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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5

       

       

       

       

       

       185화. 태양을 피한 자들 ( 1 )

       

       

       

       

       

       때아닌 재앙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평생 나고 자란 땅을 등지고 돌아서는 이들의 손에는 한없이 가벼운 짐만이 들려 있었다.

       

       촉박한 시간은 그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손때 묻은 물건을 챙길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집을 떠나는 이유조차 모른 채 부모의 손에 이끌려 피난길에 올랐다. 노인들은 이 땅을 떠날 바에야 몬테그라스와 함께 죽겠노라 외치며 방 안에 틀어박혔다.

       

       참담한 심정이었다. 

       

       숱한 세월을 마수와 다투며 손에 넣은 인간의 영역이었고, 선조들의 피땀으로 만들어진 그들의 고향인데.

       그들의 발자국이 닿지 않은 곳이 없고, 손때 묻지 않은 곳이 없는 땅일 텐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고향을 떠나보내게 되었다.

       

       나고 자라기를 평생 몬테그라스에서 보내온 피난민들은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며 눈물을 찍어 눌렀다.

       

       “…”

       

       “공녀님…”

       

       프리가도 다른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심했으면 더욱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피난민들의 행렬 제일 끝에 위치한 프리가는 힘없이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난생처음 보는 프리가의 모습.

       

       

       

       케니스가 조심스레 다가갔지만, 이미 프리가의 얼굴에는 무기력함, 우울과 슬픔, 자괴감 따위가 가득했다.

       

       “백성들을 질서정연하게 인도해라! 서둘러! 시간이 없다!”

       

       루샨 공작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외쳤다.

       

       사태의 초기, 눈사태 소식에 몬테그라스 전체가 큰 혼란에 빠졌을 때 루샨 공작의 지휘가 없었다면 피난 행렬은 더욱 늦어졌을 것이다.

       

       물론 루샨 공작도 크게 흔들리고 절망했다.

       

       마수가 몰려온다면 죽음을 불사하고 싸우면 된다. 적 앞에서 고향을 위해 싸우지 않을 북부의 전사는 없었으니까.

       

       악마가 수작을 부린다면 성도와 함께 물리치면 된다. 어둠은 거대한 빛 앞에서 사라지기 마련이었으니까.

       

       하지만 눈사태는, 자연의 재해는 인간의 손을 벗어난 종류의 것이었다.

       

       제아무리 인간이 마수와 백 마리, 이백 마리 싸워 이긴다 해도, 자연의 분노 앞에서 참으로 무력한 것이다.

       

       ‘나의 대에서 몬테그라스가 지는구나. 죄송합니다 선조들이여… 위대한 여섯 번째 신이시여. 부디 자비를 베푸소서.’

       

       허나 그는 공작이었다.

       몬테그라스의 어버이, 하나뿐인 지도자.

       

       강철 같은 그의 심성은 적어도 겉보기에는 믿음직한 지도자의 모습을 가능하게 했다.

       

       침통한 눈빛은 굳건한 의지로 덮고, 비통한 침음은 우렁찬 외침으로 묻었다.

       

       그렇게 루샨 공작은 가장 앞장서서 피난민들을 이끌었다.

       

       ‘앞장서서 백성들을 이끌고, 가장 뒤에 이들을 따라가리라.’

       

       최후의 순간까지, 몬테그라스에 남은 이가 없을 때가 되어서야.

       그제야 루샨 공작은 떠날 것이다.

       

       묵직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피난길을 재촉하는 이들의 굽은 등이 길게 늘어섰다.

       

       한 번 더 도시를 돌아보기 위해 루샨 공작이 비삐 걸음을 옮겼다.

       

       “공작님.”

       

       “…누구냐.”

       

       배후에서 아무런 기척도 없이 들려온 목소리. 고저가 없는 목소리에서는 작은 감정의 편린조차 찾아볼 수 없다.

       

       적어도 루샨 공작이 아는 이 중에서는 저런 목소리의 가신이 없다. 그것도 등 뒤에서 기척을 죽이고 말을 걸다니. 급박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당장 칼부터 나갔을 것이다.

       

       루샨 공작이 만약을 대비해 칼자루에 손을 얹고 사방을 둘러봤다. 어딜 둘러봐도 그에게 말을 거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아직 멀리 떠나지 못한 이들이 많더군요. 병사로는 모든 백성들을 안전한 곳까지 옮기기 어려울 것인데…”

       

       “악마냐?”

       

       “아닙니다. 그런 더러운 것들하고 저희를 비교하지 말아 주셨으면 하는군요.”

       

       “모습이라도 보이고 말을 해라. 음침하게 숨어서 말을 건다면, 나는 너를 악마라고 생각할 것이다.”

       

       차가운 냉기가 뻗어진 그림자를 따라 흐른다. 얼음의 한기와는 결이 다른 종류의 것이다.

       

       인위적이고 인공적인 추위.

       

       꾸욱.

       

       수상함이 가중된다. 루샨 공작이 미간을 좁혔다. 설령 죽었으면 죽었지, 살기 위해 악마와 계약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당장 모습을 보여라! 악마라면 너의 거짓된 심장을 토막 내주마! 당장 나와라!”

