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화. 돌아온 탕아 ( 1 )
파스스스스…
멀리서 있는 힘껏 달려온 바람이 황금 나무의 잎사귀를 흔들었다. 나뭇잎들이 저마다 부딪히고 흔들리며 저들 나름의 박수 소리를 흘렸다.
성지에 있노라면 하루에도 몇 번씩 볼어오는 바람이었다. 지평선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내달리는, 시작과 끝을 구분할 수 없이 질주하는 바람.
…
황금 나무가 처음 성지로 왔을 적에는 작은 사과나무 정도의 크기였지만.
길고 긴 시간 동안 무럭무럭 햇살과 탐스러운 토양을 빨아먹으며 이제는 제법 나무라고 부를 만한 크기로 자랐다. 불어온 바람을 만끽하던 황금 나무는 의문스러운 기색을 흘렸다.
무언가 이상하다.
지상에 희미하게 연결되어 있던 자신의 분신, 그러니까 원래의 신체가… 방금 완전히 죽어버렸다. 본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영혼이 이곳에 있으니 껍데기야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지만 찰나의 순간 느껴진 기척이 무척 신경 쓰였다.
“…네? 아, 어머니. 방금 뭐라고 하셨나요?”
얇은 나뭇가지를 다듬어 열심히 애기살을 만들고 있던 엘프 대장로, 알랜시아가 황금 나무의 사념에 반응했다. 찌르르 울리는 관자놀이에 집중을 해보면 그것은 약간의 걱정과 의문, 염려를 담고 있었다.
“으음. 어머니, 단순히 여러가지 이유로 지상에 있는 껍데기가 조금 더 빨리 무너진 것이 아닐는지요. 예를 들면 뭐, 마수나 짐승이 어머니의 몸에 기생했을 수도 있고… 그도 아니면 벼락을 맞아서 불에 탔을 수도 있고.”
성지 특유의 평화로운 분위기에 한껏 젖은 알랜시아가 낙관적인 추측을 보탰다.
황금 나무도 이에 동의했다. 껍데기는 결국 껍데기, 그 안에 남아있던 신성은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예? 지상의 껍데기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니요? 그것이 무슨…”
이어지는 황금 나무의 사념에 집중하던 알랜시아의 표정이 밝아졌다. 지상에 남은 엘프라고 해봐야 하나밖에 더 있겠는가. 자발적으로 지상에 남은 에스텔, 그 아이가 분명했다.
“에스텔! 우리 막내가 어머니의 껍데기에 다녀간 모양… 아. 아니라고요? 에스텔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엘프가 어머니의 껍데기에…”
침묵하던 황금 나무가 조심스럽게 사념을 전했다. 자발적으로 숲을 떠난 에스텔을 제외하고도, 까마득하게 먼 과거에 딱 한 명이 더 숲을 나선 적이 있지 않았냐고.
사념을 전해 들은 알랜시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너무나 깊은 곳에 묻힌 기억을 발굴하는 과정이 썩 달갑지만은 않았다. 그 기억이 엘프의 길고 긴 역사에서 유일한 죄수의 흔적이라면 더더욱.
“어머니… 지금 테니아에 대해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낮아진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테니아라는 이름이 나오자 주변에서 일하던 엘프 중 제법 나이 있는 이들이 몸을 흠칫 떨었다.
황금 나무는 살짝 노한 표정의 알랜시아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사념을 전했다.
“…그렇지요. 에스텔이 아니라면 지상에 있을 수 있는 엘프는, 그 빌어먹을 중죄를 저지르고 추방당한 테니아밖에 없으니까요.”
황금 나무는 노기가 가득한 알랜시아에게 반박의 사념을 보내지 않았다.
서로 대화를 이어봤자 불편한 대화가 되리라는 것을 예상한 것이다.
대신 부드러운 사념으로 알랜시아를 달래어 돌려보낸 황금 나무는 하나 된 분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파르르 떨리는 잎사귀가 저 높은 별에게 무언가 전하려 안간힘을 쓰는 듯했다.
둘의 대화를 엿듣던 주변의 남자 엘프가 제법 나이 좀 있는 여자 엘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봐 누나. 대족장님이 말하는 그 테니아…? 라는 여자가 도대체 누군데 분위기가 저렇게 험악한 거야? 누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휴. 알지, 알고말고. 어떻게 잊겠어.”
