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3화. 새로운 시대 ( 3 )
– “아니! 제발!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이냐고요! 예?!”
케넬름이 도깨비 같은 표정을 지으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아, 아니. 하지만, 솔직히 엄청 나쁜 아이디어는 아니었잖아. 그치?”
나는 동의를 구하듯 리아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리아는 어색하게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 “으으음. 흐흥. 앗, 나비가.”
있지도 않은 나비를 찾아 달려가는 리아.
나는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 “하나 된 분이시여! 고래 위에 땅을 올리시다뇨!”
케넬름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 질렀다.
“하늘 고래 위에 드워프들 고향 올려두는 거…. 진짜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하늘을 나는 고래의 등에 있는 건물은 낭만이고, ‘판타지’의 정수다.
이건 과수원 농장 주인도 인정한 사실이었다.
– “후우. 그래요. 그건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조금 진정하는가 싶더니 케넬름이 다시 급발진하기 시작했다.
나는 조용히 핸드폰 볼륨을 내렸다. 케넬름의 목소리가 조금은 작아졌다.
– “드워프들이 하늘 고래한테까지 어떻게 가냐고요!”
“아. 그건 당연히 내가 준비해놨지.”
– “……어? 저, 정말이신가요?”
케넬름이 진심으로 놀랐다는 듯 말을 더듬었다. 살짝 상처받았다.
내가 계획의 대부분을 즉흥적으로 변경하고, 기분에 따라 움직이는 성향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름 닥쳐올 여파를 생각하고 움직이는 거였는데.
“하늘 고래한테 한 가지 권능을 심어놨어. 이거라면 드워프들이 마음껏 하늘 고래한테 올라갈 수 있을 거야.”
– “…도대체 어떤 종류의 권능을 부여하셨길래….”
케넬름이 조금 미덥지 않다는 어투로 말을 흐렸다. 이해는 한다.
드워프들은 땅의 종족, 두 다리가 땅에서 떨어지는 상황을 아주아주 싫어한다.
종족 자체가 고소 공포증을 가진 셈이다.
‘드워프로 저글링을 했던 내 탓은 아니겠지?’
에이. 설마.
드워프들 특성 때문에 그런 거겠지.
아무튼.
나는 그런 드워프들의 성향까지 모두 고려해서 권능을 준비했다.
“그건 바로…. 상상 실체화의 권능!”
– “네?”
“하늘 고래를 바라보면서 자신이 원하는 건축물을 상상하면, 그 상상이 그 사람한테만 실체화되는 권능이야. 이걸로 계단 같은 걸 만들어서 하늘 고래에 올라가면 돼. 어때?”
– “오.”
나쁘지 않다는 반응.
그럴 수밖에 없다. 이건 세계에서 인정받은 과수원 농장 주인의 창조물이니까.
‘고마워요, 농장 주인!’
어쩐지 저 구름 너머에서 밀짚모자를 쓴 후덕한 인상의 아저씨가 씩 웃는 환상이 보였다.
– “이건… 정말로 괜찮은데요? 이 방법이라면 고소 공포증이 있는 드워프들도 하늘 고래에 올라갈 수 있겠어요.”
“그럼 그럼.”
하늘 고래에 올라간 다음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의외로 고소 공포증 환자들은 자신이 떠 있다는 사실만 자각하지 않으면, 멀쩡하게 활동할 수 있다.
하늘 고래의 등은 무척 넓었으니, 일부러 가장자리에 가지 않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좋아. 바로 말해주러 가야겠다.”
내가 준비한 선물을 드워프들에게 전해줄 시간.
무척이나 설레기 시작했다.
망설일 시간이 없다. 곧바로 화면을 <세계 탐험 모드>로 전환했다.
* * * * *
부스럭.
만신전에서 준비해준 숙소는 아늑했다. 급하게 건축된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수준의 가건물이었다.
“커어어어어ㅡ”
“끄허어어어어ㅡ”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 드워프들은 금방 코를 골며 잠에 빠졌다.
낯선 환경, 익숙지 않은 잠자리에 뒤척거리던 몇몇 드워프들도 이내 잠잠해졌다.
“…휴우.”
오푸스 팔락은 다른 형제들처럼 팔자 좋게 잠들 수 없었다.
그는 200명에 달하는 드워프 형제들의 맏형이었으며, 그들을 이끌어야 하는 대장이었으니까.
온갖 상념과 걱정이 몰아치며 오푸스 팔락을 괴롭혔다.
“…잠이 안 오는구먼.”
두 눈이 말똥말똥.
오푸스 팔락은 그냥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있었다.
잠자는 건 반쯤 포기해버렸다.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가만히 풀어놨다.
‘내일이면 심연이 지상으로 올라온다…. 이거구먼.’
대사제들과 성기사들을 통해 전해 들은 사실이었다. 이 밤이 지나고 해가 떠오르면, 심연과 지상은 하나가 되리라.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하고, 만물이 격변하는 대사건.
