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탑을 뒤로하고.
말라 죽은 나무를 두드리고.
특정한 곳의 원반형 돌을 치우고.
몇몇 패턴을 파훼하고 쭉 나아가면 적당한 크기의 동굴이 하나 나타난다. 살짝 아래로 경사져서 지하로 이어진 곳이다.
이곳이 유일한 통로.
그 동굴을 넘어가면.
“저곳이 아칸벨리인가.”
뻥 뚫린 하늘과 외딴 성이 나타난다.
솔직히 성이라고 부르긴 애매하다.
아직 규모가 작고 사방이 절벽에 막힌 공간에 우두커니 있을 뿐이다. 성의 영토라고 해봐야 사방 200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다만, 경치는 나쁘지 않다.
분명 땅속이지만, 마법으로 뻥 뚫린 하늘과 태양 빛이 비치고, 들판 같은 땅에는 농작물과 풀,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동화 같은 곳이랄까.
나쁘지 않은 감성이다.
하지만 저 대규모 마법은 내가 훔치러 온 히페리온 동력원으로 유지되고 있다. 곧, 이 아름다운 경치가 사라질 거라는 소리다.
하지만.
“역시 작아.”
소규모 신생 세력이라던가.
아름답긴 해도, 큰 성채 하나가 전부다.
다른 세력 본거지를 봐선 모르지만, 세오른만 해도 도시를 제 것처럼 부리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얼마나 초라한 건지….
“환영합니다. 세리아스님.”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누군가가 나타나 정중히 인사했다.
아마 아칸벨리의 노예다.
고층에 있다고 해서 다 강하진 않다.
알고 보면 고층에 갇혀 누군가의 발판으로 살아가는 이런 약자가 굉장히 많다. 탑에는 노예가 흔하다고 들었다. 또한 게이트를 이용할 수도 없으니 도망치지도 못하겠지.
나는 노예에게 지시했다.
“내가 온 걸 굳이 알리진 마라.”
“네?”
“여기 가만히 있으라고.”
“…예, 예!”
여성 노예는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원래라면 먼저 뛰어가서 성에 내 소식을 보고하고 맞이할 준비를 하지만, 그러면 마음대로 돌아다니기 힘들어진다.
따라서 녀석을 놔두고 나아갔다.
아칸벨리의 성으로.
‘저 꼭대기에 아칸이 있겠지.
아칸이란 자는 아칸벨리의 수장이다.
자존감이 매우 높은지 세력에 자기 이름을 붙인 놈이다. 세리아스 기억에 의하면 150층까지 등반한 강자로 다른 큰 세력에서 머물다가 뜻이 맞는 지배자들 몇몇을 뼈와 창설한 곳이 바로 이곳 아칸벨리가 된다.
세리아스도 그때부터 함께했다.
아칸벨리의 주축이 되어 빠른 성장을 위해 드워프를 침략했다.
하지만 놈들은 잘못 건드렸다.
침략했으면 침략받을 각오도 해야 하는 법.
오늘 아칸벨리는 파괴된다. 거래 따위는 일절 없다. 추악하고 제멋대로인 녀석들이라는 건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방심하고 있을 때 모두 죽인다.
자박.
그리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외길을 걸어 성문에 도착.
경비가 나를 맞이한다.
꾸벅.
나를 알고 있는 반응.
고개 숙이는 세력원의 인사에 아무런 대꾸 없이 쭉 걸어갔다.
현재 나는 세리아스다.
최대한 그녀의 흉내를 내야 한다.
“열어라.”
“예.”
지이잉!~
마법 기술인 걸까.
누군가 장치에 손을 넣자 마나의 유동과 함께 철문이 위로 올라갔다.
제지받을 일은 없다.
나는 이곳의 2인자다.
안으로 진입했다.
*
성 1층 내부.
넓은 복도로 움직였다.
성은 5층 규모로 수백명 정도 머물 수 있다. 대부분은 노예들이며, 지금은 1명의 지배자와 10명 정도의 세력 간부가 머물고 있다.
