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6화. 나를 속인 거니 ( 2 )
여기 두 개의 선택지가 있다.
하나는 영광과 긍지로 가득 찼지만, 험난하고 지저분하며 거친 야생의 삶이다.
다른 하나는 온갖 아양을 떨고 귀여운 척 애교 부려야 하지만, 따뜻하고 배부르고 등 따숩한 평온의 나날이다.
무엇을 고르겠는가?
고르는 이의 가치관에 따라 선택지가 달라질 것이다.
누군가는 아양 떨며 살아갈 바에는 영광에 살고 죽겠노라 할 수 있는 것이고, 또 누구는 까짓거 애교 몇 번 떨면서 편하게 살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베르는 단언컨대 후자를 골랐다.
‘영광과 긍지가 밥 먹여 주는 것은 아니지.’
꿀과 젖이 흐르는 게으름뱅이의 삶!
아무것도 안 하고 가끔 애교 몇 번 떠는 것으로 풍족하게 살 수 있는 반려동물의 인생!
“삐이이이ㅡ (으허. 온천이 뜨뜻하군….)”
온천물에 몸을 녹이는 이베르가 녹아내리듯 흐물거렸다.
과거 긍지 높은 서리고룡 이베르는 죽고, 뱃살 통통하게 오른 서리비룡 이베르만 남은 지 오래였다.
쫑긋.
축 늘어져 있던 이베르의 귀가 움찔거렸다.
존재감이, 거대한 존재감이 밀려오고 있다.
‘위대하신 분께서 오고 계시는군.’
저 멀리서부터 밀려오는 은하수가 그 증거였다.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기에 이베르는 온천물을 탈탈 턴 다음 뽀짝뽀짝 걸음을 옮겼다.
열심히 골조를 만드는 드워프들 옆에서 엉덩이춤을 추기 위함이었다.
슬기로운 백수 생활을 위해서는 적당히 일하는 척해야 할 때도 필요한 법이다.
씰룩 씰룩ㅡ
이제는 익숙해진 이 엉덩이춤.
처음 출 때는 수치심 때문에 죽고 싶었지만, 이제는 너무나 몸에 익어버린 춤 동작이다.
“흐아아압! 다들 힘내라! 이베르가 우리를 위해서 엉덩이춤을 추고 있잖으냐!”
“어흐흑. 저 통통한 꼬리 좀 봐.”
“모두 기운 내서 일하자고! 앞으로 골조 849개만 더 만들면 오늘 할당량이 끝난다!”
“““우오오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베르의 엉덩이춤을 본 이들은 이렇게 의욕이 하늘을 찌르고는 했다.
‘나야 좋지만.’
덕분에 위대하신 분께서도 자신을 엉덩이춤을 잘 추는 귀여운 동물 정도로 취급해 주셨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가끔 엉덩이춤만 춰주면 뜨끈한 온천과 편안한 나날, 안락한 인생이 기다리는 곳이라니!
여기가 바로 천국이 아니면 어디가 천국일까.
하지만 영원히 피는 꽃이 없고, 달이 차면 저무는 것처럼.
영원할 것 같았던 이베르의 개꿀 백수 라이프에도 끝이 찾아왔다.
씰룩 씰룩ㅡ
열심히 엉덩이를 흔들던 이베르는, 오늘따라 위대하신 분의 시선이 유독 따갑다는 것을 눈치챘다.
시선에 담긴 감정은… 약간의 놀람과 괘씸함.
이베르는 금방 상황을 눈치챘다.
‘들켰구나.’
신께서 따가운 시선을 보내는 이유는 자신을 괘씸하게 보심이요, 괘씸하게 보시는 까닭은 그간 자신이 본래의 임무를 모르는 척 숨겨왔기 때문이다.
아쉬운 마음에 이베르가 입을 쩝쩝 다셨다.
안녕, 젖과 꿀이 흐르던 개백수의 나날이여.
이베르는 태양과 달이 공존하는 하늘을 바라보며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그래, 참으로 오랫동안 본연의 임무를 등지고 놀았다. 인제 그만 놀고 밥값을 할 때가 되었지.
아니나 다를까.
신의 음성이 세상을 울렸다.
《후우…. 서리비룡 이베르! 이제 너에게 부여된 책무와 의무를 이행할 시간이 되었다!》
“삐이이, 삐이익! 삐이이이ㅡ!”
괜히 마른침이 넘어간다.
이베르가 맡은 본연의 임무는 온갖 희귀한 재료들을 찾아오는 것이다.
신께서는 과연 어떤 귀중한 것을 찾아 오라고 명하실 것인가.
스스로 발광한다는 죽음의 광석?
아니면… 태산과 눈을 마주친다는 거인의 뼈?
《그대 동족들의 정수를 구해오라. 비늘이 검거나 붉은 동족의 것을 찾아와야 한다.》
“삐…?!”