여자 엘프는 한숨을 푹 내쉬며 활대를 휙휙 묶었다. 실로 놀라운 솜씨였다. 남자 엘프는 옆으로 다가와 대답을 채근했다.
“그러면 좀 말해줘 봐.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길래 막 죄수이니 추방이라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으음. 대족장님이 별로 안 좋아하실 것 같은데.”
“에이 진짜! 나중에 내가 여관에서 벌꿀 맥주 3잔 줄게. 그러면 됐지?”
“5잔. 그 밑으로는 안 돼.”
“쳇. 맥주를 아주 드워프 아저씨들처럼 마시는군. 좋아. 얼른 말해줘.”
대가를 얻어낸 여자 엘프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누구도 들어서는 안 된다는 그 태도에 남자 엘프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테니아는 우리 마을에서 처음으로 추방형에 처한 죄인이야. 아마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쫓겨났을걸? 영영 어머니의 곁에서 쫓겨나는 것도 부족해서 온몸의 손가락과 발가락의 힘줄을 모조리 끊어버린 다음에 마을에서 쫓겨났지.”
“세상에.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그렇게 지독하게 한 거야? 그건… 그건 그냥 죽으라는 거잖아?”
“그 여자는 그럴만한 죄를 지었거든. 사실 테니아는 우리처럼 평범한 엘프 중 하나였어. 남들과 다른 게 있다면 어머니를 너무나, 정말 너무너무 사랑하고 있었다는 거지. 그런데 뭐, 그 정도는 큰 흠이 아니고 그냥 그렇구나 하고 지냈는데… 일이 터지고 만 거야.”
여자 엘프는 잠시 그 기억을 되살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시 떠올려도 그날 황금 나무가 내지른 고통에 가득 찬 사념을 잊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를 너무 사랑한 테니아는 생각한 거야. 어머니와 자신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그래야 진정한 사랑을 완성할 수 있다고 느낀 거지.”
“…설마…”
“맞아. 테니아는 어디서 구해왔는지도 모를 도끼로 어머니의 몸을 마구 내리찍고 있었어. 우리가 발견했을 때는 이미 어머니의 몸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였지. 마치 커다란 애벌레가 나무를 파먹은 것처럼. 테니아는 그 구멍에 앉아서 어머니의 몸을 파낸 흔적을… 전부 먹고 있었고.”
“웁. 우욱! 우웨에엑!”
결국 듣다 못한 남자 엘프가 헛구역질하며 배를 부여잡았다. 여자 엘프는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남자의 등을 두들겼다.
“붙잡는 과정에서 우리 형제들도 몇 명이나 죽였어. 아마 엘프 역사에서 최초의 동족 살해자로 기억되지 않을까?”
“으으, 우으윽… 완전히 미친 여자 아니야? 손발가락의 힘줄이 잘리고 추방당했다며. 그 여자는 도대체 어떻게 아직도 살아있는 거야?”
여자 엘프가 어깨를 으쓱했다. 드워프들에게 배운 특유의 제스처였다.
“글쎄? 그거야 나도 모르지.”
길고 긴 세월 동안 테니아에게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그것은 아무도 모를 일이다.
* * * * *
“와씨. 이 미친 새끼 진짜 안 죽네?”
– 쾅, 꽈르르릉! 꽈쾅! 콰릉!!
열심히 화면을 터치할 때마다 번쩍이는 뇌성과 우렛소리가 울린다. 내가 벼락을 떨굴 때마다 카르타할은 반항도 못 하고 죽어갔지만, 잠시라도 벼락을 멈추면 곧장 재생하기 일쑤였다.
– “아, 아아…! 보이십니까 나의 신이시여! 당신의 종이 이렇게나 완벽한 몸을 가지게 되었나이다! 부디 저를 거두시어 영원토록 당신의 모든 것을 내가 볼 수 있도록 하소서!”
오히려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하늘을 향해 외치는 모양새에 되레 내가 정신적 피해를 보았다.
“씹. 남정네가 알몸으로 그딴 표정을 짓지 말란 말이야.”
신경질적으로 벼락을 떨군다. 이번에도 카르타할은 재가 되어버린 몸에서 되살아났다.