혼자선 살짝 부담되는 전력.
내 힘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배자와 아칸은 각개격파할 필요가 있다.
우선 지하로 향했다.
이곳에 히페리온 동력원이 있으니까.
1억짜리 보물.
싸우기 전에 일단 그것부터 챙길 생각이다.
중간에 수틀려 도망가도 빈손은 아니도록 말이다.
내게 쏠리는 시건은 모두 무시했다.
그렇게 0층으로 향하는 지하 문에 도착.
하지만.
“세리아스님. 생각보다 일찍 돌아오셨군요. 원정은 성공하신 겁니까?”
한 간부가 날 알아보고 다가왔다.
도마뱀 머리를 한 리자드맨이었다.
세리아스의 기억에서 엿보기 힘든 걸 보면 중요한 인물은 아닐 것이다.
어서 지하로 내려가고 싶지만….
우선 대화를 받아줬다.
“주제넘은 질문이군.”
“큼. 만약 실패하신 거라면 메리안님이 슬퍼하실지도 모르니까요.”
이놈이 누군진 모른다.
대신 메리안이라는 이름은 안다.
이곳에 주거 중인 지배자의 이름 중 하나.
다른 놈들과 마찬가지로 남들의 피땀으로 배를 채우는 작자 중 하나지만, 세리아스와는 별로 친하진 않은 관계다.
대충 경쟁 관계 정도.
어차피 내 알 바 아니지.
“네놈 이름이 뭐지? 내가 어떤 놈을 짓밟아야 하는지 궁금해졌거든.”
“네?… 무, 무례를 범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난 이름을 물었는데?”
“그….”
“함부로 나불대지 마라. 메리안이 내게서 널 지킬 수 있을 것 같나?”
“죄, 죄송합니다!!”
어차피 세리아스는 2인자다.
하지만 메리안은 3인자라 하기에도 살짝 애매한 위치에 있는 놈이다.
게다가 난 진짜 세리아스도 아니지.
이참에 머릿수를 줄여도 괜찮을 터.
괜히 시비를 걸었다.
“알 것 같군. 메리안이 날 떠보라고 시킨 거겠지. 내 말이 맞나?”
“……아닙-”
쩌적!!!
“…!!?!”
녀석의 목을 잡았다.
얼음 능력을 극도로 끌어올려 녀석의 상반신을 통째로 얼렸다. 대답을 망설인 순간, 아니, 내가 여기 온 순간부터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다. 조금 앞당겨 줬을 뿐.
이걸로 암살 끝.
나름 300레벨의 강자 같지만….
지배자급에겐 사냥개 정도에 불과한 정도.
녀석은 꽁꽁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했다. 그 옆을 스쳐 지났다.
“허업!….”
한 노예가 이 장면을 본 것 같지만, 무시했다.
굳이 죄 없는 노예까지 죽일 생각은 없다.
이대로 지하에 내려가자.
어서 보물이나 훔쳐야지.
쾅!~
잠긴 문짝을 발로 뻥 차고 진입했다.
*
툭.
지하에 도착.
이 복도를 걸어가면 내가 찾던 히페리온 동력원이 나온다.
하지만 그전에….
휙.
그대로 뒤돌았다.
누군가가 따라왔거든.
“야!! 너 진짜 미쳤어?”
금발 머리의 여성.
지배자 메리안이 나타났다.
방금 얼려 죽였던 녀석의 주인으로 마안 능력을 가진 자다. 눈빛으로 환각을 보이게 하는 스왈리오스 계열이라 보면 된다. 날개가 있는 걸로 보아 평범한 인간은 아닌 듯하다.
찌푸려진 이마.
날 주시하고 있었던 걸까.
내게 잔뜩 화가 난 모양새다.
자기 부하를 일말의 망설임 없이 죽였으니, 어이가 없겠지. 진짜 세리아스라면 굳이 이렇게 분란을 조장하진 않았겠지만, 이곳을 파괴하러 온 내 입장에선 아무렴 상관없다.
