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화. 우리 친해졌어요 ( 1 )
탄탈로스에 들어간 악마와 죄인이 모든 죄를 털어내면, 그 영혼을 정화할 수 있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세상만사 영원한 건 없다는 걸 증명하는 것처럼, 어느 정도 오랫동안 탄탈로스에 갇혀 있던 녀석들은 지은 죄를 모두 털어내고 ‘영혼의 정화’가 가능한 상태로 변했으니까.
‘일단 한번 정화가 가능한 영혼이 되면 더 이상 비명도 안 나왔지.’
그 정도까지 뽑아먹었다면 단물까지 빨아먹은 건오징어나 다름없기에 나도 미련 없이 녀석들의 영혼을 정화해서 보내줬다.
‘딱 두 녀석, 탄탈로스의 개국공신들은 절대 보내줄 수 없지만.’
따지고 보면 오늘의 탄탈로스가 있도록 큰 영향을 미친 녀석들 아니겠는가? 하여 대악마 한 놈과 노예상인 한 놈은 특별히 아무런 고문도 하지 않고 그냥 매달아 두기만 한 상황이다.
발가락부터 귀까지 용암에 살짝씩 담갔다 빼는 정도는 탄탈로스에서 고문이라고 치지도 않으니까 아무튼 세이프다.
‘아. 그러면 이제 대악마는 보내줘야 하려나?’
어찌어찌 열심히 머리를 굴려서 필사적으로 뱉은 변명이 나름대로 먹혔음인지, 화면 너머로 보이는 발가르의 표정은 굉장히 누그러졌다. 좋은 신호다.
《발가르여. 이제 때가 되었나니. 네가 모든 악마는 순차적으로 죄를 털어내고 영혼을 정화할 것인즉. 너의 공이 참으로 크구나.》
– “…”
발가르가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몸을 떨었다. 그렇게나 기쁜 걸까?
방금까지 악에 받쳐 소리 지르고 분노했던 녀석이라고는 믿을 수 없다.
괜히 내가 다 흐뭇하다.
발가르에게는 약간의 거짓말과 약간의 진실을 섞어서 말하기는 했지만… 일단 좋게 끝났으니 다행인 거지. 만약 솔직하게 진실만을 말했다면 녀석은 눈이 돌아가서 단번에 지상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이제 너에게 탄탈로스를 드나들 수 있는 표식을 내리겠노라. 너는 이 표식을 지니고, 곧장 악마들을 통솔하여 그들의 영혼을 정화할 수 있도록 하라. 내가 너에게 직접 탄탈로스를 소개해주도록 하겠노라.》
너에게 나의 개쩌는 탄탈로스를 보여주마. 영광으로 알도록.
– “…! 아, 아버지시여! 잠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 무슨 일이더냐.》
갑자기 발가르가 나를 불러 세웠다. 어쩐지 얼굴이 조금 창백해 보이는데,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는 걸까.
– “그, 으, 아, 아직 때가 너무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
때가 이르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아. 설마?’
곰곰이 생각하다가 녀석이 이러는 이유를 알아냈다.
‘아직 악마들을 전부 지배하지 못 한 거구나?’
발가르와 휘하의 악마들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심연은 정말 무지막지하게 넓은 공간이다.
짧은 시간 동안 심연의 악마들을 모두 지배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겠지.
저쪽 구석에 악마 수십만 마리가 모여있는 것을 확인했지만, 그중 대부분은 발가르가 인공적으로 뽑아낸 악마들이었다. 녀석들은 발가르가 여차하면 지상을 공격하기 위해 만들어낸 인공 악마였기에 정화 대상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발가르의 까만 동공이 뒤룩뒤룩 굴러간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이 영락없이 상사 눈치를 보는 사회인의 모습이다.
‘좀 귀엽네.’
나도 사회인이기에 발가르의 심정을 잘 알고 있다.
촉박한 마감일과 위에서 재촉하는 상사, 태만하게 대응하는 협력 업체. 아주 죽을 맛이지.
《모든 일을 시작함에 있어 적합한 때가 있는 법. 그렇다면 너는 언제 행하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하느냐?》
– “그…으음…”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마침내 출사표를 던진 발가르.
