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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15

       

       

       

       

       

       215화. 공주와 오크 ( 4 )

       

       

       

       

       

       세상은 우연과 우연이 만나는 일로 가득하다.

       

       우연이 겹치고 겹쳐 만남이 되고, 만남이 어우러져 인연이 되며, 인연이 엮여서 운명이 된다.

       

       하얀 바탕에 검은 보석이 박힌 티아라가 어느 도시에서 야채나 팔던 아낙네의 손에 들어간 것도, 단순한 우연이었다.

       

       신의 장난이 들어간 우연.

       

       아낙네는 아름다운 티아라에 입김을 불어가며 닦아 광을 냈고, 그녀의 딸에게 선물했다.

       

       티아라를 선물 받은 딸은 그것을 쓰고 다녔다. 너무 신나게 쓰고 다닌 나머지, 어느 곳에서 떨어트려도 모를 정도로.

       

       땅바닥을 구르던 티아라는 이름 모를 전사가 주웠고, 티아라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전사는 그것을 자신의 투구에 장식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티아라의 아름다움에 홀린 강도에게 죽었다.

       

       강도의 손에 들어간 티아라는 장물아비의 손으로, 대장간으로, 마차로, 도시의 뒷골목과 언덕 위, 마을과 마을을 거쳤다.

       

       수많은 사람의 손을 지났고, 수많은 우연과 만남이 티아라를 스쳐 지나갔다.

       마차에서 퉁겨져 길가의 수풀에 떨어지기도 하였고, 이를 한낱 들개가 물고 다니기도 했다.

       

       들개를 죽인 사냥꾼의 손에 들어갔다가, 그의 아내에게, 사냥꾼의 아내에서 다시 상인의 손으로.

       티아라는 끊임없이 사람의 손을 강물처럼 타고 흐르며 움직였다.

       

       사람을 타고 흐르는 티아라의 항해는 순백의 성도에서 멈췄고, 마침내 늙고 추레한 노파의 손에서 닻을 내렸다.

       

       짧은 시간 동안 길고 험난했던 여정을 증명하듯, 처음의 우아함과 반짝임은 먼지와 오물에 덮인 지 오래였다.

       

       가볍게 날갯짓하던 새의 조각은 부서졌고, 얇은 꽃대와 꽃잎까지 묘사된 들꽃의 장식은 깊이 파였다.

       순백의 티아라에는 온갖 상처와 흠집이 가득했고, 멀쩡한 것은 오로지 커다란 칠흑의 보석뿐.

       

       그럼에도 데이지의 눈길을 사로잡는 데에는 충분했다.

       

       반짝-.

       

       “예, 예쁘다아…”

       

       침울한 표정으로 걷던 데이지가 저도 모르게 티아라에 시선을 고정했다.

       상처투성이에 흙도 잔뜩 묻었고 군데군데 풀도 껴있는 것이 보인다. 낡은 고물에 불과한 몰골이다.

       

       그럼에도 데이지는 순백의 티아라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끌끌… 꼬마야, 이게 갖고 싶니?”

       “아, 네! 혹시 파시는 건가요?”

       “그럼 팔고말고. 이건 나도 아주 어렵게 구한 물건인데… 꼬마 아가씨가 귀여우니까, 특별히 싸게 해주마.”

       

       노파는 이 티아라를 골목길에서 주웠다.

       

       “…꿀꺽.”

       

       데이지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이성이 외쳤다.

       낡은 티아라를 사는 건 낭비에 불과하다.

       

       성도로 온 이후 살림이 다소 나아졌지만, 그녀는 아직 과도한 소비에 대한 병적인 거부감이 있었다. 

       항상 소비는 계획적으로, 딱 필요한 것만 구매하는 것이 습관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그럼에도 이 티아라는 너무 갖고 싶었다.

       

       데이지가 허리춤에서 동전 지갑을 꺼내 돈을 하나하나 헤아렸다.

       돈은… 조금 여유로운 수준이다. 

       

       달달달달달-.

       

       데이지가 손을 덜덜 떨면서 노파에게 돈을 내밀었다. 이 돈이면 살 수 있는 흰 빵이 몇 개고, 과일이 몇 개인가.

       또 그렇게 생각하니 동전을 쥔 손가락이 쉽사리 펴지지 않았다.

       

       꾸욱.

       

       결국 노파가 움츠러든 데이지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피면서 동전을 가져가야 했다.

       

       “아…”

       “끙. 뭔 아귀힘이… 자. 이건 이제 네 것이다. 가져가서 광을 내든, 녹이든 마음대로 해라.”

       

       짧게 후회가 스친 데이지의 얼굴은 이내 환하게 밝아졌다.

       손에 들린 상처투성이의 티아라가 마음에 쏙 들었다.

       

       조금만 닦아내고 광을 내면 굉장히 아름다울 것이다.