싸악
잠시 주변을 쓸어보았다.
식물의 시야로 복도 끝에 반경 2m의 구체가 허공에서 느릿하게 회전하는 게 보인다.
저것이 히페리온 동력원.
이 성의 모든 동력을 책임지고 있다.
어차피 저걸 훔치려 하면 메리안이 날 이상하게 보고 덤벼들 터. 그럼 순서를 바꿔 저놈부터 처리하는 게 좋겠지.
나는 세리아스인 척 녀석을 도발했다.
“메리안.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
“뭐? 내가 할 말이야! 드워프를 침략한 네가 왜 혼자 몰래 복귀해서 멀쩡한 부하를 죽이고 여기 지하에 숨어든 거지?”
“네가 알아서 뭐 하려고?”
“허? 그 정돈 말해줄 수 있지 않아?”
“나와 싸워 이기면 알려주마.”
“뭐, 뭐?… 설마 진심이야?”
“너도 내가 싫잖아? 나도 네가 싫고. 그러니 이참에 우열을 가리는 게 어때?”
“…너 이상해. 무슨 목적으로 여기 온 거야. 이상하게 말 돌리면서 도발하지 말고 여기 온 이유부터 말해.”
“너야말로 쫄아서 말 돌리는 거냐? 됐다. 보내줄 테니까 가라.”
훠이훠이.
손짓으로 약 올리며 뒤돌아 움직였다.
아마 참기 힘들 거다.
꼴에 지배자니까.
“이 미친놈이!!… 그래. 한 판 붙자. 새끼야!!”
다행히 예상대로 움직여줬다.
이마의 핏대를 세우고 주먹을 쥔다.
그렇다면 망설일 것 없지.
먼저 뒤돌아 돌격했다.
콱!!
“큭!?”
한 팔로 내리쳤다.
메리안도 마찬가지로 한 팔로 방어했다.
방금 죽인 부하 놈과 다르게 내 기습에 여유롭게 대응한 것이다.
쩌저적!!
그 팔을 얼렸다.
왼손으로는 얼음의 창을 만들어 찔렀다.
훅!!
“이 새끼가 진짜!!!”
파악!!
녀석은 얼어붙은 손을 쳐내고 반대 손으로 얼음 창을 밀어 방향을 바꿨다.
“무슨 속셈인지 밝혀주마!!”
눈동자에 녀석이 반격하는 게 보인다.
허나, 실제 녀석은 위에서 머리를 노리고 발을 내려찍고 있다. 아마 환각계 능력으로 수작을 부린 듯했다.
물론, 식물의 감각에는 소용없다.
애초에 육체의 눈뿐만 아니라, 피부 전체가 시각을 식물의 시야를 가졌다. 눈동자는 능력 발현 및 확대 기능을 가진 기관일 뿐이다.
그럼에도 대단하다.
한 번 펄럭인 날개와 순식간의 위쪽을 점하는 속도는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전부 보인다.
대응하는 건 일도 아니지.
살짝 몸을 틀어 내려찍기를 회피.
콰앙!!!
바닥이 부서질 듯 굉음이 터졌다.
단순 신체 능력이 꽤 좋은 듯하다.
녀석은 착지의 충격을 회전으로 승화시켜 팔꿈치를 휘둘렀다.
굳이 받아줄 이유 없다.
나도 놈과 비슷한 걸 쓸 수 있으니.
파아~
빛나는 눈동자.
스왈리오스의 능력이다.
예전엔 단순 흉내가 전부였지만, 이젠 그 메커니즘을 온전히 안다. 최면까진 힘들어도 감각을 뒤트는 건 지배자에게도 통한다.
후웅!!
“어!….”
녀석은 내 옆.
허공을 휘둘렀다.
시원한 바람이 머릿결을 뒤흔든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는데, 공격이 이상하게 빗나가니 꽤 당황한 눈치다.
“네 능력을 너무 믿진 마.”
훅!!
“크읏!!”
