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8화. 다섯 신, 다섯 종족, 인간 ( 4 )
“하나 된 분 맙소사!”
드워프들을 바라보는 견습 대장장이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단번에 느낀 것이다.
대장장이로서 드워프와 그들은 하늘과 땅, 그 이상의 격차가 있었다.
“저, 저기! 이거! 어, 어떻게 하신 겁니까?”
“으응?”
애덤의 제자가 쭈뼛거리며 세듀스 팔락에게 질문했다. 모루 위에는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시험작이 천천히 식어가고 있었다.
“이거 말이냐?”
견습 대장장이를 바라보는 세듀스 팔락이 씩 미소를 지었다.
손에 가득한 물집, 얼굴 가득 묻은 검댕.
풋풋하지만 뜨거운 열정을 가진 젊은 대장장이다.
세듀스 팔락은, 드워프들은 불 앞에 서는 자로서 같은 대장장이들을 싫어하지 않았다.
특히 이렇게나 풋풋한 대장장이들은 더욱.
못 알려 줄 것도 없지.
더군다나 이 녀석이 귀여운 막내, 애덤의 제자라면!
“네 수준을 봐야 알 것 같은데. 한번 두들겨봐라. 음. 그렇지. 아까 보니까 주괴를 실처럼 얇게 뽑을 줄 알던데. 그거 한번 해봐.”
“예, 옛!”
견습 대장장이는 떨리는 손으로 주괴를 가열시켰다.
열심히 망치를 두들긴다. 잔뜩 긴장했지만 몸에 밴 습관과 노력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폼이 좋았다.
따캉! 캉! 카강!
물론 드워프는 신의 무기를 만들던 대장장이였기에.
견습 대장장이의 미숙한 점이 잔뜩 보였다.
이것은 봉황 앞에서 참새가 삐약거리며 날개를 자랑하는 꼴이나 마찬가지.
참새가 푸드득거리는 걸 본 봉황의 심정은?
너무 귀엽다!
이야, 다들 이것 좀 봐!
여기 이 삐약이는 망치를 휘두를 줄 아는데? 주조질 하는 것 좀 봐, 아아, 너무 귀엽다!
세듀스 팔락은 흐뭇한 눈으로 견습 대장장이를 바라봤다.
“자, 그만해라. 충분하다. 이제 내가 말하는 것 좀 들어볼 테냐?”
“부디! 부탁드립니다!”
“크흠. 좋아. 내가 원래 이런 건 아무한테나 말해주지 않는데ㅡ”
세듀스 팔락이 천천히 여러 노하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망치질의 기본부터 시작하여 화력을 가늠하는 방법, 쇠를 구부리고 덧대는 기술과 순도 높은 금속을 정제하는 고급 기술까지.
아무것도 없이 스스로 깨우치려고 했다면 몇 세대는 더 걸렸을 진보된 기술이, 드워프의 입을 빌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이건…!”
“이런 기술이, 가능하다고…?”
그야말로 신세계.
세듀스 팔락의 이야기를 엿듣던 제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망치를 잡았다. 기연이 왔으니, 마땅히 이를 붙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막내야. 너도 한번 해볼 테냐?”
“…예! 스승님들, 부디!”
애덤도 이에 질세라 냉큼 달려왔다.
어째서 여기에 와 계신 것인지는 몰라도, 일단 알려준다는데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따앙! 카앙! 카강!
수십 개의 화로에 맹렬하게 불이 타오른다. 뜨거운 열기가 대장간을 가득 채웠다.
그보다 더 뜨거운, 대장장이들의 열기가 숨 막히도록 차올랐다.
“만신전에서 왔습니다. 여기 신의 일꾼이신 드워프분들이 나타났다는 신고를 받고….”
뒤늦게 나타난 만신전의 성기사들은 말문을 잇지 못했다.
폐가 타들어 갈 듯 뜨거운 열기는 둘째 치더라도,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이 너무 뜻밖이었던 까닭이다.
“이건…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신의 일꾼 드워프들이 나타났다는 신고를 받고 왔는데.
왜 대장장이들이랑 드워프가 같이 일을 하는 중이지…?
“저기……. 실례합니다?”
