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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13

       

       

       

       

       

       313화. 아브락사스 ( 3 )

       

       

       

       

       

       군사 조직이라 하면 으레 가장 으뜸으로 여기는 요소가 두 가지 있다.

       

       규율, 그리고 충성.

       

       합법적인 무력의 사용을 허가받은 조직인만큼 엄격한 규율은 군사 조직의 섣부른 움직임을 제한했고, 국가 혹은 조직을 향한 충성심은 군사 조직의 칼날을 날카롭게 벼릴 수 있게 만들어줬다.

       

       허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

       

       엄격한 규율은 군사 조직의 계급 체계와 어우러지며 내리 갈굼이라는 아름다운 문화를 만들어 냈다.

       

       그와 더불어 케넬름은 자그마치 수천 년 전의 시간을 살아온, 그야말로 살아 있는 역사책.

       

       살아온 수천 년의 시간과 군사 조직 특유의 내리 갈굼이 합쳐지니, 데모닉에게는 정말 슬프게도 끔찍한 혼종이 탄생하고 말았다.

       

       “참나. 제가 현역으로 활동할 때는 성기사들이 이렇지 않았는데 말이죠. 그때는 말이에요, 하루하루가 정말 전쟁이나 다름없었어요.”

       

       “…”

       

       “…”

       

       “…”

       

       “타종이 울렸다 싶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창 한 자루 들고나와서 싸우고, 그러다가 피범벅이 된 채로 서서 졸고…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얼마나 좋은 시대인데요.”

       

       “…”

       

       “…”

       

       느닷없이 시작된 케넬름의 현역 시절 이야기.

       

       케넬름의 정체를 알고 있는 케니스와 데모닉은 말리지도 못한 채 부동자세로 이를 듣고 있었고, 다른 이들은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몰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요즘 성기사분들은 그 뭐라고 해야 할까요? 근성? 독기? 그런 게 참 아쉬워요. 내가 죽을 때 죽더라도 적에게 칼질 한 번 더 하고 죽겠다! 약간 이런 식의 정신 무장이 부족하단 말이죠?”

       

       끝도 없이 길어질 기미가 보이자, 결국 참지 못한 프리가가 끼어들었다.

       

       “야! 그런데 도대체 그쪽은 뭐야? 누군데 갑자기 우리한테 이래라저래라 훈수질인데?”

       

       “! 공녀님! 아, 안 돼요!”

       

       “아 말리지 말아봐. 내가 그래도 그쪽이 도와준 것도 있고 잘 싸우는 것 같아서 지금까지 참았는데, 듣자 듣자 하니까 말이 좀 심하잖아.”

       

       프리가가 씩씩거리며 분을 토했다. 성기사들이 조금 늦은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외부인에게 이런 말을 들을 정도로 잘못한 건 아니었다.

       

       “어머. 그쪽은… 프리가 공녀님. 맞죠?”

       

       “뭐야. 날 알고 있어?”

       

       “그럼요. 그 옆에 있는 남성분은 이스칼, 의수를 낀 분은 한스. 맞죠?”

       

       케넬름이 차례차례 이름을 부르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조금 반갑다는 태도였다.

       

       “그건 됐고. 댁이 뭔데 그렇게 잘났어? 우리 성기사 애들한테 그렇게 막말해도 되는 사람이야?”

       

       ‘해도 되는 사람이에요 공녀님!!’

       

       케니스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상대는 인류 최초의 성녀이자 첫 번째 팔라딘.

       단순하게 연배를 따져도, 나이를 따져도, 심지어 계급으로 따져도 명분은 케넬름에게 있었다.

       

       케넬름이 프리가를 빤히 쳐다보다가 씩 웃었다. 삐약거리는 병아리를 보는 듯한 눈빛.

       

       “귀엽네요.”

       

       “…! 너, 이 씹ㅡ!”

       

       “프리가 진정, 우선 진정하고! 쿠엑!”

       

       케넬름의 가벼운 도발에 길길이 날뛰는 프리가, 덕분에 말리는 이스칼만 죽어났다.

       

       이를 뒤로하고 케넬름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성기사들의 앞을 걸어갔다.

       

       

       “성기사분들.”

