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9화. 침식 ( 4 )
“이게 얼마 만이야. 거의 15년? 16년인가?”
“15년입니다. 단장님은 정말… 하나도 늙지 않으셨군요.”
셰이드와 아르테리스의 경비대장은 서로 반갑게 인사했다. 회포를 마음껏 풀기에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
경비대장의 시선이 셰이드의 기묘한 의수에 잠시 닿았다가 떨어졌다. 의수와 석궁이 합쳐진 외형이었다.
“그 팔은.”
“이쪽 일 오래 하다 보면 다 그런 거지. 오히려 너무 늦은 거다. 보기에는 이래도 굉장히 편해.”
셰이드는 제 외팔에 끼워진 반자동 기계식 석궁을 흔들며 너스레를 떨었다.
탐험단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발리안이 부단장에게 슬쩍 물었다.
“저분, 어째 단장님이랑 친해 보이시는데요.”
“아마 넌 모를 거다. 너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 탐험단에서 한창 날뛰던 분이시거든. 어마어마하신 분이야. 마수 사냥에서는 따라올 사람이 없었지.”
“그런 분이 왜 지금은 경비대장을…?”
“마수에게 팔꿈치를 물리는 바람에.”
“아.”
마수 사냥꾼들의 흔한 은퇴 사유였다.
마수에게 물리고도 사지 멀쩡하게 은퇴한 것을 두고 큰 행운이라 불러야 하리라.
‘어? 15년 전에도 단장님이 단장님이었다면, 지금 셰이드 단장님은 나이가…?’
셰이드는 얼핏 보기에는 서른 중후반의 외형으로 보였다.
하지만… 지금이 서른 중반이라면 15년 전에 열다섯 살쯤이었다는 소리인데, 그건 말이 안 된다.
‘어, 으음? 그럼 단장님 나이가 마흔…? 아니지, 쉰? 저 얼굴로 그게 가능한가? 어? 아니면 진짜 서른 살이신가?’
셰이드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이를 추측하던 발리안은 우주를 엿본 고양이 같은 표정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무슨 일로 날 부른 거냐. 네가 관에 들어갈 때가 되면 짝잡이 벌레를 보내겠다고 하더니. 설마 이렇게 팔팔해 보이는 녀석이 벌써 관을 짜놓은 건 아닐 테고.”
“…사안이 제법 심각합니다.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으니, 믿을 수 있는 자만 추려서 듣는 편이 좋을 겁니다.”
“여기 있는 녀석들 모두 믿을 수 있는 녀석들이다. 어서 말해.”
셰이드의 신뢰 가득한 눈빛으로 단원들을 바라봤다. 발리안을 바라볼 때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경비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셰이드가 그리 말한다면 그런 것이다.
“지금 해안가 쪽에 사람의 인지, 혹은 상상력에 따라 강해지는 마수가 나타났습니다.”
적막.
저마다 경비대장이 한 말을 이해하느라 열심히 머리를 굴려야 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혹시 그 녀석을 말하는 거냐? 보가트? 무서워하는 것으로 변하는 녀석 말이야.”
“아닙니다. 녀석은… 그런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경비대장은 자신이 본 것을 상세히 전달했다.
설명이 길어질수록 탐험대의 분위기는 차갑게 식어갔다.
“……변신? 진화한다고? 그게 말이 되는. 하. 일단 네가 한 말이니 분명하겠지. 안내해라. 우선 정찰부터 시작한다.”
“예.”
다리 달린 물고기 마수는 최초 발견 위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됐다.
경비대장이 발 빠르게 해안가를 통제한 것이 유효했다.
“도대체 저게 무슨….”
멀리서 살펴본 셰이드가 신음을 삼켰다.
심해에서 올라온 마수가 으레 그렇듯, 녀석은 처음 보는 종류의 마수였다.
‘녀석이 말한 대로라면, 이 거리에서도 저 마수에 대해 생각하거나 상상한 것에 반응한다고 했지.’
뻐꾹, 뻐, 뻐꾹.
저 멀리서 뜬금없는 새 울음소리가 두어 번 들려왔다.
반대편으로 돌아간 단원들이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는 신호였다.
끼리리릭… 철컥, 철컥!
셰이드가 외팔에 장착된 석궁의 노리쇠를 천천히 감았다.
‘원래대로라면 조금 더 탐색을 하다 사냥을 했을 것이지만….’
시일이 급하니 어쩔 수 없다. 시간을 끌수록 저 마수는 까다로워질 테니.
전해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저 마수의 능력을 하나하나 파악하는 수밖에.
투웅!!
