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둑.
스스스-
흙 파편이 떨어진다.
먼지가 사방으로 퍼진다.
푹!
꾸욱.
한 손을 대지에 박았다.
그대로 위로 끌어올렸다.
“……….”
투드득.
먼지가 휘날린다.
내 손에는 아칸이 들려 있었다.
하늘에서 운석처럼 충돌하고, 가속을 더한 용암 구체 주먹과 연이은 브레스 콤보에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야.”
“……….”
대답은 들리지 않는다.
반죽음이나 다름없는 상대.
반신격의 강자였지만, 승부는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본체 육신의 스펙은 상상 이상이었고, 아칸을 어렵지 않게 쓰러트렸다.
피식.
“싸움이 이렇게 재밌는 거였나.”
승리란 짜릿했다.
항상 눌려 살았기에 더 그랬다.
폐기장에서 언제나 가지고 살았던 두려움이 스르륵 사라진 것 같았다.
언제는 나의 강함을 포기하고 다른 이들을 케어하겠다고 다짐한 적도 있었는데….
나도 할 수 있었잖아.
이길 수 있었잖아.
지배자 놈들 따위.
강해졌고.
더 강해질 수 있고.
앞으로도 강해질 거잖아.
그렇게 스스로 되뇌며, 묘하게 떨려오는 전율을 느꼈다.
나는 인간과 식물의 틀을 벗어났다.
본체 육신이 물리적으로 깨어났다면, 지금은 정신적으로 성숙해지고 있다.
그것이 느껴진다.
파아아-
본체 육신에서 약간의 신성이 흐른다.
육체가 더 강해진 것 같은 기분이다.
큰 변화는 아니지만, 나의 성장 길이 열린 듯한 느낌이었다.
다만.
[에휴. 처음부터 그냥 싸웠어도 됐는 걸, 굳이 이상한 짓이나 해서 기습하고.]
“……….”
샤엘라의 불평이 들려온다.
원래라면 잘했다고 칭찬해줬을 텐데, 아칸을 기습하고자 세리아스의 모습으로 유혹했던 것의 업보가 돌아왔다.
[안 그런다고 해놓고서 대놓고 바로 다른 남자에게 들이대? 어차피 힘으로 때려눕힐 수 있으면서 왜 그랬냐? 앙?]
“그, 그건 최대한 유리하게 기습하려고…….”
[무찬. 돌아오면 기대해.]
“………?”
저건 무슨 예고지?
뭔가 불길한 느낌.
절레절레.
어쨌든 사건은 끝났다.
나의 강해진 힘을 체험했다.
그리고.
‘더 강해져야 해.’
나는 약하고, 더 강해져야 한다.
그것을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주르륵.
한 팔에서 줄기를 성장시켰다.
피부에서 신성을 머금은 줄기가 자라나 손을 타고 아칸을 집어삼킨다.
굳이 녹여서 소화할 필요도 없다.
아칸을 삼킨 줄기 덩어리는 다시 내 손으로 흡수되며 사라졌다. 본체 육신은 공간의 법칙을 무시할 수 있는 녀석이다. 나는 통째로 아칸을 몸속에 집어삼켰다.
흡수 효과 또한 이게 더 좋다.
온전한 육신을 저장하고 꽁꽁 옮아 맨 신성 줄기가 피부를 뚫고 침투해 녀석의 모든 생체 정보를 파헤치고 저장한다. 천천히 몸을 뜯고 분해하여 나의 일부가 된다.
팍!!
한 손을 뻗었다.
살짝 굵어진 듯한 팔.
아칸의 골격을 그대로 복제해 뻗은 것으로, 튼튼하고 강력한 힘이 느껴진다. 얼마나 잘 단련됐는지, 팔의 혈관 하나하나에서 수백 가지의 마나 회로가 뻗은 것 같다.
그런 녀석의 성장 데이터를 덮어씌운 거다.
하지만 본체 육신보단 모자란 듯하다.
‘드래곤 육신은 힘이라도 더 세졌었는데….’
흡수는 했지만, 본체를 강화하기에는 다소 아쉬운 맛이다. 차라리 세리아스처럼 능력을 부리는 게 내겐 더 달콤한 먹이다.
피식.
아직 시험해볼 건 많다.
벌써 조급할 이유는 없다.
이제 정리하자.
아칸벨리는 끝났으니, 히페리온 동력원을 챙겨서 돌아갈 시간이다.
슥.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대한 크레이터와 갈라진 대지.
그곳을 넘어가면 다시 숲이 보인다.
무작정 높은 하늘로 공간을 넘었기에, 당연히 아칸벨리 본거지에서 벗어난 장소였다.
“다시 길이나 찾아야겠군.”