그 틈에 얼음 창을 찔렀다.
제대로 수련해본 적 없는 창 공격이지만, 세리아스의 기억을 엿보면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대충 감은 잡고 있다. 기억을 엿보는 걸 넘어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퍽!!
쿠궁!!
녀석은 두 팔을 태극처럼 휘둘렀다.
강력한 반탄력이 나타나 공격을 막았다.
역시 쉽게 당해주진 않는다.
그렇다면 저항할 수 없게 만들어야겠지.
텁!!
쩌저적!!
녀석의 양팔을 두 손으로 잡았다.
피하려 했지만, 뒤틀린 감각에 당황한 녀석은 그대로 손목을 붙잡혔다. 공장 떨쳐내려 했지만, 이미 양팔이 얼어붙은 뒤다. 섣불리 떼어내면 자신도 위험한 상황.
“으윽… 뿔?….”
그런 한시가 급한 상황.
녀석은 당황스럽게 내 이마를 바라봤다.
이게 뭔가 싶겠지.
내 머리에 뿔이 자라났으니까.
이건 폐기장에서 섭취했던 지배자 아르곤의 힘이 담긴 뿔이다. 아르곤의 힘의 근원이자 강력한 파동을 쏘아내던 파동 능력. 이것의 장점으론 손이 필요 없다.
우웅!!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대로 발사하면 끝.
“흡!!”
녀석은 날개를 활짝 펼쳐 오러가 씌워진 깃털로 나를 폭격했다.
촤라락!!
까각!!
팅!!~
“허?”
허나, 내겐 소용없다.
강력한 위력과 관통력을 가졌지만 내 피부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위기감을 느낀 녀석은 곧장 합장하듯 움직여 얼음을 깨트렸다. 아쉽게도 능력으로 만든 얼음이 더 약했다.
얼음으로 속박하는 건 무리.
게다가 녀석은 구속을 푸는 순간 내게 환각계 능력을 사용했다. 물론, 식물의 감각을 가진 내게는 귀여운 장난질로 보일 뿐이다.
쥬륵!!
가볍게 무시하고 녀석이 얼음을 깨트린 순간 나는 양손을 변형시켰다.
휘리리릭!!
“으윽!!?
스왈리오스의 촉수다.
안쪽에는 줄기도 함께 들어있다.
유연성과 붙잡는 건 줄기가 좋지만, 점착력과 상대를 붙잡는 건 촉수가 나았다. 따라서 2개를 섞어 놈의 팔을 휘감았다.
“왜 안 빠지는!!-”
얼음으론 무리지만, 이건 다르다.
이건 단순한 부속물이 아닌, 본체 육신이다. 모양새가 이렇지만, 놈을 붙잡은 괴력은 온전한 내 힘이다. 따라서 녀석의 팔을 휘감고 상반신으로 침투해 크기를 키웠다.
슈르르륵.
“그으윽!!”
휘감은 곳을 강력하게 조였다.
녀석은 당황한 듯 몸을 비틀었으나, 이번에는 구속을 풀지 못했다. 줄기 촉수는 쉽게 끊어질 수 없는 점성과 내구를 가지고 있어 한 번 걸리면 빠져나가기 힘들었다.
그것이 지배자일지라도.
이제 남은 건 마무리뿐.
슥.
파동 공격을 준비했다.
“그만!! 그만해!!! 내가 졌어!!!”
다급해진 걸까.
녀석이 그리 고함쳤다.
어느새 메리안은 하반신까지 검은 촉수에 뒤엉켜 구속된 상태다.
하지만 멈출 생각 전혀 없다.
지배자 하나는 죽이고 시작하는 게 좋잖아?
널 죽여야 아칸을 죽이기 쉬워진다고.
애초부터 그걸 노리고 도발한 거였고.
그럼, 잘 가라.
“그마!!-”
푸화아아아악!!!!
강력한 파동이 발사되었다.
뿔에서 쏘아진 무형의 힘은 순식간에 여성의 얼굴을 관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