셰이드의 석궁에서 묵직한 화살이 흐릿하게 그림자를 남기며 날아갔다.
푸욱, 물고기 마수의 아가미에 정확히 박혔다.
《ㅡㅡㅡ키뱌가아아악?! 햐아으아아악!》
‘효과가 있군.’
생각보다 방어력은 형편없는 녀석인가?
라고 셰이드는 자신도 모르게 떠올려 버렸다.
“이런.”
꾸드드득, 콰자자작! 콰지직!
아니나 다를까.
화살을 맞고 부들부들 떨던 물고기 마수의 몸에서 검붉은 근육과 가죽이 튀어나왔다. 앞서 설명에서 들었던 모습과 정확히 일치한다.
“기다려 주지 않는다.”
순순히 기다려 줄 셰이드와 단원들이 아니다.
별다른 신호는 없었지만 바람처럼 튀어나온 단원들이 물고기 마수를 향해 저마다 무기를 휘둘렀다.
누가 봐도 대놓고 빈틈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걸 놓치면 바보다.
“키햐아아앗! 네 녀석의 피는 무슨 색이냐아아아! 내 쌍검이 너의 피를 원하고 있다아아앗!”
그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역시,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쌍검을 휘두르는 발리안.
검을 막 잡았을 때의 허접 체력 발리안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선명하게 드러난 근육과 잔 흉터가 발리안이 겪었던 과거의 수라장을 여실히 증명했다.
“끄응. 단장! 이, 이 녀석 뭔가 이상한데? 검이 잘 안 들어가!”
“튕겨 나온다! 날을 튕겨내고 있어!”
“망치랑 몽둥이 좀 가져와!”
단원들이 무기를 휘두르며 비명을 질렀다. 물고기 마수를 뒤덮은 검붉은 근육과 가죽, 혈관은 겉보기와 다르게 금속처럼 단단하여 무기가 쉬이 들지 않았다.
촤하아악! 쉭, 촤자작!
“키햐아아ㅡ!”
발리안의 쌍검만이 유일하게 피해를 줄 수 있었다.
이를 확인한 발리안이 눈을 찌푸렸다.
“일단 떨어져라. 준비해둔 1번 함정부터 5번 함정까지 발동할 준비를 해놔. 발리안! 너는 나랑 같이 남는다.”
투웅!
낮은 줄 소리와 함께 날아간 셰이드의 화살이 물고기 마수의 근육과 혈관을 꿰뚫었다. 푸욱, 깊이 박혀 화살 깃대가 보이지 않는다.
‘내 공격과 발리안의 공격은 유효하군. 다른 녀석들은 검날도 안 들어갔는데. 도대체 무슨 차이지?’
자신과 발리안의 공통점….
무기.
‘발리안의 쌍검도 예사롭지 않은 무기였지. 듣기로는 성지에서 배우고 온 대장장이에게 받은 보검이라고 했던가.’
셰이드 본인의 무기는 신께서 주신 신성한 것이다.
아무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까다로운 녀석인 것 같다.
《키햐흐프으윽!》
온몸을 뒤덮은 근육과 가죽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물고기 마수가 괴성을 토했다. 이전과 다르게 비늘이 은빛으로 번들거리는 빛을 반사했다.
마치 금속 갑옷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투웅! 투두두두두!
비처럼 쏟아지는 셰이드의 화살.
기세등등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과 달리, 물고기 마수의 옆구리에는 화살이 빼곡하게 자라났다.
“흐랴얍! 녀석 질긴 것이 베는 맛 나는구나!”
반대쪽에서는 쌍검의 발리안이 날뛰며 은색 비늘을 갈가리 찢어발겼다.
《키크흐르으으…….》
쿵, 잔뜩 긴장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물고기 마수는 손쉽게 쓰러졌다.
죽은척 하는 마수에게 호되게 당한 적이 있던 발리안은 쌍검으로 물고기 마수의 대가리를 몇 번이나 찌르며 죽은 것을 확인했다.
“뭐야. 벌써 끝났슴까?”
“생각보다 별거 아닌 녀석이구먼. 중간에 검이 안 박혀서 식겁했는데 ”
“어이, 발리안! 그거 죽은 거 맞으니까 그만 찌르고 이쪽으로 와라.”
함정을 작동하러 갔던 단원들이 어슬렁 어슬렁 돌아왔다. 생각보다 쉽게 해결된 상황에 표정이 밝았다.
“정해진 무기에만 피해를 입다니. 이런 녀석은 처음이군. 아니, 처음은 아닌가?”
황금 나무와 얽혔을 적에도 비슷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상대는 대악마였지만, 이번에는 한낱 마수에 불과하다.