새로운 시대의 도래라 부르기 아깝지 않은 일이다.
‘거기에 하늘을 나는 고래의 등에 우리 고향이 올라가 버리기도 했고….’
다시 생각해봐도 현실성 없는 풍경이었다.
하늘을 나는 고래의 등에 땅이 있고, 건물이 있다니.
그런데 그 땅이 드워프들의 고향이네?
이렇게 된 이상, 드워프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커다란 날개를 등에 멘 다음에 뛰어내리면……. 아니지. 차라리 바람이 강한 지역에서 커다란 연을 만들까……? 으음. 아니야. 차라리 강력한 폭발을 일으켜서 그 반동으로 올라간다면…….”
중얼거리며 여러 방법을 떠올려본다.
타고난 대장장이이자 공돌이 드워프 아니랄까.
맞닥뜨린 난제에 대한 해결을 궁리하기 시작하자,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것들이 말끔히 사라져버렸다.
‘이런 식으로 고민하는 게 의외로 도움이 되는구먼. 날이 밝으면 다른 녀석들한테도 말해줘야겠어.’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을 겪은 드워프 형제들이다.
분명 말 못 할 고충과 스트레스가 있을 터.
함께 머리를 맞대고 궁리할 커다란 난제가 있다면, 안정에도 도움이 되고, 드워프들끼리 더욱 뭉칠 수 있는 구심점이 될 것이다.
“하아아암ㅡ. 으, 으음?”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들던 오푸스 팔락은 크게 하품했다.
갑작스레 수마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조금 부자연스럽게 잠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했지만, 워낙 피곤한 하루였기에 그대로 잠기운에 몸을 맡겼다.
“커어어어억! 끄허어어어ㅡ!”
시끄럽게 코를 골며 잠에 빠진 오푸스 팔락.
정신을 차려보니 오푸스 팔락은 온통 안개에 휩싸인 공간에 있었다.
기이하게도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금방 자각할 수 있었다.
“이런 이상한 꿈이라니.”
안개를 헤치며 얼마나 걸어갔을까.
온 사방에서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나의 첫 번째 일꾼이여.》
“…! 하나 된 분이시여!”
오포스 팔락이 곧장 머리를 숙였다. 온 사방이 안개에 가려져 있어 어디에 계신지 알 수 없었지만.
마음을 다한 경배에 형식은 중요하지 않았다.
《너의 형제들을 이끄는 모습, 지켜보았도다. 잘 해주었구나.》
“…아, 아닙니다. 못난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나 된 분의 칭찬에 오푸스 팔락은 몸 둘 바를 몰랐다.
이후로 하나 된 분은 오푸스 팔락에게 이런저런 칭찬을 하셨다.
《아마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늘을 나는 고래와, 그 위에 올라간 너희들의 고향을.》
“아, 예! 봤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당황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하나 된 분의 깊은 배려가 있으셨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가야 하는지 짐작도 어려운 타 차원에 고향이 있는 것과, 하늘 높이 떠 있는 고향은 분명히 다르다.
전자는 돌아갈 길이 전혀 없다고 봐야 했지만, 후자는 어떻게든 방법을 궁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너의 영특함은 하늘에 닿겠구나.》
하나 된 분은 잠시 침묵하시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실로 그러하다. 하늘 고래의 등에 올라간 것은 너희들이 지내던 고향이도다. 이에 나의 첫 번째 일꾼에게 하늘 고래에게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자 하노라.》
“아….”
짧게 탄식한 오푸스 팔락은 한참이나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하나 된 분이시여. 그대의 자비로움을 부디 거두어 주소서.”
《이유가 무엇이냐? 어찌 그런 결정을 했는지 말해보거라.》
드워프는 이제 막 지상에 발을 디딘 신생아 종족이었다.
숫자는 적은데 타고난 능력은 뛰어났다.
권력자들에게 걸어 다니는 황금으로 보일 것이다.
지금이야 만신전과 비호와 하나 된 분의 은혜가 있으니 안전하지만, 이렇게 치마폭에 감겨 있으면 성지에서 나온 이유가 무색해진다.
드워프는 홀로 자립해야 한다. 이를 위해 성지를 떠난 것이다.
지금 드워프들에게 필요한 것?
강력한 동기가 필요했다!
모든 드워프들을 똘똘 뭉치게 만들 수 있는 위대한 원동력!
아무리 생각해도 고향의 수복, 이 이상 가는 것이 없었다.
그렇기에 오푸스 팔락은 하나 된 분의 말씀을 듣지 않고자 정중히 거절했다.
《…너의 뜻이 그러하다면. 실로 장하구나.》
“미흡할 뿐입니다.”
《쉽지 않을 것이다. 하늘 고래는 쉬지 않고 떠돌 것이며, 창공은 쉬이 제 품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도전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기특하도다. 그렇다면 너의 형제들과 함께 힘을 합쳐 숙원을 달성하도록 하여라.》
오푸스 팔락은 깊게 머리를 조아렸다.
