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2화. 우리 친해졌어요 ( 3 )
타다다다닥! 탁, 타다닥!
“대리님. 보내주신 자료 기입해서 메일로 보냈어요. 승인 좀 해주세요.”
타다다닥, 딸깍.
“부장님, 말씀하신 협력 업체에 전화해서 말해뒀던 샘플 오늘까지 받기로 했어요. 이따가 한번 확인 좀 해주세요.”
타다다다! 탁, 타다닥!
“창환 씨. 보낸 문서 봤는데 틀린 부분 있던데요. 내가 체크해놨으니까 다시 작성해서 보내줘요.”
머리가 가볍다.
그 어느 때보다 머리가 상쾌하여 손과 눈이 날아다니는 듯 가뿐하다.
타다다닥!! 타타타타탁!!
매섭게 밀려오는 업무의 해일은 여전하지만, 지금의 나는 파도 위를 누비는 한 마리의 서퍼.
아니!
돌고래!
지금 나는 업무의 바다를 자유롭게 헤엄치는 돌고래였다!
‘이렇게나 머리가 상쾌한 적이 없었다!’
지독하게 지끈거리던 두통이 사라지니 과장 조금 보태서 새롭게 태어난 기분이었다.
지금 이 기분과 컨디션이라면 언제까지라도 일할 수 있을 것 같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돌고래는 죽었다.
업무의 파도는 쓰나미로 진화해 몰아쳤고, 이에 휘말린 나는 돌고래가 아니라 개복치에 불과했다.
‘…후우. 그래도 전보다는 훨씬 머리가 상쾌해.’
몸이 피곤할지언정, 전처럼 머리가 무겁거나 두통은 없으니 살맛 난다.
이게 전부 지리산에서 만난 도사님 덕분이다.
퇴근길 막차 시간이 다해서 아슬아슬하게 버스를 잡아타 집에 도착했다.
“으… 죽겠, 다…”
대충 씻고 침대에 몸을 던지니 시간은 벌써 11시.
핸드폰 조금 만지다가 자야 한다.
몸은 고단하지만 그럼에도 내 의무를 방치할 수는 없는 법.
간신히 팔을 움직여 게임을 실행했다.
‘그러고 보니까 오늘 처음 접속하는 거 아닌가?’
현생이 바빠지니 전처럼 틈틈이 접속하는 건 꿈도 못 꾸고 있다.
– “흐럇! 으랏차차!”
– “불을 높여라!! 더 뜨겁게 온도를 올려!!”
– 화륵!
성지에 위치한 드워프들의 대장간에서는 맑고 청량한 쇠 울림이 들려왔다. 누가 대장장이 종족 아니랄까, 그들의 망치질 소리는 메트로놈처럼 일정하고 규칙적인 리듬을 두고 울렸다.
– 까앙! 까앙! 까앙!
듣고 있자니 마음이 점점 차분해진다.
‘오랜만에 나도 무기나 한번 만들어 볼까.’
기왕 하는 거 초심의 기분을 내보려고, 인벤토리를 뒤적여 구석에서 썩고 있던 가장 낮은 티어의 재료《조악한 구리》를 준비했다.
만드는 것도 내가 가장 처음 만들었던 《F등급, 낡은 롱소드》다.
– 카강! 캉! 카강! 캉!
“쉽구먼.”
일정한 리듬으로 화면을 두들기자 그에 맞춰 허공을 누비는 커다란 망치. 아무래도 가장 쉬운 재료인 것도 있지만, 내가 신으로서 자각한 것도 한몫을 하는 것 같다.
빠밤ㅡ!
《제작 성공! E등급, 낡은 롱소드 획득!》
‘아직 폼은 안 죽었구먼.’
SD 케넬름이 나타나 빠밤ㅡ 나팔을 불었다. 슬쩍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아주 좋아한다.
‘케넬름도 처음에 비하면 많이 둥글둥글해졌단 말이지.’
꿈에 나타났을 때는 망치로 내 머리를 막 때리기도 했는데… 그땐 진짜 아팠지.
아무튼.
완성된 검을 인벤토리에 넣어두고 잠시 찾을 녀석이 있어 《세계 탐험 모드》로 향하려 했는데.
