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화. 산에 사는 사람 ( 1 )
“으, 너무 덥다…”
쨍쨍 내리쬐는 햇볕에 땀이 줄줄 흐르면서 셔츠가 착 달라붙었다. 불쾌한 감각에 계속 손부채를 해봐도 더위는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무엇이든 개선하라! 이것저것 보장하라!! 뭐가 됐건 규탄한다!”
“““개선하라! 보장하라! 규탄한다!”””
땡 더위의 매미 소리를 덮는 우렁찬 확성기 소리. 붉은 머리 끈을 질끈 동여맨 사람 한 무리가 모여서 무어라 마구 외치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덥지도 않나?”
무엇이 그리 불만인지는 몰라도 이 더위 아래에서 저럴 수 있다는 점은 존경스러웠다.
잠깐 멈춰서 떠드는 내용을 들어보니 무언가 비리를 저지른 정치인에 대해 시위하는 내용이었다.
“정치인이라.”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카르타할의 선동으로 몇몇 왕국의 수뇌부들이 전부 미쳐버리는 일이 있었다.
엘프와 황금 나무가 지상으로 돌아가는 일 덕분에 조금 묻힌 느낌은 없지 않아 있었지만, 이것도 제법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일단 권력층이 부패하면 그걸 견제할 수단이 없다는 게 문제였지.”
판타지 세계에서는 권력이 깡패다.
귀족이랑 왕이 나란히 손잡고 부패하면 뭐 어떻게 답도 없는 것이다.
만신전이 열심히 움직이며 자정 작용하려 노력하지만, 숨기려고 하면 한없이 숨겨지는 것이 사람의 치부일 터.
“흠.”
권력층이 부패하면 고생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백성들이 되는 법이다.
그렇다면… 권력층만 어떻게든 사람처럼 만들면 조금 더 많은 사람이 살기 좋아진다는 뜻 아닐까?
“오.”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다. 한참이나 멍하니 서서 생각을 다듬고 있을 때, 저 앞에서 걸어가던 사수가 날 불렀다.
“박 주임! 더워 죽겠는데 거기서 뭐 해. 빨리 사무실 가자!”
“아, 예! 지금 갑니다!”
손에 들린 시원한 커피가 땡볕에 구슬땀을 흘렸다.
이 더위에 커피 심부름을 시킨 부장은 싸이코패스가 분명하다.
* * * * *
“ㅡ…그래서 내가 이런 생각을 좀 해봤는데. 어때?”
오전 00시. 부엉이도 울지 않는 야심한 밤.
야근으로 피로한 몸을 침대에 눕히고 핸드폰 너머의 케넬름, 리아에게 말을 걸었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게임 속 캐릭터한테 말을 거는 과몰입 씹덕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지만.
– “조금 위험하지만… 발상 자체는 굉장히 참신합니다. 항상 그렇듯 올바르게만 흘러간다면 더없이 좋을 것입니다.”
– “권력자들을 어느 정도 억제하는 효과도 있을 테죠. 과격한 방법이기는 하지만요. 그런데 성녀님께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이 엇나가기 시작한다면 이를 막을 방법이…”
케넬름과 리아는 약간 떨떠름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이 계획의 부작용을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거기에 하나 기믹을 추가하는 거지.”
피곤한 눈을 억지로 비비며 화면을 여기저기 터치했다. 내가 찾는 화면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D등급, 아프게 생긴 단검》
“이런 평범한 단검을 하나 준 다음에, 테스트를 치르는 거야. 이걸 통과한 사람들은 특수한 문양을 상징으로 삼는… 그래 암살자 집단이라고 하자.”
머릿속에 그림이 하나 그려진다.
어둠 속에서 빛을 추구하는 고독한 암살자들.
백성들의 고혈을 파먹는 부패한 귀족들을 신의 이름으로 심판하는, 어둠 속의 칼날들.
“크 씨발.”
이게 섹스지.
“아니지. 그냥 단검으로 하지 말고 좀 다른 걸로 해보자.”
이왕 하는 거 단검에도 낭만을 좀 섞어보자고.
…한참이나 별빛으로 끙끙거리며 단검의 형태를 조정했다. 덕분에 단검의 원형은 거의 사라졌고, 그나마 남은 것은 날카로운 칼날이 전부였다.
– “굳이 이런 형태일 필요가 있나요? 실용성을 따지자면 최악에 가까운 것 같은데요. 은밀성을 따지자면 상당히 좋을 것이지만… 싱황 대처 능력과 길이도 짧고.”
– “아하하하…”
케넬름의 신랄한 평가에 마음이 꺾일 것 같았지만…
“이 성능충! 무기의 진정한 성능은 간지와 애정에서 나오는 거라고!”
사람의 마음을 모르는 효율충은 낭만을 모른다.
