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화. 사람과 하늘 ( 5 )
‘…허…’
정신이, 시야가 어지럽다.
이들이 나의 호의를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에.
또 방만하게도 신의 호의를 기대하며 아무런 대비조차 하지 않고 술이나 마시고 있다는 사실에.
호흡이 가빠져 오는 것 같다.
‘내가, 너무 많이 개입한 걸까…’
물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고, 큰 위기마다 내가 나서서 해결해준 것이 독이 된걸까.
도대체 어디서부터 이렇게 된 것인지.
‘신이 실존하는 세상에서 신에게 기도하는 것이… 잘못된 건 아니야.’
인간은 벼랑에 몰리면 매달린 상대를 찾는다. 그 대상이 실존하는 신이 됐을 뿐이다. 이를 나무랄 생각은 없다.
허나.
그저 신의 호의에 기대어 이토록 방만함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진정 옳은 것일까? 이것이 진정 이들을 위한 일인가?
‘난. 나는…’
큰 위기에 순간에 어김없이 신의 벼락이 떨어지며 악을 멸했다. 도저히 저항할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에 신의 기적이 임하며 승리로 이끌었다.
나는 그것이, 당연한 나의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니었나…’
이건, 아니다.
내가 기대했던 건 이런 것이 아니었다.
신께서도 이번에 해결해 주실 거라고 믿으며, 대낮부터 술이나 마시는. 이런 것을 원한 게 아니었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했나.
다시금 밀려오는 현기증을 느꼈다.
한 차례 느꼈던 멀미와 어지러움이 내 정신을 휩쓸었다.
가물가물 시야가 흐려진다.
‘아. 젠장…’
누군가가 나에게 답해줬으면.
도대체 내가 어떻게 했어야 옳은 길이었냐고.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해야 이 뒤틀릴 대로 뒤틀린 것들을 바로잡을 수 있냐고.
‘……신, 이란 뭐지.’
나는 그렇게 다시 낯선 천장을 보며 일어났다.
수십, 수백 번을.
그리 반복했다.
계속해서 전쟁에 관련된 이들의 몸에서 눈을 떴다.
누군가는 전쟁터에 아들이 끌려갔고, 또 누구는 전쟁터에 끌려와서 악마를 마주했다.
어느 집안은 자식들이 전쟁통에 실종되어서 행방을 알 수 없었고,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는 극심한 정신 이상을 호소하다가 자살했다.
나는 그 모든 이들의 고통을, 괴로움과 눈물을, 아픔을 겪어야 했다.
전쟁으로 비롯된 무수한 절망과 슬픔이 내 마음을 헤집고 지나갔다.
자식을 잃은 부모는 생으로 창자를 끄집어 토막 내는 통곡을 흘린다. 병사가 죽기 전의 단말마는 가늘고 흐리게 공기 빠지는 날숨으로 사라진다.
아프다. 정신이 부서질 것 같다.
세상이 빨갛게 물들었다가, 어둠에 덮이기를 반복했다.
하염없이 고뇌했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했고.
어찌해야 하는 것이냐고.
‘내가 느낀 그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이들의 고통과 눈물, 아픔, 슬픔. 그 모든 것은 나의 선택으로 일어난 일이다.’
수십, 수백 번을 느낀 끝에 깨달았다.
나의 선택은 거대한 파도라는 것을.
너울치는 파도의 끝에서 부서지는 거품 속에는 수백만의 생명이 나고 사라진다.
‘… 아.’
또 낯선 천장을 보며 눈을 떴다.
이번이 몇 번째일까? 헤아리기를 포기했다.
이번에도 나의 선택으로 고통받고 시름 하는 이의 모습을 보게 되겠지.
괴로웠다.
매 순간을 후회한다.
나의 경솔함과 가벼움을.
그 모든 순간의 선택을.
그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의 통곡과 비명.
그렇기에, 나는 더 이상 이들의 고통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나로 인해 피어난 슬픔, 절망, 고통, 아픔.
모두 내가 짊어져야 하는 거대한 십자가다. 나로 말미암아 피어났기에 오로지 나만이 품을 수 있는, 내가 품어야 하는 나만의 고통.
‘나의 후회는, 오직 나의 것이다.’
나는 아직도 후회하고 있다.
그렇기에 견디기로 했다.
‘나만이 견딜 수 있는, 내가 견뎌야 하는 아픔이다. 모두 들고 가겠다.’
나만의 후회, 나만이 견딜 수 있는 고통.
나는 묵묵히 앞을 보며 모든 순간을 뇌리에 새겼다.
전쟁 피난 통에 딸이 사라진 미망인 세라를 기억한다. 혈기에 못 이겨 병사에 지원한 청년 루드를 기억하고, 부모님이 전쟁터에 끌려간 소녀 테레시아를 기억한다. 악마와의 전투에서 팔을 잃은 케포를 기억한다. 먹을 것이 없어 전우의 시체를 파먹으며 버텨야 했던 르코를 기억한다.
기억한다.
기억하고 기억하고 기억한다.
단 하나의 슬픔도, 고통도 잊지 않기 위해.
나는 눈을 부릅뜨고, 모든 고통을 껴안았다.
고통은 매 순간 괴로웠고, 절망은 여전히 힘들었다.
그러나 하염없이 고민했다.
나의 존재에 대하여, 신의 존재에 대하여.
‘발가르 칸 가르데나.’
나의 손짓으로 태어난 마왕.
오로지 죽기 위해 태어난, 근원부터 슬픔으로 점철된 존재.
그로 인해 지상으로 올라와 자신의 울분을 세상에 토하는 가엾은 녀석.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고, 얼마나 많은 슬픔이 산처럼 쌓여야 녀석은 만족할 것인가. 지상에는 너무나 많은 눈물이 흐르고 있다.
