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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2

       

       

       

       

       

       192화. 신뢰의 방식 ( 3 )

       

       

       

       

       

       아주 낯익은 천장이다. 네모난 조명과 네모난 천장, 네모난 패턴의 벽지들.

       그야말로 온 세상이 네모다.

       

       

       ‘네모난 천장과 네모난 조명… 이게 바로 네모의 꿈?’

       

       아직 잠에 취해 몽롱한 의식이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자라나는 가지처럼 사방팔방 흩어지던 의식은 이윽고 하나의 점으로 귀결됐다.

       

       “… 레, 레이드!”

       

       찬물을 맞은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눈앞에 스치는 마지막 기억.

       

       산의 정상으로 올라간 정찰대와 동굴에 갇힌 돼지 노예 상인.

       그리고 나는 잠깐 카메라를 돌려서 노예 상인한테… 벌을 줬는데…

       

       아니.

       일단 그런 돼지는 내 알 바 아니다.

       

       ‘레이드! 레이드를 보자!’

       

       번개처럼 핸드폰을 켜서 게임을 실행했다. 곧장 실행되는 게임.

       잠깐의 로딩 화면마저도 기다릴 수 없을 정도로 초조하다.

       

       마지막 기억이 확실하다면, 정찰대는 산의 꼭대기를 향하고 있었다.

       

       당장 보스를 만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다니.

       

       본의는 아니었지만, 둘도 없는 실책이다.

       

       ‘그러고 보니까…’

       

       돼지 녀석에게 벌을 줘야겠다고 생각한 직후. 나는 까만 바다에 서 있었다.

       먹물처럼 까만 바다는 끊임없이 파도치며 나를 향해 몰려왔다.

       

       그리고… 몸 안에 있는 알 수 없는 것을 이용해서 녀석에게 ‘벌’을 내렸다.

       내가 알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녀석에게 어울리는 고통을 선사할 수 있는 것으로.

       

       끝없는 탐욕에 대한 고통을 느낄 수 있도록.

       

       어떻게 했는지 자세한 방법은 조금 가물가물했지만, 녀석에게 벌을 내렸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기억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묵힌 속이 뻥 뚫리는 것처럼 속이 시원해졌다.

       

       그런 미친 녀석은 벌을 받아 마땅했다.

       

       돼지 녀석에게 벌을 내린 이후, 기절하듯 쓰러졌다는 것도 기억한다.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의식이 멀어지는 그 경험이라니.

       아마 인생에서 두 번 없을 경험일 테지.

       

       ‘그리고 잠결에 누가 날 깨우지 않았나?’

       

       잠든 나를 누군가 열심히 깨우려고 했다는 건… 꿈일 수도 있다.

       깨우려고 했다면 아마 케넬름이겠지만, 아마 꿈일 것이다.

       

       ‘… 아니겠지?’

       

       무의식적으로 입술로 향한 손가락. 화끈거리는 무언가에 스친 것처럼 열기가 남아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천천히 입술을 더듬어 봐도 화상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기억나는 것은, 뺨을 간지럽히는 옅은 숨결과 길게 늘어진 붉은 머리카락.

       몽롱한 잠기운의 와중에도 두 가지는 확실하게 기억났다.

       

       ‘…’

       

       챱 챱ㅡ!

       

       화끈거리는 뺨을 두들겼다.

       

       아직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다.

       화끈거리는 얼굴도, 주책맞게 쿵쾅거리는 심장도 애써 모른 척한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다.

       

       “레, 레이드. 레이드 돌려야지.”

       

       정찰대로 한스가 들어간 레이드다.

       여기서 한스를 잃거나 레이드에 실패한다면 정말 뼈아픈 실패가 될 것이다.

       

       나에게는 캐릭터의 문제였지만, 저쪽 세계에서는 정말로 누군가 죽는다는 소리니까.

       

       곧장 화면을 조작해 보스 레이드로 들어갔다. 끝없이 펼쳐진 하얀 설원이 눈에 들어온다.

       설원을 빼곡하게 뒤덮은 까만 색의 무언가와 그에 치열하게 맞서는 한 줌의 인간들이 보인다.

       

       “…도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거야?”

       

       분명 마지막에 봤을 때는 설산이었는데, 지금은 설원에서 전투가 일어나고 있다. 도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건지 짐작도 안 된다.

