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화. 계명 ( 1 )
‘…완전히 미친놈이군.’
척 보니까 쌍검을 제대로 다뤄본 적도 없는 초보자다. 그런데 실전에서 쌍검을 들고 저렇게 설친다고? 당장 죽지 않은 게 용할 정도다.
“흐아아암… 그래도 죽으면 찝찝할 테니까 즐겨찾기에 등록만 해놔야겠다.”
이런 녀석이라도 죽으면 가슴 아플 테니까. 일단 죽지 않도록 가끔 봐주기로 하자.
서쪽의 마경, 그로아나 수림 개척 마을이라… 베이스 캠프의 크기는 제법 커다란 편이다. 나무로 만든 오두막과 커다란 천막 몇십 개가 눈에 띈다.
“여기도 두고두고 살펴보면 꽤 볼 게 많을 것 같은 곳이네.”
일단 머릿속에 기억만 해뒀다. 당장 내가 살피려는 곳은 아니었으니까.
‘E등급, 햇별의 롱소드’는 가난한 녀석을 위한 일종의 지원템. 개척 마을에 올 정도라면 개인적인 장비는 갖춘 녀석일 테니까, 내가 살필 필요가 없다.
슥, 스윽.
쭉 화면을 옮겨 동쪽으로 향했다. 여러 커다란 왕국과 작은 도시를 지나치다가 문득 낯익은 풍경을 마주했다.
“여긴…”
수백 번의 환상에서 봤던 풍경 중 하나.
고아 겸 거지 소녀의 눈을 빌어 봤던 시장이다.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게 새겨진 기억이 아른거린다.
“아마 그 꼬맹이 이름이 테레시아였지.”
테레시아의 눈을 빌어 나는 위기의식이 결여된 이들을 볼 수 있었다. 제이콥, 그 망할 양아치한테 배빵도 맞았고.
‘여기까지 왔는데 잘 지내는지 한번 보고 갈까.’
으슥한 판자촌을 위주로 잠시 뒤졌더니 금방 찾을 수 있었다.
– “다녀오겠습니다!”
– “안 넘어지게 조심하렴.”
해맑게 웃으며 달려가는 테레시아의 손에는 작은 약 꾸러미가 가득하다. 막 열고 나온 문에는 붕대의 표식이 그려져 있다.
‘테레시아의 부모님이 치료사였어? 그래서 전쟁터에 두 사람 모두 징집된 거였구나.’
가난한 판자촌에 치료소를 차린 것을 보면 두 분의 인격이 얼마나 훌륭한지 알법하다.
나는 테레시아의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화면을 돌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에게 검을 주는 것이 너무나 잔인하다고 느껴졌다. 아이는 아이답게, 그저 해맑게 웃으면 그걸로 족하다.
‘그러면 이 검은…’
가만히 판자촌을 둘러보니 무척이나 생기 없는 곳이다. 여기저기 바닥에 누워 희망 없이 죽어가는 이들로 가득하다.
희망이 없다.
우울한 패배감이 팽배하여 무기력하게 누워있게 만든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죽음만을 기다리는 이들의 소굴. 시궁쥐와 벌레들 사이에 섞여 잠을 자는 이들로 가득하다.
“여기에 필요한 건… 내일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이겠지.”
희망.
사람은 희망이 있다면 쉬이 무너지지 않는다.
무너지고 좌절한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한 줄기의 희망이다. 오늘보다 내일은 더욱 더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 나의 역할.
‘희망이라는게 너무 추상적이라서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파앗.
정말 오랜만에 스킬 창을 열었다. 주르륵 펼쳐지는 스킬 창에서 원하는 스킬을 찾아 ‘E등급, 햇별의 롱소드’에 시전했다.
‘확실히 별빛을 쓰는 것 보다는 이미 만들어진 스킬을 쓰는 게 훨씬 편하고 부담이 덜해.’
내가 요리의 재료부터 손질해서 만들어 먹는 것과 이미 완성된 밀키트 정도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진실의 올가미’를 ‘햇별의 롱소드’에게 사용합니다!》
‘진실의 올가미’의 능력은 하나의 대상을 지정하여 속박하고 봉인하는 것. 그 대상으로 햇별의 롱소드를 지정한 이유는 간단하다.
ㅡ 슈콱!
