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3화. 폴과 함께 ( 4 )
《연옥의 모든 것은 이를 창조하신 위대하신 분의 것이다. 우리는 이를 잠시 빌렸을 뿐, 결국 이 땅의 모든 것은 위대하신 분에게 있음이다.》
미카에르의 판결이 이어진다.
《세 살 아이가 어미의 암탉을 훔친 것과 성인이 암탉을 훔친 것을 동일하게 볼 수는 없는 것처럼. 피고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었을 것이다. 설령 그것이 꽃 한 송이라 할지라도.》
“아…….”
《피고의 행동에 악의가 없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지만, 연옥의 재산을 훔친다는 것은 위대하신 분의 것을 훔치는 것.》
폴이 고개를 푹 숙였다.
저 멀리 형벌 측 천사들은 저들끼리 악수하며 고생했노라 떠들고 있었다.
《이에 선언하겠다. 피고가 연옥의 꽃을 꺾은 뒤 이를 소유한 것은, 악행이다.》
가벼운 절도, 아니 절도라고 보기에도 민망한 사건이었다.
고작 꽃 한 송이.
허나 그 대상이 연옥에 핀 꽃이라는 것과 연옥의 모든 것은 위대하신 분으로부터 빌려왔다는 미카에르의 충성심이 판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쿵.
작은 추 하나가 폴의 천칭에 떨어졌다.
아주 작은 추였다. 허나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던 천칭의 균형을 무너뜨리기에는 충분한 무게였다.
선행의 천칭이 위로 올라가고, 폴과 악행의 천칭이 내려온다.
악행이 선행보다 무거웠다.
“이, 이런…….”
가이에드가 낭패라는 표정을 지으며 필사적으로 반론했다.
미카에르는 이를 받아주지 않았다.
《불허한다. 판결은 위대하신 분에게 천칭과 검을 받은 나의 이름으로 선언되었다. 이는 되돌릴 수 없다.》
폴이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제비꽃을 꺼냈다.
연보랏빛의 제비꽃 한 송이.
“………여보.”
《최종 판결하겠다. 피고는 선언된 악행이 선행보다 무거운 바, 이에 축생문을 선고한다!》
미카에르가 단호함을 상징하는 검을 뽑으며 그리 선언했다.
쿠구구구궁.
미카에르의 등 뒤로 문 세 개가 솟구친다.
각각의 문에는 화려한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좌측에는 아름다운 구름과 날개가, 가운데에는 넓은 평원과 나무가, 우측에는 송곳니와 발톱의 문양이 있었다.
가장 우측, 송곳니가 새겨진 문이 천천히 움직이며 열리기 시작했다. 미카에르의 판결에 따라 축생문이 열리는 것이다.
“……이 또한 나의 업보겠지.”
천칭에서 내려온 폴은 터덜터덜 축생문을 향해 걸어갔다. 축 처진 그의 어깨가 초라했다.
“이, 이, 이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가이에드가 미카에르의 바로 앞까지 뛰쳐나오며 고함쳤다.
뜻밖의 난동에 모두가 가이에드를 바라봤고, 폴도 걸음을 멈추고 가이에드를 바라봤다.
“존경하는 미카에르 재판장님! 연옥의 모든 것은 위대하신 분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맞습니까?”
“이 무슨 무례한ㅡ!”
《그렇다.》
가이에드를 끌어내려는 형벌 측을 제지한 미카에르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카에르의 푸른 눈에는 흥미가 가득했다.
“그렇다면! 마땅히 주인의 의견 또한 들어봐야 함이 옳지 않겠습니까! 주인께서 용서하신다면 피고인의 악행 또한 인정되지 않을 것 아닙니까!”
“허…!”
《하하하하하하하ㅡ!!》
당돌한, 심지어는 무례하게 들리는 가이에드의 말에 미카에르가 웃음을 터뜨렸다.
《너의 말이 옳다. 허나 위대하신 분에게 어찌 여쭤볼 것이나? 그분께서는 공사다망하신 분이다.》
미카에르가 부드럽게 웃으며 질문했다.
가이에드는 주먹을 굳게 쥐고선 대답했다.
“저의, 모든 것을 걸고서 위대하신 분에게 여쭤보겠습니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저 변호인 가이에드! 증인으로 위대하신 분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것이 가능할리가ㅡ!”
《하하하하하하하ㅡ! 좋다, 증인 요청을 인정하겠다. 그러나 위대하신 분을 부르는 것은 오롯이 너의 몫이다. 할 수 있다면 해보거라.》
“…해보겠습니다. 아니, 해내겠습니다!”
가이에드가 각오를 다졌다.
미카에르가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당찬 아이를 보는 듯 따뜻한 눈빛이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느냐? 피고는 너에게 그저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망자 중 하나에 불과할 텐데.》
“누군가를 위함에 있어 이유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하는 것뿐입니다.”
