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화. 사람과 하늘 ( 3 )
낯선 천장이다.
한참이나 눈을 끔뻑거리며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헤아리려 노력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난 분명 지리산에 있었는데, 당장 보이는 풍경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쩍쩍 금이 간 천장이라니.
“루드! 아직도 자니?”
문밖에서 카랑카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몸이 절로 움직이며 대답했다.
“일어났어요. 금방 가요.”
조금 굵은 남성의 목소리. 2차 성징이 끝난 젊은 20대 남성의 특징이 도드라진다.
‘아니. 난 이런 말을 하려고 한 적이 없는데.’
당황한 심정과는 반대로 몸이 멋대로 움직이며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밥 먹고 얼른 나가렴. 너네 아빠는 한참 전에 나가셨어.”
“알겠어요.”
움직이는 것, 말하는 것.
모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루드라는 소년의 시야와 감각을 함께 느끼는 것뿐. 생생한 5D 영화를 보는 듯하다.
‘…설마 그 도사가 나한테 건 주술이 이건가?’
이래서야 다른 사람의 몸에 빙의한 잡귀 꼴 아닌가.
나름대로 루드라는 몸의 주인에게 말도 걸어보고, 몸을 움직이려 노력해봤지만 모두 통하지 않았다. 심지어 별빛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나의 역할은 오직 방관자이다.
‘도대체 이게 뭐 하자는 거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이 통하지 않자 그저 루드라는 소년의 일과를 바라보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조금 신기하기는 하네.’
루드라는 소년의 일과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제법 재미있었다. 먹는 것과 입는 것, 행동하는 것, 심지어 깡촌 시골의 모습마저도 굉장히 신기했으니까.
딱 삼일까지는 그랬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거지.’
루드는, 시골에 널린 평범한 청년이다.
처음에는 이 아이가 검성이나 미래의 영웅이 될 씨앗인가 싶었지만 특출한 무재도 보이지 않았다.
매일매일이 평범하고 무난하다.
그저 청년의 눈으로 보는 세상을 훔쳐보는 나날이 이어진다.
그런 일상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뭐여? 괭이 가격이 왜 이려? 이거 금으로 만든겨?”
“어휴. 요즘 수도에서 철이란 철은 죄다 긁어가서 금보다 비싸요.”
“에잉. 어쩔 수 없지. 하나만 줘유.”
달에 한 번 마을에 들리는 상인들을 통해 들리는 소문.
수도에서 철과 식량을 닥치는 대로 사들이면서 가격이 폭증했다더라. 어디 제국의 국경에서 큰 싸움이 있었다더라. 기사들이 떼거리로 이동하는 모습을 봤다더라.
‘전쟁이라도 일어났나?’
루드의 나라가 이웃 나라와 전쟁이라도 하는 중인가보다 생각했다.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변이 일어났다.
척 척 척.
‘저건 뭐지? 기사들?’
시골의 흙길을 따라 은빛 갑옷이 번쩍거리는 기사 두셋이 먼지를 뚫고 다가온다. 허리춤에 번쩍이는 황금빛 검이 어딘가 낯익었다.
“뭐, 뭐여? 기사님들? 이런 곳까지는 어연 일로?”
“옴마야! 세금, 세금 안 낸 거 아니여?! 어여 촌장님 좀 불러와라!”
난데없는 기사들의 등장에 시골은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저 멀리서 등이 굽은 촌장이 땅을 구르듯 하며 달려와 기사들 앞에 넙죽 엎드렸다.
“아이고, 아이고! 나으리들! 느, 늙은이는 이 마을의 촌장 겔디라고 하옵니다.”
“촌장. 이 마을에 젊은 사내와 소년이 얼마나 있지?”
기사가 구경하려 모인 사람들을 훑었다. 그 눈이 어쩐지 불길하게 느껴졌다.
촤락.
다른 기사가 품에서 긴 양피지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위대하고 신성한, 또 지엄하신 하나 된 분으로부터 통치권과 마땅한 지배를 인정받은 신성 로마니안 제국의 태양! 카이사르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명하겠다!”
카이사르 황제! 신성 로마니안 제국!
게임에서 몇 번이고 들었던 이름이다. 설마 여기는 내가 신으로 있는 그 세계인가?
나는 그제야 기사들의 허리춤에 찬 황금빛 검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내가 만든 검이잖아?’
영롱한 황금빛을 발하는 것을 보니 아마 제일 안 좋은 ‘조악한 구리’로 만든 검일 것이다.
내가 검을 보며 알 수 없는 감회에 빠져있거나 말거나, 기사들은 양피지를 보며 무어라 크게 외쳤고 사람들은 황제의 명이라는 말에 재빨리 엎드렸다.
