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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15

       

       

       

       

       

       315화. 아브락사스 ( 5 )

       

       

       

       

       

       부그르르릅ㅡ

       

       의식이 몽롱하여 마치 깊은 물 속을 헤엄치는 것 같다. 

       

       팔과 다리를 휘적거려도 추를 단 것처럼 무겁게 움직이며 의식과 몸의 괴리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들리는 것이 없고, 느껴지는 것도 없다. 내 몸의 경계와 외부의 존재가 희미하니, 마치 이 공간 자체가 내 몸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눈에 보이는 건 어둠밖에 없으니, 몽롱한 정신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생각하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다행히도 나에게는 아주 많은 시간이 있었다. 생각할 시간은 차고 넘친다.

       

       부그르르ㅡ

       

       천천히, 그리고 몽롱하게.

       깊은 늪에 가라앉아 있던 돌이 떠오른 것처럼 하나의 기억이 의식의 표면으로 부유하기 시작한다.

       

       나의 먼 기억 중에서 언젠가.

       나는 아주 작고 작은, 갓 태어난 작은 세계를 발견했다.

       

       볼품없이 작고 여리지만 무수한 가능성의 덩어리인 아주 작은 세계.

       

       ‘그래. 그건 갓 태어난 아기의 모습이었지.’

       

       나는 그 눈부신 가능성에 그만 홀려버리고 말았다. 마치 잔뜩 부풀어 오른 꽃망울처럼 잔뜩 웅크린 그 모습이라니.

       

       동시에 절망했다.

       

       내 손길이 닿으면 작은 세상은, 갓 태어난 여린 차원은 견디지 못하고 부서질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스스로의 몸을 찢었다.

       언젠가 다시금 하나로 돌아올 먼 미래를 기약하며.

       

       작은 세상에 맞춰 나를 조각내는 것은 고통스러웠지만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었다.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까 조금 미친 짓을 한 것 같기도 하고.’

       

       애초에 지금 떠오르는 기억은 내 것이 맞나?

       문득 떠오른 의문이 다시금 가라앉는다. 끝도 없는 수마가 밀려온 까닭이다.

       

       ‘졸리다…’

       

       다시 눈을 감았다.

       여전히 깜깜한 어둠이었지만, 내 의식은 다시금 천천히 가라앉았다.

       

       부그르르…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아른하게 스쳐 가는 단편적인 하나의 이미지.

       

       – “……ㅡㅡㅡ”

       

       붉은 머리카락, 여인, 당돌하게도 내 앞에 꼿꼿하게 서 있던 존재.

       

       인제 와서 떠올려보면ㅡ

       

       ‘…첫 만남은 제법 유쾌했었지…’

       

       

       

       ***

       

       

       

       “으이이익! 당장 꺼져! 꺼져요!!”

       

       《푸히이잉! 아니 성녀시여! 어찌 나에게 그리 역정을 토하시는가! 처녀라는 것은 모름지기 태어난 그대로의 상태를 유지하여 가장 순결한 존재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성녀께서는 최소 수백! 어쩌면 수천ㅡ 쿠에엑!》

       

       방정맞게 나불거리던 유니콘의 정수리에 다시 한번 케넬름의 망치가 작렬했다.

       아낌없이 들어간 별빛이 망치의 궤적을 따라 은하수 같은 꼬리를 남겼다.

       

       씩씩거리던 케넬름이 귀신 같은 형상으로 고개를 치켜올렸다. 사방을 매섭게 훑어보니 감히 그녀의 눈을 마주칠 수 있는 이가 없더라.

       

       한참이나 분을 삭히던 케넬름이 거칠게 머리를 쓸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유니콘을 탓해봐야 뭐가 달라지겠는가. 그녀가 처녀라는 것은 사실이었으니.

       

       “하… 그래요. 저는 처녀예요.”

       

       “그렇군요.”

       

       “왜요. 뭐요. 성녀가 처녀인 건 당연한 거잖아요.”

       

       “저, 저희는 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만신전이 개인의 순결을 중요하게 여기긴 하지만, 억지로 순결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순결을 유지하여 신에게 몸을 바치는 것도, 결혼하는 것도 개인의 자유.