인벤토리에서 나온 햇별의 롱소드가 한 줄기 섬광과 함께 판자촌의 공터에 떨어졌다. 하얀빛의 올가미에 칭칭 묶여 있는 롱소드가 검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이 박혔다.
– “으, 으헉! 이, 이게 뭐야! 하늘, 하늘에서 뭐가 떨어졌어!!”
– “카, 칼?! 칼이 하늘에서…?”
– “으아아악! 도대체 이게 뭐야!! 칼이 떨어진다!! 으아아!!”
난데없는 소란에 노숙자들이 소란을 피웠다. 그 틈을 타 재빨리 스킬을 하나 더 사용한다.
《‘비단 구름의 춤’을 사용합니다! 일정 시간 잔류하는 구름에 원하는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너무 눈에 띌 필요는 없으니 최대한 작게 축소해서 열심히 생각한 말을 적었다.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고난 앞에서 떨지 말고 나아가라. 나는 길 잃고 헤매는 자들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며, 너의 어깨를 내가 잡아주리니. 영원히 뽑히지 않는 검으로 이를 약조하노라.>
오색으로 빛나는 구름에 새겨진 글씨가 검 위를 부유하며 공터를 채웠다. 노숙자와 거지들이 입을 헤 벌리고 구름을 바라본다.
– “이건…”
– “으, 으허…?”
대충 이 정도면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전해졌겠지?
힘들다고 기죽지 말고 짜식들아. 열심히 살라고.
‘흐으… 졸리다…’
녀석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마저 확인하고 싶은데 이제 진짜 한계다. 나는 결국 졸음에 못 이겨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쏴아아아ㅡ
어둠 속에서 이제는 익숙한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눈을 뜨면 늘 그렇듯 케넬름과 만나는 모래사장이었다.
사박, 사박. 케넬름이 조신하게 모래를 밟으며 다가왔다.
“케넬름.”
“하나 된 분이시여.”
케넬름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한다. 저번에 우앙 울면서 달려들었던 것이 창피한 걸까. 그때부터 묘하게 예의를 차린단 말이지.
“흠.”
“…뭔가 신경 쓰이시는 거라도?”
“아니야 됐어.”
아무리 예의를 차려도 오늘은 무조건 무릎베개를 받을 거야.
“?”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케넬름이 고개를 흔든다.
파도치며 흔들리는 케넬름의 붉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보고 싶다는 충동을 애써 참았다.
“그보다. 오늘 좀 중요한 얘기가 있어.”
“말씀하시지요.”
“이제 슬슬 그 뭐냐, 경전? 성서? 하여튼 내가 직접 그런 거를 만들어서 지상에 뿌릴 때가 되지 않았나 싶어서.”
사실 지금도 굉장히 늦은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으로서 활동을 시작한 지는 한참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마땅한 가르침을 나눈 적이 없다니.
‘사실 평생을 종교에 바친 사람들에게 내가 무언가를 가르친다는 것도 좀 부담스럽기도 하고.’
무교인 내가 종교에 대해 알아봤자 얼마나 알겠는가. 하지만 신이 실존하는 세상이다. 신의 말씀을 적은 경전은 필수적인 요소.
“그렇군요! 드디어! 드디어 마음을 정하신 건가요!”
“?”
어째서인지 케넬름이 눈동자를 마구 빛내며 내 손을 꼭 잡았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작고 부드러운 손이 내 손바닥 안에서 꼬물거린다.
“저, 최초의 성녀 케넬름!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제가 조금 준비해뒀답니다!”
“준비를 해놨다고?”
“네!”
그리 말하며 내 손을 이끈 케넬름이 어딘가로 향했다. 온통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진 이 작은 무인도의 어디에 준비를 했다는 걸까?
짝짝.
케넬름이 우아하게 박수를 두 번 치자 오색으로 물든 바다가 천천히 파도치기 시작했다. 바닷물이 허공에 떠올라 동그란 거울을 만들더니, 커다란 책들이 거울에서 떨어진다.
툭, 투두둑. 후두두둑!
…쌓이는 책의 양이 심상치 않다. 얼추 봐도 어지간한 전공 서적 뺨치는 두께의 책이 수십 권.
“교리와 경전에 대해서는 언제라도 문제없도록 가볍게 준비해봤답니다.”
“가볍게? 이게 가볍게라고?”
내 허리까지 쌓이는 양의 책들인데?
애초에 교리랑 경전이 무슨 차이지?
케넬름이 눈치 빠르게 설명을 시작했다.