       데이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히히, 히히히.”

       

       티아라를 품에 꼭 안은 데이지가 쏜살같이 대로를 달려 제집으로 향했다.

       이 순간만큼은 한스에 대한 걱정도, 스스로의 무력함에 대한 자괴감도 그녀를 괴롭히지 못했다.

       

       콰앙!

       

       “데이지! 문을 그렇게 세게 닫으면ㅡ”

       “죄송해요!”

       

       답지않게 어머니의 말도 무시하며 구석에 쭈그린 데이지는 낡은 천으로 티아라를 조심스럽게 닦기 시작했다.

       

       해진 천에 티아라의 흙이며 오물이 옮겨 묻을 때마다, 티아라 본연의 찬란함이 살아난다.

       

       상처와 흠집은 데이지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였기에 포기했지만, 더러운 때를 벗겨낸 것만으로도 티아라는 우아한 제빛을 뽐냈다.

       

       “와, 와아아…”

       

       제 손에 반짝이는 별이 잡힌 듯하다.

       

       데이지가 황홀한 눈으로 티아라를 내려봤다. 돌이켜 보면 굉장히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 보석이나 치장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을 터인데, 왜 이 더러운 티아라에 시선이 향했을까.

       어째서 눈을 뗄 수가 없는 것일까.

       

       순백의 티아라가 길고도 긴 사람의 항해를 거쳐, 어째서 데이지의 손에 들어 오게 된 것일까.

       

       우연과 우연이 겹치고, 만남과 만남이 기기묘묘하게 어우러져 이끌린 환상.

       그 누가 감히 예측할 수도 없는 교묘한 우연의 흐름.

       

       저 하늘에 찬란한 일곱 개의 별. 그 눈을 빌어 지상을 엿보는 성녀도 감히 예상하지 못했던.

       

       참으로 교묘한 우연 혹은 운명이었다.

       

       스윽-.

       

       그 모든 흐름을 알 리 없는 데이지는 이내 티아라를 제 머리 위에 얹었다.

       반짝이는 티아라를 쓰니 마치 한 나라의 공주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지 않은가.

       

       데이지의 묵빛 머리 위에서 하얀 티아라가 반짝였고, 데이지의 눈동자와 똑 닮은 보석이 흐릿한 광휘를 흘렸다.

       

       “헤헤헤ㅡ.”

       

       그렇게 이름 모를 공주의 티아라는, 어느 시골 마을의 소녀에게 도착했다.

       그리고 티아라에 자리 잡은 까만 보석에서ㅡ

       

       반짝ㅡ.

       

       영문 모를 빛이 아주 잠깐 반짝이더니, 그 자리에서 데이지가 사라졌다.

       

       “어…?”

       

       한순간 눈을 깜빡인 데이지의 앞에는 초록색의 커다란 근육이 보였다.

       

       

       

       *****

       

       

       

       팍! 팍! 팍! 팍!

       

       드넓은 초원에서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먹을 수 있는 거라면 우는 아이의 빵도 뺏어 먹는다는 오크들이, 손에는 몽둥이 대신 괭이 비스무리한 것을 들고 땅을 가는 그 장관이라니.

       

       멍청하기로는 망아지 이하라고 불리는 족속이 농사라니?

       

       드디어 저 빌어먹을 메뚜기 떼가 약탈의 삶에서 벗어나 자급자족의 문명으로 안착하는 것 인가ㅡ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노옹쌰아!! 따앙!! 워어어ㅡ!!”

       “땽을!! 퍈다아아!!”

       

       저들은 그저 땅을 파고 있을 뿐이었다.

       

       잡초와 거친 흙을 골라내고 터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 있었다.

       

       마치 농사를 흉내 내는 아이의 장난과도 같이.

       어설프게 농사에 대해 따라 하는 모습이었다.

       

       그러한 헛짓거리를 반복하는 오크들이 초원의 사방에 있었으니.

       그 선두에서 이 멍청한 짓을 이끄는 자가 있었다.

       

       콰악! 콰악! 콰아악!

       

       “부하들!! 나를 따라! 농싸를!! 짔는다!!”

       

       한스였다.

       오크의 우두머리가 된 한스는 오크들을 진두지휘하며 유사 농사 놀이에 심취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농사인지, 왜 무의미한 땅파기를 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를 보는 이들은 적어도 폭력적인 사태가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한시름 놓을 뿐이었다.

       

       “여섯 신 맙소사…”

       “…세상에 저렇게 추할 수가 없구나.”

       

       다만 만신전의 이들은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신성한 두 개의 룬 문자가 새겨진 롱소드를 두 손으로 잡아 땅을 파는 그 모양새라니.

       거룩한 신의 무기를 삽처럼 사용하는 그 불경함이라니.

