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1화. 펜리르 ( 6 ) ㅡ 수정됨
“쓰으으읍… 후우우우….”
눈을 감고 있던 한스가 깊게 호흡을 내쉬었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벽’을 넘어섰다. 그 너머의 풍경을 보고, 느끼고, 이름을 붙였다.
한스 나름의 방식으로, 영혼의 바다를 정의했다.
“…이런 느낌이구나.”
몸은 여전히 최악이었다.
철철 흘린 피는 바닥에 웅덩이처럼 고였고, 시야는 흐릿하게 흔들렸으며 다리는 덜덜 떨렸다.
그럼에도 온몸에 힘이 넘쳐 흘렸다.
– 《축하한다 계약자여. 드디어 작은 벽을 넘어섰구나.》
“고마워. 네 도움이 아니었으면… 아마 영원히 몰랐을 거야.”
한스가 쓰게 미소지었다.
‘벽’을 넘고 나서야, 왜 자신이 벽을 넘는 것이 이토록 힘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너무 과분하게도 많은 격을 품고 있었던 게 문제였어.”
신에게서 받은 수많은 은총, 신비한 룬 문자, 용왕의 의수, 이따금 생겨나던 이상한 맛의 사탕까지.
그 모든 것이 한스의 격을 비정상적으로 올리는 데 도움을 주는 신물들이었다.
농부 한스는 신물의 힘으로 과분한 격을 달성했다.
“모래사장 위에 쌓아 올린 탑이나 다름없었던 거야. 기둥이나 대들보 없이, 무작정 커다랗게 쌓아 올리기만 했던 성이지.”
그렇기에 남들보다 ‘벽’을 넘는 것이 유달리 힘들었던 것이다.
용왕의 말처럼, 이미 그릇은 화려하게 완성되었지만 내용물이 없었기에.
“한스 님! 성공, 크윽! 하셨군요!”
《크르르르! 쫄랑쫄랑 정신 사납게 뛰어다니는구나! 깨앵! 캐캥! 이 빌어먹을 계집ㅡ!》
데이지가 환하게 미소 지으며 주먹을 휘둘렀다.
붉은 꼬리가 유성처럼 남으며 펜리르의 복부를 두들겼다.
《캐앵!》
데이지가 오도도 뛰어왔다.
“고생했어 데이지. 정말로, 정말로 고마워. 덕분에 ‘벽’을 넘을 수 있었어.”
“헤헤. 아, 아니에요….”
데이지가 몸을 배배 꼬았다.
펜리르와의 싸움이 쉽지 않았는지 몸 전체가 흙이며 자잘한 상처로 꼬질꼬질했다.
“이제부터는 쉬고 있어. 내가 해결할 테니까.”
벽을 넘었지만 한스의 육체가 극적으로 달라지지는 않았다.
기묘한 사탕의 힘으로 만들어진 육체가 제법 뛰어났기 때문에 육체를 조금 더 효율적으로 다루고,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는 형식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예를 들자면, 그간 한스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과민한 감각.
지나치게 예민했던 감각들을 이제는 자유롭게 통제할 수 있었다.
이 안개 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청각, 시각, 촉각… 더 나아가 자아마저도 잃게 만드는 음험한 안개 속을 훤히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용왕. 간다.”
《음. 좋다.》
꾸드득, 뚜드드득ㅡ!
벽을 넘었으니 거리낄 것 없이 용왕의 힘을 끌어다 사용했다.
의수가 빠르게 몸을 뒤덮으며 검붉은 흉갑의 형태로 변했다.
《크아아아아! 정말 질기게도 버티는구나! 죽어라, 제발 좀 죽으란 말이다!》
안개 속에서 튀어나온 펜리르가 포효했다. 한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펜리르의 몸 주변에서 안개가 요동치고 있다.
‘녀석이 몸에 두르고 있는 바람이… 점점 거세진다.’
흉흉하게 회오리치는 펜리르 주변의 바람. 투명한 진공 칼날이 매섭게 회전하고 있다.
《인제 그만 죽어라! 너의 피로 나의 복수를! 내 주인의 원한을 달랠 것이다!》
펜리르가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거대한 폭풍, 그 자체가 된 듯 펜리르는 거센 바람을 두른 채 솟구쳤다. 그리고 가늘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안개가 되어 사라졌다.
