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440

       ​

       ​

       ​

       ​

       ​

       440화. 펜리르 ( 5 )

       ​

       ​

       ​

       ​

       ​

       결투 축제가 한창이던 콜로세움에 펜리르와 마왕이 나타나던 그때.

       빛으로 빚어진 신성한 신수, 유니콘은 어디에서 뭘 하고 있었을까?

       ​

       《푸히히히힝!》

       ​

       성도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외딴 숲.

       유니콘이 행복한 울음을 터뜨리며 한 처녀의 곁을 빙빙 맴돌았다.

       ​

       “아니, 저기…. 이, 이제 조금 가주시면 아, 안될까요…?”

       ​

       시골 처녀 특유의 주근깨와 조금 짙은 구릿빛의 피부가 인상적인 처녀는 곤란한 듯 유니콘의 주둥이를 계속 밀었다.

       ​

       유니콘은 꿋꿋하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푸쉭, 푸쉬식 콧김이 매우 거셌다.

       ​

       《처녀여…. 그대, 한여름의 태양을 품은 처녀여. 나는 그대의 고단함을 알고 있다오.》

       ​

       “아. 네…. 그, 그러니까 이제 저기, 제가 이제 물을 뜨러 가야 되거든요? 그, 그러니까 이제 좀… .”

       ​

       힘으로는 한참이나 밀리는 탓에 어찌하지도 못하는 처녀.

       유니콘은 처녀의 곤란함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지, 꼬리만 거세게 흔들 뿐이었다.

       ​

       《그대가 원한다면 내 기꺼이 그대를 내 등에 태우고 저 하늘을 힘차게 날아줄 수 있다오.》

       ​

       “그러니까 좀 비켜주시면.”

       ​

       《저 구름도 그대의 아름다움 앞에서 부끄러워 숨어버릴…으음?》

       ​

       한참이나 낯간지러운 소리를 지껄이던 유니콘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헤벌쭉 기분 나쁘게 녹아내렸던 눈동자는 총명한 빛이 가득하였고, 신성을 품은 일각이 영롱하게 광휘를 비췄다.

       ​

       “저는 이만 가, 가볼게요!”

       ​

       그 틈을 타 처녀가 후다닥 언덕길을 달려 도망쳤다.

       유니콘은 처녀를 붙잡을 생각도 없이 어딘가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

       《………이건?》

       ​

       또각, 또각.

       ​

       걸음걸음에 맑은 종소리가 울리는 듯하더니, 유니콘의 일각이 허공을 쿡 찔렀다.

       허공이 쩍 찢어지며 차원의 벽이 부드럽게 열려 그 내부를 보였다.

       ​

       유니콘은 자연스럽게 균열 너머로 걸음을 옮겼다.

       ​

       온통 허무로 가득한 차원과 차원의 틈.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무의 공간.

       ​

       《…분명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아야 할 터인데.》

       ​

       온통 암흑으로 가득 찬 공간에서 유니콘의 일각이 환하게 빛을 내뿜었다.

       위, 아래, 좌, 우, 안과 밖이 사라지는 차원과 차원의 틈에서 유니콘은 어딘가로 걸음을 옮겼다.

       ​

       《이쪽인가.》

       ​

       슈와아악!

       ​

       유니콘의 일각이 더욱 환하게 빛을 흩뿌리며 사방의 어둠을 걷어냈다.

       ​

       《도대체 이건…?》

       ​

       어딘가에 도착한 유니콘이 의아하게 사방을 둘러봤다.

       ​

       뻥 뚫린 차원의 틈이, 마치 거대한 무언가 지나간 듯한 땅굴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

       차원과 차원의 틈에 존재하는 허무라는 것은, 차원이라는 것은 본래의 형상으로 돌아가려는 향상성을 갖고 있다.

       ​

       아무리 찢고 가르고 부숴도, 차원은 결국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성질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어느 무식한 신처럼 아예 박살을 내버리는 건 또 다른 문제였지만.

       ​

       《파괴된 차원이…… 돌아오지 않는다?》

       ​

       거대한 무언가가 지나간 것처럼 뻥 뚫려버린 차원의 틈.

       이런 것을 난생처음 본 유니콘은 황급히 걸음을 재촉했다.

       ​

       《마치, 지렁이가 파먹고 지나간 듯한….》

       ​

       차원의 틈을 파먹은 듯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득하게 이어진 구멍.

       유니콘은 그 끝을 확인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

       수수께끼의 차원 땅굴은 지상과 무척이나 가까운 곳에 있었다.

