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4화. 새로운 시대 ( 4 )
기분 좋은 고양감과 함께 눈을 떴다.
눈부신 햇살이 창문을 뚫고 들어온다.
“날씨 좋네.”
벌떡 몸을 일으켰다. 냉장고에서 냉수를 벌컥벌컥 마신 다음 곧바로 씻었다.
꼼꼼하고 정성스럽게 구석구석 닦는다.
어젯밤 다리미로 다려둔 옷을 입으면 준비는 끝났다.
오늘은 출근하는 날이 아니다.
하지만 유달리 일찍 일어났다. 핸드폰을 확인했더니 시간은 고작 새벽 6시.
쉬는 날에 6시에 일어나서, 씻고, 옷도 차려입었다.
누군가 본다면 뭔가 중요한 약속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주 틀린 추측은 아니다.
‘오늘이구나….’
바로 오늘이다.
오늘, 심연과 지상 사이에 있는 차원의 벽이 한계에 다다르는 날이다.
달리 말하자면. 심연과 지상이 하나 되는 날이 바로 오늘인 것이다.
실로 중요한 날이다.
부정을 씻으려고 새벽에 일어나서 목욕재계까지 했다.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왔다.
거실의 한쪽에는 십자가와 불상, 이슬람의 초승달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은은하게 향초가 타오르며 병풍 위로 날아간다.
‘예수 선배님, 저에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주시고. 부처 선배님…. 제가 어느 상황에서라도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시고. 그, 처음 뵙겠습니다. 알라 선배님.’
앞서 대성하신 선배님들에게 드리는 기도는 필수다.
“…좋아. 가자.”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
나는 전쟁터에 나가는 장군의 심정으로, 아주 엄숙하게 핸드폰을 꺼냈다.
빠밤빠팜!
게임을 켰다.
* * * * *
마침내 해가 떠오른다.
까마득한 과거에도 그러했고, 아득한 미래에서도 변치 않고 태양은 떴을 터이지만.
오늘의 일출은 그 의미가 남달랐다.
“…아, 한스. 왔어요?”
“일찍 나왔네, 케니스. 오래 기다렸어?”
심연과 지상이 하나 되는 날.
새로운 시대가 개벽하며, 잃어버렸던 것이 마침내 하나가 되는 날.
케니스와 한스는 이른 새벽부터 몰래 만났다. 케니스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얼른 가요.”
케니스는 축축한 새벽 공기를 뚫고 성벽의 바깥으로 향하기 달리기 시작했다.
영문도 모르고 불려 나온 한스는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부스럭.
저 멀리 사라지는 한스와 케니스.
그림자 속에서 데이지가 몸을 일으켰다.
케니스와 한스는 데이지를 따돌렸다고 생각했겠지만, 오산이었다.
데이지의 은신술은 나날이 성장했고, 작정하고 숨으면 성도의 그 누구도 데이지를 찾을 수 없었다.
“……한스 님.”
데이지는 한스를 따라가기 위해 땅을 박찼다.
아니. 박차려고 했다.
“잠깐. 넌 나랑 좀 어울려 줘야겠구나.”
누군가 지붕에서 뛰어내리며 데이지 앞을 가로막았다.
나부끼는 은빛 머리카락, 데모닉 팔라딘이다.
“……데모닉 팔라딘 님.”
“…꼬마 아가씨. 네가 저 놈팽이에게 연심을 품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러면……. 비켜요. 얼른.”
“미안하지만, 어렵겠구나. 오늘은 팔라딘이 아니라, 모자란 아비의 역할을 하려고 온 거라서.”
데모닉은 몰래 집을 나서는 케니스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알고 있었다.
마침내 결심을 굳힌 소녀의 얼굴.
“…….”
“오늘은 안된다. 이만 들어가서 얌전히 자거라, 꼬마 아가씨.”
데모닉은 쉬이 보내줄 표정이 아니었다.
데이지의 눈에서 붉은 투기가 일렁거렸다. 꽉 움켜쥔 작은 주먹은 거석이라도 부술 듯했다.
저도 모르게 검을 움켜쥔 데모닉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본격적으로 수련한지 1년도 안 된 애송이가 팔라딘을 긴장하게 하다니.
‘다 성장하면 얼마나 터무니없는 녀석이 될지 궁금하군.’
하지만ㅡ
“아직 이르구나.”
카강!
데모닉이 검집을 휘둘렀다.
꼬마 아가씨에게는 미안하지만, 오늘만큼은 봐줄 수 없다.
데이지의 주먹과 데모닉의 검집이 허공을 수놓았다.
공방의 양상은 뚜렷했다. 데이지가 공격하면, 데모닉은 막았다.
데이지가 한 걸음 물러나면, 데모닉은 세 걸음 밀어붙였다.
압도적인 경험과 기술의 차이.
“왜, 왜애…! 왜 막아요, 왜! 왜 나한테만 그러는 거예요!”
데이지의 재능이 높다지만, 살아온 시간의 밀도가 달랐다.
결국 데이지는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미안하구나. 오늘은 정말 안 된다.”
데모닉은 눈을 감았다.
그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 * * * *
이슬 젖은 풀이 종아리를 적시고, 축축한 새벽안개가 폐를 가득 채웠다.
케니스와 한스는 그 모든 것을 바람처럼 꿰뚫으며 달리고 있었다.
케니스는 한스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지도 않고 묵묵히 달렸다. 어쩌면 당연히 따라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둘 다 초인의 육체에 이르렀기에, 잠깐 사이에 제법 멀리까지 나왔다.
“……케니스?”
오늘은 성도에서 멀어질 수 없는 날이다. 한스가 우려에 찬 목소리로 케니스를 불렀다.