       

       영화의 초중반을 건너뛰고 후반부의 클라이맥스부터 보는 기분.

       

       확대해 살펴보면 몰려오는 녀석들의 대부분이 악마와 웨어울프다. 인간들의 최후방에 보이는 것은 저들끼리 부둥켜 안은 민간인들.

       

       대충 눈에 보이는 상황은 일목요연하다.

       

       “또 디펜스야?”

       

       몰려오는 적으로부터 후방의 민간인들을 지킨다.

       

       이미 한 번 해본 디펜스다. 당연히 저번 시골 마을처럼 방어 건물 업그레이드가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디펜스라면 당연히 있어야 하기도 하고.

       

       그런데 없다.

       

       ‘… 뭐야? 왜 방어 건물이 아무것도 없어.’

       

       이제 보니 방어 건물만 없는 게 아니다. 그간 어떻게 진행됐는지 알려줘야 할 알림도 없었고, 어떻게 하라는 메시지도 나타나지 않았다.

       

       “케넬름? 케넬름!”

       

       케넬름이 알려줘야 하는 것들인데,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다행히 스킬은 멀쩡하게 쓸 수 있었다. 일단 인간들이 밀리고 있으니까 이것저것 손에 잡히는 대로 난사한다.

       

       – 꾸르릉! 꽝! 콰광!

       

       시퍼런 번개가 벌레처럼 뭉쳐있는 악마들 사이에 떨어진다. 아무래도 단일 타깃이라 그닥 효율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띠링ㅡ!

       

       경쾌한 메시지 알람.

       드디어 케넬름이 일하기 시작했다.

       

       《… 디풴스 전용 스킬의 사용이 가능합니다.》

       

       보기 드물게 오타가 난 모습. 케넬름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그 이유는 어쩌면…

       

       ‘아니, 아니지! 일단 레이드부터!’

       

       띠링! 띠링! 띠링!

       

       한번 메시지가 뜨기 시작하니, 미친 듯이 알람이 울리면서 메시지가 쌓이기 시작했다.

       슬쩍 보니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리해주는 로그 형식의 메시지다. 전부 한쪽으로 치운다. 이런건 끝나고 봐도 된다.

       

       띠링ㅡ!

       

       《디펜스 전용 스킬, 몰아치는 번개 폭풍! 넓은 범위에 강력한 번개 폭풍이 몰아칩니다. 낮은 확률로 마비를 부여합니다.》

       

       띠링ㅡ!

       

       《현재 전장에 어울리는 스킬이 상점에 존재합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오? 어울리는 스킬?”

       

       이런 식으로 대놓고 스킬 사라고 말하는 건 거의 처음 아닌가? 당당하게 스킬 하나 사라고 말하니까 또 호기심이 동했다.

       

       이렇게 말할 정도면 분명 뭔가 굉장한 스킬이겠지.

       

       자연스럽게 손을 놀려 상점으로 향했다.

       꼭 스킬을 사는 게 아니라도, 구경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

       

       ‘어디 보자…’

       

       추천하는 스킬의 설명을 천천히 읽어볼수록, 고개는 점점 삐딱해진다.

       

       ‘정말 이게 맞아?’

       

       그동안 없었던 스킬은 맞는데… 정말 이게 전투에 도움이 된다고? 싶은 그런 스킬이다. 오히려 악마들한테 더 도움이 되는 스킬이 아닐까 싶다.

       

       인간에 불과한 아군에게는 전혀 쓸모없는 스킬인 것 같은데.

       오히려 부정적인 요소만 주는 것에 가깝다.

        

       “씁. 이거 아닌 거 같은데. 잘못 본 거 아냐?”

       

       띠링ㅡ!

       

       《이 스킬은 현재 전투에 ‘매우’ 도움이 되는 스킬입니다!》

       

       나도 모르게 의심하는 말을 했더니, 메시지창이 득달같이 나타났다. 메시지 구석에 팔짱 끼고 볼을 부풀린 작은 케넬름과 함께.

       

       “오.”

       

       – 《…!》

       

       아, 사라졌다.

       작은 케넬름의 얼굴이 빨개지더니 후다닥 도망쳤다. 덕분에 귀여운 걸 봤다.