       

       기분 탓인지 일곱 개의 눈동자 별자리도 한숨을 쉬는 것 같았다. 데모닉이 한스의 몰골을 보며 눈을 찌푸렸고, 케니스가 눈을 가렸다.

       

       “저걸 도대체 어떻게 말리죠? 벌써 며칠째에요.”

       “말릴 수가 있는지 모르겠구나. 말도 통하지 않고, 네 얼굴도 못 알아보지 않았니. 오히려 저대로 땅만 파는 것이 다행일 수도 있단다.”

       

       데모닉의 말대로였다. 오크들이 땅을 파는 동안은 마을에 대한 약탈이 일어나지 않았다. 제국에서 가져온 식량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저 묵묵히 땅을 파는 것이다.

       

       “그, 그건 그렇지만요. 저대로 두기에는 좀… 그렇지 않나요? 며칠이나 계속 땅만 파는데…”

       “그럼 어떻게 할 거니?”

       “음. 한스 사도님을 어떻게든 제정신으로…”

       “무슨 수로?”

       “…”

       

       케니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확인한 것만 벌써 며칠째 저러고 있다.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정말 땅 파는 것에만 전념하고 있다.

       

       “케니스. 내가 가서 한번 후려쳐 볼까?”

       “공녀님이 가시면, 저도 도와드리겠습니다.”

       

       프리가와 이스칼이 각자 무기를 꺼내 들었다. 북부에서 눈사태를 반으로 가른 프리가의 의욕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프리가의 눈에서 자신감이 넘실거린다.

       

       “…단순히 때린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쩝. 아쉽네. 원래 망가진 것들은 때리다 보면 고쳐지는데.”

       

       사람은 단순히 때린다고 고쳐지지 않는다ㅡ 라는 말이 케니스의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가까스로 참아냈다.

       

       “저주라고 보기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고, 근처에 악마나 이단의 낌새도 없고… 난감하군.”

       

       데모닉이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며 턱을 긁었다. 팔라딘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온갖 것들을 봐온 그로서도, 이런 괴상한 것은 처음 봤다.

       

       그러니까… 사람이 오크처럼 행동하는 것 말이다.

       

       “일단 오크들이 난폭하게 굴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으니, 주민들의 보호를 게을리하지 말고… 성도에 추가적인 인력을 요청해야겠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현상 유지뿐.

       

       지시를 내리는 데모닉의 표정이 썩 밝지는 못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름 써먹을 놈이라고 인정했던 녀석이다. 한순간 바보천치가 된 모습을 보는 것은 굉장히 괴로웠ㅡ

       

       “노옹싸아!! 부하들!! 땅!! 판다아!!”

       “푸흡!”

       “아빠, 웃은 거 아니죠?”

       “…기분 탓이다.”

       

       …아무튼 괴로웠다.

       

       케니스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린 데모닉의 시야가 저 멀리 초원의 능선을 향했다.

       

       옅은 흙먼지 구름이 달려온다. 흐릿하게 보이는 깃발은 만신전의 것이다.

       

       만신전의 대서고를 샅샅이 뒤진다고 하더니, 뭔가 새로운 사실이라도 알아낸 것일까?

       

       다그닥ㅡ 다그닥ㅡ

       

       흙먼지를 뒤집어쓴 전령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데모닉 앞에 멈췄다. 

       

       “허억… 허억! 파, 팔라딘 님! 아, 안토니오 대사제께서 이것을…!”

       

       전령이 품에 소중하게 감싸 안고 있던 것을 떨리는 손으로 내밀었다.

       

       “이 책에 한스 사도님의 상황에 대한 실마리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낡고 해진 책이다. 두께도 그리 두껍지 않았다. 표지에는 꾸부렁거리는 고서가 보인다.

       

       “이게 뭐에요?”

       “케니스. 너 아직 고서도 못 읽는 거니?”

       “어, 음. 고어 시간에는 좀 졸아서…”

       “…나중에 성도에서 얘기하자꾸나.”

       

       용사가 고서를 못 읽는다니.

       애써 잔소리를 참은 데모닉이 책의 제목을 천천히 헤아렸다.

       

       “오크와 잿더미 공주…라.”

       

       아이들의 동화책이다.

       

       안토니오 대사제가 이 책을 보낸 이유가 있을 터. 데모닉이 조심스럽게 싯누런 종이를 넘기며, 그 내용을 훑기 시작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쿠팡 허브 계약직…!! 저도 잠시 그곳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기에, 얼마나 몸이 고된 지 잘 알고 있습니다…!!! 부디 몸 다치지 않게 조심하세요….!!! 몸이 최우선입니다…!!!! 무거운 거 들 때 조심하면서 움직이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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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치형 무기 만들기 게
Status: Ongoing Author:
Out of boredom, I downloaded an idle weapon crafting g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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