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4화. 사람과 하늘 ( 1 )
“이, 인간의 도리요? 그걸 아냐고 물어보셔도… 아니 그보다 지금 저한테 너 사람 새끼 맞냐고 점잖게 돌려서 말한 거 아니에요?”
“그렇게 들으셨다면 정확하게 들으신… 흠, 흠! 잠시 말이 헛으로 나왔습니다.”
능청스럽게 잡아떼는 여인의 말에 정신이 살짝 혼미해졌다.
느닷없이 ‘사람도 되지 못한 녀석!’이라고 욕을 먹다니.
‘내가 도대체 왜 욕을, 그것도 지리산까지 와서 욕을 먹고 있는 거지…?’
뭔가 정신없이 끌려온 느낌이라서 더욱 그렇다.
나는 혼미한 정신을 부여잡으며 애써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니까…분명히…’
그래.
시작은 분명 어느 날 느낀 이질감에서 비롯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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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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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다닥. 딸깍. 딸깍. 타닥. 탁. 타다다다. 딸깍.
정적.
그리고 침묵.
이 두 단어 사이에는 무수한 키보드 소리와 마우스 딸깍이는 소리가 차 있지만, 그럼에도 이 사무실은 오로지 침묵만이 지배하고 있었다.
사무실에 앉은 모두가 구부정하게 자세를 취하여 목이 빠져라 앞으로 내밀며 키보드를 두드린다.
모두가 기계처럼 일한다.
그 움직임은 어딘가 반복적인 패턴마저 띠고 있다.
화면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신음하다가, 신경질적으로 마우스를 클릭하고, 다시 키보드를 거세게 두들긴다.
실시간으로 생기를 빨리는 이들이 노래하는 연주가 이럴까.
어쩌면 멈추지 않는 죽음의 톱니바퀴 일지도.
‘……주, 죽을 것… 같다…’
불행하게도 나 역시 그 죽음의 톱니바퀴에 갈려가는 작은 바퀴였다.
일, 일, 일, 그리고 업무.
일과 업무가 서로 짝짓기하여 새끼라도 치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말도 안 되는 양의 업무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
서류를 해결하면 사내 메일이 오고, 메일을 해결하면 전화가 왔고, 전화를 받으면 사람이 온다. 그리고 다시 서류로 돌아가는 무한한 굴레.
환장하고 가공할 순환에서 소리 없이 사람들이 갈려 나간다.
“하, 하하. 아니, 그러니까요? 그걸 분명 오늘 점심까지 준다고 말씀 하셨. 저기, 아니. 반말하지 마시고요. 예?”
부글부글.
온 세상이 바보 멍청이로 가득하다. 도대체 왜 달라는 걸 제시간에 안 주는 거지?
그게 그렇게 어렵나? 그냥 시간만 지키면 되는 것을. 도대체 왜.
“후우.”
목덜미가 뻐근하게 당겨오면서 머리가 욱신거린다.
예전 같았으면 슬슬 스트레스도 풀 겸, 슬쩍 빠져나가서 게임이나 하고 왔을 텐데.
새로 옮긴 프로젝트의 사무실은 그럴 틈이 존재하지 않는다. 잠깐이라도 자리를 비우면 그사이에 일이 복사가 되는 통에 화장실도 아껴서 가야 할 판이니까.
‘머리 아프다…’
일이 힘든 건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상대할 인간이 개차반인 건 참기 어렵다.
벌써 며칠이나 프래깅에 갈려가는 걸까.
‘……’
두근두근.
머리에서 심장이 뛰는 것처럼, 관자놀이의 혈관이 펄떡거리며 맥박 한다. 호흡이 점점 거세지고, 손바닥을 파고들 듯 주먹을 쥐었다.
시야가 점점 흐려지고 붉어진다. 정신이 몽롱하니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부유하는 듯하다.
문득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도대체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지?
나는 그래도. 이세계의 신인데, 이런 하찮고 벌레 같은 것들 틈에서 몸을 비집고 살아가야 하나? 그럴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는 것인데.
모조리, 쓸어버릴까.
흠칫.
“…뭐?”
