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3화. 큰 힘에는 큰 책임이…
큰 힘에는 큰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하나의 영혼을 되살리는 데에는 큰 힘이 필요했고, 내 통장에는 큰 대가가 찾아왔다.
“에휴.”
한순간 빠져나간 30만 원의 처참한 흔적.
구멍이 난 생활비를 채우려면 한동안 콩나물과 케잡, 돼지 뒷다릿살로 버텨야 했다.
‘그래도 펜리르랑 그 주인이 잘 마무리 돼서 다행이네.’
갑작스러운 지출은 뼈 아팠지만, 어깨는 어느 때보다 홀가분했다.
드디어 과거의 내가 싸지른 똥을 청산하는 것이 끝났기 때문이다.
참… 길고도 지긋지긋한 시간이었다.
‘일단 이걸로, 심연에 있는 대악마들은 전부 해결한 거겠지?’
발가르를 통해서 심연의 대악마를 모으고, 녀석들의 말뚝을 정화함으로써 늦게나마 안식을 선사한다.
길고 긴 여정의 끝을 보았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푹 잘 수 있었다.
‘하아…. 전부 끝난 거 맞지?’
사실 아직 할 일이 남아있기는 하다.
심연에는 대악마들 말고도 다른 악마들이 가득하다. 고위급 악마와 중급 악마, 지능이 거의 없는 하급 악마들까지.
수많은 악마 중에서 대격변의 영향으로 심연에 떨어진 녀석들을 구분해 하나하나 영혼을 정화해야 했지만….
“그 정도야 뭐, 대악마들처럼 말뚝 하나하나 알아내서 정화하는 것보다는 쉬울 테니까.”
그러니까 오늘은 대악마들의 말뚝을 전부 정화한 기념으로 나 자신에게 상을 주기로 했다.
이제 좀 푹 자볼까나.
“……그런데 왜 뭔가를 잊은 기분이지.”
……….
아.
일꾼 1호!
* * * * *
따그닥.
따그닥.
한 마리의 백마가 마른하늘을 질주했다. 백마의 뒤를 따라 신성한 휘광이 길게 꼬리를 그렸다.
《으으음…. 이거 참으로 곤란하게 됐군. 곤란하게 됐어…. 너무 늦은 것은 아닌지.》
빛의 신수, 유니콘이었다.
차원의 틈에 생긴 이상을 확인하고도 결국 옆길로 한참이나 새버린 유니콘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신께서는 어찌하여 나, 처녀의 수호자 유니콘을 만드시고 이토록 많은 처녀들을 만드셨단 말인가!》
차원의 틈에 이상이 생겼다는 중대한 사실을 알려야 했음에도 늦은 이유는 단 하나.
처녀가 눈에 보일 때마다 족족 들이대며 추파를 던졌기 때문이었다.
《푸히힝. 값진 시간이었다.》
유니콘은 후회하지 않았다.
세상은 지켜야 한다. 하지만 처녀도 지켜야 한다.
처녀가 없는 세상을 지켜서 무엇하리?
따그닥.
따그닥.
그렇게 한참이나 옆길로 새는 것을 반복하다 보니, 그래도 성도에 도착하기는 했다.
《푸르르륵? 흐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성도 거리의 거리로 내려온 유니콘이 사방을 살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오가는 이들의 표정이 썩 어두웠다. 날카롭게 창을 세운 것처럼 오가는 분위기가 흉흉했으며, 울적하게 슬픔에 젖은 이들의 얼굴이었다.
상황 파악을 위해 우선 한스를 찾기로 한 유니콘이 바쁘게 걸음을 재촉했다
《히힝ㅡ. 주인이여. 오랜만이군.》
유니콘은 금방 한스를 찾을 수 있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유니콘과 한스는 주종관계였다
“누구…. 아, 유니콘 너구나. 진짜 오랜만이네. 그동안 어디에 있던 거야?”
《이 몸이야 뭐, 세상을 지켰지. 그러는 주인은… 호오. 꽤 깊은 깨달음이 있었던 모양이군.》
유니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법 큰 벽을 넘었으니 선명하게 드러났다.
《주인이여. 이 몸이 없는 동안 무슨 큰일이라도 있었는가? 분위기가 말이 아니군.》
“아…. 그러고 보니까 너는 그때 없어서 잘 모르겠구나. 일단 이쪽으로 와봐. 대놓고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야.”
《푸륵. 무슨 이야기를 그토록 비밀스럽게 한다고, 이 몸이 남정네와 조용한 곳까지 가야 하는 건지….》
유니콘은 불만스레 투레질했지만, 순순히 한스를 따라 으슥한 곳으로 장소를 옮겼다.
한스의 표정에 깃든 진지함을 엿본 까닭이다.
“네가 없는 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어.”
한스에게서 그간 있었던 일을 전해 들은 유니콘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 그런 어마어마한 일들이 있었다고?