       

       저렇게 도망치면 내가 꿈을 꾼 게 아니라는 것 같아서, 괜히 나까지 부끄러워지는데.

       

       ‘… 일단 스킬부터.’

       

       부우웅ㅡ!

       

        [WEB발신] 카드 38,500원 일시불 승인. 

       

       “와씨. 뭔 스킬 하나가 4만 원이야?”

       

       작은 케넬름에 홀려서 가격도 제대로 못 봤는데. 이게 정말 4만 원의 값어치를 할까? 4만 원이면 이게 치킨이 몇 마리야?

       

       ‘어라? 한 마리네?’

       

       그럼 스킬이 더 혜자인 것 같은데.

       

       다시 레이드 화면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전투에 큰 변화는 없었다. 오히려 악마들을 조금 밀어내기까지 했다.

       

       번개 폭풍이 넓은 범위에 떨어지면서 방어선에 조금은 여유가 생긴 모양.

       

       곧장 새로 구매한 스킬을 사용했다.

       

       – 쿠구구구구ㅡ

       

       뭔가 거대한 것이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천천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

       

       

       

       

       

       거친 고함과 옅은 단말마, 생과 죽음이 갈리는 찰나가 사방에 가득하다. 죽이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 전장.

       

       이스칼은 거대한 방패를 앞세워 흔들림 없이 나아갔다. 그의 옆으로는 비슷하게 생긴 방패를 든 병사들이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크르르르ㅡ!!”

       

       카가각!

       

       광분한 웨어울프의 발톱이 방패를 긁는다. 살 떨리는 충격이 방패를 타고 전해졌지만, 이스칼은 조금도 뒤로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 더 밀고 나간다.

       전선을 유지해야만 했다.

       

       쿵 쿵!

       

       방패를 두들겨 자신에게 시선을 모은다.

       

       “나 이스칼이! 여기 있다!! 더러운 악의 종자들아!!”

       

       붉게 충혈된 눈동자 수십이 그에게 집중된다. 전투의 흥분에 취한 적들이 기이할 정도로 이스칼의 방패를 향해 달려들었다.

       

       쾅! 카캉! 쿵쿵!

       

       수십 마리의 웨어울프가 이스칼의 방패를 향해 몸을 날리고, 긁고, 깨물고 발로 찬다. 이스칼은 그제야 뒤로 밀렸다.

       

       “크윽ㅡ!”

       

       아직이다.

       

       조금만 더. 조금 더.

       아직 때가 아니다.

       

       …

       

       지금이다.

       

       “창ㅡ!! 찔러!!”

       

       이스칼의 선창에 맞춰 방패 벽 사이에 작은 틈이 생기더니 날카로운 가시 수십이 뻗어 나왔다. 잘 벼려진 강철 창은 한낱 짐승의 가죽을 손쉽게 찌르고 꿰뚫었다.

       

       붉은 핏방울이 설원에 흩날리며 때아닌 꽃을 피웠다.

       

       이스칼도 한 손으로 있는 힘껏 창을 뻗었다. 창끝으로 뭔가 꿰뚫는 저항감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조금 비릿한 혈향이 선명하다.

       

       이건 좋은 신호다.

       아군이 흘릴 피가 줄었다는 소리니까.

       

       뻗어졌던 창이 방패들의 틈 사이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고, 잠시 열렸던 틈은 굳게 닫혔다. 수많은 방패가 한 몸처럼 움직이며 조금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는다.

       

       수십, 수백 번에 가까운 훈련의 성과였다. 이스칼의 무기 특성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전투 방법이기도 했다.

       

       이후로는 계속해서 반복할 뿐.

       이스칼은 그 자체로 뚫리지 않는 강철의 장벽이었다.

       

       “진형을 유지해라! 앞으로 전진한다!!”

       

       이스칼의 외침과 함께, 하늘에서 거대한 울림이 들려왔다.

       

       꾸르르릉ㅡ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돌연 먹구름이 뭉치기 시작한다. 거대한 뱀이 하늘에서 똬리를 틀 듯, 까맣고 길게 늘어선 구름이 서서히 뭉치기 시작한다.

       

       먹구름의 사이로 시퍼런 번개가 이따금 번쩍였다. 구름 속을 기어 다니는 뱀처럼 제 모습을 보일 듯 말 듯 했다.

