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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2

       

       

       

       

       

       182화. 마수의 산, 그 정상으로 ( 6 )

       

       

       

       

       

       “커헉… 큽, 아윽. 으, 아파…”

       

       나는 방 한가운데에서 꿈틀거렸다.

       시야가 온통 빨간색이다. 벽도 빨갛고, 바닥도 빨갛고, 장롱과 핸드폰, 컴퓨터까지.

       온 세상이 토마토 범벅이 된 것 같다.

       

       어린 시절 질 나쁜 악몽을 꾸면 이런 식으로 세상이 보이지 않았을까.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어렸을 때는 그저 꿈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이 모든 게 현실이라는 점이겠지.

       

       “어, 우윽. 세상에. 진짜… 으어ㅡ”

       

       피눈물을 한 차례 닦고 나서야 시야가 맑아졌다. 다행히 안구의 핏줄이 터진 것이 아니라, 코피가 역류하면서 눈으로 흘러나온 모양이다.

       

       “으억. 으으…”

       

       온몸의 근육이 혹사당한 듯 너덜너덜해져서 비명을 지른다.

       이건 마치 운동을 안 하던 사람에게 갑자기 하프 마라톤을 뛰게 한 다음 날의 근육통과 흡사하다.

       

       내가 한번 해봐서 잘 안다. 마라톤 다음 날에는 이것보다 조금 더 아팠지.

       

       한참 동안 바닥에 엎어져서 꾸물거리다가, 천천히 기어서 핸드폰으로 향했다.

       근육통뿐만 아니라 온몸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서 한참이나 기어야 했다.

       

       지금의 나는 배터리가 떨어진 핸드폰과도 같다.

       배터리의 잔량이 5퍼센트도 남지 않은, 그야말로 최약체 모드.

       

       덕분에 스마트폰이 이렇게 무거운 물건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핸드폰을 들어 올리는 손이 덜덜 떨려왔는데, 금단 증상이 온 마약 중독자의 그것 버금가는 수준이다.

       

       덜덜덜덜ㅡ

       

       스마트폰을 쥔 두 손이 격렬하게 진동한다.

       이대로는 도저히 게임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차라리 바닥에 엎드리는 자세로 누워버렸다. 

       

       엎드리니까 따뜻한 바닥 덕분에 잠기운이 몰려오는 듯싶다가.

       

       뿌드득! 우득ㅡ!

       

       “어윽! 으아악!”

       

       근육통이 작렬했다.

       가벼운 움직임에도 온몸의 근육과 뼈가 비명을 지른다.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자세를 잡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쓰나미처럼 몰려오던 고통이 조금 잠잠해지니, 그 빈자리에 잠기운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따뜻한 바닥과 완전히 바닥난 체력의 이단 콤보는 무자비했다.

       

       의식이 가물가물하고, 잠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것이 심상치 않다.

       눈이 깜빡깜빡 잠겨오는데 얼마 버티지 못할 게 분명하다.

       

       눈꺼풀이 점점 아래로 감기며 당장 자라고 칼 들고 협박하는 것 같았지만.

       

       “레, 레이드…”

       

       보스 레이드 돌리고 있었단 말이야.

       

       최소한 정찰대의 상황을 두 눈으로 보기 전에는 쓰러질 수 없다.

       

       잠기는 눈꺼풀을 부릅뜨고 화면을 바라본다.

       그럼에도 자꾸 잠겨오는 눈꺼풀은 정말이지 끔찍했다.

       

       톡. 토톡ㅡ

       

       몽롱한 정신으로 이리저리 화면을 옮긴다. 반쯤은 잠에 취한 상태다.

       

       검지 손가락도 덜덜 떨려와서 화면을 움직이는 데 아주 애를 먹었다.

       

       “아, 이건…”

       

       그러던 와중 보인 야트막한 돌무덤. 

       악마에게 먹힌 희생양이 묻힌 곳이다.