“손목에서 튀어나오는 암살검을 어떻게 참아!”
* * * * *
끼익… 끼익…
사람들에게 대륙에서 제일 높은 산이 무어냐 물어보면 주저 없이 마수의 산을 꼽을 것이다.
허나, 가장 오르기 힘든 산이 무엇이냐 물어본다면… 어쩌면 절반 정도는 마수의 산이 아닌, 이곳 아이야테르 산을 말할 것이다.
끼익… 끼익…
아이야테르 산이 오르기 힘든 것에는 거창한 이유가 없었다.
길이 험난해서 힘들었고, 하루에도 다섯 번씩 바뀌는 날씨가 힘들었으며,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에 삐끗하면 곧바로 낭떠러지인 것이 사람을 미치게 했다.
산은 온통 바위투성이에 물이라고는 한 줌 웅덩이가 귀한 곳이고, 초록색은 이끼가 전부인 미쳐버린 산.
등산하는 것이 더럽게 어려운 산. 그 모든 역경을 뚫어내면 그나마 보기 좋은 절경이 장점이었지만.
대부분의 현명한 사람들은 풍경 하나 보자고 목숨을 내놓고 깎아지듯 가파른 산을 오르지는 않았다.
끼익… 끼익…
대부분의 현명한 이들이 그러했다.
허나 몇몇 우둔한 이들은 아득바득 석산을 기어올라 질기도록 뿌리를 내려 아이야테르 산에 삶의 터전을 일궜다.
끼익… 끼익…
사람이 사는 데 중한 것이 의, 식, 주라고 하였다.
옷은 적당히 아껴 입고 고쳐 입으면 족하다. 집은 작은 오두막 하나에 몸을 눕혔으니 이것으로 족하다.
그러면 음식과 물은?
풀은 이끼가 전부요, 물은 웅덩이가 고작인 아이야테르 산에서 식사는 어떻게 해결하는가.
끼익… 탁!
놀랍도록 현명한, 그리고 빌어먹을 그의 선조들은 답을 찾았다.
깎아지듯 지랄 같은 벼랑에서만 사는 괴상한 산양, 카우투스.
어째서인지 벼랑을 타고 올라가 바위를 핥는 습성이 있는 멍청한 산양들을 도축하며 식량을 구한 것이다.
허나 사람이 고기와 물만 먹으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소금이며 각종 조미료도 있어야 할 것이고 옷과 이불 수선할 천도 필요하고, 물이 새는 집을 수선할 목재도 필요했다.
끼이이익… 탁!
그러면 가진 것이 카우투스의 고기 밖에 없는 자신이 무얼 할 수 있겠는가?
“……후우.”
필요한 것은 많은데 가진 것은 산양 고기밖에 없으니.
도축한 고기를 가지고 산 아래까지 내려가서 고기를 팔고 물건을 사오는 수밖에.
이것이 바로 아이야테르 산의 작은 오두막에 사는 에샤가 수십 킬로에 육박하는 고기를 등에 짊어진 이유였다.
“……”
수십 킬로에 육박하는 카우투스의 고기를 등에 짊어진 에샤는 작은 신음 한번 없이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해 온 것은 도축이요, 걸음마와 함께 노닌 곳이 지랄맞게 높은 절벽이었으니 벼랑을 타고 바람처럼 내려가는 속도가 아찔하기 그지없었다.
“……”
중간중간 산 구릉에 걸린 구름도 통과하고, 훌쩍 뛰어올라 낭떠러지에서 낭떠러지도 뛰어오르는 모양새였느니. 누군가 봤다면 손뼉을 치며 아낌없이 동전을 던졌을 것이다.
꼭두새벽부터 산을 내려간 에샤는 이른 저녁쯤에야 산 바로 아래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여어, 에샤. 간만이구먼. 오늘도 고기 팔려고 온 거지?”
“…”
자주 거래하는 상인이 아는 체하며 인사했고, 에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축을 업으로 삼아 몸에 피비린내가 배고, 작업용 칼에 여기저기 베여 팔이며 얼굴에 커다란 흉터가 있는 에샤가 그리하니 당장이라도 사람 하나 담글 것 같은 살벌함이 느껴졌다.
“…젠장. 언제봐도 와꾸 한번 살벌하구만. 여기, 은화 두 개에 동화 스무 개야. 오늘도 고기 상태가 아주 좋네.”
그나마 자주 봐서 익숙해진 상인은 꿀꺽 침을 삼키며 셈을 끝냈다.
“……”
에샤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를 떠났다. 상인은 그제야 덜덜 떨리는 손을 꽉 눌러 잡았다.
