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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4

       

       

       

       

       

       174화. 북부 원정대 ( 4 )

       

       

       

       

       

       살다 보면 뜻밖의 장소에서 예상치 못한 인연을 마주치고는 한다. 외나무다리에서 원수를 만날 수도 있고, 스쳐 지나간 옷깃의 인연에게 큰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야, 네가 왜 여기 있냐?”

       

       물론 프리가에게 셀리나는 전혀 반갑지 않은 불청객, 그 이하의 무언가였다.

       

       한껏 밝아졌던 프리가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모습에 되려 이스칼이 당황했다.

       

       태연하게 차를 호록- 마신 셀리나가 까만 꼬리를 휘적휘적 흔들며 말했다.

       

       “저요? 당연히 공무 수행 중이죠. 저번에 공녀님한테 보여드리지 않았나요? 북부에서 노예 상인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공문.”

       

       “뭐…? 아니 잠깐. 고작 노예 상인을 잡는 일에 직접 왔다고?”

       

       “고작이라뇨. 노예 상인들에게서 억압받는 동포들을 구하기 위한 숭고한 사명인데요.”

       

       “얼씨구.”

       

       프리가의 눈썹이 까딱거렸다.

       

       “프리가. 오랜만이구나. 보내준 찻잎은 잘 쓰고 있다.”

       

       “아빠 오래간만이네.”

       

       반갑게 인사하는 루샨 공작에게 휘적 손을 흔들며 화답한 프리가. 곧장 도끼눈으로 셀리나를 노려봤다.

       

       척 보니까 견적이 나온다. 셀리나 이 년이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 몸소 북부까지 행차하신 모양인데 어림도 없다.

       

       무슨 꿍꿍이로 북부까지 쫓아왔는지 모르지만, 여기까지 온 것은 실수다.

       

       ‘하다못해 똥개도 제집에서는 절반을 먹고 들어가는데, 감히 내 고향인 북부까지 올라와?’

       

        “아아아안녕하십니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어… 만신전의 사도, 이스칼이라고 합니다!”

       

       뒤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이스칼이 제국식 예법과 만신전의 예법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만신전의 예법으로 인사를 건넸다.

       

       목에 건 만신전의 표식을 손에 모아 기도하듯 건네는 인사. 루샨 공작도 똑같이 만신전의 예법으로 인사를 받았다.

       

       “반갑습니다. 몬테그로스의 공작, 루샨 닉스입니다. 이스칼 사도님의 명성은 익히 들어 왔는데, 이렇게 직접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깍듯한 대우. 이스칼이 한낱 변방 귀족의 서자가 아닌, 사도의 신분으로 루샨 공작과 만나는 것이기에 가능했다.

       

       “흠, 크흠.”

       

       가만히 앉아 있던 프리우스 후작이 헛기침하며 조용히 일어났다.

       

       “공작님, 프리가 공녀님께서도 오셨으니 손님인 저희는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모쪼록 공작님의 적극적인 협조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요. 부디 편하게 쉬다가 가시기를 바랍니다.”

       

       점잖게 일어난 프리우스 후작이 셀리나를 에스코트했다. 셀리나의 까만 고양이 귀가 쫑긋거리며 움직였는데, 그럴 때마다 대쪽 같은 프리우스 후작이 조금씩 움찔했다.

       

       “루샨 공작님, 저희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프리가 공녀님 그리고… 자기, 다음에 또 봐요?”

       

       “읏…!”

       

       셀리나의 부드러운 까만 꼬리가 이스칼의 손목을 팔찌처럼 휘감았고, 속삭이는 듯 뜨거운 숨이 귓불을 간지럽히다가 사라졌다.

       

       뒤늦게 알아챈 프리가가 휙-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저만치 달려간 셀리나의 까만 꼬리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만 보였다. 그야말로 눈 뜨고 코 베인 상황. 프리가의 관자놀이에 불룩하게 핏줄이 솟아올랐다.

       

       으득-

       

       프리가의 입에서 바위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쾅ㅡ!

       

       “아빠, 저년 도대체 언제 온 거야?”

       

       분에 찬 프리가가 응접실의 원목 테이블을 내려찍었다. 흡사 망치로 찍은 듯 묵직한 소음이 울린다.

       

       언젠가 봤던 것처럼 그녀의 주먹을 따라 원목 테이블의 표면이 움푹 파이며 뚜렷한 흔적이 남았다.

       

       ‘인제 보니 한 개가 아니구나…’

       

       원목 테이블의 곳곳에는 움푹 들어간 흔적이 뚜렷했다. 이스칼의 추측처럼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에 루샨 공작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여기 온 지 며칠 됐다. 비밀리에 출발했다고 하더니, 네 반응을 보니 정말 몰랐나 보구나.”