        

       최초의 성녀가 처녀라는 것도 이치에 어긋나는 일은 아닌 것이다.

       

       “하, 하지만 성녀께서는 자식을 낳아 후대를 잇지 않으셨습니까?”

       

       처녀 수태라니.

       

       “하… 제가 처녀인 것도 맞는데, 그… 자식이 있는 것도 맞아요. 입양이나 그런 건 아니고, 정말로 제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이에요.”

       

       “그런 것이 가능합니까?”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다니. 어찌 그런 일이…?”

       

       어떤 경전에도 적혀있지 않던 새로운 지식에 대사제들이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렸다.

       처녀로 임신한다는 것은 여간 상서로운 일이 아니었으니, 분명 아비 되는 이도 보통 존재가 아닐 터.

       

       케넬름이 최초로 기적을 받은 성녀라는 것, 다섯 신과 최초의 하나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던 점을 떠올리면…

       

       “…설마…”

       

       “……정말로?”

       

       단 하나의 가능성이 남는다.

       

       대사제들이 케넬름을 향해 애타는 눈빛을 발사했지만, 케넬름은 고개를 휙 돌리며 모른 척했다.

       

       이런 곳에서 말해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렇게 유쾌한 첫 만남은 아니었다고요.’

       

       지금 와서 떠올려 보면, 그분과의 첫 만남은 썩 좋은 시작이 아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차마 떠올리기 부끄러운… 그래, 위대하신 분의 말을 빌리자면.

       

       ‘흑역사나 다름없어요!’

       

       목덜미가 붉게 달아오른 케넬름이 아주 오래전의 과거를 어렴풋하게 떠올렸다. 

       

       다섯이자 하나이신 존재께서 자신의 눈앞에 강림하셨으매.

       당시의 풋풋하고 어린 케넬름은 크게 놀라서 이렇게 외쳤다.

       

       – “죽어라 괴물!”

       

       그리 외치며 한 손으로 늠름하게 장도리를 쥐고 휘둘렀다고 하더라.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았지만.

       

       “으으으으으으! 아그으으으으으!!”

       

       갑작스레 떠오른 부끄러운 과거에 케넬름이 몸부림을 치며 이리저리 머리를 헤집었다.

       

       한참이나 몸을 떨던 케넬름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럴 때가 아니었지.

       지금도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천천히 줄어들고 있었다.

       

       심지어 예정보다 더욱 촉박해졌다!

       홧김에 유니콘을 때리면서 적지 않은 양의 별빛을 써버린 탓이다.

       

       케넬름이 유니콘을 보며 찌릿 눈을 흘겼다.

       

       덕분에 계획의 상당 부분을 수정해야 했다. 이제 와서 남 탓을 해봐야 무슨 노릇이겠나. 유니콘에게 휘말린 자신의 부족함이지.

       

       “중요한 건 제가 처녀냐 아니냐 그런 게 아니에요. 여러분께서 생각하신 것처럼, 여섯 번째 신께서는 진정한 하나가 되기 위해 긴 잠에 드셨습니다.”

       

       《미친 소리! 세상에 처녀성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있!》

       

       “그만 해!”

       

       중간에 정신을 차린 유니콘이 난입했지만 한스가 능숙하게 제압하여 밖으로 끌고 나갔다.

       

       “여섯 번째 신… 아니, 최초의 하나께서 잠에 드셨다니요. 그렇다면 언제쯤 다시 눈을 뜨시겠습니까?”

       

       “그건 아무도 알 수 없어요. 당장 내일 눈을 뜨실 수도 있고, 어쩌면 수십 년 후에, 정말 어쩌면 수백의 시간이 흐르고서야 눈을 뜨실 수도 있죠.”

       

       “그, 그런…!”

       

       “영원한 억겁의 세월조차 그분 앞에서는 찰나의 흐름. 필멸하는 저희와 그분의 시간은 다르게 흐르니까요.”