– “나, 나흘? 아니. 닷새! 닷새의 시간을 주시면 족합니다!”
닷새라.
그 안에 심연에 남은 악마들을 모두 지배하겠다는 포부가 당차다.
《좋다 발가르. 너에게 닷새의 시간을 주겠노니. 그동안 모든 일을 마무리하거라. 나는 닷새 뒤에 오겠노라.》
스윽.
그리 말함과 동시에 아주 약간의 별빛을 이용해 심연에 거대한 모래시계를 만들었다. 5일 치 분량의 모래가 천천히 아래로 쏟아진다.
《닷새다 발가르.》
그리 말하며 일단 화면을 돌려 심연에서 빠져나갔다.
“휴…”
그제야 몸에 긴장이 풀리며 쭉 힘이 빠졌다. 인제야 조금 실감이 난다.
어떻게든 발가르를 말로 구슬리는 데 성공해서 그 빌어먹을 전쟁을 막아낸 것이다.
‘수백, 수천을 겪어왔던 아픔과 상실의 고통, 괴로움, 절망. 마침내 전부 사라졌구나.’
해냈다.
잠시 성공의 여운을 만끽했다. 조금, 아주 조금은 어깨가 가벼워진 것 같다.
‘…이제 앞으로의 방침을 정해야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방만하게도 대낮부터 술을 마시며 그저 막연히 내가 도와줄 것이라 믿은 이들의 얼굴과 눈빛을. 위기의식이 결여되어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모르는 이들을.
‘이건 굉장히 심각한 문제야. 심지어 술집의 그 사람들만 그런 게 아니었어. 몇백 번의 환상 속에서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위기의 순간에 신을 찾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인간의 본능이다.
하물며 신이 실존하는 세계에서는 오죽할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무작정 신의 도움만을 기다리는 것을 옳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내가 무작정 이들을 방치하는 것 또한 옳지 못한 일이야.’
어떤 철학자가 이르기를.
신에게 악을 바로잡을 능력도, 의지도 없다면 우리는 그를 신이라고 부를 이유가 없다고 하였으니.
나는 능력과 의지, 둘 다 가지고 있으니 마땅히 옳은 곳에 써야 한다.
‘그런데 내가 나서야 하는 기준이 참 모호하단 말이지…’
어차피 당분간은 잠잠할 예정이다.
악마들은 발가르가 꽉 휘어잡고 있으니까 문제없을 것이고. 내가 직접 나설 정도의 문제가 생기면 케넬름이 알려주겠지.
“아. 케넬름한테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줘야지.”
발가르가 케넬름의 시선을 예민하게 눈치채는 기질이 있기에, 아마 케넬름은 심연의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을 것이다.
일단 케넬름부터 찾아가도록 하자.
“───지금까지 그렇게 된 거야.”
– “… 정말 엄청난 일들이 있었군요… 거기에 수백 번이 넘도록 무수한 괴로움을 겪으시다니…”
케넬름이 침울한 표정으로 기도하며 중얼거렸다.
막 일어난 직후에는 좀 힘들었지만, 지금은 나름 괜찮은 상태다.
거기에 어쩐지 머리도 굉장히 맑아졌고 생각할 것도 많이 얻었으니, 나에게는 꼭 필요한 기회였던 셈이다.
“나름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어.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한테 정말 필요했던 경험이기도 했고.”
그렇게 말하며 차의 시동을 걸었다.
부릉.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 * * * *
덜덜덜덜.
만마의 제왕, 악마의 지배자, 가장 사악한 정수에서 태어난 자.
태어남과 동시에 지고한 어버이로부터 이름을 받았으며 두 다리로 우뚝 서서 왕의 운명을 내려받았으니.
덜덜덜덜.
오오.
그 이름도 위대한 발가르 칸 가르데나 되시겠다.
‘크, 큰일이다…!’
발가르가 제 머리를 부여잡으며 신음했다.
‘분명, 분명 모든 것이 괜찮았을 터인데!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된 것이냐!’