‘모두 나의 잘못으로 비롯된 일이구나.’
바로 잡아야 한다.
내가, 직접.
화악!
점점 시야가 환해진다.
이제는 익숙해진 현기증이 덮쳐왔다.
“………아.”
“오셨나이까, 천존이시여.”
나는 더 이상 낯선 천장이 아니라.
눈이 부시도록 맑은 하늘을 보며 눈을 떴다.
돌아왔구나.
* * * * *
성공했다.
도사는 제단에서 일어나 멍하니 사방을 둘러보는 사내의 눈을 보며 안심했다.
몽롱한 눈동자 아래 은은하고 깊게 자리 잡은 현기가 보인다.
아직은 새싹에 불과하지만, 주인된 이가 꾸준히 보살핀다면 머지않아 웅장한 고목으로 자라날 것이다.
‘백이 육의 수준에 다다랐어. 큰 깨달음이 있으셨구나.’
“…도사님.”
“말씀하시지요.”
“제가 본 것들은… 전부 현실인가요?”
그리 묻는 사내의 얼굴은 파리하게 질렸고, 입술이 잘게 떨렸다. 무언가 끔찍하고 무서운 것을 본 모양.
“아닙니다. 제가 알기로 이 술법은 만화경처럼 미래에 대한 경우를 비쳐서 보여주는 종류일 뿐, 현실이 아닙니다. 허나 보신 것들이 무수한 갈래의 길 중 하나임은 부정할 수 없군요.”
도사는 그동안 고서에 대해 조금 더 분석했는지 제법 상세하게 대답했다.
“그런가요… 다, 다행이네요.”
일종의 예지몽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하지만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무수한 갈래의 길 중 하나.
한참이나 몸을 덜덜 떨던 사내가 호흡을 고르려 노력하더니 이윽고 완전히 진정했다.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소녀가 한 일이 무어라고ㅡ”
겸양을 떨려던 도사는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상대는 천존이다. 아직 불완전하여 비틀거리는 모양이시지만, 그럼에도 천존.
그런 존재에게 은혜를 씌울 기회는 흔치 않다.
“흠, 흠. 그럼 혹시 이 종이에다가 천존님의 영력을 좀 불어 넣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많이도 필요 없고 아주 조금이면 족할 것입니다.”
청년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제 막 제 존재의 무거움과 너울치는 운명에 대해 갈피를 잡은 셈인데, 이런 부탁이라니?
“후우. 도사님께 도움을 받은 것도 있으니까 어쩔 수 없죠. 대신 맹세해주세요. 나쁜 일, 특히 누군가를 해치는 일에는 쓰지 않겠다고.”
“천지신명과 조상님의 명예를 걸고 약조하지요.”
그리 확신을 얻고서야 청년은 제 힘을 아주 약간 끌어내 종이에 불어넣었다.
도사가 희희낙락하며 종이를 조심스럽게 제 품에 챙겼다. 그동안 청년은 무언가 안절부절못하며 연신 엉덩이를 들썩였다.
“천존이시여, 무언가 하셔야 하는 일이 있으신 듯 합니다.”
“그, 흠. 할 일이 있기는 하죠. 좀 급하기도 해서.”
“하면 그리 하십시오. 뒷정리는 소녀가 해둘 터이니.”
“! 그래도 될까요? 정말 고마워요! 도사님, 정말 신세 많이 졌습니다!”
청년이 쏜살같이 일어나 산 밑으로 내달렸다. 울창한 산길을 평생 산에서 나고 자란 이처럼 뛰어다니는 모습이라니.
금세 작아지는 청년의 뒷모습을 보며 도사가 중얼거렸다.
“이 신물로 무얼 만들어야 좋을꼬?”
행복한 고민이었다.
* * * * *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내가 보았단 그 수많은 아픔과 통곡, 절망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들이라서. 너무 늦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래도 안심하기는 일러.’
ㅡ발가르가 곧 지상으로 올라온다.
모든 환상의 대전제.
수백 번의 환상에서도 깨지지 않았던 절대적인 명제다.
머지않아 발가르가 지상으로 올라온다.
수백 번의 환상을 통해 본 풍경에서 절대 변하지 않았던 발가르의 반역을 막아야 했다.
‘아직 늦지 않았어.’
발가르 칸 가르데나.
죽기 위해 태어난 마왕.
발가르가 지상으로 올라온 이유를 알아내야 했다.
우선 게임에 접속해서 상황을 살피기 위해 다급히 전파가 터지는 곳을 찾아 산을 내려갔다.
‘설마…’
와중 떠오른 조금 섬찟한 가정.
만약 발가르가 자신의 탄생 이유에 대해 알아냈다면? 그리하여 내 말을 어기고 지상에 올라온 것이라면?
‘하지만 내가 발가르에게 걸어둔 제약은ㅡ’
ㅡ발가르는 지상의 존재를 죽일 수 없다.
별빛으로 묶인 언약이자 어길 수 없는 맹세였다. 이 맹세가 유효한 이상 발가르는 직접 지상의 존재를 죽일 수 없을…
“아 씨발.”
지금 보니까 이거 우회할 수 있는 허점이 너무 많잖아?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4일의 휴재… 솔직히 그 동안 글만 쓴 것은 아닙니다. 게임도 하고, 산책도 하고, 쇼핑이나 노래방도 다녀왔습니다. 영화랑 애니도 봤네요. 거기에 4일 휴재 = 4연참으로 갚자, 라는 오기가 생긴 덕분에 어찌어찌 4연참이 됐습니다. 지금 와서 보니까 어케했누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