       

       온 사방에 눈이 펑펑 오는 와중에도, 돌무덤의 주변에는 눈이 쌓이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파릇한 풀과 작은 들꽃들이 꼬물꼬물 머리를 들어 올리고 있다.

       

       화면 너머로도 무덤 주변의 온기가 전해져 오는 것 같다. 마치 돌무덤의 주변에만 따뜻한 봄이 성큼 다가온 풍경이다.

       

       명백한 기적의 현장.

       

       “… 해낸 거구나.”

       

       정말로 해냈다.

       

       내 스스로의 의지로, 다른 세계에 기적을 펼친 것이다.

       

       이제야 조금은 실감이 난다. 

       쩌릿한 근육통이 느껴지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화면을 바라봤다.  

       

       흐뭇한 마음에 아주 잠깐 방심했는데ㅡ

       

       “쓰으… 커어ㅡ”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

       

       

       

       

       

       *****

       

       

       

       

       

       눈 내리는 몬테그로스 공작가의 마구간. 보통이라면 말이 가득할 그곳에는 노루만이 가득했다. 추운 지방이기에 추위에 약한 말보다는 노루를 선호하는 까닭이다.

       

       그리고 노루들 사이에서 이질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존재가 있었으니.

       

       푸르륵ㅡ

       

       유니콘이다.

       

       유니콘은 최근 자신의 처우에 대해서 아주아주 불만이 많았다.

       

       그의 주인이라는 남정네는 고귀한 자신을 짐말처럼 부려 먹지 않나, 사랑해 못지않는 처녀들은 자신을 보면 경멸하고 매도하며 괴롭히기 바빴다.

       

       자신이 지내는 곳이라도 좋으면 모른다. 고귀한 요정마를 겨우 뭐? 마구간?

       

       다른 짐승들과 같은 곳에 머물게 해? 따뜻한 집 안에 모셔도 모자랄 판에 마구간?

       

       먹이로는 겨우 여물을 줘?

       

       《푸륵ㅡ! 불쾌하군. 아주 불쾌해!》

       

       불만에 찬 앞발이 거칠게 땅을 찍었다. 가볍게 움직이는 발길에 꽁꽁 언 땅이 진흙처럼 푹푹 파이며 부서졌다.

       

       히히힝ㅡ

       

       불만이 가득한 유니콘에게 암컷 노루가 다가와 치근덕거렸다. 눈빛은 묘한 열기로 가득했다.

       

       《저리 가게! 난 자네 같은 짐승 따위에게 관심이 없는 몸이야!》

       

       유니콘의 주변에는 기이하게도 암컷 노루가 가득했다. 뜨겁고 정열적인 눈빛의 암컷 노루들은 유니콘의 주변을 맴돌며 적극적으로 구애했다.

       

       동물들의 기준에서 유니콘은 굉장한 미모를 자랑하는 모양.

       

       정작 본인은 암컷 노루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애초에 자신의 입으로 처녀를 지키는 요정마라고 하였으니, 당연할지도 모른다.

       

       푸륵ㅡ 푸르르륵!

       

       《불쾌하단 말이네! 히힝ㅡ… 음?》

       

       연신 투덜거리며 여물을 우물거리던 유니콘이 고개를 휙- 틀었다.

       

       불만이 가득하던 유니콘의 눈에는 끝 모를 현기가 차오르며 공간을 넘어선 어딘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마구간의 벽을 뛰어넘고, 성벽을 넘어서 높은 산의 어딘가를 향한다. 그 눈에 보이는 것은 그의 주인, 한스가 거대한 용의 형상을 한 대악마와 맞서고 있는 모습.

       

       《히, 히힝? 이게 대체 무슨…?》

       

       도대체 왜 주인이 산의 정상까지 올라가서 대악마와 싸우고 있단 말인가? 유니콘의 눈에 의문이 가득 찼다.

       

       그간 마구간에 감금당하다시피 지내왔던 유니콘은 정찰대에게 내려온 계시도 모르고 있었다.

       

       푸르르륵ㅡ!

       

       자세한 내막은 몰라도, 주인의 위험을 확인한 유니콘이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미우나 고우나, 한스와는 영혼으로 계약된 관계.