《온다.》
“보고 있어!”
보인다. 녀석의 움직임이, 숨결이, 근육이.
펜리르의 속도는 실로 바람과도 같았지만, 이제 한스의 눈에는 그 모든 것이 똑똑히 보였다.
까드드드득ㅡ!
아스러질 듯 움켜쥔 롱소드의 손잡이가 살짝 우그러졌다.
눈부시게 빛을 흘리는 용기의 룬이 맥동하며 한스의 몸에 활력을 북돋웠다.
《계약자여. 지금 그대의 몸은 엉망이다.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렸어. 내 힘을 빌리더라도, 견딜 수 있는 건 단 한 번이다.》
“……한 번이면 충분하지.”
검을 들 수 있었고, 베야 할 적이 눈앞에 있으니.
한스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명확했다.
천천히 검을 머리 위로 들었다.
《크아아아아! 죽어라, ■의 종!》
발광하며 달려드는 펜리르. 바람처럼 가까워짐에 따라 광풍에 한스의 머리칼을 흔들었다.
모든 것이 느껴졌다.
피부에 와닿는 바람으로, 악취로, 떨려오는 땅의 진동과 안개의 흔들림으로.
두근.
두근.
벽을 넘어선다는 것은, 자신에게 허락된 생명체로서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
한스는 눈을 감았다. 자신의 몸 안에서 활발하게 터져 나오는 모든 것을 느낀다.
활화산처럼 솟구치는 생명력,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 근육의 미세한 떨림, 바람의 흔들림.
“후우.”
데모닉에게서 질리도록 배웠던 검술은 단 세 가지.
수직 베기, 수평 베기, 사선 베기.
‘거창한 검술은 필요 없어. 결국 모든 것은… 이 세 가지 동작으로 귀결된다.’
《가라, 계약자.》
한스는 위로 올린 검을 천천히 아래로 내리그었다.
수천, 수만, 수십만 번을 반복하고 또 반복한 그 동작이었다.
검에 모든 것을 싣는다.
생명과 호흡을, 근육과 힘, 몸 안에 잠든 모든 것을 깨워서.
쓰걱.
안개가 갈라지고. 매섭게 몰아치던 바람이 잘렸다.
폭풍을 두른 채 다가오던 펜리르의 몸이, 서서히 느려지더니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커, 크흑…. 도, 도대체 무엇을, 뭔 짓을 한, 끄으으윽…!》
윤기 나는 검은 털을 자랑하던 펜리르의 몸에는 수직으로 선이 하나 그어져 있었다.
다만 펜리르의 가죽을 온전히 가르지는 못했기에 절명에 이를 수준은 아니었다.
한스는 가죽을 베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녀석을 강자로서 존재하게 만드는 것을 베어 갈랐다.
‘녀석은… 끄응. 이제 죽은 거나 다름없어.’
한스 자신도 무엇을 베어 갈랐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다만 펜리르가 천천히 죽을 것이라는 건 확신했다.
“커허어억…! 후윽, 하, 하아…. 어윽. 아, 아파라….”
왈칵 피를 한 움큼 토한 한스가 바닥에 쓰러졌다. 몸을 감싸던 용왕의 갑주는 어느새 의수로 돌아갔다.
“한스 님! 한스 님! 피, 피가! 피! …괘, 괜찮으세요?”
데이지가 달려와 한스를 부축했다. 그녀의 눈에 펜리르는 이미 전투력을 상실한 대상이었다.
경계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죽지는 않았지만, 한스의 일격은 치명적이었다.
“안개가….”
치명상을 입은 펜리르는 더 이상 안개를 유지할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한스와 데이지를 감싸고 있던 안개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끄으응. 아이고, 끄윽, 아파라.”
한스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팔다리는 덜덜 떨렸지만, 그 어느 때보다 후련했다.
안개가 빠르게 사라지더니, 이내 시야가 완전히 바뀌었다.
“어?”
“……이건…?”
데이지와 한스가 마주한 것은, 완전히 반파된 콜로세움과 치열하게 겨루고 있는 케니스와 발가르였다.
