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화. 우리 친해졌어요 ( 2 )
철그럭. 철그럭.
발가르가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묵직한 쇠사슬 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살벌한 기세를 풀풀 풍기는 밤의 기병대가 잠시도 긴장을 놓치지 않은 채 발가르를 호송했다.
발가르는 자신의 모습이 마치 꽁꽁 묶인 물고기 같다고 생각했다.
‘불쾌하군.’
만마의 제왕이자 지고한 어버이께서 직접 빚은 이 몸을 이토록 대접하는 것이 영 마땅치 않았지만, 꾹 참았다.
지금 아쉬운 건 이쪽이었으니까.
“───…!!”
온몸에 사슬을 칭칭 감은 채로 나아갔을까. 구체 형태의 까만 장막을 통과하자 반쯤 무너진 탄탈로스가 보이기 시작했다.
《끄응.》
예상은 했지만 절로 탄식이 나온다.
천장은 완전히 무너져서 하늘이 보였으며, 바닥의 곳곳은 갈라지고 무너졌다. 벽 곳곳에 새겨진 날카로운 전투의 상흔까지.
‘이 모든 것을 닷새 안에…’
할 수 있을까.
발가르가 머리를 흔들며 나약한 마음을 털어냈다.
‘아니 발가르. 할 수 있냐 없냐의 문제가 아니다! 넌 어버이 앞에서 약조했으니, 반드시 해내야 한다!’
탄탈로스 수복 5일 대작전.
그 웅대한 계획의 서막이자 가장 큰 난관이 발가르를 찾아왔다.
쿵, 쿵, 쿵ㅡ!
《이ㅡ마ㅡ귀ㅡ녀ㅡ석!!》
얼굴 셋 달린 심판자 이시디움이 탄탈로스의 저 끝에서부터 거체를 일으켜 쿵쿵 달려왔다. 여덟 개의 손에는 이미 무기를 들고 있는 만전의 태세다.
《지난번에는 내가 경황이 없어 놓쳤다만!! 오늘은 결코 무사히 보내지 않을 것이다!!》
쐐애애액!!
여덟 개의 팔이 커다란 연꽃의 형상을 그리며 발가르를 향해 떨어진다. 발가르가 그 모습을 보며 눈을 좁히더니, 제 몸을 꽁꽁 감싸고 있는 사슬을 가볍게 부쉈다.
콰앙!
눈 깜짝할 사이에 휘둘러진 얼어붙은 탄식과 여덟 개의 무기 사이에서 커다란 충격파가 퍼져간다.
《멈춰라 심판자! 오늘 너를 만나러 온 것은 전에 못다 한 싸움을 마무리 짓기 위한 것이 아니다.》
《문답 무용! 사악한 마귀와 대화는 하지 않는다!》
카카캉!! 캉!
여섯 개의 눈이 훼까닥 돌아간 이시디움이 발가르를 마구 몰아붙였다. 아무래도 지난번 발가르의 기세에 눌려 저도 모르게 보내준 것에 자존심이 상해있던 모양.
《심판자!! 난 지고한 어버이, 너희들이 하나 된 분이라고 말하는 분의 손에서 태어난 존재다!!》
《허튼 소리 하지 말라!! 너 같은 마귀의 왕을 하나 된 분께서 감히 만드실쏘냐!!》
카가가강!! 쾅, 채앵!!
무자비하도록 쏟아지는 연격에 발가르가 혀를 찼다.
대충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무작정 달려들 줄이야.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군!》
품을 뒤지던 발가르가 작은 열쇠를 꺼내 높이 들어올렸다.
이런 일을 대비하여, 지고한 어버이께서는 자신에게 탄탈로스를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게 해주는 귀물을 미리 챙겨주셨다.
‘역시 어버이의 혜안은 끝이 없구나.’
파앗!