       

       어쩐지 알 수 없는 기백이 케넬름의 주변에 흘렀다.

       

       아무런 지시도 없었지만 성기사들은 어쩐지 바짝 긴장하며 절로 동작에 힘을 주어 부동자세를 유지했다.

       

       섬뜩하고 오싹한, 하지만 절제되어 차갑게 벼려진 기세.

       이는 마치 만전 태세의 라이언하트… 어쩌면 그 이상의 기백이다.

       

       “오늘 여러분이 저에게 보여준 모습은 조금 아쉬웠지만, 다음에는 더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케넬름이 단단한 눈빛으로 성기사들을 바라봤다.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나아갈 수 있는, 또 자신의 그런 걸음은 옳은 결과로 이어지리라 믿어 의심하지 않는 이의 굳은 눈빛이다.

       

       “여러분의 등 뒤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있는지, 항상 기억하기 바랍니다.”

       

       짧은 조언을 마친 케넬름은 미련없이 뒤돌았다.

       

       성기사들을 보니 저도 모르게 옛 추억이 떠올라서 너무 흥이 올라서, 무심코 옛날처럼 행동하고 말았다.

       

       ‘이러면 안 되죠. 모처럼의 지상인데, 바쁘게 움직여야 합니다.’

       

       이제부터 케넬름은 주어진 시간을 한없이 유용하게 사용해야 했다.

       

       시간이란 본래 누구에게나 공평한 자원이지만, 지금의 케넬름에게 시간이란 신의 손길에서 비롯된 한정된 금화였다.

       

       아끼고 아껴서, 꼭 필요한 곳에 써야 한다.

       

       “데모닉 팔라딘.”

       

       “넵!”

       

       “바로 만신전으로 가겠습니다. 먼저 가서 모든 대사제들을 모아주세요.”

       

       “대, 대사제분들을… 어째서인지 그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음.”

       

       잠시 고민하던 케넬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최초의 성녀 케넬름이 시간을 넘어서 그대들에게 전할 말이 있노라…라고 말하세요.”

       

       케넬름은 만신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아주아주 많았다.

       

       

       

       ***

       

       

       

       “일단 데모닉 팔라딘의 말이니 모이기는 했습니다만,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랍니까?”

       

       “글쎄요… 최초의 성녀 케넬름께서 저희들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던데. 뭔가의 비유일까요?”

       

       “에잉. 조교들 연구 주제 정해주다가 왔단 말이야. 빨리빨리 끝내자고.”

       

       넓은 대회의실에 대사제들이 모여서 저들끼리 떠들고 있다. 일단 데모닉의 부탁이니 모이기는 했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는 까닭이다.

       

       최초의 성녀 케넬름? 시간을 넘어서 전할 말이 있다고?

       무언가의 비유라고 추측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무래도 이번에 데모닉 팔라딘이 케넬름 성녀에 관한 잊힌 기록이라도 발견한 거 아닐까요?”

       

       “그것도 일리 있군요.”

       

       끼익-

       

       수군거리는 말소리를 뚫고, 커다란 석문이 천천히 열렸다. 모두의 시선이 문을 향했다. 

       

       저벅저벅, 작은 발소리가 걸어 들어온다.

       하지만 그 존재감마저 작은 것이 아니었다.

       

       꿀꺽.

       

       ‘도대체 무슨 존재감이…!’

       

       크고 거대한 존재감의 여성이 당당하게 대회의실에 들어왔고, 그 뒤를 데모닉과 케니스가 지켰다.

       

       붉은 머리카락이 돋보이는 여인은 성큼성큼 대회의실을 가로질러 두 발로 원탁 위에 우뚝 올라섰다.

       

       당당하게 원탁에 올라가는 태도에 대사제들이 기겁할 틈도 없이, 여인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사포가 휙 공중으로 휘날렸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면사포를 따라가다가 문득 여인의 얼굴을 본 대사제들은 거의 턱이 찢어질 기세로 놀랬다.

       

       “…!! 허, 흐어어어!!”

       

       “이, 이이이이게 도대체 무슨!!”

       

       붉은 머리카락과 꿀색의 눈동자, 그와 더불어 오밀조밀 자리 잡은 보기 좋은 이목구비.