한스와 데이지는 누가 뭐라고 할 것 없이 빠르게 주변을 파악했다
주변에 쓰러진 성기사와 사도 부대원들, 사제들. 모두 죽은 것은 아닌지 가늘게 숨을 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처참한 잔해들 사이에 우뚝 서 있는 케니스와 발가르.
“가자, 데이지.”
“네!”
데이지가 다부지게 대답하며 손발에서 붉은 기운을 흘렸다. 눈에서는 번쩍번쩍 붉은 흉성이 빛나는데, 한스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벽을 넘고서야 데이지의 흉성이 얼마나 어마무시한 것인지, 어렴풋하게 감이 잡히는 까닭이다.
《크하하하하ㅡ! 제법이구나, 그간 실력이 조금 늘기는 했어.》
케니스를 매섭게 몰아붙이던 발가르가 한스와 데이지를 돌아봤다.
《크흐ㅡ. 뭐냐 너희들은. 아하, 그렇군. 펜리르는? 펜리르는 어찌하였느냐.》
펜리르라면 옆에서 다 죽어가고 있을 터인데, 그걸 왜 묻는ㅡ.
“없잖아?”
힘없이 쓰러져 있던 펜리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한스와 데이지가 멍하니 서로를 마주 봤다.
확신할 수 있었다.
펜리르는 절대 움직여서 도망칠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으흠…. 아, 그렇게 된 것인가. 크흐흐흐. 네 녀석들, 제법 성대하게 일을 저질러 줬구나.》
발가르가 얼어붙은 대검을 갈무리했다. 가쁜 숨을 고르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케니스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하. 이쯤 했으면 적당히 즐거웠다. 너, 붉은 머리 계집. 너는… 크흐. 아직 한참이나 멀었지만 썩 즐거웠다.》
쩌억!
발가르가 허공을 베어냈다. 큼직하게 잘린 차원의 균열이 열리자, 발가르의 의도를 깨달은 케니스가 몸을 던졌다.
“두 번이나, 크흡. 도망치게 두지는 않는다ㅡ!!”
몸이 삐그덕거린다. 전신의 근육과 뼈, 혈관이 깃든 별빛이 이리저리 요동치며 비명을 질렀다.
‘끄으으윽ㅡ. 조, 조금만 더…!’
케넬름의 방식으로, 케넬름에게 배운 대로.
케니스는 고통을 눌러 삼키며 온몸에 별빛을 깃들게 하였다. 그저 검을 휘두르는 데 집중했다.
《흐흐. 다음에 또 보자꾸나. 그리고 넌… 쓸데없이 이상한 년 흉내를 내는 것은 그만둬라.》
케니스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발가르는 너무나 쉽게 검을 막아냈다.
그리고는 말릴 틈도 없이 잽싸게 균열 너머로 사라졌다.
“아.”
케니르가 머리를 부여잡더니 풀썩 쓰러졌다.
“케니스!”
한스가 급히 케니스의 상태를 살폈다. 얼굴이 창백하고 입술이 파리하게 질렸다. 기력을 모두 쏟아부은 탓이다.
다행히 큰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저는 다치신 분들부터 옮길게요.”
다부지게 외친 데이지가 성인 장정 여럿을 너끈하게 들어서 급히 옮기기 시작했다.
“하아…. 이게 도대체 무슨 난리인지.”
온통 눈에 보이는 것은 부서진 건물과 파편,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뿐이다.
한스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 * * * * 《여기부터 수정된 내용입니다.》
“캐앵…. 끄으응……. 여기는…….”
펜리르는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간신히 눈을 떴다. 면상이 반지르르한 놈팽이에게 한 방 먹었다는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ㅡ녕?”
“으으으윽……. 죽은 건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기에 펜리르는 가만히 누워서 고개를 숙였다.
온통 시야가 뿌연 것이 무엇 하나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었다. 특유의 예민한 코도 먹먹하게 막혀서 숨조차 제대로 쉬기 어려웠다. 그나마 멀쩡한 건 귀 하나뿐.
그래, 죽었구나.
차라리 그리 생각하니까 홀가분했다.
“……ㅡ내 말 듣고 있니?”
펜리르는 눈을 감았다. 짧은 평화가 퍽 마음에 든다.
짊어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가벼운 것이….
“이상하다. 숨은 쉬는 것 같은데.”