       

       “… 악마가 아니라ㅡ 휴우. 알겠습니다.”

       

       기운 빠지는 사내의 목소리와 함께 그림자에서 무언가 스슥ㅡ 올라오기 시작했다. 기상천외한 마수들을 숱하게 봐온 루샨 공작이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까만 그림자가 이리저리 뭉치고 꼬이더니, 이윽고 사람의 형상이 되어 간다.

       

       모습을 드러낸 이는 남성이었다.

       

       남성임에도 미모가 굉장히 빼어났는데, 길게 늘어진 다크서클과 환자처럼 창백한 피부 때문에 잘생긴 시체처럼 보일 뿐이었다.

       

       특히 사람의 것이 아닌 백발과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돋보였다.

       

       “악마구나, 이 더러운 녀석!”

       

       눈사태의 원인이 악마임을 알고 있던 공작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격분한 루샨 공작이 검을 휘둘렀다. 

       

       악마 새끼가 감히 이 땅에 발을 들이다니! 

       

       캉!

       

       그림자에서 길게 뻗은 까만색의 무엇인가 검을 막아섰다. 두텁게 뭉친 그것은 마치 방패와도 같은 강도를 자랑했다. 검을 타고 전해진 반동이 손을 울린다.

       

       쩌릿한 손을 한 차례 털어낸 루샨 공작이 정체 모를 사내를 경계하며 말했다.

       

       “그런 사술을 보이고도 악마가 아니라고 말하는거냐?”

       

       “… 후우. 인간이란 족속은 시간이 흘러도 참 변하는 게 없군요. 얼굴만 보면 악마라고 하다니.”

       

       “네 모습을 보고 말해라. 움직이는 시체 같은 녀석.”

       

       “시체… 뭐, 별로 틀린 말은 아니군요.”

       

       사내가 피식 웃었다. 아니, 웃었나? 기이하게도 말투는 비꼬는 어투였는데 표정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마치 가면을 쓰고 있는 자와 비슷했다.

       

       쿠구구구ㅡ

       

        눈사태의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려온다.

       

       루샨 공작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정체 모를 녀석과 드잡이할 시간이 없었다.

       

       “남은 시민들 모두 대피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할 겁니다.”

       

       떠나려는 루샨 공작을 붙잡는 사내의 말.

       

       “제가, 아니. 저희 일족이 도와드리면 이 도시에 남은 사람들을 모두 제시간에 옮길 수 있습니다. 아주 안전한 곳으로 말이죠.”

       

       악마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수상한 사내의 제안.

       

       루샨 공작은 꺼림칙함을 애써 억누르며 사내에게 물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전부 죽을 판이었다.

       

       “무슨 수로 말이냐.”

       

       “이렇게요.”

       

       루샨 공작의 팔을 휘어잡은 사내가 휘리릭! 하고 그림자로 들어갔다. 팔을 잡힌 루샨 공작도 순간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눈을 떠보니ㅡ

       

       휘이이ㅡ

       

       “이, 이게 무슨…”

       

       마수의 산 정상이었다.

       

       절벽 사이의 그림자에서 얼굴을 꺼내 주변을 둘러본다. 저 아래 몬테그라스가 아주 작게 보였다.

       

       “너는… 너희는 대체 뭐냐? 진정 악마가 아니냐?”

       

       공간을 넘어 이동한 건가? 아니면 이조차 악마의 환상일까.

       

       루샨 공작의 물음에 창백한 인상의 사내가 희미한 바람 같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 저희는 시간에 묻혀 잊힌 자들일 뿐입니다.”

       

       그림자 속에서 붉디붉은 눈동자가 멍하니 태양을 바라보았다. 결코 닿을 수 없는 것을 갈망하는 것처럼.

       

       

       

       

       

       *****

       

       

       

       

       

       쏴아ㅡ 철썩!

       

       잠잠한 파도 소리만이 들려오는 모래사장. 위대하신 분은 일어날 기미도 없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케넬름의 안색에 점점 초조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잠에서 깨어나지 않을 줄은 미처 몰랐던 까닭이다.

       

       “위대한 분이시여, 제발 일어나세요. 이제 눈을 뜨셔야 합니다! 위대한 분이시여!”

       

       불경함을 감수하고 감히 옥체에 손을 대서 흔들어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케넬름의 시선이 거울과 위대하신 분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영혼의 바다와 지상 사이에서는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잠을 적당히 주무시면 일어나실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오판이었다.

       위대하신 분은 케넬름의 예상보다 더 깊게, 더 오랫동안 잠에 빠졌다.

       

       ‘눈사태가 도시를 덮치기 전에는 일어나실 줄 알았는데…!’

       

       초조하게 손톱을 깨문다. 

       

       산의 정상에서 시작한 눈사태는 빠르게 덩치를 불리며 몬테그라스를 향해 접근하고 있다. 피난민들의 행렬이 길게 꼬리를 이었지만, 아직 멀리 벗어나지 못했다.