《허, 허어……. 마왕 그 사악한 괴물이 또다시 성도에 왔을 뿐 아니라, 유유히 농락하듯 돌아가 버렸다니. 그것도 결투 축제의 도중에….》
성도의 분위기가 우중충한 것도 이해가 되었다.
수많은 성기사와 전사들이 보여서 마왕에게 대적하였으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심지어 용사 케니스조차도.
“거기에 신께서 지켜보고 계시는 와중이었으니까. 충격이 더 큰 모양이야.”
《그것도 같은 상대에게 두 번이나 같은 수법으로 당했으니 더욱 심하겠군.》
한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사람들이 충격을 많이 받았어.”
한창 성장세를 타고 있던 성도의 위상이 크게 꺾였다.
다른 무엇보다 성도가 침략당한 것이기에 더더욱.
“다른 왕국에서도 성도의 군사력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고 하더라. 아직 찔러보기 식이기는 하지만.”
《정치는 이 몸이 나설 수 있는 일이 아니군.》
유니콘이 고개를 저었다. 답답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스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벽을 넘었는데…!’
데모닉이 한스에게 걸었던 조건, 케니스를 지킬 수 있는 남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
한스는 벽을 넘는 것으로 스스로의 강함을 증명해 보였다.
허나… 우중충한 성도의 분위기는 데모닉에게 말을 걸기 어렵게 만들었다.
‘데모닉 팔라딘 님도 요 며칠 동안 엄청 바빠 보이셨고.’
아무래도 성도의 군사 작전권을 가진 유일한 팔라딘이다 보니 더욱 바쁠 것이다.
한스가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유니콘이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차원의 틈에 생긴 이상에 대해 말하기 조금 껄끄러운 분위기였다.
목적지는… 딱히 없었다.
발걸음 닿는 대로 걸을 뿐.
“후. 한스 경! 드디어 찾았군.”
저 멀리서부터 은발을 휘날리며 데모닉이 달려왔다. 요 며칠간 철야를 했다는 걸 증명하듯, 눈 아래 짙은 그림자가 광대뼈까지 내려온 모습이었다.
“도대체 어디를 이렇게나 돌아다니는 건가. 한참을 찾았군.”
“팔라딘 님? 무슨 이유로 저를 찾으셨는지.”
“일단 가면서 이야기하지. 자네한테 좋은 이야기야.”
그리 말하며 데모닉은 한스를 잡아끌었다. 묘하게 박력 넘치는 태도에 한스는 어어 하며 데모닉에게 끌려갔다.
한스를 잡아채 가는 데모닉의 눈빛은, 마치 쓸 만한 노예를 잡아온 농장 주인의 눈빛과도 비슷했다.
* * * * *
본래 성도에는 두 명의 팔라딘이 상주하고 있었다. 대외적으로 팔라딘의 자리는 세 개였지만, 첫 번째 자리는 영원히 공석으로 비워두는 것이었으니 실상 팔라딘은 두 명이 전부였다.
그리고 라이언하트 팔라딘이 심연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순교하면서 팔라딘 자리가 비게 되었다.
성도의 수뇌부는 고민했다.
팔라딘 자리를 오래 비워서 좋을 것은 없다. 이렇게 혼자 일하다 쓰러져서 죽겠다고 찡찡거리는 데모닉의 투정도 멈추려면, 더욱 그러했다.
“원래라면 한스 경 자네와 이스칼 경이 유력한 후보였지. 결투 축제에서 보여주는 모습에 따라 결정될 것 같다고 내가 말했건가?”
“아, 예. 기억합니다.”
데모닉이 성도의 복도를 가로지르며 빠르게 말을 뱉었다. 뒤따라가는 한스는 상황을 파악하며 대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어. 이스칼 경이 자진해서 후보 자격을 포기했지 뭔가. 마침 자네가 벽을 넘었다는 정보도 입수한 참이었으니, 대사제님들은 옳다구나 박수를 치시더군.”
“아, 예. 그렇군… 예?”
기계적으로 대답하던 한스가 우뚝 멈췄다.
지금 뭐라고? 누가 뭘 포기해? 벽을 넘은 건 또 어떻게 알았지?
“어…?”
그러면, 어, 내가…?
뒤늦게 한스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데모닉의 입꼬리도 덩달아 높아 치솟았다.
“축하하네. 한스 경. 앞으로 같은 팔라딘으로서 많은 활약 기대하지.”
“ㅡㅡㅡ허어어업!”
한스가 무어라 단어가 되지 못한 것들을 입 안에서 마구 외쳤다. 다리를 동동 구르고, 팔을 붕붕 휘두르고.