질긴 수준이 바퀴벌레를 아득히 넘어선 무언가에 가깝다.
“얘도 그냥 불에 태워버려야 하나? 꼬락서니를 보면 불에 태워도 재생할 것 같은데.”
거의 가루로 갈아버려도 재생하는 수준이었으니 이전처럼 불로 태워서 재생을 막기는 어려울 것 같다.
띠링ㅡ!
《‘제법 커다란 황금 나무’가 퀘스트를 발주했습니다.》
“으음? 갑자기 퀘스트? 황금 나무가?”
돌연 성지에 얌전히 있던 황금 나무가 퀘스트를 발주했다. 지금까지 없었던 일에 살짝 당황했지만, 퀘스트라는 말에 나의 손은 정직하게 움직였다.
[퀘스트 : 돌아온 탕아를 위하여]
황금 나무는 오래전 추방당한 자신의 아이를 마주했습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중죄를 지었기에 쫓겨난 황금 나무의 아이는, 길고 긴 세월이 흘러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것도 최악의 형태로 말이죠.
하지만 황금 나무는 다시 돌아온 자신의 아이를 사랑으로 품으려 합니다.
위대하고 거룩한 하나 된 분에게 감히 소망합니다.
부디, 테니아가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시기를.
…혹은 평화 속에 잠들 수 있도록 허락하시기를.
내용 : 테니아의 귀환 혹은 안식
보상 : 황금 나무의 반짝이는 열매
“흐음?”
쭈욱 내용을 읽어보니까… ‘테니아’라는 엘프가 성지로 올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내용인 것 같은데. 갑자기 왜 이런 내용의 퀘스트가 떴는지 약간 의아했다.
“아.”
지금 타이밍에 황금 나무가 갑자기 테니아라는 엘프와 관련된 퀘스트를 준 이유가 뭘까.
원인 없이는 결과도 없는 법이다.
유일하게 추측할 수 있는 것이라면 지금 황금 나무의 껍데기 앞에 있는 이 둘, 대악마와 카르타할이 무언가 시발점이라는 소리인데.
‘돌아왔다.’라는 표현을 생각하며 아마 황금 나무의 껍데기 근처에 있는 둘 중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겠지.
“상식적으로 카르타할이 엘프일 리는 없으니까… 설마 황금 나무가 말하는 테니아라는 엘프가…”
떨리는 눈동자와 쿵쾅거리는 심장.
소거법으로 카르타할이 사라지면, 황금 나무가 말하는 ‘테니아’라는 엘프는 이 촉수 덩어리 대악마라는 소리가 된다.
그리고… 대악마와 악마들은 과거의 내가 저지른 트롤링의 피해자들이다.
조마조마한 심정에 혀가 바싹 말랐다. 설마 테니아도 과거의 내가 차원을 부쉈을 적에 심연으로 떨어진 피해자 중 하나인가 싶어서.
– 딸깍.
조심스럽게 대악마, 아니 테니아를 향해서 색안경을 켰다. 곧장 무수한 수의 단편적인 사진들이 나타났다. 거의 절반에 가까운 사진이 우중충한 심연을 배경으로 한 사진들이었다.
하나하나 살펴보던 나는 이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씨, 씹… 원래 엘프였잖아.”
설마 진짜 나인 건가? 이번에도 내가 잘못한 거야?
테니아는 옛날에 차원 부수기 했을 때 심연으로 떨어진 피해자 중 한 명인 거야?
기억도 안 나는 과거의 내가 싼 똥이 또다시 나한테 날아오는 그런 부조리함의 반복인가 싶어서 손이 덜덜 떨렸다.
서둘러 사진을 과거로 넘긴다. 두툼한 사진을 한참이나 뒤적이며 테니아가 처음 심연에 왔을 때의 기억을 찾아 헤맸다.
마침내 심연과 지상의 기억이 분리되는 시점을 발견하고,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한 장의 기억을 더듬었다.
꿀꺽…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토했다.
“이, 이번에는 내가 아니었네.”
우중충한 심연의 기억이 시작되는 최초의 기억에서, 숲에서 죽어가던 테니아는 커다란 늑대를 닮은 무언가에 실려 심연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