빠바바, 빰, 빠빠바, 빠밤ㅡ
“으음?”
뭔가 화면이 하얀빛으로 번쩍번쩍 점멸하며 케넬름이 힘차게 나팔을 불어 고조되는 노래를 연주했다.
‘뭐, 뭐지. 이건 진화? 케넬름이 진화하나?’
안타깝게도 그건 아니었다.
《‘낡은 롱소드’의 상태가?!》
빠바밤ㅡ!!
《‘E 등급, 낡은 롱소드’는 ‘E등급, 작은 햇별의 롱소드’로 변화했다!》
“어? 이건 또 뭔…”
그간 본 적 없던 것이라 무슨 일인가 싶었다. 나팔을 치우고 안경을 쓴 케넬름이 커다란 메시지 창을 들어 올렸다.
“…제작 과정에서 의식하지도 못할 정도의 작은 별빛이 무기에 스며들었습니다. F 등급이나 E 등급의 무기를 제작할 때 확률적으로 무기가 변화할 수 있습니다… 라고?”
요약하자면 나도 모르게 제작하면서 무기에 별빛을 불어넣었다는 소리인데.
“이거 의식적으로 할 수 있나? 되면 대박인데.”
곧바로 실험해봤지만 실패였다. 의식적으로 별빛을 불어넣으려 하니 아무리 섬세하게 조절해도 무기가 버티지를 못한다.
“A 등급부터 F 등급까지 골고루 해봤는데도 안 되네.”
확률적으로, 그것도 F, E 등급의 낮은 티어 무기를 만들 때만 별빛이 깃든다니.
‘조금 아쉽기도 한데…’
아니지.
오히려 잘된 일이다.
수백 번의 환상을 통해 무수한 사람의 눈을 빌려 세상을 바라봤다. 누구보다 평범하고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상을.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너무 특정 인물들만을 보고 있었어.’
요컨대 케니스와 프리가, 한스와 이스칼과 엘프 에스텔 등. 그간 나는 몇몇 인물만을 집중적으로 케어했을 뿐, 좀 더 폭넓은 범위를 살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진흙에 젖은 빵을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놀랐던가. 전쟁 중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해도 이건 너무나 심각한 문제였다.
나의 손길이 좀 더 넓고 멀리 퍼져야 한다.
될 수 있으면 낮은 곳에서 소외되는 이들에게로. 그들을 품어 살피는 것이 나의 의무이자 역할일지니.
‘거기에 위기의식이 결여된 놈들도 문제고…’
이것에 대해 방법을 좀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방법은 하나다.
경전, 성경, 혹은 성서를 만드는 거다.
광범위하게 사람들을 교육하는데 이만큼 좋은 것이 또 있을까?
물론 무신론자인 나 혼자 하기에는 아무래도 전문성이 떨어지는 분야이니,만신전이나 케넬름의 도움을 받아야 그럴듯한 모습으로 보이지 않을까 싶다.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 간단한 틀만 잡아둔 상황이라, 나중에 꿈에서 케넬름과 만나 자세한 내용을 이야기하면 될 것 같고.
‘그러면 이제 할 일은…’
발가르에게 준 닷새의 시간은 아직 30분 정도 남았다.
얼마나 끝났나 한번 보고 싶었지만, 일하는 도중 상사가 와서 “잘 돼가? 얼마나 했나? 혹시 한번 확인해도 될까?” 이러는 것만큼 빡치고 부담스러운 일이 없는 걸 잘 알기에.
나는 꾹 참으며 심연과 탄탈로스로 가는 것을 잠시 보류했다.
어차피 30분만 참으면 되는 일이야.
‘이제 세계 탐험 모드로 가서 환상에서 봤던 애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 쭉 한번 확인하고…’
“…아. 내가 이걸 잊을 뻔했네.”
뚜둑ㅡ
손가락 마디를 풀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진짜 중요한 걸 깜빡할 뻔했다.
환상 속에서 봤던 녀석들의 근황을 직접 보는 것도 정말정말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일이 딱 하나 있었다.