《다정하고 착한 아이구나. 너 같은 아이는 싫어하지 않는다.》
결연하게 앞으로 나온 가이에드가 공손히 무릎을 꿇으며 기도를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 밝은 빛이 하나둘 흘러나오더니, 이윽고 점점 밝은 광휘를 뿜어냈다.
위대하신 분은 가이에드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높은 격을 가졌다.
태양 앞의 촛불이며, 거목 앞의 개미와도 비슷하다.
그러니 위대하신 분에게 가이에드의 의지를 전달하려면, 작게나마 신호라도 보내기 위해서는 그의 모든 것을 불태워야 했다.
설령 그의 근원, 날개를 태우는 한이 있더라도.
“끄윽, 꺽, 흐으으으윽, 커허억……….”
빛이 강해짐에 따라 가이에드의 신음이 점점 커졌다.
순백의 깃털이 한 올 한 올 불타며 사라진다.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챈 폴이 눈물을 글썽이며 가이이드를 바라봤다.
“가, 가이에드. 도, 도, 도대체 어째서….”
가이에드는 고통으로 찡그려진 얼굴을 애써 미소 지었다.
소리 없이 입만 뻥긋거리며 무어라 말한다.
‘아내를…… 만나셔야…죠…?’
폴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흐른다.
이윽고 가이에드의 몸에서 나오는 빛이 태양처럼 강해졌다.
화아아아악!
“으으윽!”
“누, 눈이!”
재판장이 환한 빛에 휩싸였고,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ㅡ
《흥미롭도다.》
지엄한 일곱 개의 별이, 눈동자의 형상을 그리며 모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창조주를 뵙습니다!》
““위, 위대하신 분을 영접합니다!””
미카에르가 곧장 무릎을 꿇었고, 그 뒤를 이어 사태를 깨달은 천사들과 폴이 엎드렸다.
기진맥진하여 바닥에 쓰러진 가이에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의 하얀 날개 두 장은 까맣게 타버린 채였다.
《미카에르. 이게 무슨 일이더냐. 누가 나를 부른 것이지? 네가 나를 불렀느냐?》
《아닙니다 창조주시여. 여기 쓰러진 아이가 불렀습니다.》
미카에르는 그간 있던 일을 낱낱이 고했다.
전후 사정을 들은 일곱 개의 별이 웃음을 터뜨리는 듯 한껏 휘어졌다.
《참으로 당돌하고 당차구나! 그래, 나를 증인으로 불렀다고? 무엇을 증언하면 되겠느냐. 어서 재판을 이어가거라.》
《그, 어흠. 아, 알겠습니다.》
심지어 위대하신 분께서 몸소 증인으로 출석하셨다!
미카에르가 슬쩍 눈치를 보며 긴장했고, 형벌 측 천사들은 덜덜 떨며 입을 열지도 못했다.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위, 위대하신 분께서 증인으로?’
‘이런 재판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미카에르가 조금 떨면서 재판을 개시했다.
《크, 크흠. 자리에 위치한 즈, 증인께서는 말씀 부탁드립니다.》
사실 조금 전에 최종 판결까지 전부 끝냈지만, 인제 와서 그런 것을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위대하신 분이 하사한 천칭과 검의 이름으로 선언된 판결이고 나발이고.
천칭과 검을 준 본인이 직접 왔는데 무슨 수가 있겠는가!
미카에르는 눈치를 보다가 등 뒤에 자리한 세 개의 문을 빠르게 치워 버렸다.
《그래. 폴? 나의 꽃밭에서 꽃을 꺾었다고?》
“흐이아악! 예, 예에…! 주,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요! 느, 늙은이가 배운 것이 없어서 그만!”
《어찌하여 꽃을 꺾었느냐?》
폴이 덜덜 떨며 간신히 대답했다.
인간에게 신의 시선은 너무나 버거웠다.
“그, 그, 그것이 주, 죽은 아, 아내가 좋아하던 꽃이라서……! 혹시 이곳에서 만날까 싶었기에 선물로 주려고…….”
《호오. 아내를 위해서? 아내의 이름이 무엇이더냐.》
“마, 마리라고 하옵니다.”
《마리, 마리……. 흐음. 아. 그렇구나. 부부의 연이라. 과연.》
무엇을 말씀하시는 걸까?
폴은 문득 궁금해졌지만 감히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좋다 미카에르. 증언하겠다. 나는 폴이 꽃을 꺾고 훔친 것을 용서하겠노라.》
《예, 창조주시여. 그리 될 것입니다.》
미카에르가 폴의 천칭에 걸려 있던 작은 추 하나를 잽싸게 치웠다.
천칭은 선업을 향해 기울어졌다.
《그러면 이제 저 폴이라는 노인은 인간문으로 가는 것이냐?》
《예. 그렇습니다.》
쿠구구궁!
방금 전과 다르게 인간문만 솟구치며 올라왔다.
위대하신 분께서 인간문이라 하셨으니 인간문 말고는 달리 올라올 이유가 없었다.