       

       “당연히 나도 몰랐지! 아니, 하ㅡ 돌겠네 진짜.”

       

       프리가가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리며 한숨을 내쉰다. 까만 머리칼이 폭포처럼 흘러내리며 뒤엉켰다.

       

       루샨 공작의 시선이 뒤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이스칼을 향했다.

       

       “이스칼 사도님, 시장하지 않으십니까? 괜찮으시다면 함께 식사라도 하는 게 어떻습니까?”

       

       “아.”

       

       그제야 허기짐이 느껴졌다. 때아닌 소란으로 공복이라는 것도 잊고 있었는데, 의식하기 무섭게 위장이 요동치며 밥을 내놓으라 소리쳤다.

       

       “하아… 맞아. 밥 먹기로 했지. 그래. 이스칼, 밥이나 먹자고. 이리 와.”

       

       “어, 예? 에?”

       

       한 방 먹은 건 어쩔 수 없는 거고, 지금은 그녀가 할 수 있는 걸 해야 할 때. 깊은 한숨을 쉰 프리가는 이스칼의 손을 덥썩 잡고 이끌었다.

       

       이스칼이 어어ㅡ하다가 프리가의 손에 질질 끌려 나갔다. 반항 따위는 어림도 없는 것이, 그야말로 폭풍에 휩쓸린 갈대의 모습이다.

       

       “허허.”

       

       루샨 공작이 그 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선머슴 같던 딸이 남자를 데리고 오다니. 평생 혼자 살다가 노처녀로 죽을 줄 알았는데, 가죽신에도 제 짝이 있다는 건 틀린 말이 아닌 듯하다.

       

       역시 인생은 오래 살고 볼 일. 루샨 공작은 앞으로 시달릴 이스칼에게 짧은 애도를 표하며 천천히 응접실을 나섰다.

       

       “공녀, 공녀님 잠깐만요!”

       

       저 멀리 복도에서 이스칼의 애처로운 외침이 작게 들려왔다.

       

       

       

       *****

       

       

       

       또각또각.

       

       프리우스 후작과 셀리나는 루샨 공작가의 복도를 따라 걸었다. 셀리나의 귀가 열심히 쫑긋거리며 사방의 소리를 주워 담았고,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확신이 들고 나서야 걸음을 멈췄다.

       

       “후작님, 제 억지에 어울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셀리나 님. 보좌하는 자로서 바라신다면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후작의 멋들어지게 정리된 콧수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열심히 움직이는 고양이 귀의 자태가 참으로 훌륭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여기는 공녀님의 고향입니다. 섣불리 움직이면 되레 역풍을 맞기 십상이니, 항상 신중하셔야 합니다.”

       

       프리우스 후작의 눈이 지성으로 반짝였다. 

       

       “알고 있어요. 항상 조심할게요.”

       

       “음.”

       

       셀리나는 다부지게 대답했다. 가끔 변태 같지만, 같이 일한다면 누구보다 든든한 게 프리우스 후작이다.

       

       “먼저 들어가서 쉬시지요. 저는 남은 업무가 있어서 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어요. 먼저 들어갈게요, 후작님.”

       

       셀리나가 앞서 걸으며 인사를 건넸다.

       

       또각또각 발소리에 맞춰 좌우로 흔들리는 까맣고 복슬복슬한 고양이 꼬리. 프리우스 후작은 우수에 젖은 눈으로 그것을 오랫동안 지켜봤다.

       

       ‘…훌륭하군.’

       

       이 순간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 아니겠는가.

       

       일상 속의 소소한 보상을 만끽한 프리우스 후작은 자신의 숙소 겸 임시 집무실로 돌아왔다.

       

       “…”

       

       책상 위에 놓인 것은 얼마 전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친 부대원의 보고서. 구석에는 삐뚤하게 로한이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이런저런 설명이 길지만, 보고서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명료했다.

       

       ‘노예 상인의 우두머리를 찾을 수 없음…이라.’

       

       썩 유쾌한 소식은 아니었다.

       

       

       

       

       

       *****

       

       

       

       

       

       화륵-

       

       마수의 산 깊은 곳에 있는 어느 깊은 동굴.

       

       검붉은 불꽃이 일렁인다.

       

       타오르는 불꽃을 따라 그림자가 춤추며 불길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불꽃이 타오른다는 것은, 무언가를 불살라 먹음으로 존재한다는 것. 그렇다면 이 불길하고 사악하기 짝이 없는 불꽃은 무엇을 잡아먹고 제 몸을 키우는 것인가.

       

       타탁-

       

       고고하게 타오르던 불꽃이 날름 혀를 뻗어 바닥에 놓인 무언가를 집어삼켰다.

       

       타타탁-

       

       노릿한 냄새가 가득하다. 고기와 약간의 액체, 그 밖의 잡다한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타오르는 향기.

