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화. 신 세계
과수원에 사는 은거 고수가 홀연히 나타나 세상에 던진 두 마리의 새가 있다.
누군가는 사실 세 마리의 새가 있다고 하지만, 이름이 알려진 건 두 마리뿐이니 아무튼 두 마리다.
한 마리는 물을 마셨고, 다른 한 마리는 피를 마셨다고 하더라.
그중 물을 마시는 새가 말하기를.
– “축제는 끝났소. 이제 집으로 돌아가시오.”
참 여운이 깊게 남는 명대사다.
내가 갑자기 이 대사를 떠올리는 이유는 뭘까.
‘뭐긴 뭐야…… 나만 빼고 정말 축제가 끝났으니까 그러지!’
새벽의 택시 기사님과 기나긴 혈투(아님)에서 살아남아 돌아왔더니 이미 모든 것이 끝나있더라.
다소 황망한 기분이 절반, 도대체 어떻게 해낸 것인지 모르겠다는 감정이 절반이다.
“하…”
일단 어떻게든 잘 풀렸으니까 다행이기는 한데.
화면 너머로 보이는 것은 빈사 상태로 쓰러진 프리키의 주변에서 대성통곡하는 남녀 한 쌍, 저 멀리 루나와 에샤를 둘러싸고 질질 짜는 밤의 일족들, 거기에 모래 바닥으로 몸을 숨기며 환술에 걸렸다고 중얼거리는 마녀까지.
‘……뭐지. 수어사이드 스쿼드인가?’
도무지 인과를 짐작할 수 없는 상황에 머리가 어지럽다.
띠링ㅡ!
《“진실의 올가미” 발동! 단일 대상을 잠시 속박합니다!》
우선 기절한 프리키를 구속했다. 하얗게 빛나는 빛의 밧줄이 하늘에서 내려와 프리키의 몸을 꽁꽁 감쌌다.
“오.”
꽉 조이는 밧줄에 프리키의 몸에 숨겨져 있던 힘이 드러난다. 프리키 녀석… 그렇게 안 봤는데, 상당한 힘을 숨기고 있었어.
– 찌릿
“크, 흐흠! 프리키가 이, 일단 살아있는 것 같으니까 다행이네!”
케넬름의 날카로운 시선과 함께 움찔하는 그녀의 장도리.
어쩐지 정수리가 욱신거리는 오싹함에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휘이이잉.
불어오는 바람에 으슬으슬 몸이 떨린다. 일단 상황이 일단락 된 것을 확인했으니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띠, 띠띠띠ㅡ
집에 들어서고 곧바로 옷을 갈아입는 동시에 침대로 몸을 날렸다. 푹신한 침대와 함께 하루의 고단함이 녹아내린다.
“흐어, 으어어…”
졸리다…
가물가물 눈이 감기고… 이대로 자면 진짜 편할 것 같은데……
챱!
별빛을 손에 모아 있는 힘껏 스스로 따귀를 갈겼다.
“할 일은 해야지!”
화끈한 열감이 볼에 남았다. 수마가 기겁하여 달아나는 것이 느껴진다.
“자아. 이제 한번 정산해 봅시다.”
프리키와의 전투에서 실질적으로 내가 소비한 돈은 겨우 5만 8천 원뿐이다. 장판 스킬 하나 ‘딸깍’ 했더니 에샤와 루나가 알아서 이겼다.
‘씁. 뭔가 조금 아쉬운… 아니. 이게 무슨 미친 발상이야.’
내 몸에서 나가, 흑우의 신!
고개를 털어내고 에샤와 루나의 상황을 확인했다.
이번 전투의 일등 공신, 2인 케리의 정석을 보여준 든든한 국밥 딜러들 되시겠다.
– “ㅡㅡㅡ그래서 우리는 이제 동쪽으로 갈 거야. 엘프들을 만나기 위해.”
– “동쪽이라. 아주 긴 여정이 되겠군.”
– “…응. 아주 긴 여행이 되겠지. 그래도 괜찮아. 우리한테는… 시간이 충분하니까.”
– “시간이라. 훗. 난 너만 있으면 된다.”
– “ㅡ으읏…! 그, 그, 그건…… 나, 나도… 나도 그래…”
“크아아아악!!”
곧바로 화면을 끄고 말았다!
도대체 뭐야! 내가 뭘 본 거야! 방금 그 달짝지근하고 알콩달콩한 대화는 도대체 뭐냐고!!
에샤와 루나 사이에 흐르는 기류는 옅은 분홍색이었다.
나 같은 모쏠에게는 극독이나 다름없는 종류. 어쩔 수 없이 프리키의 상황을 확인하기로 했다.
– “……흑, 흐으윽, 끄흑, 이, 일어나렴… 으응? 프리키… 우리 딸 프리키…”
– “………하, 하나 된 분이시여. 부디 저희의 하나뿐인 딸을 가엽게 여기소서…”
“으음.”