       ​

       이것이 앞으로 얼마나 후환으로 닥쳐올지 잠시 가늠해본 유니콘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

       《알려야 한다. 이 사실을 나의 창조주께 알려야 해.》

       ​

       사명감으로 불타는 유니콘이 눈부신 휘광과 함께 마른하늘을 박찼다.

       그는 바람보다 빠르게 달려서 곧장 신에게 모든 것을 알리리라.

       ​

       《아니. 저기 연못에서 처녀들이 씻고 있잖아?》

       ​

       …신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는 데 조금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

       ​

       ​

        * * * * *

       ​

       ​

       ​

       – 《계약자여, 집중해라. 녀석은 안개 속에서 기척을 감추는 것에 능하니 온 감각을 집중하여ㅡ》

       ​

       “나도 아는 내용은 그만 떠들어!”

       ​

       용왕은 안개에 갇힌 이후로 쉬지 않고 떠들었다.

       덕분에 한스는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

       가뜩이나 안개 속에서 덮쳐오는 펜리르의 공격을 막기 위해 온 정신을 곤두세우고 있는 중인데.

       용왕이라는 작자가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훈수나 두고 있다니.

       ​

       촤아아악!

       ​

       “끄하아악!”

       ​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렸나. 크르르르. 너의 공포가 점점 짙어지고 있구나….》

       ​

       사각에서 튀어나온 펜리르의 날카로운 발톱이 한스의 어깻죽지를 스치고 지나갔다.

       붉은 피가 후두둑 떨어지며 안개 속으로 침전했다.

       ​

       한스가 뒤늦게 롱소드를 휘둘렀지만 허무하게 안개를 가를 뿐이었다.

       ​

       -《옆을 봐라, 계약자!》

       ​

       매섭게 닥쳐오는 돌풍이 살점과 뼈를 갈아버릴 기세로 닥쳐왔다.

       부리나케 몸을 던진 한스의 등 뒤로 검은 그림자가 허공에서 뚝 떨어진다.

       ​

       《크르르르! 너의 피로 나의 목을 축이리라!》

       ​

       “으으윽!”

       ​

       아슬아슬하게 반응한 한스가 롱소드로 목을 가렸다.

       ​

       한스의 팔뚝만 한 펜리르의 송곳니가 한스의 목덜미 바로 앞에서 가까스로 멈췄다.

       펜리르의 아가리에 물린 롱소드에서 미친 듯이 불똥이 튀었다.

       ​

       “끄으으으읍! 냄새나는 아가리 치워!”

       ​

       위에서 무게까지 싣고 있는 펜리르의 몸이 천천히 밀리기 시작한다.

       실로 가공할 괴력에 펜리르는 내심 당황했다.

       ​

       ‘이것이 정녕 인간의 힘일 수 있는가. 역시 ■의 총애를 받는 녀석은 달라도 뭔가 다르구나.’

       ​

       이에 더욱 살의가 짙어진다.

       ​

       한스의 위에서 훌쩍 뛰어오른 펜리르의 형상이 안개로 흩어졌다. 

       ​

       “어디야, 당장 나와! 나오라고!”

       ​

       분에 찬 한스가 사방으로 롱소드를 휘둘렀지만 펜리르는 보이지 않았다.

       휘오오오오! 대답 대신 닥쳐오는 것은 매서운 진공 칼날의 폭풍들. 

       ​

       펜리르의 안개에 들어온 이후로 위와 같은 전투를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었다.

       ​

       “허윽, 흐으읍. 후, 후윽. 이, 이대로는 흐읍, 정말 큰일 나겠는데.”

       ​

       어깨며 허벅지, 복부, 옆구리 등등. 피를 흘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슬슬 시야가 흐려지는 것을 인식한 한스는 초조한 듯 검을 붙잡았다.

       ​

       – 《계약자여. 나의 힘을 쓰거라. 다시 한번 용의 힘을 사용하는 거다.》

       ​

       “……그건 정말 최후의 수단이야.”

       ​

       용왕의 힘을 사용하는 건 정말 최후의 방법이었다. 매우 심각한 부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

       “그거 한번 쓰고 나면 한동안 폭염용왕흑살제 어쩌구 계속 이러고 다녀야 하는 거잖아….”

       ​

       – 《음. 그대가 벽을 넘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

       “……네 힘을 쓰는 거 말고 다른 방법은 없을까.”

