “2층에 집을 파줄게.”

       ​

       “진짜?”

       ​

       반짝반짝.

       ​

       무찬이 세계수에 집을 지어준다는 한마디에 아무리 표정이 없는 그녀라도 놀라움과 기쁨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

       엘프에게 성역과도 같은 곳.

       그곳에 집을 내어주겠다니.

       ​

       대체 이 무슨.

       ​

       휙!

       ​

       빠르게 정신 차리고 뒤를 돌았다.

       ​

       넓은 숲.

       사이사이의 집들.

       자연과 조화를 추구하면서도 발전된 건축 양식과 몇몇 채의 빌딩이 보였다.

       ​

       그리고 당연하게도.

       ​

       ‘엘프….’

       ​

       엘프들이 돌아다닌다.

       신기하게도 전부 다크 엘프였고, 이미 수십 명도 넘는 인원이 주변에 몰려들어 신성한 표정으로 이곳을 향해 기도하고 있다.

       ​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장면.

       속으로 의문을 표했다.

       ​

       ‘아무도 제지하지 않아? 여기를 보며 기도하고 있어? 왜?….’

       ​

       슥.

       ​

       레이븐은 무찬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세계수에 집을 지은 데다가, 자신에게 2층 집을 내어주겠다는 무찬의 존재와 그것을 제지하지 않는 엘프의 모습이.

       ​

       ‘왜 이자에게 기도하고 있는 거야?’

       ​

       엘프의 기도가 매우 익숙해 보였다.

       이런 일이 자주 있었던 것처럼.

       ​

       하이 엘프.

       그런 범주가 아니다.

       마치 엘프의 신이라도 되는 듯한….

       ​

       빠안-

       ​

       “…왜 그리 쳐다보는 거냐?”

       ​

       “알아낼 거야.”

       ​

       “뭘?…….”

       ​

       “네 정체.”

       ​

       “그래. 맘대로 해라.”

       ​

       무찬은 별 괘념치 않아 했다.

       오히려 귀찮다는 듯.

       ​

       “들어가자. 집 다 지었으니까.”

       ​

       “응?”

       ​

       검지로 세계수를 가리켰다.

       벌써 집을 다 지었다는 얘기에 시선을 돌리니, 아무것도 없던 곳에 2층으로 향하는 계단과 문이 나타나 있었다.

       ​

       ‘어, 언제?….’

       ​

       “들어가자. 네가 여기 머물 동안 지낼 집이니까. 마음대로 꾸며봐.”

       ​

       “………응.”

       ​

       꿀꺽 넘어가는 침.

       반짝거리는 눈빛.

       설레이는 가슴.

       두근콩닥거림.

       ​

       어느새 홀린 듯.

       그녀는 무찬을 따라갔다.

       흥미를 가졌으나 놀란 적은 별로 없었다.

       어느 새부턴가 무슨 일에도 놀라지 않았었다.

       ​

       그러나.

       ​

       ‘알고 싶어.’

       ​

       이런 미지의 것을 꿈꿔왔다.

       가슴 뛰게 하는 그런 것을.

       ​

       ​

       ​

       *

       ​

       ​

       ​

       다크레아 세계수 2층.

       폐기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2층 계단과 레이븐의 집을 지었다.

       ​

       “여기가 내 집?”

       ​

       레이븐은 이곳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쭉 무덤덤했던 표정이 어느새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변해 있었다.

       ​

       “당장 준비된 게 없으니, 여기서 며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쉬고 있어. 나중에 네가 가르칠 엘프를 데려올 테니까.”

       ​

       “이 집은 내가 맘대로 사용해도 돼? 집 파서 줄기 뜯어 먹어도 돼?”

       ​

       “줄기… 그냥 더 좋은 걸 줄게.”

       ​

       뽀록!~

       ​

       손끝으로 생명과가 맺혔다.

       그것을 녀석에게 내밀었다.

       ​

       “손끝에서 열매?…….”

       ​

       녀석은 호기심에 열매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열매를 먹진 않고, 마나를 이리저리 흩뿌리며 알 수 없는 마법을 사용하고 손끝에서 또르륵 굴리길 반복했다.

       ​

       “뭐 하냐.”

       ​

       “감정. 이건 아마도 고등급 영약.”

       ​

       “……….”

       ​

       텁~

       ​

       마침내 녀석이 생명과를 입에 넣었다.

       그렇게 잠시 우물우물 씹던 녀석은.

       ​

       “므웃?….”

       ​

       놀란 듯 이상한 소릴 흘렸다.

       그 상태에서 다시 입만 위아래로 움직이며 생명과를 마저 삼켰다.

       ​

       꿀꺽.

       ​

       “…방금 이거 뭐야?”

       ​

       “이곳 특산품이지.”

       ​

       “세계수 열매?….”

       ​

       “맞아.”

       ​

       “…더 먹을 수 있어?”

       ​

       “네가 일만 잘한다면야. 아니, 이참에 여기 눌러앉아 우릴 도와주면 더 맛있고 좋은 음식을 먹을 수도 있지.”

       ​

       “……….”

       ​

       슥.

       ​

       녀석이 잠시 고개를 숙였다.

       정말로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양새.

       이거… 잘하면 자의로 정착시킬 수 있겠는데?

       ​

       그렇다면야.

       ​

       파앗!~

       ​

       한 손에 차원 줄기를 소환했다.

       차원 틈새에서 녀석이 호기심을 드러냈던 차원 줄기 지팡이다. 옛날이라면 매우 귀한 물건이지만, 지금은 여분이 좀 있다.

       ​

       “그건!….”

       ​

       마침 녀석의 시선이 내 손에 향했다.

       나는 지팡이를 옆으로 살랑살랑 흔들었다.

       ​

       슥, 슥.

       ​

       내 손에 맞춰 돌아가는 고개.

       반짝 생기 도는 눈동자.

       ​

       “갖고 싶냐?”

       ​

       이거 먹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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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roken Goddess Tries to Raise Me

The Broken Goddess Tries to Raise Me

망가진 여신이 나를 키우려 한다.
Score 8
Status: Ongoing Author:
I have become the World Tree that the goddess is obsessed with. I ended up taking care of the broken goddess, and at some point, she started exerting her strength to raise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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