처음 어버이로부터 모든 설명을 듣고 나서는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모든 것이 어버이의 뜻이 있음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탄생조차도 어버이의 큰 뜻 아래 있는 것이었으니!
다만 심연의 탄생과 악마가 만들어진 것은 지고한 어버이의 실수라는 것이 조금 충격이었지만… 심연이 어디 보통 어둡고 낮은 차원이던가. 어버이께서 오랫동안 이들을 찾지 못한 것도 이해는 갔다.
그리고ㅡ
《어버이께서는 이들의 영혼을 정화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
부정한 기운에 타락한 영혼을 정화해야 한다. 그리하면 악마들은 타락의 고통에서 벗어날 것이다.
…좋다. 얼마나 좋은가.
억겁의 세월을 광증과 타락에 신음하는 것보다 훨씬 좋은 일이다.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탄탈로스를 통해서…! 크으으윽!’
문제는 정화의 핵심이라고 부를 수 있는 탄탈로스를, 자신이 반쯤 부숴버렸다는 것이겠지.
한참이나 현실을 부정하던 발가르가 이내 정신을 부여잡고 냉정하게 상황을 직시했다.
‘…어버이께서는 이미 내 생각을 읽으셨겠지. 그런데도 자비로운 어버이께서 나에게 닷새의 시간을 주셨다.’
위대한 어버이께서는 분명 자신과 심판자의 싸움에서 탄탈로스가 반쯤 무너진 것을 알아차리셨을 것이다.
그럼에도 닷새의 유예 기간을 주셨으니.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 손으로… 다시 탄탈로스를 수습해야 한다.》
자신으로 비롯된 일이니, 직접 수습하라는 어버이의 뜻이다.
닷새… 고작 5일이다.
탄탈로스가 또 어지간히 거대한 곳이었으니 이를 수습하려고 한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것이다.
《우선 이 소식을 다른 녀석들에게 알려야겠군.》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발가르는 한 걸음 대지를 박차 수십만의 악마를 모아둔 곳을 향했다.
타탓.
거대한 늑대 펜리르와 울룩불룩한 근육의 아리오크가 발가르를 발견하고는 곧장 다가왔다.
《마왕이시여.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크워어어어! 대장이 왔다!》
그 뒤로 실실 광소를 흘리며 촉수를 질질 끄는 테니아, 까만 장막을 뒤집어쓴 프리키가 느릿느릿 걸어왔다.
《히, 흐힉. 히히힉. 이, 이제 가? 가는 거야? 우리 가? 지상에지상에지상에지상에?》
《주주주주준비… 다, 다아…해해했어요…》
대악마들의 눈이 번들거린다.
진득한 살기와 복수심이 형체를 갖춰 안개처럼 퍼져가는 착각마저 들었다.
《아니.》
발가르가 단호하게 이들의 기세를 끊어냈다.
《우리는 지상으로 가지 않는다.》
화악!
순간 대악마들의 살기가 크게 일렁이며 발가르를 향했다. 발가르가 눈을 찌푸렸다.
감히 자신에게 살기를?
‘…허나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이들의 사정을 모르는 것이 아니니.
이 무례는 한 번만 봐줄 것이다.
크게 심호흡하며 분노를 다스린 발가르가 잠시 생각했다.
‘지상에 대한 공격을 취소하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살기를 비추는 녀석들이다. 어버이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녀석들이 과연 순순히 협조할 것인가.’
넷의 대악마들은 심연이 탄생하는 순간부터 존재했고, 길고 긴 타락의 고통에 저항하며 어느정도 영혼의 뒤틀림을 견딘 이들이다.
그만큼 기억도, 복수심도 뚜렷할 것인데.
‘…지금 말하는 건 오히려 독이 될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항상 점잖고 차분한 모습만을 보이던 펜리르조차도 지상에 대한 공세를 취소하자 잔뜩 흥분하여 침을 뚝뚝 흘리고 있지 않은가.
‘이들은 아직 진실을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해봤자 도리어 반발심만 커지리라.