《피고는 인간문으로 향하라. 재판은 끝났다.》
미카에르의 최종 판결 선언이고 뭐고 죄다 생략한 초 스피드 재판!
사실 재판장에 위대하신 분이 강림한 순간부터 이는 예견된 일이었다.
폴은 덜덜 떨리는 다리를 재촉하며 인간문으로 향했다.
어서 빨리 들어오라는 듯 인간문이 활짝 열린 채 기다리고 있었다.
《폴.》
“예, 예에!”
신의 부름에 쇠약한 심장이 쿵, 한 번 더 죽을 뻔했다.
《부부의 연이란 참 아름다운 것이다. 그렇지 않느냐?》
“……? 그, 그렇습니다요.”
《그 제비꽃은 선물로 주겠다. 그러니 잘 간직하고 있다가 아내를 만나면 선물로 주도록 하거라.》
“………! 가,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제야 신의 말씀을 깨달은 폴이 눈물을 펑펑 흘리며 연거푸 절을 했다.
《어서 가거라. 저 문을 통과하면 이번 생의 모든 기억이 사라지고, 다음 생이 시작될 것이다.》
보다 못한 미카에르가 재촉하고 나서야 폴은 인간문 너머로 사라졌다. 한 손에는 행여나 놓칠까 제비꽃 한 송이를 꼭 잡은 채였다.
“…….”
“…….”
《…….》
재판이 끝났다.
헌데 증인으로 오신 위대하신 분은 물러나지 않았다.
미카에르와 형벌 측 천사들이 은근히 눈동자를 굴리며 눈치를 봤다.
《후후. 가이에드. 착하고 올곧은 성품이로다.》
위대하신 분은 아직도 쓰러져 있는 가이에드를 유심히 바라봤다.
작은 별 하나가 퐁 솟아나더니 가이에드의 몸에 스며든다. 흉하게 불탔던 날개에 깃털이 돋아나더니, 두 장의 날개가 풍성하게 자라났다.
헌데 두 장의 날개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세 장, 네 장의 날개가 더 자라났다.
가이에드는 총 여섯 장의 날개를 가진 천사가 되었다.
《미카에르. 너의 고생이 많음은 알고 있다. 조만간 너를 도울 아이들을 보낼 것이니, 우선 가이에드를 중히 쓰거라. 내가 이 아이에게 작은 선물을 줬노라.》
《받들겠습니다, 창조주시여.》
《이번 일은 재미있었지만, 앞으로 나를 증인으로 부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니라. 지엄한 재판의 공정함이 깨질 우려가 있지 않느냐.》
《명심하겠습니다.》
찬란히 빛나던 일곱 개의 별이 스르륵 사라졌다.
일대를 짓누르던 위압감이 사라지자, 천사들은 바닥에 주저앉으며 가쁜 숨을 뱉었다.
“헉, 흐윽, 허으윽…! 도, 도대체 우리가 뭐, 뭘 본 거야?”
“위, 위대하신 분께서 정말 증인으로 재판에 출석하시다니!”
“이, 이이이런 일이 가능한 거였어?”
대답을 바라는 천사들의 눈동자가 미카에르를 향했다.
미카에르는 그 시선을 모른 체 했다.
《물러가거라. 재판은 끝났다.》
미카에르의 말에 천사들이 재판장 밖으로 우르르 달려 나갔다.
《………흐음.》
미카에르는 가만히 쪼그려 앉아서 시체처럼 누워있는 가이에드를 바라봤다.
가이에드를 일손으로 쓰라 하셨지?
선물을 줬으니 아주아주 중히 쓰라고?
《………후후후.》
미카에르가 음흉하게 미소지었다.
24시간 일 년 내내 몰려드는 망자의 행렬!
미카에르는 연옥이 탄생한 이래 단 일 분도 쉰 적이 없었다. 낮에도, 밤에도 그는 계속해서 재판을 해야 했다!
그런데 이제 일을 떠넘길, 아니 분배할 후임이 나타난 것이다!
미카에르는 곤히 쓰러진 가이에드가 너무 이뻐 보여서 참을 수가 없었다.
비록 가이에드가 증인으로 창조주를 부르는, 희대의 대사건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웃으며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기분이 매우매우 좋았다!
《어서 일어나거라 후후후후. 너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구나.》
“…….”
움찔.
기절한 가이에드가 오한을 느낀 것인지 몸을 떨었다.
자신에게 닥쳐올 미래를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일까?
《좋구나, 후후후. 아주 좋아! 어서 일어나서 나와 함께 재판을 하자꾸나!》
“……….”
모두가 행복해진 재판이었다.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엄청나게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마음에는 크고 작음이 존재하지 않으니, 항상 과분하고 거대한 사랑 뿐!!! 항상 응원과 사랑을 보내주시는 독자님에게 제가 할 수 있는 보답은 열심히 글을 쓰는 것이겠죠…!!! 그러니 열심히 글을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