       

       “저, 저건…”

       “구름 속에 뱀… 이 있는 건가?”

       

       전장에 침묵이 도래했다.

       

       모두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봤다. 구름이 뭉친다. 뭉칠수록 구름 속을 기어 다니는 번개가 더욱 크게 꿈틀거린다.

       

       “키, 키르륵… 키헤엑! 이상, 하다!”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악마 몇몇이 도망치려 했으나.

       

       콰르릉!! 콰쾅!

       

       벼락이 더 빨랐다.

       

       거대하게 뭉친 구름에서 떨어지는 수많은 벼락은 그야말로 폭풍이었다. 스치는 것은 형태도 남기지 못한 채 재가 되었고, 무엇 하나 온전히 남기지 않는다.

       

       콰앙!! 콰과광!!

       

       벼락이 쏟아진다. 몰아치는 비처럼, 거친 태풍처럼.

       삿된 것들을 모조리 벼락으로 정화한다.

       

       수세에 몰리고 있던 전사들의 기세가 단숨에 치솟았다.

       

       “우와아아아!!”

       “신께서! 우리를 보우하신다!!”

       “승리는 이미 우리의 것이다! 우리는 승리하리라! 승리하고 또 승리하리라!!”

       

       그야말로 광신에 다다른 현장.

       그들은 이미 승리를 약속받았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쿠구구구구ㅡ

       

       덕분에 벼락 소리에 섞인 또 다른 소리를 눈치챈 것은 아주 일부였다.

       

       거대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였다.

       몇몇 전사가 소리의 원인을 찾아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쿠구구구구ㅡ

       

       더욱 커진다.

       

       몰아치는 우렛소리마저 덮을 정도로 거대한 무언가의 소리. 이윽고 누군가 경악하며 외쳤다.

       

       “태양! 태양이!!”

       

       하늘에 떠 있던 태양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 태양을 가리는 것은 신의 눈동자, 일곱 개의 별이었다.

       

       대낮에도 찬란하게 빛나던 별들이 움직여 태양을 가리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하늘을 바라봤다.

       신께서 노하신 것일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어두워질수록 주변이 점차 따뜻해지고 있었다. 설원의 추위마저 몰아내는 온기의 무언가로 가득해진다.

       

       상처가 아물고, 턱 끝까지 올라온 숨이 가라앉는다. 포근한 기운이 그들의 등을 토닥였다. 신께서는 여전히 그들을 보우하고 계신다.

       

       지평선 끝에서 땅거미가 몰려온다. 

       순식간에 몰려온 땅거미는 하얀 설원을 까맣게 뒤덮었다.

       

       쿠구구구구구ㅡ

       

       별이 움직이는 소리가 세상에 가득하다. 이윽고 태양이 완전히 가려지자, 하늘에는 검은 원과 그 중심에 반짝이는 일곱 개의 별이 보였다.

       

       신께서는 여전히 그들을 바라보고 계시는 것이다.

       

       “밤… 밤이 됐어.”

       

       누군가 중얼거렸다.

       

       태양이 눈을 감고 어둠이 도래했다.

       

       마수도, 악마도, 인간도.

       모두가 어둠에 잠겼다.

       

       그리고.

       

       푸슈슈슉! 촤아아악!

       

       짙은 어둠 속에서, 무언가 터져나가며 사방으로 피와 내장을 흩날렸다.

       

       “… 모두 죽여주마.”

       

       하얀 머리카락,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어둠을 타고 흔들린다.

       

       가장 오래된 기록조차 먼지가 되어 사라진 아득한 옛적.

       그들은 밤의 귀족이라 불리던 이들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일교차에 이제는 미세먼지라니. 날씨가 미쳐 돌아갑니다. 독자님들은 저처럼 창문 열고 출근하지 마세요…

    – ‘신선우’님!!! 후원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부분들… 새겨듣도록 하겠읍니다… 200화 가까이 글을 썼지만, 아직도 너무나 어려운 것이 소설이군요…!! 응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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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Installed an Idle Weapon Crafting G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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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치형 무기 만들기 게
Status: Ongoing Author:
Out of boredom, I downloaded an idle weapon crafting g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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