       

       눈사태의 범위에서 도망치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대로 있다가는 끔찍한 대참사가 일어날 것이다.

       무고한 백성들이 수없이 죽을 테고, 지상에 내려앉은 희망의 등불도 여럿 꺼지겠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사색이 된 케넬름이 더욱 급하게 위대한 분을 흔들며 소리쳤다.

       

       “제발, 제발! 일어나세요, 위대한 분이시여! 제발!”

       

       그녀가 바다의 도움을 받아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의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바다가 그녀를 도울지도 의문이었다. 합당한 주인이 집 안에 와있는데, 케넬름에게 힘을 빌려주기는 할까?

       

       “우음. 스읍ㅡ”

       

       묵묵부답. 

       

       한 차원을 새로 만드는 창조의 기적을 벌였으니 이렇게 탈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만.

       때가 너무나 좋지 못했다.

       

       ‘뭔가, 뭔가 수가…!’

       

       케넬름이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벅지를 베며 자고 있던 위대하신 분은 쿵ㅡ 하고 머리를 박았다.

       조금 꿈틀거리더니 다시 잠에 빠진다.

       

       케넬름이 초조하게 손톱을 깨물며 모래사장을 오갔다. 영특한 머리가 번뜩이며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사정 없이 돌아간다.

       

       그러기를 한참.

       

       파바바바박!

       

       케넬름은 모래사장의 어느 한 곳을 미친 듯이 파기 시작했다. 고운 손톱끝에 모래알이 박혔고, 마구잡이로 땅을 파헤쳐서 고풍스러운 옷에 흙이 잔뜩 묻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특이하게도 케넬름이 구멍을 파는 곳의 지형은 마치 거대한 운석이 떨어진 것처럼 거대한 원형으로 움푹 파인 곳이었다. 케넬름이 구멍을 파는 지점은 크레이터의 한 가운데.

       

       뱔똥별이 떨어졌다면 딱 케넬름의 위치에 떨어졌을 것이다.

       

       ‘제발 제발… 있어야 할 텐데!’

       

       구덩이가 점점 깊어질수록 그녀의 눈동자에는 간절한 기색이 짙어진다. 

       

       그렇게 손톱에 박힌 모래알들이 살을 파고들어 피가 조금 흘러나올 정도로 구덩이를 팠을 때.

       

       “이, 있다!”

       

       케넬름은 작은 빛 덩어리를 찾을 수 있었다.

       

       

       

       *****

       

       

       

       지상과 영혼의 바다에서 재앙으로 인한 사투가 일어나고 있을 때.

       

       “삐이익…”

       

       서리용 이베르는 여느 때와 같이 온천에 몸을 담그고 느긋한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이베르가 성지에서 가지는 위치는 매우 특이했다.

       

       여타 다른 일꾼들처럼 무언가를 만들어서 바치는 종류도 아니었고, 그 외의 생산적인 행위를 하지 않았다. 하는 일이라고는 온천에서 몸을 녹이다가 광산이나 숲 주변에서 춤을 추는 것뿐.

       

       위대하신 분은 이베르에게 그것만을 바라셨다.

       

       “삐익-”

       

       뜨끈한 온천 열기에 이베르가 녹아내리듯 흐물흐물해진다.

       

       이베르의 특수한 처지에도 드워프나 엘프들은 별다른 불만이 없었다. 이베르가 매우 귀엽고 애교도 많았을뿐더러, 고된 노동 와중에 보는 이베르의 춤은 청량한 맥주와도 같았다.

       

       “여어, 이베르! 오늘 춤은 언제 추러 오는 거야?”

       

       “너무 늦지 않게 오라고!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까!”

       

       “삑, 삐익ㅡ…”

       

       지나가던 드워프들이 이베르를 보며 아는 체했다. 노곤한 온기에 취해있던 이베르는 그저 고개만 까딱이며 성의 없게 대답했다.

       

       그의 춤은 보기에는 아무렇게나 막 추는 것 같아도 나름대로 깊은 의미도 심오한 상징이 포함된 춤이었다. 추고 싶어도 아무 때나 막 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삐익… 쌔액ㅡ 삑… 새액ㅡ”

       

       이윽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이베르의 고개가 온천의 수면에 닿을락 말락하게 떨어지고 올라오기를 몇 차례나 반복했을까.

       

       “쌔액… 삑?”

       

       문득 느껴지는 이질감에, 이베르가 잠에서 일어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뭔가 간질간질하게 자신을 건드리는 느낌.

       

       위대하신 분이 오셨나 했는데, 은하수가 없는 것을 보면 또 그건 아니다.

       

       “… 삐익?”

       

       뭔가 등을 콕콕 찌르는 감촉이다. 

       

       이 정체 모를 것은 뭐지?

       

       이베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과 추천은 항상 감사합니다.

    – ‘신선우’님!!! 후원 감사합니다!!! (언젠가는 야스도 하고, 애도 만들지 않겠냐는 내용) (근데 언제 할 지는 작가도 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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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치형 무기 만들기 게
Status: Ongoing Author:
Out of boredom, I downloaded an idle weapon crafting g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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