《이것을 보아라 심판자! 이건 지고한 어버이께서 나에게 증표로 주신 것! 이것을 보고도 나의 말을 믿지 못하는가!》
《그, 그것은…!》
발가르의 손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작은 열쇠를 본 이시디움의 눈이 크게 떨렸다.
처음 보는 형태의 열쇠지만, 그 안에 깃든 막강한 기운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파도치듯 밀려오는 하나 된 분의 신성함이 느껴진다.
《그, 그 열쇠… 이, 이 녀석…! 도대체 어디에서! 어디에서 구한 것이냐!》
《말하지 않았나. 나는 지고한 어버이… 그러니까 너희들이 하나 된 분이라고 말하는 분에게서 직접 빚어졌다고. 이건 어버이께서 나에게 증표로 주신 것이다.》
이시디움이 한참이나 열쇠를 바라봤다.
믿을 수 없는 말이다. 허나… 저 열쇠에 깃든 기운과 권능. 모든 것이 발가르의 말이 사실임을 말하고 있었다.
《그 열쇠에는… 탄탈로스를 언제라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하는 권능이 심어져 있구나. 이런 일이 가능하신 것은 하늘 아래 오직 하나, 하나 된 분이로다.》
어찌 이런 일이.
한참이나 고민하던 이시디움이 고개를 저었다. 마귀의 왕이 하는 말을 믿고 싶지는 않았지만, 저 열쇠에 깃든 권능은 분명 하나 된 분의 것.
‘마귀 녀석이 감히 저 물건을 훔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주인을 가리는 영험한 신물이다.
《…》
《…》
《…》
이시디움의 세 얼굴이 한참이나 침묵하다가, 이내 가운데 있는 가장 온화한 얼굴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좋다. 마귀의 왕, 발가르. 그대가 하나 된 분…의 뜻으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겠다… 허나, 어찌하여 하나 된 분께서 가장 부정하고 악한 것으로 그대를 만드셨는지… 이 우매한 머리로는 도저히 깨달을 수가 없구나.》
《그것도 모르는가. 멍청한 심판자 녀석. 머리는 셋이나 달렸으면서 하나만도 못하군.》
발가르의 도발에 이시디움의 관자놀이에 혈관이 불룩 튀어나왔는데, 얼굴이 세 개여서 도드라진 혈관도 세 개였다.
《어버이께서 나를 빚으신 이유는ㅡ》
발가르의 설명을 들은 이시디움이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참으로 이치에 맞는 이유라.
역시 하나 된 분께서 하신 일에 허투루 되는 것은 없는 것이다.
《과연, 과연. 하나 된 분께서는 뒤틀린 마귀들의 영혼을 보듬어 살피실 계획이라고.》
실로 자비로운 마음이시다.
헌데…
《너, 사특한 마귀의 왕이여. 그 계획에 있어 탄탈로스는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더냐?》
가장 중요한 탄탈로스의 기능이 거의 마비된 상황.
탄탈로스의 자랑인 여러 고문 코스는 무너지거나 부서졌고, 용암은 흘러넘쳐 바닥이 보였다. 이래서야 어떻게 악마들의 죄를 털어내겠는가?
《그래서 내가 직접 온 것이다. 닷새. 지고한 어버이께서는 우리에게 닷새의 시간을 주셨으니, 너와 나는 닷새 안에 탄탈로스를 고쳐야 한다.》
발가르는 은근슬쩍 우리라는 말을 강조하며 이시디움까지 책임의 울타리에 넣어버렸다. 실로 교활한 단어 선정이었지만 이시디움은 말려들지 않았다.
《우리가 아니라 너의 문제가 아니더냐? 교활하게 혀를 놀려 한곳에 묶지 말지어다.》
《거기에 가만 생각해보니 화가 나는구나! 심판의 권능을 받은 이 몸은 너보다 훨씬 앞서 창조되었거늘! 어찌하여 너 마귀의 왕이 감히 눈을 똑바로 뜨고 이 몸을 바라보느냐!》
《오, 오오… 태어난 지 하루도 안 된 강아지는 용의 무서움을 모른다고 하더니. 참으로 슬프게도 사실이구나.》
세 개의 머리가 시끄럽게 떠들며 발가르를 바라봤다. 발가르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세 개의 머리가 제 할 말을 하나씩 뱉으니 곱이 되어 소음이 세 배다.