“역시 대장이십니다. 솜씨는 여전하시군요.”
“별것 아닌 녀석이었다. 그보다, 이 녀석… 나랑 발리안의 무기만 유효한 피해를 줄 수 있더군. 혹시 비슷한 녀석이 주변에 더 있나?”
셰이드의 물음에 경비대장은 고개를 저었다.
마음대로 진화하는 녀석이 여럿이라면 그것만 한 재앙이 없다.
“없습니다. 이 주변에서 발견된 건 녀석이 유일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셰이드는 석궁을 정리했다. 뒷정리는 경비병들이 할 것이다.
“제가 먼 길 오시게 했으니 크게 한턱 사겠습니다. 이쪽으로 가시죠.”
“오오! 얘들아, 오늘 먹고 뒤져보자!”
경비대장을 위시한 탐험대는 시끌시끌 떠들며 술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이 일은 하나의 사건으로 지나가는 듯싶었다.
그냥 특이하고 까다로운 마수를 초기에 진압한 사례로 남을 줄 알았다.
다음 날.
신성 제국에서 어제 사냥한 물고기 마수와 비슷한 녀석의 습격으로 도시 세 개가 사라졌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 * * * *
《지긋지긋한 녀석.》
연옥을 다스리는 지엄한 재판장, 미카에르가 혀를 차며 천칭과 검을 높이 들었다.
온통 무채색인 공간에서 미카에르의 검이 붉게 타올랐다.
그 앞에 서 있는 것은, 기괴한 물고기를 닮은 무언가.
《크흐흐. 몇 번이나 휘둘러도 소용없다.》
데보라가 음험한 미소를 흘렸다.
그의 권능은 적응과 포식.
생명체가 살아갈 수 없는 차원의 틈에서도 적응했는데, 저까짓 칼질을 견디지 못하겠는가?
《…….》
눈을 찌푸린 미카에르가 불타는 대검을 사방으로 휘둘렀다.
유려하게 불타는 검로가 수레바퀴를 그리며 데보라를 짓밟았다.
《크하하하하. 몇 번이고 다시 말해주마. 너의 공격은, 무용하다.》
데보라의 몸에 생긴 커다란 상처가 빠르게 아물었다. 미카에르의 불꽃 또한, 이미 적응을 마쳤기에 피해를 입지 않았다.
《…짜증이 나는 몰골만큼 짜증 나는 잔재주를 부리는구나.》
《흐흐흐흐. 그 잔재주 하나에 쩔쩔매는 네 녀석은 뭐지?》
겉으로는 여유로운 척, 미소를 흘리는 데보라였지만.
실상 돌아가는 상황이 여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더 붙잡히면 위험하다. ■이 나를 잡으러 올 거야!’
연옥에 선명히 남아있던 ■의 손길과 흔적.
필히 무척이나 아끼는 공간임이 틀림없었다. 그렇기에 데보라가 습격한 것이고.
그러니… 당장이라도 멀리 도망치지 않으면, 분노한 ■이 자신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리라.
《순순히 보내주지 않는다.》
데보라의 아가리가 크게 벌어지며 차원을 뜯어먹으려 하자, 미카에르가 날개를 펼치며 날아들었다.
데보라가 초조한 만큼, 미카에르는 녀석을 붙잡기만 하면 된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을 끌기만 해도 창조주께서 금방 찾아오실 거다.’
자신의 역할은 철저한 족쇄.
미카에르는 꾸준하게 데보라에게 따라붙으며 검을 휘둘렀다.
차원을 뜯어먹고 도망치려는 데보라의 시도가 번번히 좌절됐다. 불타는 검이 수레바퀴를 그리며 데보라의 신경을 박박 긁었다.
결국 데보라가 몸을 돌려 아가리를 크게 벌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녀석을 ‘포식’하는 편이 더 빠를 것 같다.
《크아아아악! 이 짜증 나는 날파리 녀석! 너부터 ‘포식’해주마!》
시야를 뒤덮으며 쩍 벌어진 아가리가 순식간에 사방을 채웠다.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엄청나게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 오늘 저는 산나비 굿즈에 펀딩을 넣었습니다… 후, 저는 존나 우는 부엉이요, 질질 짜난 호랑이입니다… 주말동안 산나비 다회차나 해야겠습니다…!!
– ‘신선우’님… 후원 감사합니다..!! 어…? 그러고보니까 진짜 창 쓰는 녀석이 없었네요…? 오잉? 어째서일까용…? 제 안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창잡이 캐릭터가 허구한 날 자해당하는 랜서여서 그런걸까요…? 이거 참… 심오한 문제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