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
하찮고 벌레 같은 존재들이라니?
손을 내려다보니 선명하게 맺힌 별빛이 은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기겁하여 재빨리 별빛을 흩어지게 했다.
다행히 일에 바빠서 본 사람은 없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쌓인 스트레스 때문인가?
얼굴 가득 흘러내린 식은땀을 닦았다. 손이 살짝 떨려온다.
방금 전, 나도 모르게 별빛을 모으고 있었다. 그것도 당장 휘두를 기세로.
무의식 중이라고 해야 할까. 그대로 손을 휘둘렀다면 분명 큰 사고로 이어졌겠지.
‘이건, 문제가 좀 심각한데.’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생명을 벌레에 비유하며 경시했다는 것이 가장 큰 충격이었다.
별빛을 품고 본신의 힘을 4할이나 흡수한 지금의 나는 걸어 다니는 핵폭탄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온갖 무시무시한 일들이 가능했으니까.
지금까지는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끔찍한 일을 벌이지 않는다는 확고한 자신이 있었지만…
방금 무의식적으로 별빛을 모으며 휘두를 준비까지 마쳤다는 것이.
나에게 굉장한 위기감으로 다가왔다.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미쳐서 난동 부리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없어.’
안전핀 빠진 수류탄이 두 발 달려서 걸어 다니고 있는 상황인데, 그게 나였네?
대책이 필요하다.
그러한 생각이 늦은 밤 퇴근길에서도 머릿속을 꽉 채웠다.
‘스트레스의 영향을 받은 것 같으니까 정신과를 가볼까?’
내친김에 바로 다음 날 휴가를 내고 정신과를 방문했다. 정신과에서는 나에게 과도한 업무로 인한 우울증이라며 진정제를 처방했다.
정신과에서 받아온 약을 먹으며 다시금 업무의 굴레에 갈리는 며칠이 흘렀다.
두근두근.
‘씨,이… 하나도, 안 변했… 잖, 아…!’
세상이 벌겋게 물들어간다.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호흡이 턱 끝에 부딪혀 거칠게 폐를 오간다. 눈에 보일 정도로 손이 떨려온다. 커다란 못으로 머리를 있는 힘껏 쪼개는 듯 거센 두통이 머리를 뒤흔들었다.
손에, 별빛이 모이려 한다.
이빨이 부서질 정도에 이르러서야 가까스로 별빛을 통제했다.
‘야, 약을!’
처방받은 진정제 두세 알을 한 번에 삼킨다. 그러고 한참이나 있어야 간신히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 흐읍, 끄읍…”
“박 주임! 박 주임! 괜찮아? 상태 많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오늘은 이만 들어가. 남은 일들은 내일 해도 되니까.”
“…예에. 감사합니다.”
낯선 부장님의 걱정과 함께 이른 시간에 퇴근했다. 이렇게 아파 보이는 데 끝까지 업무를 대신 해준다는 말은 안 하네.
‘단순히 스트레스의 문제가 아닌가…?’
뇌가 삐걱거리는 것 같다. 정신이 몽롱해지는 시간이 길어졌다.
몸이 아프니 정신이 고단하고, 게임에 접속해서 무언가를 살핀다는 건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처음 발작한 이후… 아니지, 새로운 프로젝트에 투입된 이후 정말 가끔 들어간 것밖에 없다.
‘우선 이 발작부터 어떻게 해결해야 해.’
스트레스 따위는 원인이 아니다.
그보다 근본적인 것, 내면적이며 추상적인 것이 내 안에서 어긋나는 것이 느껴지고 있다.
아귀가 맞지 않는 톱니바퀴들이 서로 돌아가려 애쓰면서 마모되는 느낌.
‘케넬름에게 물어봐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 관뒀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피곤해 보인다며 한창 걱정시켰는데, 이것까지 얘기하며 더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까…
시간도 이르기에 집에 들어가기 아까워 정처 없이 주변을 걷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니 조금 낯익은 거리였다.
“여기는…”
기억난다.
언제였을까. 여기를 지나가다가 갑자기 어떤 여자가 맨발로 뛰쳐나왔던 적이 있었지.