에샤, 루나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
빛의 밧줄에 묶인 프리키는 작은 천막에 누워 있었다. 루나의 부모님이 프리키의 손을 꼭 잡은 채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할 수 있다면 최대한 프리키를 죽이지 않고 싶었다.
‘대악마들은 어떻게 보면 내 원죄를 상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녀석들이니까.’
과거의 나로 인해 심연에 떨어져 타락한 존재들.
미숙했던 나의 실수로 인해 탄생한, 가엽고도 딱한 것들이 바로 대악마들이다.
녀석들을 볼 때마다 마음 한편이 절로 무거워진다.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 선배님이 이런 심정이었을까.
‘물론 예수 선배님은 인류의 원죄를 짊어진 거고, 나는 내 업보지만…’
아무튼.
우선 프리키의 뒤틀린 영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말뚝’의 파악이 중요했다.
‘나와라! 만능 색안경! 얍!’
지금까지는 퍼즐 푸는 느낌을 만끽하기 위해 아껴왔지만, 이제 그런 거 따질 상황이 아니다.
딸깍.
머릿속에서 버튼 눌리는 소리가 들리며 촤르륵- 무수한 단편 사진들이 펼쳐진다. 나에게만 보이는 과거의 흔적이자 미래로 이어지는 발자국이다.
“어디 보자… 그러니까…”
손짓을 따라 쭉쭉 넘어가는 사진들 속에서 내가 원하는 장면을 찾아냈다.
프리키와 루나, 에샤가 최초로 만나는 장면이다.
“자. 한번 보자.”
나는 곧바로 자리에 앉으며 감상 모드로 들어갔다.
촤라라락-! 흑색의 사진이 영화처럼 움직이며 과거의 흔적을 펼쳤다.
ㅡㅡㅡ그리고 모든 상황을 알게 된 나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
“끄흐으윽, 허윽, 흐으윽…! 흐으으윽… 끄하아아아……”
너무 슬프잖아!
프리키, 넌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 온 거냐! 심연에서 얼마나 모질게 살아 남은 거냐고!
젠장!
루나와 에샤! 너희는 행복해라! 너희 둘은 순애를 할 자격이 있다!
최루탄을 맞은 것처럼 눈물이 줄줄 흐른다.
그렇게 한참이나 침대에 앉아 궁상맞게 눈물을 짜내고 있자니, 핸드폰에서 주춤주춤 케넬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 음…… 저어. 그래서 프리키의 그, 말뚝은 도대체 뭔가…요?”
“끄흡, 으, 흐으윽, 하읍, 아. 그, 그건 말이지…”
아.
‘색안경’은 음성 지원이 안 돼서 그건 모르는데.
“……어, 그건…… 음.”
– “……어휴.”
– “…하나 된 분께서는 은근히 이런 곳에서 칠칠치 못하시군요……”
나긋나긋하게 할 말 다 하는 리아의 말이 시리도록 팩트였다.
* * * * * *
《곤란하군.》
프리키가 사라졌음을 깨달은 발가르의 소감이었다.
이건 정말로 곤란했다.
‘아리오크와 테니아의 뒤를 이어 프리키까지. 벌써 세 번째다.’
발가르 휘하의 부하가 죽거나 실종된 것이 벌써 세 번째라는 말이다. 다른 악마도 아니고, 마왕이 직접 거둔 최측근의 대악마가 벌써 셋이나 죽거나 실종이라니?
이는 마왕 발가르의 권위와 위엄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는 사항이었다.
《…지상으로 간 것인가.》
프리키가 어디로 갔는지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마왕성 내부라면 발가르의 시야 아래 훤히 놓여 있는 공간이었으니.
문제는 지상이 발가르에게 허락되지 않는 곳이라는 것.
‘그렇다고 이를 마냥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당장 펜리르만 하여도 요 며칠 동안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심히 불순하다. 펜리르가 그 정도라면 훨씬 밑의 악마들은 어떨지 안 봐도 훤하다.
‘…본보기로 몇 놈을 죽여야 하나?’
압도적인 힘과 공포는 가장 쉬운 통치 수단이다. 대신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복종을 끌어내기 어려웠다.
《아니. 너무 단기적인 방법이다. 내가 영원토록 공포로 통치할 수는 없는 일이니.》
한참을 고민하던 발가르가 옥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한참이나 머뭇거리며 주춤거리다가 마음을 다잡은 듯 걸음을 옮긴다.
얼어붙은 탄식을 쥐고 가볍게 발을 구르니 순식간에 마왕성 바깥이었다.
발가르는 그대로 한참이나 광야를 내달렸다.
우뚝 솟은 마왕성이 심연의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이윽고 기척이 없는 곳에 도착한 발가르가 하늘을 우러르며 힘차게 외치기를.