일단 가장 급한 것은 닷새 안에 탄탈로스를 수복하는 것이니,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
《…아직 적당한 때가 되지 않았다. 내가 잠시 헤아려보니 지상의 역량은 상상 이상으로 강대하고, 얼마 전 탄탈로스에 대한 공격이 실패하며 적지 않은 수의 악마가 죽지 않았더냐.》
발가르가 차분하게 설득하자 대악마들의 기세가 조금씩 누그러졌다.
《내가 만들어 낸 악마들은 결국 인형이다. 오래 지나지 않아 형체를 잃고 무너질 허수아비인즉. 우리에게는 아직 힘과 시간이 필요하다.》
《크으으으… 어려운 말, 모른다! 댸장!! 그럼 어떻게 할 거냐!!》
아리오크가 가슴 근육을 쿵쿵 두들기며 그리 물었고. 기다렸다는 발가르가 대답했다.
《무릇 나무는 뿌리가 튼튼해야 하는 법. 나의 영역인 심연부터 온전히 손에 넣은 이후에 지상에 대한 공격을 다시 한번 검토하겠다.》
검토라는 것은 해당 사안을 깊이 고민한 이후 가불 여부를 결정하는 것.
결국 발가르는 지상에 올라간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고민해본다고 했지.
《키히, 으히히히힉… 시, 심연을 정복해?! 그러면, 이히힉! 다, 다시 탄탈로스를?! 흐이이이익!! 히히히힉!!》
《마왕이시여,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테니아와 펜리르의 우려는 합당했다. 지난 총공세에도 무너뜨리지 못한 곳이 탄탈로스 아닌가.
하물며 지금은 마왕군의 기세가 크게 꺾인 상황.
발가르가 고개를 저었다.
전제부터 틀렸다.
《나 혼자 탄탈로스로 향하겠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발가르의 선언에 대악마들이 몸을 덜컥 떨었다.
《지난 전투로 너희들의 수준은 잘 알았다. 도리어 나의 족쇄가 되어 답답하기 그지없더구나. 그러니 이번에는 나 홀로 다녀올 것이다.》
이 얼마나 오만한 발언!
《내 이번에는 시건방진 심판자 녀석과 끝을 보고 올 것이다.》
발가르가 그리 말하며 휙 뒤돌았다.
남자는 등으로 말한다고 하던가.
강대하고 오만한, 또 위엄있는 왕의 뒷모습에 대악마들이 저도 모르게 머리를 낮췄다.
《그동안 너희들은 각자 네 방향으로 흩어져서 남은 악마들을 모두 잡아 마왕군으로 만들어라. 나는 심판자와 결판을 내고 올 것이다.》
타탓!
이윽고 발가르는 땅을 박차 신형만을 남기며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오오… 오오오오. 마왕이시여. 만마의 제왕이자 패왕이시여…!》
《크워어어ㅡ!! 대장!! 짱 쎄다!!! 우리 댸장이다!!!》
《키히힉…》
《마마마마왕… 니임…!》
이 얼마나 오만하고 또 광오한 모습인가.
실로 만마의 제왕다운 모습에 대악마들은 한참이나 발가르의 등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 * * * *
두두두두두두ㅡ!!
발가르가 탄탈로스의 주변에 다가가기 무섭게 밤의 기병대가 달려 나왔다.
눈에서 푸른 안광이 줄기줄기 흘러내리는 것이 어째 독기가 가득하다.
《쯧.》
시간은 없는데 피라미만 잔뜩 꼬인다.
발가르가 얼어붙은 탄식의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다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내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
‘탄탈로스는 어버이의 손길이 직접 닿은 권역. 저 기마대 또한 어버이의 권속일 가능성이 크다.’
가뜩이나 탄탈로스를 부숴서 눈치 보이는 마당에 권속마저 해쳐 어버이에게 밉보일 필요는 없다.
《항복이다. 어서 나를 심판자에게 데려가거라.》
“ㅡ…?”
한껏 기세를 올리던 기마대가 황당하다는 듯 푸른 안광을 거세게 떨었다.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대악마들의 원한이 심상치 않았던 이번 화…! 과연 주인공과 발가르는 이들을 어떻게 다스릴지…!! 저도 정말로 기대가 됩니다…!! 언제나 응원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