“후우. 진짜 분위기 한번 살벌하구만…”
아이야테르 산 바로 밑에 자리한 작은 마을이다 보니 소문은 빠르게 돈다. 그중 반쯤 괴담처럼 퍼지는 것이 바로 에샤에 대한 소문이었다.
우는 아이에게 에샤가 산 꼭대기로 잡아간다고 으레 겁을 주고는 하였으니. 에샤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과 도축업자 특유의 무언가가 어우러진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꿀꺽. 나는 절대로 에샤한테 돈 떼먹지 말아야지.”
상인은 저 멀리 걸어가는, 느긋한 맹수처럼 거리를 누비는 에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저 살벌한 와꾸의 도축업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인지, 상인은 너무나 두려웠다.
‘아. 배고프다…’
에샤는 주머니 속에서 흔들리는 은화와 동화를 느끼며 경쾌하게 걸었다.
작은 마을이지만 아이야테르 산을 보러오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장사하기에 그럭저럭 있을 것은 다 있는 마을이었다.
‘아 맞다. 바지에 덧댈 천 사야 하는데.’
에샤는 자주 가는 포목점 앞에서 안에 들어가지 않고 앞을 어슬렁거리며 늘어놓은 천을 노려봤다.
“히, 히익!”
“눈, 눈 마주치지 마. 얼른 눈 깔아. 빨리!”
포목점을 기웃거리던 관광객들이 기겁하여 바람처럼 사라졌다. 에샤가 포목점을 어슬렁거리니, 무슨 연쇄 살인마가 나타났다고 착각한 것이다.
‘이 천 예쁘네.’
에샤는 아무 생각 없이 천을 구경하고 있었다.
한창 꾸미는 것에 관심 많은 나이, 에샤는 17살이었다.
“에, 에, 에샤? 처, 처처처천 사러 왔니?”
“…”
주인이 자리를 비운 것인지 포목점 처녀가 덜덜 떨며 응대했다. 에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으으으. 누구한테 말하는 건 너무 부끄러워.’
에샤는 산에서 혼자 지낸 시간이 길어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고 대화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그리하여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거나 젓는 것으로 대부분의 의사를 표현했다.
“여, 여기 있단다…”
짤랑.
포목점 처녀가 손을 덜덜 떨며 물건을 건넸다.
천을 구매한 에샤는 곧바로 성큼성큼 시장을 누비며 필요한 것들을 샀다.
비가 새는 집을 수리할 목재와, 바지에 덧댈 깨끗한 천과 바늘, 칼을 손질할 숫돌과 각종 조미료 등이 그것이었다.
최대한 빠르게 장을 봤음에도 이른 저녁 무렵에 도착했던 터라, 어느새 하늘이 뉘엿뉘엿 어두워지는 때였다.
“……”
야밤의 산은 위험하다.
이것은 평생을 산에서 나고 자란 에샤에게도 통용되는 말이었기에 에샤는 자주 가는 여관에 하룻밤을 숙식하기로 결정했다.
“에샤…? 혹시 술 필요하니?”
자신은 17살인데 왜 자꾸 술을 권하는 걸까.
에샤는 그저 고개를 저으며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
간만에 느껴보는 푹신한 이불의 감촉에 에샤는 활짝 미소 지었다.
창문을 달려온 달빛에 비친 에샤의 미소는… 굵은 칼자국과 더불어 어딘가 살육을 앞둔 이의 차가운 미소와도 비슷했다.
‘헤헤. 이불 따뜻하다.’
물론 에샤는 행복하게 미소를 지은 것이었다.
푹신한 침대에 누우니 절로 잠이 오는 것이… 이렇게 금방이라도… 잠이 들어… 꿈… 나라로…
“………스으ㅡ…”
에샤는 곧장 잠자리에 들었다.
간혹 뒤척이는 모습에 평온한 표정. 에샤의 얼굴이 그나마 가장 덜 살벌할 때를 꼽으라면 자는 순간을 말할 수 있었다.
– “이것 봐. 얘 생긴 것부터 그냥 타고난 인재라니까? 그런데 생긴 거에 비해서 악업도 없고. 완전 얘가 딱이야. 아주 그냥, 크으 얼굴 좀 봐. 아주 그냥 타고난 살인, 아니. 암살자 대장이야.”
그런 그의 모습을, 어느 별자리가 빛나며 유심히 보고 있음은 꿈에도 모른 채.
영역전개ㅡ 벌충연참.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엄청나게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어제의 벌충분은 완수…!!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무사히 퇴원하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푹 쉬시면서 그간 하고 싶었던 것들을 마구마구 즐기실 시간이군요…!! 열심히 한 당신… 쉬어라…!! 라는 말을 실천하세욧…!!
사제, 성녀특) 물리 직업임. 이는 최초의 성녀 케넬름부터 유구하게 이어진 전통이나 다름 없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