“그러니까 말이다, 애송아. 이렇게 한계까지 달군 다음에 기름으로 식히면… 으잉? 뭐요?”
다정한 말투로 설명해주던 오푸스 팔락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급격한 온도 차이에 성기사는 살짝 당황했다.
“아. 실례합니다. 저는 하나 된 분을 모시는 검, 창익기사단의 단장 에리프카라고 합니다. 하나 된 분의 일꾼이시라는 드워프 분들을 만신전으로 모셔 오라는 명을 받았기에 이렇게 왔습니다.”
“아, 거참. 조금만 기다리쇼. 지금 애들 작업하는 거 안 보이나?”
뚜캉! 따캉! 카앙!
드워프들은 각자 견습 대장장이를 하나씩 붙들고 열심히 강의 중이었다.
누군가에게 뭔가를 알려준다는 건 드워프들에게 무척 신선한 경험이었다.
저들끼리 성지에 있을 적에는 하나같이 고이고 고인 작자들 뿐 이라.
뭔가 알려주고 가르칠 것이 마땅치 않았는데.
세상에, 여기 오니까 풋풋한 애송이 대장장이들이 한가득이다.
이렇게나 뉴들박, 아니 알려줄 보람이 넘치는 녀석들이라니!
“지금은 바쁘니까 조금 있다가 오쇼!”
“아니, 그, 지금 가셔야…. 끄응.”
같은 대장장이가 아니라면 얄짤 없이 퉁명스러운 드워프들.
성기사들은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이다가 대장간 주변에 풀썩 주저앉아버렸다.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끝날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시든가.”
성기사들은 꼬박 다섯 시간을 기다린 끝에 드워프들을 만신전으로 데려갈 수 있었다.
* * * * *
“오오오오오ㅡ! 반갑습니다, 환영합니다! 하나 된 분의 일꾼들이여!”
“만신전은 그대들을 환영합니다!”
버선발로 튀어나온 대사제들이 열렬하게 환영했다.
드워프들이 조금 당황할 정도로 뜨거운 인사였다.
“뭐, 뭐요? 당신들은 도대체 뭐야?”
“자, 자! 우선 이쪽으로 오시죠”
“하하하하! 여러분에게 여쭤보고 싶은 것이 아주아주… 아주아주 많습니다.”
대사제들의 눈에 일렁이는 뜨거운 신앙심.
어어ㅡ하다가 대사제들에게 잡혀버린 드워프들은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어, 어어? 자, 잠깐만! 잠깐!!”
어두컴컴한 석실로 끌려가는 드워프들. 그들의 외마디 비명을 끝으로 문은 굳게 닫혀버렸다.
암실 속에서, 대사제들과 드워프들은 아주 찐한.
정말 찐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성지에 대한 것, 하나 된 분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으며.
이들의 대화는 정오에 시작하여, 저녁 무렵에야 끝날 수 있었다.
“……흐어어….”
“……무, 무슨 늙은 인간들 체력이…….”
온갖 대장간 일로 체력이 단련된 드워프들의 얼굴이 반쪽이 되어 석실에서 빠져나왔다. 정신력이 탈탈 털렸다.
뒤따라 나오는 대사제들의 얼굴에는 윤기가 반짝반짝 흘렀다.
아주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보람찬 시간이었다.
성지에 대해 몰랐던 것을 더욱 자세히 알게 되었으며, 드워프들이 어째서 지상에 왔는지 들을 수 있었다.
“설마 하나 된 분께서 직접 일꾼들을 지상으로 보내셨을 줄이야.”
“이게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단순한 외유는 아닐 것 같습니다만.”
대사제들이 수군거리며 머리를 모았다.
이틀 뒤, 심연이 지상으로 올라올 것이다. 수많은 것들이 바뀌리라.
그야말로 시대의 격변, 대격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거사를 앞두고 하나 된 분께서 허투루 본인의 일꾼들을 지상으로 보내셨을 리 없을 테니.
필히 무언가 뜻하신 바가 있을 터.
“흐으음.”
“…난해하군요.”
드워프들도 자신들이 어째서 지상에 왔는지 모르고 있었다. 하나 된 분은 외유라고 하셨지만…. 정말 단순한 외유일까?