       ​

       – 《흐음. 역경은 또 다른 말로 하자면 크나큰 도약이 되는 법. 그대가 정말 기막힌 기연으로 벽을 넘어서, 이 기묘한 안개를 통째로 가를 수 있다면 승산이 있겠군.》

       ​

       결국 모든 것은 ‘벽’을 넘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

       한스는 답답해서 미칠 노릇이었다.

       ​

       “그게 됐으면 내가 이 고생을 안 하고 있겠지!”

       ​

       안개에서 튀어나오는 펜리르의 발톱을 쳐낸다. 롱소드의 날을 세워 펜리르의 몸통을 찔렀다.

       ​

       ‘얕았어…!’

       ​

       펜리르의 몸을 감싸고 있는 안개와 바람이 갑옷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케니스는 별빛을 활용해 이를 꿰뚫을 수 있었다. 별빛을 다루지 못하는 한스로서는 난감한 상황.

       ​

       까가강! 채앵! 

       ​

       “내가 도대체 뭘 해야 벽을 넘을 수 있는 건데. 여기서 뭘 더 해야!”

       ​

       터져 나오는 것은 울분.

       ​

       수련? 명상? 미친 듯이 해봤다.

       샛별을 보며 검을 휘두르다가 저녁별을 보며 쓰러지듯 잠드는 것이 일과였다.

       ​

       온갖 오지와 들판, 험지를 쏘다니며 검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강자와 대련이라면 마다한 적이 없었다.

       ​

       손에서 굳은살이 가시는 날이 없었으나.

       굳은살이 터지고 또 터지며 만들어진 딱딱하고 억센 손이 한스의 노력을 반증했다.

       ​

       이를 악물고 피가 나올 정도로 검을 휘둘렀다.

       그런데도 깨달음이라는 것은, 저 높디높은 벽이라는 요원하게도 고고하게 한스를 허락하지 않았다.

       ​

       “그 빌어먹을 깨달음이라는 게 도대체 뭐길래!”

       ​

       《아우우우우ㅡ! 그래, 그래! 그렇게 원망하고 분노해라! 너의 최후를 비참하게 울부짖으란 말이다!》

       ​

       한스의 울분이 짙어질수록 펜리르는 희열을 느꼈다.

       ​

       사냥감의 숨통이 흐려지는 그 찰나, 탁해지는 망막에는 무엇이 비출 것인가.

       ​

       이를 상상하기만 해도 영혼에 박혀 있는 그의 말뚝이 찌르르 흔들리며 전율하는 것 같은……. 전율을 느끼는…….

       ​

       ‘어째서냐?’

       ​

       놀랍도록 고요한 그의 영혼.

       두 개의 말뚝 중 복수를 새겨넣은 말뚝은 잠잠하게 침묵을 지켰다.

       ​

       마치 펜리르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처럼.

       혹은, 정말로 네가 이것을 원하는 것이 맞냐고 묻는 것처럼.

       ​

       까득.

       ​

       《나는 틀리지 않았다! 그럴 리 없다!》

       ​

       더욱더 거세게 일어나는 광풍에 한스가 다급히 물러났다.

       몰아치는 진공 칼날이 팔다리를 훑고 지나가는데 하얀 뼈가 숭숭 드러났다.

       ​

       – 《쯧. 돌아가는 꼴이 예술이구나.》

       ​

       보다못한 용왕은 넌지시 힌트를 주기로 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깨달음이고 자시고 죽을 판이었다.

       ​

       – 《계약자여. 그릇은 이미 완성되었다. 허나, 그릇의 쓰임새는 무언가를 담는 것으로 정해지는 법. 그대는 무엇을 담고자 하느냐?》

       ​

       “…뭐? 그게 무슨 헛소리ㅡ 으극!”

       ​

       – 《……. 》

       ​

       용왕은 더 이상 말 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줘야 할 단초는 모두 줬다. 여기에서 깨닫느냐 못 깨닫느냐는 계약자에 달린 것이다.

       ​

       “끄으으으윽!”

       ​

       펜리르의 발톱에 치인 한스가 허공을 붕 날다가 우당탕 나뒹굴었다. 퉷 시뻘건 침을 보아하니 속이 꼬인 모양.

       ​

       ‘그릇? 완성? 담기는 뭘 담아!’

       ​

       용왕은 뭔가를 알려준답시고 붕 뜬 선문답이나 던지고 앉아있고, 축 처진 팔다리가 물먹은 솜처럼 무겁기 짝이 없다.