동족의 정수를 찾아오라고?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은 신의 말씀에 이베르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그, 그걸 어떻게 찾지?’
만약 신께서 이베르의 생각을 읽었다면 이렇게 대답했으리라.
– 그건 이제부터 네가 고민해 봐야 할 문제지. 난 모르겠고, 아무튼 용족의 정수 좀 찾아와.
떨리는 눈동자를 신께서 보실까 이베르는 서둘러 머리를 숙였다.
“삐이이익ㅡ”
작은 날개로 파닥파닥 날아오른 이베르는 성지에 위치한 차원 관문을 통과했다.
슈우우욱!
차원의 틈을 비행하며 이베르의 몸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작고 앙증맞던 날개가 점점 커진다.
좁쌀 같았던 발톱은 맹수의 송곳니처럼 날카로워졌고, 턱은 점점 흉악하게 벌어졌다.
‘그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용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일정한 시기에 대대적인 탈피를 하며 크게 성장하게 된다.
비룡에서 아룡으로, 아룡에서 성룡으로, 성룡에서 고룡으로.
이베르는 탐색이라는 임무에 적합한 크기인 성룡에서 성장을 의도적으로 멈췄다.
───────!!
저 끝, 관문이 끝나는 곳에서 이베르는 거세게 포효하며 드넓고 푸른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으허어억!”
“요, 용이다! 용이 나타났다!”
발밑으로 벌레처럼 보이는 인간들이 이베르를 보며 소리쳤다.
‘아. 이 몸을 찬양하는 이 기분. 나쁘지 않군.’
안락한 성지의 나날도 나쁘지는 않지만, 아주 가끔은 이런 외유도 신선한 자극이 된다.
용이라는 족속도 재미와 쾌락을 추구하도록 설계된 종족이었으니까.
이베르는 한껏 용의 감각을 살리며 인간들의 반응을 즐겼다.
“아, 여러분! 순례객 여러분들께서는 무척 운이 좋으십니다! 지금 보고 계신 용은 하나 된 분께서 몸소 가르침을 베풀어 사악한 심성을 이겨냈다는 서리비룡으로ㅡ”
“우오오옷! 용, 용이다! 내가 여기서 몇 달이고 기다린 보람이 있구나!”
“우와아! 엄마, 엄마! 용! 진짜 용이에요! 쩐다! 우와! 우와아아아!”
《…도대체 뭐냐, 이 반응은?》
이베르가 떨떠름하게 지상을 바라봤다.
뭔가… 자신이 기대했던 반응과는 조금 다른 반응이다.
두렵고, 놀라워하고, 경외하는… 그런 감정이 아니라, 이건 마치….
‘굉장히 희귀한 볼거리를 본 듯한 반응이군.’
자신이라는 존재가 인간들에게 그렇게나 익숙해진 걸까.
이베르는 새삼스레 시대가 참 많이 변했음을 실감했다. 옛날이었다면 자신과 눈도 못 마주쳤을 것인데.
《흐음. 오랜만에 지상에 나왔으니 그년 얼굴이나 한번 볼까…?》
턱을 긁적이던 이베르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 맡은 바 임무가 있으니, 그것을 먼저 수행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동족의 정수를, 그것도 가능하면 비늘이 검거나 붉은 녀석의 것을 구해오라 하셨지.’
문제가 하나 있었다.
용족은 서로 연락을 거의 하지 않기에 서로 어디에 살고 있는지 잘 모른다.
용이라는 것들은 몸 안에 흐르는 차가운 피처럼 참 매정한 종족이라서.
알에서 태어난 자식이 성룡으로 탈피하는 즉시 부모의 품에서 독립시켜 버린다.
그렇게 독립한 성룡은 다른 용들처럼 자신만의 보금자리를 꾸리고는 천년만년 살아간다.
부모와 자식 간의 정? 혈육 간의 정?
기대하기 어렵다.
정은 고사하고 연락이나 한번 주고받을까 말까 했으니.
그렇게 살다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면 수명이 다해서 죽었구나ㅡ 하고 마는 것이다.
이베르는 우연한 계기로 용왕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지만, 뭐어.
용끼리 친하게 지내는 것이 흔한 경우는 아니었다.
‘검은 비늘과 붉은 비늘이라…. 끄응. 이걸 도대체 어디서부터 찾아봐야 하나?’
용은 대개 비늘 색에 따라 좋아하는 성향이 얼추 비슷했다.
푸른 비늘은 시원한 곳에 살거나, 붉은 비늘은 따뜻한 곳에 살고, 누런 것들은 황무지나 바위산에, 검은 비늘은 축축하고 어두운 곳에 사는 식이었다.
《우선, 그래. 검은 비늘부터 찾아봐야겠군.》
이베르는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을 가로질렀다.
일단 어떻게든 될 것이라는 막연한 마음이 컸다.