《광활한 하늘로 날아가거라. 너희는 땅의 종족으로 빚어져 마땅히 자유로울 것이다.》
“으읏. 이, 이건….”
오푸스 팔락의 머릿속으로 여러 장면이 빠르게 지나가기 시작했다.
광활한 창공, 빠르게 스쳐 가는 순백의 구름과 발밑으로 펼쳐진 산맥, 강줄기, 바다.
이 순간, 오푸스 팔락은 한 줄기 바람이 되었다.
“…….”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오푸스 팔락은 그간 경험한 적 없는 무한한 자유로움에 압도되고 말았다.
땅에 묶인 존재로 태어나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것.
아찔하도록 무한한 자유로움이 오푸스 팔락의 영혼을 강하게 뒤흔들었다.
《기억하여라. 이것이… 너희 종족이 나아가야 할 숙원이다.》
“아아아….”
주변의 안개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꿈에서 깨어난다.
벌떡!
오푸스 팔락은 오뚜기 인형처럼 몸을 일으켰다. 다른 드워프들은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잠자리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멍하니 벽을 바라보던 오푸스 팔락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밖으로 뛰쳐나왔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푸르다.
“……하늘…….”
오푸스 팔락이 손을 뻗어 하늘을 가렸다.
활짝 펼친 손아귀에 구름이 잡힐 것 같다.
“형님? 아침부터 왜 그러는 거요?”
“어제 술 못 먹었다고 금단 증상이 온 건가?”
“어이! 누가 보드카 챙겨 온 거 있으면 큰형님한테 드려! 빈속에는 역시 보드카지!”
다른 드워프들이 걱정스레 오푸스 팔락을 챙겼다.
오푸스 팔락은 신경도 안 쓰고 한참이나 하늘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아우들아. 우리는…… 우리는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갈 거다.”
“…? 뭐라고요 형님? 혹시 술이 깨신 거요?”
영문 모를 소리에 다른 드워프들이 고개를 저었다.
“하늘로, 고향으로…!”
신의 첫 번째 일꾼이자 영웅 드워프, 오푸스 팔락.
그의 숙원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언젠가 반드시, 구름보다 높게 나는 드워프가 될 것이라는.
그렇게.
마침내 날이 밝아왔고.
심연이 지상으로 올라오는 역사의 순간이 도래했다.
* * * * *
삐이ㅡ
성지, 이제는 초원만이 남은 땅.
애용하던 온천이 사라져 시무룩해진 이베르가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도합시다!”
“찬양합시다!”
사람 여럿이 신전에 모여있었다. 하는 행동을 한참이나 구경했지만…. 딱히 재밌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았다.
재미없네….
이베르가 작게 한숨을 뱉었다.
영겁을 살아가는 용에게 재미라는 개념은 아주 중요했다. 기나긴 삶 중간중간 꽂는 책갈피라고 할까.
파닥파닥ㅡ
이베르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기가 막힌 우연인지, 이베르가 날아오르기 무섭게 성지의 땅이 흔들리더니 건물 수십 개가 솟구쳐 올라왔다.
여관, 숙소, 식당, 목욕탕, 공터, 회관, 도서관….
척 보기에도 일상에 필요한 것들이다.
“우오오오오옷!! 여러분, 이것 좀 보십시오!”
“여기 대련을 할 수 있는 곳도 있군. 오, 무기들의 수준이 상당한…. 으, 으음? 이, 이건 신의 무기…?!”
띠리링ㅡ
어디선가 감미로운 흘러나왔다. 잔잔하고 평화로운 현악기 소리가 듣는 이의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었다.
쁘에에에엑!!
이베르는 비명을 질렀다.
이게 뭐야! 이 재미없는 음악은 뭐야!
으악! 살려줘!!
몸을 베베 꼬며 괴로워하던 이베르가 벌떡 일어나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뽀작 뽀짝.
여긴 너무 재미가 없어졌어. 여기 있다가는 미쳐버리고 말 거야!
모두 도망쳐!
뽀작 뽀작 뽀짝!
정신없이 뛰던 이베르는 뒤늦게 날개를 펼치며 날아올랐다.
아.
나는 날 수 있었지?
파닥파닥ㅡ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엄청나게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
– ‘신선우’님…!! 후원 감사합니다…!! 제피로스 상단주님을 국ㅎ, 아니, 황궁으로!! 상단주님께서 우리를 부국한 미래로 이끌어주실지니!! 그분은 신이며, 빛이다!! 이제 주인공은 진짜 성지에 관심 좀 많이 줘야합니다…ㅋㅋㅋ 감사합니다!
– ‘안정권371’님…!! 후원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내용에 대한 대답을 하려면 작가의 말이 조금 길어질 것 같습니다…! 따로 답변 형식으로 대답해드리는 편이 괜찮을 것 같네요…!! 대댓글을 확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