       ​

       “도대체… 도대체 얼마나 더…!”

       ​

       강해야 이길 수 있는 것인가.

       몽롱한 정신 속에서, 펜리르의 형체가 둘 셋으로 분리가 되었다 합쳐지기를 반복했다. 

       ​

       기분 탓인지 펜리르의 아가리가 쩍 벌어지면서 가까워지는 것 같은.

       ​

       ‘피해야…….’

       ​

       무거운 다리가 느릿하게 움직인다.

       한스는 직감했다. 

       ​

       아, 이거 못 피하겠구나. 막아야겠다.

       허나 팔 또한 느릿느릿하니 답답하기 짝이 없다.

       ​

       “ㅡㅡㅡ이런…!”

       ​

       《이걸로 끝이다ㅡ!》

       ​

       몰려오는 당혹감.

       펜리르의 송곳니가 한스를 갈가리 찢어놓기 직전, 그림자 속에서 작은 신형이 바람처럼 튀어나왔다.

       ​

       “한스 님은, 내가 지켜!”

       ​

       콰앙!

       ​

       검붉은 아우라를 줄기줄기 흘리는 데이지의 신권이 펜리르의 옆구리 깊숙이 꽂힌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펜리르가 안개 속으로 날아갔다.

       ​

       “한스 님…! 몸이, 괜찮으세요?! 까득, 아드득. 용서 못 해. 용서 못 해. 용서 못 해. 용서 못 해. 으으으으으. 죄송,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내가, 제가 조금 더 빨리 끼어들었어야 했는데….”

       ​

       데이지가 탁한 눈으로 미친 듯이 중얼거렸다.

       진작부터 끼어들 수 있었지만, 한스의 몸에 상처가 늘어날 때마다 몸을 도려내는 듯 아팠지만.

       ​

       데이지는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한스의 분투를 지켜봤다.

       ​

       “뭔가 아슬아슬하게…… 벽을 넘으실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 그래서! 저는 정말로 한스 님을 위해서, 저, 저도 너무 괴로웠지만….”

       ​

       “………지켜? 지킨다… 지킬 수 있는…….”

       ​

       한스는 데이지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다만 멍한 눈으로 데이지가 외쳤던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

       ‘이건…!’

       ​

       데이지는 한스의 상태를 단번에 눈치챘다.

       ​

       깨달음의 실마리!

       한스은 벽을 넘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중요한 순간에 있었다.

       ​

       《크아아아아ㅡ! 넌 또 뭐냐, 작은 계집! 크아아아아!》

       ​

       “…ㅡ지금 한스 님을 방해하지 마ㅡ!”

       ​

       안개 속에서 뛰쳐나오는 펜리르를 향해 데이지가 몸을 던졌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

       ‘지킨다, 한스 님을…!’

       ​

       한스가 벽을 넘을 때까지.

       펜리르를 붙잡아 두는 것.

       ​

       ​

       ​

        * * * * *

       ​

       ​

       ​

       한스는 기묘한 공간에 서 있음을 자각핬다.

       자아와 의식의 경계, 무의식과 현실의 완충점쯤 되는 곳.

       ​

       ‘지켜, 지킨다……. 누군가를 지키는…….’

       ​

       머릿속에서 맴도는 것은 데이지가 외쳤던 단말마.

       한스는 멍하니 그 말을 되새겼다.

       ​

       그래.

       따지고 보면 자신이 힘을 원하기 시작한 것도, 힘을 얻은 것도, 그 힘을 쓰기로 한 것도.

       ​

       모두 누군가를 지키고자 함이었다.

       ​

       무지몽매한 농부 한스와, 롱소드를 들고 이 자리에 있는 한스의 차이는 무엇인가.

       ​

       “…누군가를 지키고자 싸울 수 있는 각오.”

       ​

       어느 새부턴가, 너무나 길고 많은 싸움을 겪으면서 그 절박했던 마음을 잊고 말았다.

       ​

       이 롱소드에 새겨진 무게와, 검을 들고자 했던 의미를.

       ​

       자신은 소중한 누군가를 잃고 싶지 않아서, 지키고자 했기에 검을 들었고, 기꺼이 앞으로 나아갔으며 싸움을 피하지 않았다.

       ​

       “…그 마음을, 너무 많은 피와 싸움으로 잊고 있었어.”

       ​

       그릇에 무엇을 채울 것이냐고?

       지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잃지 않고자 하는 절박함으로.

       ​

       《정답이로다.》

       ​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와 함께 저 멀리서부터 거대한 벽이 다가왔다.