《어버어시여, 지고한 어버이시여! 그대의 피조물이 이렇게 외치노니, 부디 저의 간절한 부름을 들어주소서!!》
ㅡ들어주소서 ㅡㅡ어주소서 ㅡㅡㅡ소서…
메아리치는 발가르의 외침이 점점 작아질 무렵.
번쩍! 보랏빛 가득한 심연의 하늘에 작은 섬광이 일며 일곱 개의 별이 눈동자를 그리며 황홀하도록 빛나는 것이 아닌가.
발가르는 곧장 무릎을 꿇으며 어버이를 배알했다.
《어버이시여. 그대의 피조물이 당신을 찬미하옵나이다.》
이에 사방천지의 만물이 하나 되어 목청껏 말하기를.
《발가르, 발가르 칸 가르데나. 말하라. 나의 귀는 너를 위해 열려있노라.》
이에 발가르가 그간 있던 일을 차근차근 읇조렸다.
프리키의 실종으로 마왕의 권위가 흔들리고 있음을. 그리하여 심연의 통솔이 어려워지고 있음을.
《…그러니, 으음. 그러니까 제가 어버이께 감히 드리고 싶은 말은…》
발가르가 한참이나 입술을 달싹이다가 어렵사리 말문을 이었다.
《……혹시 제가 직접 지상으로 향하여 프리키를 잡아 와도 되겠나이까?》
무려 발가르의 첫 지상 외출 신청이었다.
* * * * *
“흠?”
발가르의 부탁을 들은 나는 절로 눈을 찌푸렸다. 발가르의 상황은 이해했지만, 그렇다고 직접 지상으로 가겠다니?
나에게 리스크가 크지 않나 싶었다.
막말로 발가르가 지상에 나갔다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아니, 그래도 발가르가 그동안 보여준 것들을 생각하면 믿어 볼 만한가?’
그간 발가르는 심연에서 내가 시킨 일들을 묵묵히 해냈으며, 작은 불평불만 한번 없던 녀석이다.
매번 나를 어버이라 부르며 따르는 녀석인데, 내가 직접 가지 말라 했던 지상에 가고 싶다고 말하기까지 얼마나 많이 고민했을 것인가.
거기에 미우나 고우나 내가 만든 내 새끼인데. 내가 믿어주지 않으면 세상 누가 믿어줄까?
크나큰 결심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발가르여. 내 너의 외유를 허하노니. 다만 너의 목적에 걸맞도록 곧장 프리키만을 향해야 할 것이다.》
– 《…! 가, 감사합니다! 어버이의 은혜를 찬미합니다!》
발가르가 활짝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또 저리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내가 너무 과하게 걱정했나 싶었다.
‘생긴 것이 조금 험악해서 그렇지 애는 착해.’
……혹시 모르니까 안전장치로 쓸 스킬은 조금 준비해둘까?
《내가 적절한 시일을 일러줄 테니 그리 알고 있거라.》
일단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 발가르를 돌려보냈다.
상점창을 무지성으로 슥슥 훑다 보니까 번뜩 신적인 영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까 이대로 있으면 밤의 일족을 다시 성지로 들어오게 해야 하잖아?”
녀석들을 성지에서 내쫓으며 내건 조건은 아이야테르 산에 얽힌 비사의 조사. 녀석들은 그걸 훌륭하게 해냈다.
이대로 있으면 꼼짝도 못 하고 다시 성지로 들어오게 해야 할 판이었다.
‘…아니지. 어차피 발가르가 프리키를 다시 심연으로 잡아간다고 했잖아? 그러면 그걸 꼬투리 삼아서 밤의 일족을 계속 지상에 머무르게 하면 되겠는데?’
성지는 변화가 없는 완벽한 땅이다.
밤의 일족이 성지에서 계속 지낸다면 언제까지고 영원히 히키코모리 아싸찐따로 남을 거라는 소리다.
녀석들의 정상적인 사회 활동 복귀를 위해서라도 이게 맞는 거다.
‘오? 그러면 겸사겸사 발가르한테 프리키의 말뚝이 뭔지 알아내라고 해도 되겠는데?’
외출 한번 하는 걸로 일을 몇 개나 시키는 건가 싶겠지만, 꼬우면 발가르도 부하 시키면 된다. 원래 유능한 부하를 열심히 굴리는 만큼 내가 편해지는 법이니까.
좋아.
완벽하게 계획을 정리한 뒤, 곧바로 발가르를 호출했다.
– 《어버이시여. 부르셨나이까?》
넙죽 엎드린 발가르를 향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그대에게 몇 가지 임무를 하달하노니. 발가르여, 너는 마땅히 이를 엄중히 행해야 할 것이다.》
너, 나하고 일 하나 같이 하자.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엄청나게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
– ‘신선우’님…!! 흐익…!!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저 글쟁이, 독자님의 추천과 댓글만 있다면 삼시 세끼를 굶을 수 있습니다…!! 추천과 댓글만 먹어도 배가 든든하거든요…!!! 끼요오오오옷!!!! 항상 사랑함니다!!!! 꼬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