“교리라는 것은 종교의식이나 예배 등에서 사용되는 고정된 양식과 기도문을 뜻하고, 경전이란 그 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신앙을 담고 있답니다.”
“생각보다 복잡하구나… 종교의식이나 예배는 아직 생각이 없어. 그냥, 그 경전을 좀 어떻게든 해볼까 싶어서.”
딱!
케넬름이 손가락을 튕기자 허리까지 쌓인 책이 절반으로 줄었다.
“그렇다면 성서군요.”
“성서라.”
내가 알고 있는 성서는 군대에서 읽은 신약, 구약 성경밖에 없는데.
“설마 내가 그만한 두께의 책을 직접 써야 하는 거야?”
“아뇨. 적는 것은 제가 적을 테니 하나 된 분께서는 저한테 그냥 말로 전해주시면 됩니다.”
무지막지한 두께의 책을 직접 써야 한다고 하면 슬플 뻔했는데 정말 다행이다.
“근데 말로 전하라고? 뭘?”
“…? 그야 당연히 성서에 적을 내용이죠.”
케넬름과 내가 멀뚱히 시선을 마주쳤다.
케넬름이 혹시나 싶은 기색으로 물었다.
“혹시… 성서가 그냥 뚝딱 손가락 튕기면 나오는 거라고 생각하신 건 아니죠?”
“…”
성서 나와라 얍! 하면 나오는 거 아니었어?
내가 신인데?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자 케넬름이 이마를 짚었다. 다시 손가락을 튕기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 책이 허공을 날다가.
후두둑.
…내 앞으로 떨어졌다.
“성서, 그것도 신께서 직접 베푸실 성서라면 구절 하나하나, 사소한 단어 하나라도 아주 신중하게 선택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케넬름이 나를 도와주면ㅡ”
“저도 물론 옆에서 도와드리겠지만. 큰 흐름을 제시하는 것은 하나 된 분께서 직접 하셔야죠. 그런데 지금 그 큰 흐름을 제시하실 수… 있으신가요?”
“…”
“성서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된 가르침은 무엇인가요? 종교적 지침과 윤리적 사상, 도덕의 교리에 대해서는 어떻게 접근하실 것인지요? 삶의 가치와 죽음의 경계, 나눔과 배려의 미덕, 이단의 처벌에 대해서는요?”
“그, 그건…”
“신의 가르침과 말씀을 적은 것이 성경이고, 그렇기에 하나 된 분께서는 성경을 만드는 것에 대해 아주아주 신중하게 접근하셔야 합니다.”
케넬름이 엄한 표정을 지었다.
종교 이야기가 나오니 세상 진지한 표정. 새삼 성녀는 성녀구나 싶다.
“해석하기에 따라 종교 안에서 분파가 나뉠 수도 있고, 잘못 적은 구절 하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요.”
“알겠어… 그러면 성경은 다음 기회에ㅡ”
텁.
케넬름의 여린 손이 내 옷 덜미를 붙잡았다. 도대체 무슨 악력인지 빠져나갈 수 없다.
“일단 제가 준비한 경전이라도 대충 보시면서 기본적인 흐름이라도 익히시죠.”
“아, 하하. 아니야. 가만 생각해보니까 성경은 좀 무리인 것 같은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있다가는 저 두꺼운 책들을 전부 공부하게 생겼다.
내가 신인데! 경전을 공부하라니!
이건 말도 안 된다고!
“아! 그, 계명! 간단하게 계명으로 하는 건 어떨까?! 성경처럼 자세히 할 필요도 없고, 간단한 규칙 몇 개면 충분하잖아!”
십계명!
그 방법이 있었지.
“내가 하고 싶은 건 광범위하게, 못 배운 사람이나 거지한테도 가르침을 주고 싶은건데, 그러려면 성서보다는 계명이 더 효과적이잖아!”
케넬름이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명… 알겠습니다. 빈민에 대한 계몽이라면 성서보다는 짧고 쉬운 계명이 더 낫죠. 말씀하신 것처럼 알기도 쉽고요.”
가까스로 설득된 케넬름을 보며 식은땀을 닦았다.
‘꿈속에서도 일을 할 뻔했네…’
“그러면 계명에 대한 자료를 가져오겠습니다.”
짝짝.
경쾌한 박수 소리가 울렸다. 모래사장에 두꺼운 책들이 우수수 쌓였다.
“엣.”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