자신의 사체도 평생 살던 설산에서 발견되었으니, 다른 것들도 비슷하지 않겠나 싶은 그런 안일한 마음.
늪지대로 가면 어떻게든 찾을 수 있겠지ㅡ. 그런 근거 없는 자신감이 솟구친다.
그리고 6일 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 * * * *
《조졌군.》
이베르는 심사숙고한 끝에 이 상황을 그렇게 정의할 수 있었다.
《완전히 조졌어.》
다시 한번 중얼거리며 이베르는 고개를 저었다.
주변 늪지대는 지진이라도 한 차례 왔다 간 것처럼 온통 쑥대밭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없던 골짜기가 생겼으며, 큼직한 구덩이가 수십 개, 거칠게 갈라진 균열은 수백 개.
성난 괴물이 날뛰고 간 자리가 이러할까.
《생각보다 너무 찾기 어렵군.》
물론 성난 괴물은 아니었고, 이베르가 동족의 정수를 찾겠다며 사방팔방 파헤친 결과물이었다.
늪지대에 평화롭게 살아가던 동물이며, 마수들은 난데없는 생태계 최강자의 횡포에 부리나케 도망쳐서 오들오들 떠는 수밖에는.
당연하지만 그런 잡동물들의 안위는 이베르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오로지 하나.
동족의 뼈를, 정수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에 매몰되어 있었다.
《설마 6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도 안 나올 줄이야.》
용이라는 존재가 지나가는 고블린 이름도 아니고.
생태계의 정점이었던 만큼 개체수는 매우 적은 편이다.
거기에 죽어서는 튼튼한 뼈와 비늘, 질긴 가죽, 날카로운 송곳니와 이빨에 혈관, 근육, 심장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버릴 구석 하나 없는 것이 바로 용의 사체였으니.
후대들이 용의 사체를 발견하는 족족 긁어다가 무기 만들고, 장식품 만들며 알차게 써먹었다.
온전하게 사체를 남긴 이베르의 경우가 극히 드문 경우였다. 인적이 드문 설산의 꼭대기 부근에 묻혔던 덕택이 크다.
《곤란하군. 정말 곤란해….》
푸른 빛이 아름다웠던 이베르의 온몸에 질척한 진흙이 가득했다. 꼬박 6일 동안 늪지대를 헤집은 꼬락서니가 여실히 드러났다.
《도대체 동족의 뼈 하나 찾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뼈 한 조각.
딱 한 조각의 뼈만 있으면 된다.
한 조각의 뼈에도 용의 정수가 녹아있을 것이고, 제아무리 작은 정수라고 해도 위대하신 분께서 이를 복원하여 쓰시면 될 것이니까.
그런데….
───────!!
어찌 뼈 한 조각 찾기가 이렇게 어렵단 말인가!!
이베르는 애꿎은 하늘에 분풀이하듯 울부짖었다.
산천의 다리 달린 것, 날개 달린 것들이 두려움에 떨며 몸서리쳤다.
《후…….》
성지의 뜨끈한 온천이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피로해진 이베르가 눈을 끔뻑거렸다.
신체적으로 피곤한 것이 아니다. 간만에 노동의 쓴맛을 맛본 정신이 괴로움을 호소하고 있었다.
《…아주 잠깐만, 아주 잠깐만 눈을 붙여야겠군….》
질척한 진흙을 대충 평탄하게 만들어 누울 자리를 만든다.
슥슥- 꼬리와 뒷발로 진흙을 쓸어내리고 있자니, 툭하고 꼬리에 뭔가 걸렸다.
바위인가 싶어 대충 부수려고 하던 그 때.
‘이건?’
찰나를 쪼개는 용의 시선에 걸리는 유달리 특이한 모양의 바위. 어느 한 곳이 툭 튀어나오고, 어느 부분은 유달리 뭉툭한 기묘한 모양의 바위가 어째 눈에 걸리는 것이ㅡ.
《……!! 찾았다!》
번쩍 눈을 뜬 이베르가 앞발 뒷발, 나중에는 턱까지 사용해서 진창을 파헤쳤다. 신화의 지배자라는 위용은 온데간데없이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영락없이 땅굴 파는 동네 강아지의 꼬락서니였다.
《차아따!!! (찾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위엄 서린 얼굴이며 몸통, 앞발, 뒷발에 진흙을 묻힌 이베르는 커다란 뼈를 입에 물고서는 기쁘게 소리쳤다.
묻어 놓은 뼈를 되찾은 강아지처럼 아주 해맑았다.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엄청나게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존나 짱 쌘 용…!! 엄청 크고 강한 용…!! 이ㅡ세상에 강하고 멋진 용이 많다고 하지만… 제가 감히 그 강함의 서열을 따지자고 한다면… 아무래도 투명 드래곤 아닐까요…!! 크롸라라라라라라ㅡ! 짱 쌘 투명 드래곤이 울부지져따! 으악 도망가자! 발록들이 도망가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