       

       다르게 말하자면 찰나의 시간조차 그분에게는 억겁의 강물처럼 흐른다는 뜻이었지만, 케넬름은 이에 대해 구태여 알려주지 않았다.

       

       ‘준비라는 건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하는 법.’

       

       리아의 영혼을 핵으로 움직이는 회색 괴물을 상대하려면 케니스의 힘이 필수적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러기 위해 자신이 존재하는 것 아니겠나.

       

       케넬름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을 느끼며 늠름하게 자세를 취했다.

       

       유니콘 때문에 조금 모양 빠지기는 했지만, 그녀는 신화시대에 살아있는 기적으로 추앙받은 최초의 성녀이자 영원한 첫 번째 팔라딘.

       

       “그러니까 우선 전투 훈련부터 시작합시다.”

       

       달리 말하자면, 그녀는 혼자서 수많은 장병들을 굴려 어엿한 전사로 만들어 낸 탁월한 교관이다.

       

       “케니스를 불러와 주세요.”

       

       케니스는 자신이 타고난 혈통과 초대 성녀의 후손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실감할 필요가 있다.

       

       

       

       ***

       

       

       

       아프다.

       너무 아파!

       

       좁은 틈으로 몸을 구겨 넣은 회색 괴물이 낮게 울음을 토했다. 바삐 몸을 움직일 때마다 까맣게 그을린 살점이 욱신거린다.

       

       너무 좁다. 움직이기 힘들다.

       

       비대해진 몸으로는 좁은 틈을 지나다니기 어려웠다.

       

       회색 괴물은 생각했다.

       자신의 이점과 먹잇감의 약점을.

       

       저것들은 지킬 존재가 있다. 강한 것들은 숫자가 적고, 특정한 곳에 몰려있는 모습을 보였다. 약한 것들은 우르르 몰려다니며 강한 것들을 찾아 도망친다.

       

       반면 자신은 지킬 것이 없다. 닥치는 대로 쳐들어가서 먹고 도망치면 된다. 균열은 도주할 때도, 공격할 때도 좋은 수단이다.

       

       《키, 키히…》

       

       몰려오는 기쁨에 부들부들 몸을 떨던 회색 괴물의 몸이 돌연 울룩불룩하게 부풀어 올랐다. 몸 안에서 폭탄이라도 터지는 듯, 부정형의 몸이 거칠게 날뛴다.

       

       《케, 니…ㅅ…!! 키르르륵!》

       

       짧은 경련으로 끝났지만, 제법 고통스러운지 회색 괴물의 입에서는 침이 뚝뚝 흘렀다.

       

       뭔가 몸 안에서 날뛴다. 아프다. 억눌러야 한다. 어떻게 하지?

       

       ㅡ더 먹어 치우자.

       

       회색 괴물은 끓어오르는 허기를 느꼈다. 동시에 냉정하게 판단했다.

       

       자신은 계속 성장한다.

       

       언젠가 거인을 먹을 수 있을 때까지 무한하게 성장할 것이다.

       

       틈 사이에 마련한 둥지는 자신에게 너무 작아졌다. 이제 균열은 이동하는 용도로 쓸 수 있을 것이니, 바깥세상에 둥지를 만들어야 한다.

       

       ‘둥지, 먹이, 성장…’

       

       먹고, 성장한다.

       이 무한한 굴레의 근원에는 끝없는 허기가 있다.

       

       생각한다. 끝없이 생각한다.

       먹고 성장하는 만큼 지성은 늘어간다.

       

       《키르르륵…》

       

       회색 괴물은 생각했다.

       강한 것들이 쉽게 찾지 못할 장소에 둥지를 만들자.

       

       뚜두두둑-

       

       거칠게 균열을 열어 그 틈으로 몸을 쑥 밀어 넣는다. 회색 괴물은 이 동작을 몇 번이나 반복하면서 둥지를 만들기 적당한 위치를 찾아다녔다.

       

       《키르르륵- 둥지, 짓는다.》

       

       이윽고 아주 적당한 곳을 찾을 수 있었다.

       

       뽀득-

       

       사방에 하얀 눈이 가득하고, 까마득한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었다.