       ​

       그토록 높고 웅장하게 솟아있던 벽은, 너무나 낮아져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로.

       ​

       “하하…. 참 바보처럼, 멀리도 돌아왔네.”

       ​

       한스는 쓴웃음을 흘리며 벽을 훌쩍 뛰어넘었다.

       발을 잡는 것은 없었다.

       ​

       한없이 가벼워진 몸은 날아가는 듯 뛰어올라 벽을 넘어섰고.

       ​

       “아ㅡ.”

       ​

       한스는, 끝도 없이 펼쳐진, 시야를 가득 채운 오색 찬란한 별의 바다를 목도했다.

       ​

       ​

       ​

        * * * * *

       ​

       ​

       ​

       갑작스레 발가르가 난입했을 때는 잠깐 뇌 정지가 왔지만, 이내 기회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

       – 《발가르, 아주 잘 와주었구나!》

       ​

       이대로 있다가는 펜리르의 복수고 나발이고 케니스가 펜리르로 멍멍이 보신탕 끓이게 생겼다.

       ​

       그러니 선수 교체다.

       발가르에게 귀띔하여 펜리르를 한스와 싸우도록 유도하고, 나머지 병력들은 발가르가 붙잡는다.

       ​

       “물론 나도 보고만 있으면 안 되니까 적당히 스킬을 쓰기는 해야지.”

       ​

       – 꽈릉! 콰르르릉!

       ​

       명색이 신인데 마왕을 보고만 있는 것도 이상하니까, 심심할 때마다 벼락이나 한 번씩 떨구고 있었다.

       신이 왜 직접 마왕을 족치지 않는 것인지 의구심을 품은 녀석이 나올 법도 하기는 했는데.

       ​

       – “시련은 고행길이요, 고행길이라 함은 이겨내고 성장하며 우리의 영혼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신께서는 우리에게 이겨낼 수 있는 시련만을 주시니! 우리는 승리하리라!”

       ​

       나름 그럴 듯하게 이유를 만들어 납득하고 있었다.

       ​

       “이러면 나야 좋지.”

       ​

       펜리르의 상대로 한스를 붙여준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

       하나, 일단 한스라면 일단 죽지는 않을 거다.

       ​

       용왕의 의수에 두 개의 룬, 사탕까지 그득그득 먹은 한스였으니 죽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

       ​

       둘, 한스가 펜리르를 죽이더라도 시간이 제법 걸릴 것이다.

       ​

       등장하자마자 케니스에게 줘터진 펜리르의 전투력을 예상하자면… 흠, 고작 이 정도인가? 싶은 수준이었다. 

       아마 아리오크가 더 세지 않았을까.

       ​

       그런데 웬걸.

       발가르가 펜리르한테 구정물을 한바탕 쏟아줬더니 우오오오 놈의 몸에 생기가 돌아온다! 뿐만 아니라, 잃었던 힘까지 전부 되찾았다는 것 아닌가.

       ​

       설마 했던 완전 회복에 이은 파워업 이벤트.

       ​

       이러면 한스한테 버겁겠는데 싶었지만, 뭐라 개입할 틈도 없이 펜리르가 한스, 데이지를 붙잡고 결계를 쳐버렸다.

       ​

       야스하지 못하면 나가는 종류가 아닌, 어느 한쪽이 죽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실로 살벌한 결계다.

       ​

       “음, 으으음. 이걸 지금이라도 말려야 하나…?”

       ​

       안개를 두른 펜리르가 한스를 미친 듯이 몰아붙인다.

       섣불리 개입하지 못하는 이유는, 결계의 한구석에 둥둥 떠 있는 일꾼 1호가 눈에 거슬리기 때문.

       ​

       어설프게 한스를 도우려 한다면 펜리르는 단숨에 일꾼 1호의 숨통을 끊어 버릴 것이다.

       

       “씁. 그런데 뭔가 여기서 내가 끼어들기에는 영 아닌 것 같단 말이지.”

       

       일꾼 1호 때문이 아니더라도, 느낌이 뭔가… 섣불리 끼어들기 어려운 느낌이 들고 있었다.

       혼자 걸음마를 시작하려는 아이를 보고 있는 것처럼, 위태로우면서도 저절로 응원하게 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한스를 보면서 그런 마음이 들고 있었다.

       

       “…일단 조금만 더 지켜보자.”

       

       당장 한스가 쉽게 죽지는 않을 것이다. 