       자신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히히힝! 참 손이 많이 가는 주인이구려!》

       

       유니콘이 힘차게 울부짖으며 마구간을 박찼다. 한낱 통나무 울타리 따위로는 유니콘을 가둘 수 없었다.

       

       그간 처녀들에게 미움받기 싫어서 얌전히 시키는 대로 따랐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모든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주인의 안위가 가장 우선이다.

       

       튼튼한 통나무는 유니콘의 발길질 앞에 썩은 나뭇가지처럼 부서지고, 유니콘은 거침없이 땅을 박차고 달렸다. 그의 뒤로 길게 흙먼지가 꼬리처럼 이어지며 따라왔다.

       

       다그닥! 다그닥!

       

       《이히힝!》

       

       그리고 점차 하늘을 향해 날아오른다.

       

       백색의 갈기에서는 오색 찬란한 별빛이 흘러내리고, 처녀를 살피던 눈동자에는 깊은 현기가 차올랐다.

       

       목표로 하는 곳은, 저 높은 산의 정상.

       

       유니콘이 하늘 높이 울부짖으며, 유성이 되어 하늘을 가로질렀다.

       

       

       

       *****

       

       

       

       투콰앙! 쾅! 챙!

       

       《하하하! 고작 그게 전부인가? 자네들은 그렇게 벼룩마냥 뛰어다니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느냔 말이야!》

       

       “크윽!”

       

       콰앙!

       

       거대한 용의 탈을 뒤집어쓴 악마가 광소를 터뜨리며 한스와 성기사를 몰아붙였다.

       

       커다란 몸체에 걸맞지 않게 날렵한 움직임을 자랑하는 악마는 한스와 성기사를 당장이라도 죽일 수 있음에도 천천히 구석으로 몰아갔다.

       

       ‘이 새끼, 우리를 가지고 장난을!’

       

       거대한 발톱이 땅을 내리찍는다. 간신히 굴러서 피했지만 스친 풍압이 볼에 가벼운 상처를 만들었다.

       

       한스가 이를 악물며 악마를 올려봤다. 

       

       그때와도 비슷한 상황이다. 산골 마을에서 악마와 단신으로 맞서 싸우던 그 동굴.

       

       악마라는 족속들은 하나 같이 상대방을 가지고 놀며 고통을 주다가 천천히 죽이는 녀석들이다. 녀석들의 눈에는 인간이 언제라도 밟아 죽일 수 있는 존재로 보였기 때문일까.

       

       ‘한 방. 딱 한 방만 제대로 먹일 수 있으면…!’

       

       두근ㅡ 두근ㅡ!

       

       한스의 롱소드에 새겨진 용기의 룬이 태양처럼 빛나며 맥박친다. 뜨거운 울림을 따라 전신에 힘이 퍼졌다.

       

       그때처럼 피가 끓어오르는 듯한 고양감은 없었지만, 평소 이상으로 힘이 넘쳐났다.

       

       악마가 동공을 길게 찢으며 한스를 내려다보았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한스의 몸 곳곳을 탐색하였다.

       시선이 형태를 갖춘 채 끈적한 혓바닥이 되어 온몸을 핥아오는 착각마저 들었다.

       

       《흐음…? 너, 평범한 인간이 맞나? 괴상하고 기이한 동시에 흥미롭군. 단순한 글자가 격을 올린다고? 아니지, 그저 촉진하는 건가? 아니면 눈속임?》

       

       악마의 동공에 흥미와 탐욕이 차올랐다. 아무래도 ■이 재밌는 장난감을 만든 모양이다.

       이것과 별빛을 함께 먹어 치운다면, 그야말로 천상의 별미가 따로 없으리라.

       

       악마의 주둥이에서 군침이 뚝뚝 떨어졌다.

       

       《일단 죽인 다음에 천천히 얘기하도록 하지! 자네의 영혼에 물어보면 될 일이야!》

       

       새까맣고 날카로운 발톱이 빠르게 휘둘러졌다. 저기에 부딪힌다면 한스는 그 형체도 남지 못하고 산산이 터져 나가리라.