“그런데 평소 같았으면 말이지, 음. 아주 성대하게 임명식을 했을 거야.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지금 성도의 상황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라서 말이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자네한테는 미안하지만, 일단 약식으로 임명식을 진행하고 나중에 상황이 좋아지면 그때 정식으로 임명식을 하는 방향으로 결정이 될 것 같네.”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설명하니 한스는 내심 아쉬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임명식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
팔라딘이 되었다는 것에 중요하지.
앞서가던 데모닉은 커다란 기도실에 도착했다. 벽에 걸린 예식용 검 한 자루를 뽑아 들더니 한스를 바라봤다.
“무릎을 꿇게.”
한스가 냉큼 무릎을 꿇었다. 데모닉이 화려한 예식용 검으로 한스의 양쪽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한스. 그대는 평생을 신의와 신앙에 몸 바치며 불의에 분노하고 올곧게 살아갈 것임을 맹세하는가?”
“맹세합니다.”
“좋다. 이제부터 그대를 신의 검을 대변하는 지상의 대행자, 팔라딘으로 임명한다.”
그리고, 끝.
예식용 검을 다시 벽에 건 데모닉은 멀뚱하게 바라보고 있는 한스를 일으켰다.
“뭐 하는가? 어서 일어나게.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으니.”
“어…, 그, 음? 아니, 정말로 이게 끝…? 이, 이게 전부인 겁니까?”
“약식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아무리 약식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 짧고 성의 없는 임명식은 도대체 무슨…?
데모닉에게 질질 끌려가는 한스의 표정은 점점 다채롭게 변해갔다. 발 들이면 안 되는 곳에 들어왔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이의 그것이었다.
쿵!
어느 커다란 방에 들어간 데모닉이 한 움큼의 서류를 들고 와 책상에 쌓기 시작했다. 큼직한 소리가 날 때마다 작은 언덕이 생겼는데, 그러한 것이 두 번, 세 번, 네 번… 한스는 헤아리기를 포기했다.
“……이건 도대체?”
데모닉이 한스를 보며 웃었다.
동질감과 안쓰러움, 약간의 즐거움이 가득한 미소였다.
“팔라딘 선배로서 첫 번째 수업을 해주지. 의자에 앉고, 나는 서류 결재하는 좀비라고 생각하게.”
“……….”
“성도의 군사적 행방에 관해 우리 둘이 논의해야 할 것들이 아주아주아주아주 많다네. 그간 나 혼자 하느라 힘들었는데, 이제 믿음직한 후배가 생겼군! 하하하하하!”
데모닉이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가만히 눈동자를 바라보니 10년을 썩은 동태 눈깔이었다.
“……아.”
사태를 깨달은 한스의 눈동자가 썩어가기 시작했다.
* * * * *
“가르르르르ㅡ”
“아르르르르르.”
“우베베베베벱.”
“우루루루. 까꿍! 까꿍! 아이구, 귀여운 내 새끼들.”
데릴과 마리, 에리를 놀아주는 이스칼의 표정이 썩 밝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프리가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야. 그런데 너, 정말로 괜찮겠어? 팔라딘 말이야. 네가 후보 자격을 포기했다면서.”
“아, 그거? 갑자기 그건 왜?”
“너는 뭐 명예나 관심받는 거 엄청 좋아하잖아. 그래서 나는 당연히 네가 팔라딘에 목맬 줄 알았는데.”
이스칼은 마리의 볼살을 매만지며 말했다.
“흠. 아니 뭐, 여러 이유가 있기는 한데….”
머리를 긁적인 이스칼이 멋쩍게 대답했다.
“조금 느낌이 안 좋았다고 해야 하나? 그… 뭔가 개미지옥으로 끌려가는 느낌이 들어서. 그래서 그냥 안 한다고 한 거지.”
“참나. 겨우 느낌 하나 때문에?”
“…그것도 있고, 가족이랑 보낼 시간이 줄어들 것 같아서. 이게 제일 컸지. 아무리 그래도 가족이 제일 중요하잖아.”
“……오.”
가족을 중요시하는 북부인의 취향에 꽉 차게 들어오는 이스칼의 대답. 이스칼은 저도 모르게 프리가의 스위치를 눌러 버렸다.
투툭. 천 쪼가리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이제 막 마리와 에리를 재운 이스칼의 고개가 삐걱거리며 돌아갔다.
“야, 씻고 침실로 와.”
군살 하나 없는 몸으로 우뚝 선 프리가는 썩 흉흉한 미소를 지으며 침실로 올라갔다.
“여, 여보? 프리가? 그게 무슨 말이야? 씨, 씻고 침실로 오라니? 왜?!”
이스칼은 남아있는 어인족 특제 비약이 있는지 다급히 헤아려야 했다.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엄청나게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오에엑… 그런 취미가 있으시다니… 작가로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먼저 드려야… 넙죽넙죽… ( _ _) ( _ _ )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제가 작가인데… 독자님에게 어찌 그런 명령(?)을 할 수 있겠읍니까…?? 황송하옵니다 독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