“으하아아ㅡ! 마셔, 마셔! 마시고 열심히 일하자고!”
“크흐! 이봐, 주인장! 여기 술 더 가져와!”
“우오오오! 난쟁이가 술을 5통째 마시기 시작했다!! 오크통 5개를 혼자 비운다고!!”
“저렇게 작은 몸에 어떻게 저 많은 술이 들어가는 거지??! 이, 이건…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이건 꿈이야아아!!”
드워프들은 지상의 유흥에 빠져 열심히 놀고 일하기 바빴다. 드워프들의 가공할 음주 실력에 놀란 손님들은 머리를 부여잡고 공중제비를 돌았다.
“…모르겠군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한참이나 고민하던 대사제들은 결국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저희들의 부족한 지혜로는 하나 된 분의 혜안을 짐작하기 어렵군요.”
“일단 오늘은 해산하도록 합시다.”
그렇게 흩어지는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면, 이제 지상에 참 많은 종족이 있군.”
엘프, 수인, 오크, 밤의 일족, 인어를 통틀어 다섯 종족.
인간과 드워프까지 합치면 도합 일곱의 종족이 있는 셈이었다.
“으음?”
다섯 종족… 다섯 종족… 다섯 종족?
…인간과 드워프?
다섯 신?
뭔가 떠오른 대사제 한 명이 부리나케 고서관으로 뛰어 들어갔다.
우당탕!
얼마나 급했는지 정갈하게 정리된 책자와 선반이 넘어졌다.
대사제는 이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분명, 분명히 여기쯤에서 관련된 내용을…!”
이건가? 아니야. 이것도 아니야. 이거였나?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뭔가에 홀린 것처럼 한참이나 고서를 훑던 대사제가 만세를 외쳤다.
드디어 찾았다!
“이거다! 이거야, 인류 최초의 성녀이자 영웅, 케넬름 성녀의 자서전…!”
정확히 말하자면 자서전의 사본이다.
케넬름, 인류 최초의 영웅이자 성녀이며 팔라딘이라 불리는 여인.
다섯 신을 최초로 목격하여 기적을 받았다고 전해지는 최초의 성녀 케넬름이 직접 쓴 자서전.
자서전의 역사적, 문학적, 신학적 가치는 가히 따지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 한 권의 책에 담긴 내용만 제대로 해석한다면, 인류 역사의 많은 부분이 해결될 것이니까.
‘허나 지금까지 제대로 해석한 사람이 없었다.’
그 이유?
너무 어렵고, 추상적이고, 은유적이며, 고풍스러운 미사여구가 가득했기 때문!
단편적인 예시로.
《아득한 천공의 청자색 휘장이 걷히고, 은빛 햇살 가닥들이 세상을 곱게 쓰다듬는다.
푸른 하늘은 거대한 비단처럼 달리고 있었고, 그 아래 펼쳐진 땅은 마치 갓 깨어난 처녀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따스한 햇살은 마치 어머니의 손길처럼 부드럽게 내려와, 모든 것을 감싸 안았다》
라는 문구가 있다.
이를 번역했더니, 《오늘은 날씨가 좋았다.》라는 뜻의 글귀였다.
읽기 힘든 고대어로 적혀있다는 것도 한몫했다.
만신전이 케넬름의 자서전 해독에 오랜 시간 공을 들였지만, 700쪽가량의 분량 중 고작 200페이지밖에 해독하지 못했다면 믿겠는가?
대중들에게 케넬름의 이야기가 널리 퍼지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아직 해석이 덜 끝난 미완성의 이야기를 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읽기 어려웠다는 것도 있고, 내용이 너무 허황된 것 같다는 이유도 있었지.”
자서전은 스스로 적은 일대기다.
자신의 이야기를 적다 보면 서사는 부풀려지고, 실수는 축소하기 마련.
‘케넬름 성녀께서 하늘을 밟고 날아올라 산의 거인을 두 주먹으로 부쉈다는 둥, 바다를 갈라서 식인 물고기 떼를 도륙했다는 둥…. 그런 이야기가 많았으니 ’
현시대의 초인이라는 이들도 그런 짓을 못 한다.