‘제국뽕 뒤지게 채우는 연설이네.’
콧수염 달린 그림쟁이 엉덩이 좀 빨아본 녀석인가?
주로 제국이 얼마나 위대한지, 또 황제란 사람은 신에게서 직접 인정받은 정당하고 위대한 통치자라는 내용의 연설이었다.
나야 현대인이고 제국 사람도 아니니까 그냥 그렇구나 했지만. 피가 끓는 청년들은 기사의 말에 홀린 것처럼 눈을 빛냈다.
“ㅡ하여 작금의 세상은 사악하고 끔찍한 마왕, 발가르 칸 가르데나의 악행으로 심히 어지러우니! 황제께서는 이를 다스리기 위해 용맹하고 정의로우며, 물러서지 않을 전사들을 구하고 있으시다!”
‘어?’
멍하니 한 귀로 흘려듣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
지금 뭐라고?
마왕 발가르? 걔가 여기서 왜 나와?
“황제 폐하와 하나 된 분께서 용맹한 그대들을 기다리고 계신다! 뜻이 있는 자는 앞으로 나와 이 종이에 이름을 적도록!”
“나! 나부터 할거야!”
“저리 비켜! 내가 먼저야!”
기사의 말에 감화된 젊은이들이 앞다투어 몰려들며 기사의 앞에 줄을 섰다. 그 광경을 보며 밀려오는 혼란스러움을 다스릴 수 없었다.
‘발가르? 발가르가 도대체 왜 지상에 왔지? 그렇게나 시간이 많이 흘렀다고? 아니, 애초에 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혼자 지상에 온 거야?’
두근두근.
내 심장 소리가 아니다. 이건 루드의 심장 소리다. 루드도 기사의 말에 홀려 끓어오르는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름이 뭐지? 글을 읽고 쓸 수 있나?”
“루, 루드입니다! 제 이름을 쓸 수 있습니다!”
말릴 틈도 없이 제 이름을 적어 버린 루드.
그 모습을 보며 밀려오는 싸함을 느껴야 했다.
‘…이거 좆되는 것 같은데.’
제국은 엄청 거대한 나라다. 군사력, 경제력, 문화, 예술, 정치 등등. 대륙의 질서를 주도하는 나라가 바로 제국이란 말이다.
그런 제국이 이런 깡촌까지 와서, 그것도 귀한 인력인 기사가 직접 와서 젊은 사람들을 징집한다고?
‘전선이 생각보다 많이 치열한 모양인데.’
당연하게도 루드의 부모님은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늦은 밤 여기저기서 통곡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루드의 부모님만 억장이 무너진 건 아닐 것이다.
“이 못난 놈… 제발 살아만 와라. 살아만 와…!”
“흑, 으흑! 루드! 아아! 하나 된 분이시여! 제발 저희 루드를 살려주세요!”
다음 날,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이별식이 이어졌다. 여기저기서 어머니의 통곡과 혼절이 이어지고, 아버지들은 눈시울을 붉히며 아들의 무운을 기도했다.
갑작스럽지만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어딘가 훈련소 입대할 때의 모습 같다고 느꼈다. 심각성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이쪽이 심하지만.
‘…아. 도사님은 내 이런 부분을 지적한 건가?’
인간이 인간답지 못하여, 인간의 도리를 잃어가는 것.
그것을 경계하라 말한 거였나.
내가 본신일 때부터 가지고 있던 지상의 생명에 대한 애정과 사랑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백… 그것의 수준이 높아지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는 걸까.’
“이제 집합!! 어제 이름을 적은 21명은 이 깃발 아래로 모인다!!”
“어머니, 아버지… 저 이제 갈게요.”
“루드! 루드!! 아, 아아!!”
“…꼭 무사히 오거라.”
루드를 포함하여 21명의 청년들은 기사를 따라 며칠이고 길을 걸었다. 간혹 노숙도 하였고, 도시를 만나면 묵힌 때를 씻고 배를 채우며 며칠이나 걸었다.
강행군의 피로에 찌든 청년들이 해롱거릴 때, 나는 도리어 정신이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점점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워지고 옷도 안 좋아지고 있잖아. 상황이 엄청 안 좋은가?’
의문투성이다.
“전선 소식 들었어? 미친 악마 새끼들이 떼거리로 몰려와서 또 요새를 내줬다는군.”
“젠장. 악마, 그 갈아버릴 벌레 새끼들!”
“이게 전부 그 마왕 때문이야!!”