터벅.
숲으로 나아갔다.
*
길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원래는 세리아스의 기억에 의존해 특정한 방식으로 숲속에 진입해야 하지만, 애초에 나는 식물의 시야를 가졌다.
모든 숲의 시야가 보인다.
숲의 모든 것이 내게 속삭인다.
잠깐 교감한 것으로 숲의 시야가 펼쳐져 숨겨진 길이 드러난다.
그저 특정 지점을 통과하면.
스륵.
아칸벨리로 통하는 동굴이 나왔다.
다시 그곳을 통과해 성으로 향했다.
“저… 누구십니까?”
세리아스 모습으로 왔을 때 나를 처음 맞이했던 노예가 나타났다. 현재 나는 엘프 본모습인지라 녀석에겐 초면이다.
이 녀석은 아칸이 죽은 것을 모를 터.
잠시 녀석에게 질문했다.
“너는 여기 붙잡혀 사는 노예인가?”
“네?….”
“아님, 여기서 스스로 일하는 건가?”
“……부, 붙잡힌 노예입니다.”
예상대로의 상황이다.
잠시 눈을 감고 아칸의 기억을 뒤졌다.
아칸은 마이낙스 도시에서 노예를 경매로 사들여 이곳에 배치한 듯했다.
기억을 깊게 파고들진 않았다.
너무 자세히 보면 두통이 오니까.
볼 가치도 별로 없고.
“너는 어쩌다 노예가 되었지?”
“그….”
“탑에서 태어났나?”
“예.”
“처음부터 노예거나 붙잡혀 팔렸겠군.”
“……….”
“이제 넌 자유다. 스스로 노예를 자처할 정도로 타락하지 않았다면, 이제 너의 삶을 살아. 길은 있다가 열어줄 테니.”
“네?….”
노예는 원래 여기서 도망칠 수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이곳을 함부로 나갔다간 미로에 갇혀 숲의 미아가 된다. 아칸벨리 세력원이 꺼내주기 전까지 공포에 떨다가 붙잡혀와 다시 노예로 교육된다.
그 정도는 해결해줄 생각이다.
이곳에 들어오기 위한 특정한 행동을 취하게 했던 진법 자체를 깨버리면 되니까.
사실 깨고 말 것도 없다.
동력원을 훔치면 끝난다.
알아서 진법이 해제될 것이다.
그냥 선심 쓰듯 말한 것뿐이다. 적어도 자유라는 건 알려줘야지.
“……….”
허나, 노예는 뻘쭘하게 서 있을 뿐이다.
섣불리 날 믿지 못하는 눈치다.
아마 앞으로 마주칠 노예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일 테지. 그들을 굳이 안심시키고 상황을 이해시켜야 할 테고.
귀찮지만, 조금은 돕자.
딱히 손해 보는 행동은 아니고.
손 한번 내미는 것으로 인생 수백개를 구제할 수 있다면, 투자할 생각이다. 그 정도의 선한 인간성은 남아있거든. 하지만 내가 희생해야 할 게 있었다면 과감히 버려야겠지.
그리고 그렇게 귀찮은 일도 아니거든.
슥.
“친위대. 너희 도움이 필요하다.”
한 솓을 뻗었다.
손가락 하나가 차원 줄기가 포탈을 열 때처럼 일그러져 쭈우욱! 늘어나 펴졌다.
처척!!
“부르셨습니까.”
손가락이 쭉 늘어나 벌어진 포탈.
그 안에서 열 명의 엘프가 나타났다.
이들은 시리안이 내게 붙여준 친위대로 내 몸속에 보관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아공간에 말이다.
필요한 물품을 보관하는 건 물론, 나는 생명체도 문제없이 넣을 수 있다.
솔직히 아공간이라는 표현도 모자라다.
몸속에 아주 작은 세계를 창조했다고 말하는 게 더 옳다. 이 안에는 친위대 집도 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작은 농장은 물론.
생명과와 차원 줄기.
드워프제 무구와 훈련장.
친위대만을 위한 작은 세상을 만들어 몸속에 들고 다니고 있다.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
크기는 매우 작지만 가능했다.
본체를 담보 삼아 작정하고 세계를 창조하면 제법 큰 세상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덕분에 친위대를 보관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니 잘 써먹어야지.
이들을 위해서라도.
“지금부터 너흰 아칸벨리의 잔당을 처리하고 노예로 보이는 자들을 구출해 한 데 모아. 위험하다 싶으면 나를 부르고.”
“예!!”
샤삭!!
친위대는 민첩했다.
명령이 떨어지는 즉시 2개 조로 나뉘어 아칸벨리 성 앞뒤로 향했다. 지배자와 아칸이 없으니 친위대의 힘만으로도 충분할 거다.