그러니 해독하다 보면 “하하. 성녀님께서 허풍이 심하시네ㅡ.”하고 읽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진실이라는 것은, 얼마 전 강림한 케넬름께서 마왕을 두들겨 패는 것으로 증명됐지만.
아무튼.
대사제가 찾는 것은 앞서 해독된 200페이지가량의 내용에 있었다.
파라라락!
“찾았다!”
구불구불한 고대어 밑으로 해독된 내용, 밑으로 빼곡하게 달린 주석들. 중간중간 해석되지 않은 내용도 있었다.
대사제는 급한 마음에 신성력까지 눈에 집중하며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시대의 흐름으로 ●미암아 시대와 다른 시대를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온갖 신비와 괴이가 ●닐던 시기를 신비의 시대로 일●●다.》
글 좀 읽었다 하면 누구나 아는 내용이다.
신비의 시대.
많은 역사적 내용이 베일에 가려진 잃어버린 고리.
오늘날에도 많은 역사학자가 매달린다는 미지의 역사.
대사제는 서둘러 다음 내용을 읽었다.
《신비의 시대는 대●●으로 끝을 맞이했다. 그다음은 다섯 신께서 은혜로운 자비를 베푸신 다섯의 시대, 인간과 ●● ●●은 다섯의 ●대를 은혜롭고 풍●하게 가꾸었으며…. ●● ●●과 인간은 다섯 신에게서 받은 ●총을 지혜롭게 사용하며ㅡ》
중간중간 해석되지 않은 내용에 대한 첨언이 있었다. 앞뒤 문맥과 내용을 바탕으로 해석한 내용이다.
“…다섯의 시대.”
지금까지는 왜 다섯의 시대라 불리는지 정확한 이유를 몰랐다. 그저 다섯 신의 은총이 있던 시기였기에 그리 불렸으리라 추측했을 뿐.
조금 더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다.
“신비의 시대는 끝나고, 다섯의 시대가 열렸다. 인간과… 다섯 종족이 함께 살아가는 다섯의 시대가.”
해석되지 않은 내용을 채운다면 이런 내용이 될 것이다.
《…인간과 다섯 종족은 다섯 신의 시대를 은혜롭고 풍족하게 가꾸며….》
새로운 시대가 열릴 때, 다섯 종족이 나타났다.
대사제는 다섯 시대가 어떻게 끝났으며, 어떤 시대가 도래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최초의 성녀 케넬름이 승천한 이후…. 다섯 신의 기나긴 침묵이 시작됐다. 길고 아득한 침묵의 시대.’
다섯 신의 침묵, 다섯 신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모였던 다섯 종족과 인간들은 서로 다투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결국 다섯 종족은 인간을 떠나 각자 살길을 찾아갔으며, 인간들은 다섯 종족에 대한 모든 내용을 역사 속에서 철저히 말소했다.
그렇게 인간은 지상의 지배자가 되었다.
세월이 흐르며 인간들은 엘프와 오크, 수인, 인어, 밤의 종족에 대한 것을 잊었다.
‘그렇군. 다섯 종족은 그렇게 완전히 잊혔고, 그들이 다섯 신에게서 받은 은총은 신의 침묵으로 반전되어 족쇄가 되었던 거야.’
그렇다면 인간이 받은 은총은 무엇일까?
대사제는 이 호기심을 뒤로 밀어냈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으니.
“그렇다면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ㅡ”
다섯 신의 시대가 열리며 다섯 종족이 등장했다.
다섯 신의 시대가 저물면서 다섯 종족이 잊혔고, 길고 긴 침묵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암흑의 시대는 하나 된 분의 기적으로 종말이 되었으며, 잊힌 다섯 종족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드워프.”
대사제가 손을 떨었다.
신의 일꾼, 드워프가 지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머지않아 심연과 지상은 하나가 될 것이다.
이는 다가올, 더 거대하고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다.
아니.
이미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나타냈다.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엄청나게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음, 산업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드워프라…!!! 언젠가 증기기관을 발명하면, 눈에 불을 켜고 터빈을 돌리려 하겠군요…!!
??? : 이봐, 용사님! 여기 그 불타는 검 좀 놔봐!! 물 끓여서 터빈 돌릴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