       조금만 더 한스를 믿어보기로 했다.

       

       허나 상황이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

       ‘여기서 한스가 펜리르를 죽이게 둘 수도 없고… 펜리르가 한스를 죽이게 할 수도 없고….’

       

       진퇴양난, 오리무중.

       ​

       펜리르의 말뚝이 나에 대한 복수인 이상, 누군가의 파멸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

       “정말 방법이 그것밖에 없나…? 펜리르를… 죽이는 것?”

       ​

       꺼림칙하고, 손이 가지 않는 이 기분.

       나로 인한 피해자를 다시 한번 내 손으로 죽이게 된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우울하고 무력한 감정이 들게 했다.

       ​

       – 《크르르르ㅡ! 나는 틀리지 않았어! 틀리지 않았다! 이것이 나의 길이다.》

       ​

       “……?”

       ​

       갑자기 펜리르가 혼자 그리 외치며 발광했다.

       평소라면 그냥 흘려들을 수 있었겠지만….

       ​

       츠팟!

       ​

       “느낌이, 느낌이 와…. 뭔가 있어, 이 똥개 녀석.”

       ​

       예리한 무언가 스쳐가며 나에게 속삭였다.

       한스와 펜리르, 둘 중 하나가 죽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노라고.

       ​

       “시간이 필요해. 조금만 더….”

       ​

       하지만 색안경을 쓰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앗차하는 사이에 한스가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

       – “한스 님은 내가 지켜!”

       ​

       벼락처럼 튀어나온 데이지가 펜리르를 막아섰다. 눈에서 붉은 흉성이 흘러내리고, 주먹과 발길질에 꼬리가 남는 것이….

       ​

       “처, 천마 신권?”

       ​

       도대체 데이지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아니지. 일단 지금 생긴 기회를 알뜰하게 써먹어야 한다.

       ​

       – 딸깍.

       ​

       머릿속의 스위치를 누르자 시야가 단번에 반전되며, 온갖 기기묘묘한 것들이 펼쳐졌다.

       ​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느끼는 것에 가까운 감각.

       ​

       화사한 색채의 사진들이 길고 끝없이 펼쳐진다.

       앞으로, 뒤로.

       ​

       앞으로 향한 사진들은 펜리르의 미래였으며, 뒤로 이어진 것은 펜리르의 과거였다.

       ​

       ‘녀석의 과거에 분명 말뚝에 대한 힌트가 있을 거야.’

       ​

       펜리르 스스로 복수가 맞는 것이라며 외칠 정도로 확신이 없는 모습을 보여줬다.

       ​

       어쩌면 녀석의 말뚝이 복수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혹은, 자신이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일 수도 있고.

       ​

       손짓을 따라 사진들이 넘어간다.

       길고도 방대한 사진첩을 들추며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 얼마나 헤맸을까.

       ​

       “찾았다.”

       ​

       넓고 푸르른 초원에 누군가와 평화롭게 누워있는 펜리르의 모습.

       어지간히도 소중한 기억인지, 빛바랜 다른 기억들과 달리 유난히도 온전한 모습이었다.

       ​

       곧장 그 사진에 정신을 집중했다.

       한 편의 무성 영화처럼, 기억과 추억을 가만히 엿보았다.

       ​

       “어, 어흑…! 흐흐흑……!”

       ​

       그리고 나는 굵은 눈물을 펑펑 쏟았다.

       ​

       “내가…… 내가 미안해…! 내가 좆같은 신이라서 미안해…!”

       ​

       내가 죽일 놈이야!

       ​

       

       ​

       ​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엄청나게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

    오늘은 푸짐한 고봉밥… 입니다…!! 사실 분량 조절에 실패한거지만… 연참인 척 잘라보려고 했지만 그것도 실패한 거지만…!!

    아무튼 오늘은 조금 푸짐하게 준비했습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젠장, 한스..! 너는 잘생기고 힘도 세고 신의 총애도 받고…! 그런데 이제 벽마저 넘다니!! 한스의 억까는 여기서 끝나는 것인가…!! 한스는 굴러야 제 맛이기는 한데…!! 여기서 이렇게 한스라는 이름의 굴렁쇠는 멈추고 마는가…!!! 어흐흑 원통하군요!!!
    정말정말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다음화 보기


           


I Installed an Idle Weapon Crafting Game

I Installed an Idle Weapon Crafting Game

방치형 무기 만들기 게
Status: Ongoing Author:
Out of boredom, I downloaded an idle weapon crafting game.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