       

       “후우…”

       

       촉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한스는 깊게 호흡을 마셨다. 손끝에는 아직 바다에 다녀온 감각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덧없지만, 여린 감각이 이끄는 대로 자세를 잡는다.

       

       동시에 데모닉과의 대련을 통해 배운 것을 떠올린다.

       

       평정심.

       맑은 연못과도 같은 침착함.

       

       차분하게 적을 바라보고, 그 궤적을 파악한 뒤에 휘두른다.

       상대의 공격은 흘리고 내 공격을 적중시킨다.

       

       손에 든 것은 한 자루의 검. 그리고 마음에 품은 것은 돌아가야 할 이유.

       

       한스는 언젠가 대장장이에게 들었던 충고를 아직 잊지 않았다.

       

       ‘내가 검을 든 이유…’

       

       지키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항상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이번에도 같았다.

       

       한 걸음 앞으로 걷는다.

       

       그리고ㅡ

       

       검을 휘둘렀다.

       

       전방의 모든 공간을 가득 채우며 쇄도하는 악마의 발톱. 그에 마주 휘두른 한스의 롱소드.

       겉보기에는 마차에 대적하는 사마귀, 아니 개미의 형상이었다.

       

       허나, 그 결과는.

       

       촤악ㅡ!

       

       한낱 개미가 마차를 멈춰 세웠다.

       

       《크아아악! 너, 너! 감히ㅡ!》

       

       새까만 앞발이 허공을 유영했다.

       

       매끈한 단면을 보이며 툭 떨어진 악마의 한쪽 발. 이윽고 까맣게 질척거리는 피가 흘러나왔다.

       

       

       설마 인간 따위에게 당할 줄은 몰랐단 걸까.

       

       당황하고 분노한 악마가 주춤 뒤로 물러났다.

       

       “커흡ㅡ! 후ㅡ… 흐읍!”

       

       한스가 뜨겁게 이글거리는 검을 부여잡고 거친 숨을 내뿜었다.

       

       한계까지 쥐어짠 근육이 후들거렸고, 항상 가볍게 느껴지던 롱소드가 한없이 무거웠다.

       

       느낄 수 있었다.

       방금의 그 일격은, 이름 모를 바다에 다녀오기 전의 자신과는 차원이 다른 무언가였다.

       

       ‘다시, 할 수 있을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가능하리라.

       

       거친 호흡을 가다듬으며 애써 태연하게 검을 겨눴다.

       

       바늘처럼 얇아진 악마의 눈동자에서 분노가 이글거렸다. 살짝 벌어진 아가리에서는 불꽃이 넘실거리며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 흉흉했다.

       

       《크으ㅡ! 너! 결코 쉽게 죽이지는 않겠ㅡ!》

       

       투콰아아아앙ㅡ!

       

       《커허어억!!》

       

       하늘에서 쏜살같이 처박힌 무언가가 악마의 머리를 강타하며 유성처럼 곤두박질쳤다.

       

       “무, 무슨?!”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이변. 당황한 한스와 성기사가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경계했다.

       

       다각ㅡ 다그닥ㅡ

       

       자욱하게 일어난 먼지 속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청명하게 울리는 말발굽 소리에는 어쩐지 평온해지는 울림이 가득하다.

       

       이윽고 먼지를 뚫고 무언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얀 갈기, 총명한 눈망울과 늠름하게 뻗은 일각.

       

       《주인이여! 내가 왔네!》

       

       그야말로 혜성처럼 내려온 유니콘이, 늠름한 자태를 뽐내며 외쳤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과 추천은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원래 깨달음과 변신 중에는 공격하지 않고 기다려주는게 국룰인데… 매너를 지키지 않다니. 악마답게 소인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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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Installed an Idle Weapon Crafting G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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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치형 무기 만들기 게
Status: Ongoing Author:
Out of boredom, I downloaded an idle weapon crafting g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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