옆에서 쫑알거리는 목소리에 결국 펜리르가 버럭 소리 질렀다.
“에잇! 시끄럽다! 이미 죽은 몸에게 짧은 안식마저 허락하지 못하는 것이…냐……?”
뒤로 갈수록 펜리르의 말은 점점 작아졌고, 고개는 위로 올라갔다.
흐릿하게 형상은 보이는데… 왜 이렇게 크지?
“………허?”
한참이나 고개를 들어야 보이는 상대의 머리, 커다랗게 드리운 그림자가 펜리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야 만났네.”
가물가물한 시야 너머로 거대한 존재가 손을 뻗어왔다.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펜리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 너는 도대체 뭐냐. 여, 여기는 어디인 것이냐!”
당황한 펜리르가 발톱을 세워 휘둘렀다. 하지만 작고 앙증맞은 발톱은 상대에게 아무런 해를 끼칠 수 없었다.
“쉬이. 괜찮아, 놀라지 마…. 천천히, 가만히 있어.”
거대한 존재는 가만히 펜리르를 들어올려 품에 안았다. 바둥거리는 펜리르는 따뜻한 온기에 천천히 반항을 멈췄다.
‘이건… 이, 이 냄새는….’
후각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다.
그에 따라 익숙한 내음이 펜리르의 코를 타고 전해졌다.
따뜻한 향기, 여러 풀들의 냄새, 진흙과 웅덩이를 짓밟으며 뛰어다니는 체취.
꿈에서도 잊을 수 없었던 주인의 흔적이다.
“주, 주인…? 주인인 것이냐? 정말로, 정말로 주인이냐?”
펜리르가 마구 제 눈을 부볐다. 원망스럽게도 시야는 여전히 가물가물 흐렸다.
“반가워, 정말로… 정말로 오랜만에 만났네.”
“아아! 아아아아! 주인! 주인이구나! 정말로 주인이야!”
펜리르는 북받쳐오는 감정에 목이 메였다.
어떻게, 어째서, 이미 죽었을 터인데….
머리 한 구석에서는 ■의 농간일 수도 있겠다는 의심이 피어올랐지만, 그 이상으로 주인을 만났다는 감격이 거세게 몰아쳤다.
“어찌, 어째서 이제야 온 것이냐. 나는, 나는…!”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산처럼 많았다.
미안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려 했는데.
오히려 꽉 막힌 목울대 너머로 나오는 것은 끅끅거리는 괴상한 울음소리의 무언가였다.
“전부 알아, 네가 하고 싶은 말도, 하려는 말도.”
주인이 부드럽게 속삭이며 펜리르를 껴안았다.
작디 작은 강아지의 몸이 된 펜리르는 혀를 내밀어 주인을 핥았다. 뜨겁고 축축한 물기가 핥아졌다.
주인 또한 울고 있는 것이다.
“정말로… 너를 정말로 보고 싶었어……. 흑, 끄흐흡… 정말로…!”
한참이나 펜리르를 부여잡고 슬프게 울던 주인은 퉁퉁 부은 눈으로 몸을 일으켰다.
“자. 이제 그만 가자.”
“어디로 가는 것이냐?”
그리 말하면서도 펜리르는 늠름하게 주인의 곁을 지켰다. 비록 지금은 작디 작은 강아지였지만 대악마였던 만큼 나름 늠름한 기세가 가득했다.
“우리의 여정을 떠나야지.”
“어디까지라도 주인의 옆을 지겠다. 이번에는 기필코.”
쿠구구구궁ㅡ
주인과 펜리르의 앞으로 커다란 문이 솟아났다.
산과 들판이 아름답게 조각된 문이었다.
* * * * *
우웅ㅡ.
[WEB 발신] 카드 285,000원 일시불 승인.
“씨… 발…….”
이거 왜 이렇게 비싸냐?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엄청나게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앗차…!! 제가 이.내용을 전부 작성한 뒤에, 너무 늦게 메시지를 봐버렸습니다…!! 제길, 그렇게 할 걸…!! 안타까운 마음이… 무럭무럭… 너무 슬픈 것 입니다…!!! 어흐흐흑… 독자님의 귀중한 의견… 옥조같은 의견은… 아쉽지만… 언젠가 다시… 꼭…!!! 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