       

       어찌 대사제들이 저 여인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수 있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지나치며 보게 되는 것이 성인들의 초상화일 텐데.

       

       “케! 케넬름 성녀?! 최초의 성녀ㅡ!!”

       

       “어찌! 도대체 어찌 이것이 가능한 건가! 분명 수천 년 전의 인물이실 텐데!!”

       

       크게 놀란 대사제들의 반응에도 그저 침묵으로 대꾸한 케넬름은 차갑고 무거운 시선으로 회의실을 훑었다.

       

       할 말은 수도 없이 많았고, 해야 할 말은 산처럼 쌓여있다.

       그러나ㅡ

       

       성녀 케넬름으로서 나서기 전에, 한 명의 인간 케넬름으로 꼭 해야 하는 말이 있었다.

       

       “저는.”

       

       케넬름이 입을 열자, 대회의실에는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단 한 마디로 분위기를 묵직하게 휘어잡은 것이다.

       

       “그대들에게 적지 않게 실망했습니다.”

       

       “…”

       

       “…”

       

       “모두를 지켜야 하는 성녀이기 이전에, 그저 한 명의 인간으로서 말하겠습니다. 당신들은 절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는 걸,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대사제들의 얼굴이 까맣게 죽었다.

       케넬름이 무엇을 말하는지 어찌 모르겠는가?

       

       희생제.

       감히 인간의 손으로 신을 만들겠다는, 오만하고도 불손한 꿈을 꾸었던 자의 최후는 어떠했나.

       

       의식은 폭주하여 악마의 먹잇감으로 전락했고, 커다란 피해가 속출하여 악마가 들어오는 침략으로 이어졌다.

       

       데모닉의 아내이자 케니스의 어머니 리아의 목숨을 잃었으며, 더불어 무고한 백성들의 희생까지 이어졌다.

       

       침울하게 침묵하는 대사제들을 보며 케넬름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이 질책하고자 이 얘기를 꺼낸 것이 아니다.

       

       지금 성도를 한바탕 뒤집고 사라진 회색 괴물은 희생제에서 이어진 하나의 인과였다.

       

       “지금 밖에서 일어난 회색 괴수의 사태는 그대들의 원죄입니다. 희생제의 망령이고, 업보입니다.”

       

       “그런…”

       

       “아, 어… 어찌… 여섯신 맙소사…”

       

       결국 죄책감을 못 이긴 몇몇 대사제가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성녀님…? 그게 도대체 무슨 말씀… 이십니까? 희생제의 망령이라니, 그 말은 꼭…”

       

       혼란스러운 눈빛의 데모닉이 뒷말을 삼켰다. 차마 스스로 뱉은 말의 뒤를 잇는 것이 두려운 까닭이다.

       

       케넬름의 말은 마치…

       방금의 괴물이 리아와 관련이 있다는 말처럼 들리지 않았는가.

       

       “데모닉…”

       

       케넬름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데모닉을 바라봤다. 그가 받을 마음의 상처와 상실감을 어찌 감히 함부로 재단할 수 있을까.

       

       이미 한 차례 마음에 묻어 흉터로 얼룩진 상처를 다시 한번 칼로 도려내는 고통일 것이다.

       

       “…아직은 저도 추측의 영역이기는 합니다만.”

       

       케넬름이 낮고 차분하게 속삭였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데모닉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방금의 그 회색 괴물은 오래전 영면에 든 리아의 영혼을 먹고…”

       

       회색 눈동자가 크게 확장된다. 온 세상이 까마득하게 멀어지며 아찔한 어딘가로 끝없이 추락하는 감각이 몰려온다.

       

       “그 영혼을 핵으로 성장한 녀석일 수도 있습니다.”

       

       쿵, 하고 데모닉의 세상이 어딘가로 끝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수천 년 묵은 라떼의 이 그윽한 향기가 느껴지십니까…?? 이것은 흡사 예술의 경지에 다다른 라떼…!!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숙성된 라떼의 미향이 저를 미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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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치형 무기 만들기 게
Status: Ongoing Author:
Out of boredom, I downloaded an idle weapon crafting g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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