       

       “으ㅡ… 아악…!!”

       

       검붉은 불꽃이 집어삼킨 것이 꿈틀거리며 소리 질렀다. 불꽃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버둥거린다. 악착같이 바닥을 기어가고, 팔다리를 휘저어 저항한다.

       

       살고 싶었다. 살아야 한다.

       

       《가만히 있어라.》

       

       덧없는 저항은 짧은 말 한마디에 사라졌다. 발버둥 치던 것은 우뚝 멈춰서더니, 스스로 장작이 되기를 자처한 듯 불꽃에 몸을 맡겼다. 

       

       타탁-

       

       불꽃은 제 몸에 들어온 ‘장작’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어린아이가 사탕을 입 안에서 녹여 먹는 것처럼, 느리고 조심스럽게.

       

       선물의 포장지를 뜯는 것처럼, 살갗부터 아주 느리게 태우기 시작한다.

       

       타탁-

       

       일련의 과정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함이었다.

       

       “끄…! 끄흡! 아아악!!”

       

       고통, 절망, 공포.

       

       온갖 질척하고 끈적거리는 감정들이 비명에 녹아들었다. 동굴 벽을 타고 사방으로 메아리치는 비명은 지옥의 합주곡이었으니.

       

       《달구나, 아주 달아.》

       

       악마에게는 더 없이 듣기 좋은 울림이었다.

       

       이 달콤한 합주곡을 듣기 위해 ‘장작’을 천천히 먹는 수고로움을 들이는 것 아니겠는가.

       

       타타탁-

       

       ‘장작’의 비명이 멈췄다. 그제야 불꽃은 ‘장작’을 완전히 먹어치우고는 꿈틀거렸다. 불씨가 사방으로 번져나간다.

       

       《케이건 케이건, 나의 친구여. 설마 이것이 마지막이라고는 하지 말아주게.》

       

       “…이,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바닥에 엎드린 케이건의 볼살이 푸들거렸다. 땀이 바닥에 뚝뚝 떨어져 내린다. 계약으로 자신이 잡아먹힐 일은 없겠지만, 그럼에도 방금의 풍경은 너무나 두려웠다.

       

       《으음… 부족해, 부족해. 케이건. 아직 부족하단 말이야.》

       

       “흐읍…”

       

       다음 장작은 자신이 될까 몰려오는 불안감은 어쩔 수 없다.

       

       뒤에 서 있는 웨어울프들이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날카로운 손톱으로 자신을 갈기갈기 찢을 것만 같다.

       

       검붉은 불꽃이 조용히 꿈틀거리며 타오르더니, 이내 쿵ㅡ 하고 황금 덩어리를 만들어냈다.

       

       《그래도 계약은 계약이지. 자네의 몫이니 가져가게, 케이건.》

       

       “아, 아아!”

       

       번쩍거리는 황금. 자신의 상반신은 될법한 거대한 황금이다.

       

       케이건의 눈에 탐욕이 번들거렸다. 무릎으로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황금을 끌어안았다. 아아, 이토록 황홀한 빛이라니!

       

       케이건의 두툼한 뱃살이 황금이 짓눌려 삐져나오는 그 몰골이란, 차마 눈 뜨고 못 볼 장관이었다.

       

       불꽃은 케이건의 추태에서 눈을 돌려, 뒤에 늘어선 웨어울프를 바라보았다. 나름 쓸만한 패라고 여겨 거두었는데, 과연 나쁘지 않은 사냥개들이다.

       

       물고 오는 인간의 질이나 숫자는 썩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너무 느리군…’

       

       터무니없이 느리다. 더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 필요한데,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산의 아래에는 벌써 냄새를 맡은 ■의 사냥개들이 모여들었다.

       

       잠시 침묵하던 불꽃이 일렁이며 말했다.

       

       《케이건 나의 친구여. 혹시 그대가 머무는 곳은 이곳에서 가까운가?》

       

       “크흐흐… 예? 머, 머무는 곳 말입니까?”

       

       《혹여나 여기서 가깝다면 피하는 것이 좋을 거야.》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불꽃은 침묵하며, 동굴의 벽을 넘어 저 멀리 보이는 인간들의 성을 바라보았다. 이 거리에서도 뚜렷하게 느껴지는 불쾌하고 거대한 기운. 

       

       별빛이다.

       

       저걸 먹는다면… 아주 달콤하겠지.

       

       벌써부터 군침이 흐른다.

       

       《그래. 아주 멀리 피하게. 뒤도 돌아보지 말고 달려야 할 거야.》

       

       휩쓸려 죽고 싶지 않다면.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과 추천은 언제나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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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치형 무기 만들기 게
Status: Ongoing Author:
Out of boredom, I downloaded an idle weapon crafting g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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