들려오는 이야기를 하나같이 암울하고 울적하다. 청년들도 어느 정도 주변의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행동과 표정에 긴장이 묻어났다.
‘도대체 왜?’
발가르는 어째서 기다리라는 내 말을 무시하고 지상으로 나온 것인지, 내가 걸어둔 제약을 어찌했길래 지상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케넬름과 케니스, 프리가 등은 무얼 하고 있는 건지.
알아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모두 일어나라! 거의 다 왔다!”
기사가 어느 한 요새를 손으로 가리켰다.
험난한 전쟁의 상처를 증명하듯, 성벽의 곳곳이 무너지고 검은 피가 한쪽 벽을 까맣게 칠한 요새였다.
“으, 으으윽…”
“크아아악! 아아악! 사제! 사제!!”
요새 내부는 더욱 아수라장이다.
격렬한 전투가 있었는지 곳곳에 붕대를 감은 이들이 누워서 시름 했고, 만신전의 표식을 단 사제들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신성력을 퍼부으며 부상자를 살폈다.
“…저게 도대,체.”
“오, 하나 된 분 맙소사…”
그제야 제국뽕에서 벗어나 차가운 현실을 마주한 청년들의 얼굴이 파랗게 죽었다. 루드 또한 마찬가지. 숨은 가빠지고 손이 떨리고 있다.
후회하는 걸까?
너무 늦었다.
“어딜 가냐! 너희들은 자랑스러운 제국의 선봉에 설 병사들이다! 도망은 불충! 즉시 처형이다!”
서걱!
“흐이익!”
기사의 서릿발 같은 외침과 함께 굵은 나무가 썩둑 잘렸다. 이제는 얼굴이 하얗게 변한 청년들은 감히 도망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하나 된 분이시여. 영원한 빛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어두운 장막이 나를 덮치는 순간에도 길을 잃지 않도록 하시고ㅡ”
입술을 파들파들 떠는 루드가 미친 듯이 기도문을 외웠다.
나를 향해서.
‘…’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후 루드와 청년들은 갑옷과 투구, 창 한 자루, 약간의 식량을 배급받았다.
“이게 도대체…”
“흑, 흐흑… 집에 갈래… 엄마가 보고 싶어…”
루드는 같이 온 청년들과 좁은 천막을 배정받았다. 천막에서 한참이나 우는 소리가 들리다가, 어느 순간 모두가 깊은 잠에 빠졌다. 그간 피로가 쌓인 탓이리라.
‘나,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는 나는 낮에 본 풍경이 계속해서 눈앞에 아른거렸다.
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 다친 사람이 있다. 신음하며 고통에 가득 찬 사람이 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삐이이이익!! 삐이이이익!!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요새의 정적을 꿰뚫었다.
“씨발! 일어나! 일어나라고!!”
“무기 챙겨! 뭐? 없어? 그럼 가서 찾아와!!”
“뛰어 굼벵이 새끼들아! 걷는 거 보이면 내 손에 죽는다!!”
어디선가 험상궂은 이들이 튀어나와 루드와 청년들을 마구 발로 차며 달렸다. 영문도 모르고 달린 끝에 도착한 곳은 높은 성벽.
‘…오, 미친…’
늦은 밤.
휘영청 걸린 달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다.
하얀 달빛으로 보이는 것은 까만 대지를 가득 채운 붉은 안광들.
악마.
악마의 무리다.
“궁병들!! 활 들어!!”
“어리바리 타지 말고 똑바로 행동해라!! 신호하면 귀를 막고!! 절대로 저 녀석들과 눈을 마주치지 마라!!”
기사들이 병사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우렁차게 외쳤다.
“후으으… 하나 된 분이시여, 거 거룩한 빛, 으로 나를 보호하시고ㅡ”
루드의 공포가 느껴진다.
후회와 공포, 절망이 가득하다.
달빛이 구름에 가려 대지가 어둠에 덮이고.
“ㅡㅡㅡㅡㅡㅡ!!!!”
“쏴라!!”
쐐애애액!!
찢어지게 높은 소리와 함께 화살이 날아가며 외친다.
이것이 전쟁이고. 네가 만든 존재가 일으킨 것이라고.
나의 머리속을 잔뜩 헤집었다.
루드의 눈을 빌려 세상을 보고 있을 것인데, 어째서인지 눈이 점점 감겨온다.
의식이 흐려진다. 몽롱한 정신이 기묘한 경계를 오가며 춤을 췄다.
그리고 눈을 떴다.
‘…씨발. 이번엔 또 뭐야.’
나는 또 다른 낯선 천장을 보며 눈을 떴다.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항상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글쟁이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