도착할 때쯤엔 모두 끝나 있겠지.
“아아…….”
뒤쪽에 노예는 놀란 듯 나를 바라본다.
방금 본 비현실적인 모습에 당황한 듯했다.
선심 쓰듯 말했다.
“아칸은 죽었다. 아칸벨리는 끝났어. 진짜인지 아닌지는 알아서 확인해. 있다가 결계가 풀릴 테니 다른 곳으로 떠나라.”
“……….”
슥.
그 말을 끝으로 녀석을 지나쳤다.
노예는 내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 몰래 조심스럽게 뒤를 따랐다. 경계하는 눈치지만, 굳이 신경 쓸 건 아니다.
정말 아칸벨리는 끝났다.
지배자 메리안과 수장 아칸이 죽었다.
성의 동력인 히페리온 동력원도 슬쩍하고 떠날 생각이며, 남아 있는 세력원 간부들은 모조리 양분이 될 것이다.
이변은 없다.
왔으면 확실하게.
*
“커억!!?”
“누구…….”
촤악!!-
잘 쉬고 있던 세력원이 모두 쓰러트렸다.
친위대는 적들 모르게 다가가 기습했고, 비약을 먹고 신속하게 협력하여 적을 처단했다. 뒤늦게 저항한 자도 있었지만, 친위대의 협동 공격에 처참히 무너졌다.
털썩.
주르륵.
유유히 성에 도착한 나는 쓰러진 놈들에게 다가가 줄기로 흡수헸다.
애초에 세력원이 많지도 않았다.
여긴 간부들만 모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마침 친위대가 지하에 쓰러진 메리안을 들쳐 배달해줘서 녀석도 집어삼켰다. 마안을 쓰던 녀석이었으니, 스왈리오스 인자와 조합하면 재밌는 결과물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잔당을 모두 처리했습니다.”
“노예를 한데 모으는 중입니다.”
“숨어 있는 노예가 있어 시간이 살짝 걸릴 것 같습니다.”
확실히 유능한 부하는 편리하다.
혼자라면 길게 끌렸을 일이 척척 해결된다.
여유롭게 수십 분 정도 기다렸다.
*
““……….””
아칸벨리 성 1층.
약 60명의 노예가 집합했다.
그중에는 처음 마주친 노예도 섞여 있었다.
아칸과 간부를 대접하기에 매우 많은 인원이다. 고작 열 명 남짓을 케어하고자 이만한 수의 노예라니….
그들을 쓱 훑어보았다.
겁에 질려 움츠러들거나.
양어깨 손을 걸쳐 벌벌 떨거나.
체념한 표정으로 가만히 대기하거나.
폐기장처럼 세뇌적으로 교육되진 않았는지, 자신들의 처지를 깨닫고 있다. 때문에 대부분 불안에 떨고 있었다.
허나.
“흐흐. 쓰레기 자식들. 쌤통이다.”
통쾌함을 내비치는 자도 있었다.
세력원이 죽어 나가는 광경에 겁먹기보다는 기뻐하는 모습. 전신의 화상을 보니 고된 일을 겪었을 게 뻔히 보인다.
고로.
“너, 나와.”
“넵?….”
녀석을 불러들였다.
놈은 우물쭈물 다가왔다.
붉은 머리의 여성 노예로, 화상 때문에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다.
녀석과 마주 보며 말했다.
“네가 대표로 대답해. 너흰 자유다. 이제 마음대로 해. 알아들었겠지?”
“…지, 진짜요?”
다가오라는 말에 움츠러들었다가, 이어진 내 말에 태도가 돌변했다.
“아칸은 이미 죽었다. 이곳에 있던 지배자도 죽었고, 보다시피 너흴 괴롭히던 세력원들도 너희 눈앞에서 죽었다.”
“그럼 저흴 풀어주시는 건가요?“
“믿든 말든 마음대로 해라. 난 이곳을 떠나 사라질 거니. 이후는 너희 자유야.”
이걸로 끝이다.
이 이상 베풀 필요는 없다.
대부분은 이곳을 나가 다시 노예가 되거나 비운한 결말을 맞이하겠지만, 적어도 몇몇은 잘 숨어 살 수 있겠지.
허나, 이 녀석도 그걸 알고 있는 걸까.
“저 그럼!… 차라리 이곳을 다스려 주세요.”
뜬금없는 요청을 했다.
의아하게 바라보자 녀석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저흰 어차피 돌아갈 곳도 가족도 없습니다. 당신은 전 주인보다 훨씬 나을듯한데, 이참의 저희 주인이 되어주시죠!”
척!
가슴을 짚으며 당당히 외쳤다.
제법 당황스러운 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