       

       

       

       ***

       

       

       

       “자. 한번 별빛을 써보세요. 전력을 다해서.”

       

       “네, 네엡!”

       

       케넬름의 단독 지도를 받게 된 케니스가 잔뜩 긴장한 채로 대답했다. 누군가 이 모습을 본다면, 케니스가 최초의 성녀를 만나 직접 가르침을 받아서 긴장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ㅡ아니었다.

       

       오들오들.

       

       케니스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크, 흐어… 으허으으으…”

       

       “……커헉…. 주, 죽여, 줘…”

       

       “흐어업…!”

       

       생글생글 웃는 케넬름의 뒤로 흙바닥을 나뒹구는 장병들이 가득하다. 성기사와 사도를 가리지 않았고, 심지어 데모닉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쿵! 끄허어어억!

       

       쿠웅! 흐어으으으읍!

       

       묵직한 쇳덩어리들이 중력을 거스르고 기계적인 상하 움직임을 반복한다. 상하 운동 한 번에 터져 나오는 무수한 신음 소리.

       

       연병장은 그 어느 때보다 땀과 비명으로 가득했다.

       

       “신성력의 본질은 치유입니다. 근육은 찢어지고 재생하며 더욱 강하게 성장하죠. 이 말은, 강한 무게로 근육을 찢고! 그걸 신성력으로 치유하면! 단기간에 엄청난 효율로 육체 훈련이 가능하다는 소리죠!”

       

       케넬름의 최단기간 육성 훈련 계획.

       근육을 찢고 신성력으로 치료해서 폭발적인 성장을 이뤄내는 것.

       

       이는 만신전에서도 알고는 있는 방법이었다.

       다만 훈련 강도와 위험성 때문에 실전된 훈련이었다.

       

       무리한 무게로 훈련하다가 단번에 몸이 으스러져 사망하는 이들이 속출한 것이다. 덕분에 만신전에서 이 훈련법은 사실상 사장된 방법이었다.

       

       “후욱, 흐읍! 끄으으으…!”

       

       허나 케넬름은 노련한 훈련 교관. 개개인의 한계 중량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정확한 자세를 이끌어 효율적으로 근육을 박살 내도록 유도했다.

       

       “……허, 흐어, 흐으으으… 이, 이제 진짜… 못 해… 그, 그만…!”

       

       털썩.

       

       “더 하실 수 있습니다. 딱 한 세트만 더 하도록 합시다. 제가 옆에서 도와드리겠습니다.”

       

       대기하던 사제가 달려와 주저앉은 이에게 신성력을 퍼부었다. 파랗게 피멍이 들었던 사지가 빠르게 가라앉으며 한층 더 튼튼한 근육으로 재탄생한다.

       

       “우웨엑!”

       

       토를 해도, 기절해도, 심지어 도망쳐도 훈련은 끝나지 않는다. 신성력으로 멀쩡해지는 육체가 원망스러울 뿐.

       

       ‘사, 살려줘…!’

       

       자신도 저런 훈련을 하게 되는 걸까.

       케네스가 오들오들 떨며 별빛을 끌어냈다. 

       

       타탁, 별빛이 타오르며 불꽃으로 이어진다. 별빛을 먹어 치우고 별의 불꽃이 거칠게 타오른다. 이를 본 케넬름의 눈썹이 거칠게 요동쳤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건 정말이지ㅡ

       

       “아주 훌륭하네요.”

       

       “가, 감사합니다!”

       

       예상치 못한 칭찬에 케니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렇게 매번 감정을 태우다가 빈 껍데기가 될 셈인가요?”

       

       “…어?”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유니콘…!! 처녀의 수호자..!! 🦄!! 저는 가끔 동물 다큐를 즐겨보는데, 볼 때마 자연의 경이로움과 신비함에 놀라고는 합니다…!! 아니!! 거의 영생하는 해파리가 있는데!! 왜 뿔 달린 말이 없는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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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치형 무기 만들기 게
Status: Ongoing Author:
Out of boredom, I downloaded an idle weapon crafting g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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