‘그때 자기 입으로 무당이라고 했나? 아니야 도사라고 했었지. 전우치의 후손이라고.’
그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나를 상제님이라고 부르면서 제법 용한 모습을 보여줬다.
심지어 그때의 나는 아직 신으로서의 자각도 없던 상태였는데.
번쩍.
“아. 그래!”
그 여자 도사에게 물어보자.
그때의 나를 알아봤을 정도의 도사라면 분명 지금 내 상황에 대해서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띵동.
“계세요? 여기 아무도 없어요?”
열심히 벨을 눌렀지만 인기척이 없다. 내가 몇십분이나 그러고 있자 맞은편 가게의 사장님이 외쳤다.
“거기 있던 아가씨는 이제 없어. 사당 정리한 지 제법 됐거든.”
“이런…그럼 혹시 어디로 갔는지 아세요?”
“그걸 내가 어찌 아나? 그냥 가면 가는가보다 하는 거지.”
그러고선 뒤돌던 사장님이 턱을 매만졌다.
“가만. 그러고 보면 고향으로 간다고 했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뭔 수행을 하러 간다고 했거든.”
고향, 수행.
짧은 단어에서 키워드를 얻었다.
그 여자 도사는 분명 지리산에서 수행을 하다가 내려왔다고 했었다. 아마 다시 지리산으로 향한 것이리라.
‘지리산이라. 차 타고 여기서 얼마나 걸리지?’
네비를 찍으니 얼추 두 시간 나온다. 이 정도면 운전해서 가도 된다.
부우웅.
차를 달려 지리산에 도착했다. 근처에 차를 주차하고 일단 성큼성큼 등산로를 따라 산을 올랐다.
이 넓은 산에서 도사 한 명 찾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그러니 저쪽에서 나를 찾아오도록 만들 것이다.
스아아아ㅡ
보이지 않게 가려둔 한쪽 손으로 계속해서 옅은 별빛을 둘러 바깥으로 기운을 흘렸다. 신이라는 자각이 없을 때의 나도 알아본 도사였으니, 이렇게 하면 금방 알아보고 찾아올ㅡ
부스럭!
“…사, 상제님? 아니, 아니지. 처, 천존(天尊)?”
양반은 못 되는 것인지.
수풀을 헤집고 언젠가 봤던 익숙한 여인이 나타났다.
“저 알아보시겠어요?”
“아, 아니. 이리 갑자기도 찾아오시면. 잠시, 일단 그 영기(靈氣)부터 어떻게 좀 거두어 주시겠습니까?”
도사의 말을 따라 손에서 별빛을 거두고 도사의 뒤를 따라갔다.
“도대체 어쩐 일로 오신 것인지 모르겠으나, 소녀를 만나러 오신 것이겠지요? 그리도 짙은 영기를 흘리며 소녀를 부르시다니. 일단 소녀가 머무는 것으로 모시겠습니다.”
인제 보니 여자 도사는 한복을 현대식으로 재해석한 개량 한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런 불편한 옷을 입고 험한 숲을 성큼성큼 잘도 걸어갔다.
얼마나 산을 올랐을까.
제법 좋아진 체력으로도 슬슬 한계에 다다르는 것이 느껴질 때가 되서야 작은 초가집 하나가 나타났다.
“누추한 곳이지만 일단 들어가서 잠시 쉬고 계시면, 차라도 한 잔 내오겠습니다.”
“아뇨. 안 그러셔도 돼요.”
그럴 시간이 없다. 일분일초가 아까운 상황.
내 표정을 본 도사가 무언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곧장 자리에 앉았다.
“제가 이렇게 다시 도사님을 찾은 이유는ㅡ”
“아니, 잠시… 천존이시여. 이건 도대체.”
도사가 말을 잇지 못하며 내 얼굴과 몸 곳곳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무언가 보이는 듯한 동작에 절로 몸이 굳었다.
“……”
꿀꺽.
한참이나 얼굴과 몸 여기저기를 살핀 도사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 천존이시여. 말씀드리기 황송하지만, 그… 혹시 지금 인간의 도리를 알고 계십니까?”
“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