《그만, 그만! 심판자여,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어버이께서는 참으로 자비롭고 온정이 넘치시는 분이라는 것을. 너와 내가 다투어 서로를 상하게 하는 것은, 창조주인 어버이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어버이께서는 뒤틀린 영혼을 가진 악마들마저 품으려는 분이다.
필히 가장 넓고 따뜻한 마음을 지니신 분이니, 자신의 피조물끼리 싸운다고 하시면 누구보다 괴로워하실 것이다.
《네가 나를 마땅치 않는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나도 마찬가지로 네가 마음에 들지 않음이다! 허나, 우리 둘의 사사로운 감정으로 대의를 그르치고, 또 우리의 다툼으로 지고한 어버이의 마음을 해롭게 만드는 것이 정녕 옳은 것이냐!》
발가르의 세 치 혓바닥이 춤을 췄다.
《너 또한 지고한 어버이에게서 빚어졌으니 너는 그 분의 자식이라. 인정하기는 싫지만, 너와 나는 크게 본다면 형제의 관계다! 자식간의 싸움은 부모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는 걸 정녕 모르는 것이냐!
더불어! 어버이께서 크나큰 자비를 베풀어 탄탈로스를 이롭게 쓰고자 하심인데, 너는 탄탈로스의 심판자로서 어버이를 돕겠다는 사명조차 없는 것이냐! 그러고도 네가 정녕 어버이의 손에 탄생한 자이며, 탄탈로스의 심판자라고 말할 수 있느냐!》
기름칠한 듯 움직이는 실로 간사한 혀 놀림이었으니, 과연 만마의 제왕이라.
《그건…》
《…부정할 수 없군!》
《끄응.》
이시디움의 세 개의 머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무언가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좋도다 마귀의 왕이여. 이번만은 너의 놀음에 넘어가겠노라.》
《어째 너의 간악한 혓바닥에 놀아나는 듯하여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이번 것은 어쩔 수가 없구나!!》
《흐흑… 갓 태어난 녀석의 술수에 당한 기분이 드는구나…》
좋아.
가장 큰 난관을 넘음과 동시에 가장 큰 협력자를 얻었으니, 절반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
《좋다 심판자. 짧지만 협력 관계이니, 앞으로 닷새 동안 내 발목을 잡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우습도다. 잠시 굽혔다고 그사이에 머리 꼭대기까지 오르려 하느냐.》
《닷새 뒤에 두고 보자!! 그땐 내가 묵사발을 내 줄 것이다!!》
《흑, 흐흑… 더러운 마귀의 왕이 본색을 드러냈구나…》
우여곡절 끝에.
만마의 제왕과 탄탈로스의 심판자 사이에는 닷새 동안의 짧은 휴전이 이루어졌다.
쿠웅, 쿠웅, 쿠웅!
《멍청한 심판자 녀석! 기둥을 똑바로 세우란 말이다! 눈깔이 여섯 개나 달렸으면서 제대로 보지도 못하는가!》
《작고 옹졸한 마귀의 왕이여. 너의 몸이 참으로 작고 귀여우니, 마치 계집아이의 인형과도 같구나.》
《그리 기둥에 붙어 있으니 마치 나무에 붙은 벌레의 모습 아니냐!! 흐하하하하!》
《너무 작고 귀여워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구나… 흐흐흐흐흑…》
중간중간 사소한 다툼이 있기는 했지만.
약간의 말싸움이 조금 격렬한 다툼으로 이어지면서 탄탈로스가 도로 무너지는 실로 앙증맞고 사소한 사건이 있기는 했지만.
어찌 됐든 반파된 탄탈로스는, 단 두 존재에 의해서 빠른 속도로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