“제이콥 이 씹새끼…”
고아 겸 거지 소녀 테레시아를 무자비하게 두들겨 팬 악독한 녀석! 할당량을 채워오라며 한참 작은 아이를 때린 양아치 중의 양아치!
…물론 환상 속에서 있던 일이라 실제로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지만.
“아무튼. 정의의 사도가 간다!”
하루종일 딸꾹질이 멈추지 않도록 해주지!
* * * * *
닷새.
5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참 짧은 시간이다.
한 주의 시작인 월요일부터 금요일이라고 한다면 억겁이나 다름없을 것이고, 휴가를 5일이라고 한다면 찰나처럼 지날 것이다.
《…간신히, 시간에 맞췄군.》
발가르와 이시디움에게 지난 5일은 내리치는 번개처럼 순식간에 지나갔다.
5일 동안 밤낮 가리지 않고, 쉬는 시간 없이 탄탈로스를 수복한 끝에, 마침내 반파됐던 탄탈로스는 본래의 웅장한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촌각을 다투는 긴박한 순간이었도다…》
《중간에 마귀의 왕이 시비만 걸지 않았어도 진작에 끝낼 수 있었을 것이다!!》
《흑, 흐흑… 마귀의 왕은 결국 우리에게 졌구나… 흐흐흐흐흑… 이걸로 우리의 승리이니…》
세 개의 머리가 뱉는 말을 들은 발가르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다른 말은 그렇다 쳐도, 좌측의 화난 머리와 우측의 슬픈 머리가 하는 말은 결코 흘려들을 수 없었다.
《허튼 소리하지 마라! 열심히 일하는 이 몸에게 대뜸 형님의 예우를 갖추라 헛소리 한 것은 심판자 네가 아니냐! 애초에 내가 더 강하니 내가 형님이거늘! 그리고! 마지막 싸움에서는 근소한 차이로 밀렸을 뿐이지 이긴 횟수는 내가 더 많지 않냐!》
《약육강식 같은 무식한 소리나 하는 것이 역시 마귀의 우두머리도다!! 내 어찌 돌덩어리에게 지적인 예우를 기대하겠느냐!!》
《흐흐흐흐흑… 마귀의 왕이 졌다, 흐흑흐흑… 우리가 더, 흑흑… 강하다…》
《으드득…》
발가르의 입에서 송곳니 부서지는 소리가 살벌하게 울렸다.
마음 같아서는 대가리 세 개를 오목하게 만들어버리고 싶지만…
《…후. 됐다. 이제 곧 시간이니 예를 갖춰라.》
지고한 어버이께서 주신 시간이 다 되어간다.
탄탈로스로 옮겨온 커다란 모래시계에서 끝없이 모래가 쏟아지다가, 이윽고 닷새의 모래가 모두 떨어지며 천천히 멈췄다.
그리고 모든 모래가 떨어졌을 때ㅡ
쿠웅!
태산처럼 육중한 시선이 곧장 탄탈로스를 향해 떨어졌다.
《어버이시여!》
《하나 된 분을 받들라!》
《지고한 하나 된 분을 뵙습니다!》
《찬미해 마땅한 분이시여!》
처척!
탄탈로스의 모든 존재가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예를 취했다.
《…》
시선이, 느껴진다.
알량한 벽과 천장 따위를 허물고, 생명 그 너머의 것을 보는 위대한 시선이 도래한다.
시선이 멎을 때까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
어째서인지 어버이의 침묵이 길어진다. 발가르와 이시디움의 등에 식은땀이 촉촉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일이 틀어진 것인가, 혹은 수복한 탄탈로스가 마음에 차지 않으심인가.
위대한 시선은 발가르와 이시디움, 그리고 탄탈로스 곳곳을 바쁘기 오가더니.
《…둘이 싸웠더냐?》
움찔!
발가르와 이시디움이 크게 움찔하며 미친 듯이 땀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 감사합니다. 누가 만든 녀석 아니랄까… 지금보니 어쩐지 행적이 정말 닮기는 했군요…!! 이런 못 말리는 녀석…!! 그래도 어찌어찌 수습은 잘 하는 것 같으니, 다행이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