“…조금만 더요. 정말 조금만 더.”
반쯤 애원하는 듯한 케니스의 목소리.
한스는 아무 말 없이 케니스의 뒤로 더 바짝 붙었다.
시야에서 성도가 새끼손톱처럼 보이기 시작하자, 케니스가 걸음을 멈췄다.
“여기는….”
높은 언덕의 정상에서 멈춰선 케니스. 바로 옆에는 우뚝 솟은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나무 옆에 주저앉은 케니스가 툭툭 옆을 두들겼다. 한스는 조심스럽게 케니스 옆에 앉았다.
“……….”
“……….”
솨아아아아아ㅡ
저 멀리서부터 너른 바람이 불어왔다. 나뭇잎과 풀이 흔들리며 파도치는 소리를 흘렸다.
케니스와 한스는 아무 말 없이 이 풍경을 바라봤다.
“여기는…. 제가 어릴 때, 아주 가끔 너무 힘들면 오는 장소였어요.”
한참이나 침묵하던 케니스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목소리가 조금 촉촉했다.
“지금은 제가 어머니가 있었다는 것도 알고, 아빠도 있지만.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거든요. 제 부모님이 누구인지, 왜 나를 버렸는지….”
“그건ㅡ”
“지금은 알아요. 아빠랑 충분히 얘기했으니까.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죠. 하지만, 너무 어렸던 저는 그게 너무 힘들었어요.”
케니스는 떠오르는 일출 속에서 자신의 과거를 보았다.
만신전 소속의 고아원에서 자라다가, 영문도 모르게 성기사단 교육대에 들어가게 된 어린 자신.
고아원 출신으로서는 이례적인 경우였다.
또래 견습 성기사 중에서 고아는 케니스가 유일했다.
유일하다는 것은 모난 돌이라는 뜻. 미숙한 아이들에게 남들과 다른 것 만큼 괴롭히기 좋은 대상이 또 있을까.
케니스는 순수한 악의로 가득찬 유년기를 보냈다.
– “너는 엄마아빠도 없다면서?”
– “너 같은 애는 키우기 싫다고 고아원에 버렸다고 하던데? 푸하하하!”
때로는 버티고, 때로는 맞서 싸웠다.
– “야, 너 이리 나와!”
뻐억!
– “으아, 아아아악! 내, 내 이빨! 이빨 부러졌잖아!”
– “또 우리 엄마아빠 들먹이면서 헛소리 지껄여 봐. 떠들어 보라고!”
어린 케니스는 당차게도 모진 악의를 견뎌냈다.
억세고, 꿋꿋하게. 마지 길가의 잡초처럼 무럭무럭 자랐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의 부모님이 교육대에 오는 날처럼, 이 세상에 혼자라는 것을 느껴버릴 때면.
아주 가끔은 울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케니스는 몰래 성도를 빠져나와 하염없이 달렸다. 달리고 또 달리다 숨이 차올라서 멈추면, 항상 이 나무 앞이었다.
“뭐어. 그게 너무 힘들어서 도망치듯이 성도를 떠났어요. 그렇게 가게 된 곳이 북부였죠. 하하. 그때는 엄청 힘들었는데.”
“……많이 힘들었겠네.”
“그렇죠.”
이름도 모르는 이 나무 옆에서 그리도 많이 울었다.
“성도를 떠나는 날, 저는 이 나무를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맹세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왜….”
케니스의 황금 눈동자가 한스를 바라봤다.
한스는 잠시 숨을 멈췄다.
“그냥…. 그냥요.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한스한테는 꼭 말해주고 싶었어요. 내가 어릴 때 이렇게나 힘들었고, 이런 곳까지 와서 혼자 울다 잠들었다는걸.”
아무도 모르는 케니스의 비밀.
아마 하늘은 알고 있지 않았을까.
“어쩐지 오늘이 아니면 말하기 힘들 것 같아서요.”
케니스는 그리 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한스는 멍하니 케니스를 바라보다가, 뭔가에 홀린 것처럼 중얼거렸다.
“…좋아합니다.”
“예?”
“…아, 아? 아아?! 자, 잠깐만! 그, 그러니까 이건ㅡ, 어, 그으ㅡ!”
한스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분위기에 휩쓸렸던 탓일까. 저도 모르게 입이 움직였다.
“자, 잠깐. 이건, 그, 으으ㅡ.”
해가 점점 더 밝게 세상을 비춘다. 태양은 케니스의 얼굴을 살짝 따뜻하게 어루만졌다.
덕분에 케니스의 얼굴도 옅은 분홍색으로 달궈졌다. 햇빛 때문이다.
케니스의 금빛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가.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이내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더니.
“그, 그으ㅡ 흐읍?!”
시끄럽게 떠드는 한스의 입을 막아버렸다.
케니스와 한스의 그림자는 잠시 붙어있다가, 천천히 떨어졌다.
* * * * *
쿠르르릉ㅡ
보랏빛 독무로 가득 찬 심연.
요사한 얼음 궁전에서 가장 높은 곳, 커다란 옥좌에 앉은 발가르는 고뇌에 빠져 있었다.
삐이이이….
한손으로는 로티를 쓰다듬으면서.
‘바로 오늘이군.’
실로 역사적인 날이 될 것이다.
발가르 뿐만 아니라, 심연과 지상을 살아가는 모든 존재가 그리 생각하고 있으리라.
‘차원의 벽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어.’
오늘이 지나면 차원의 벽은 무너진다.
역설적이게도, 심연과 지상을 합치기에 가장 적합한 날이기도 했다.
《어버이께서도 분명 이를 알고 계실 터.》
평소 인기척 하나 없었던 마왕성은 온갖 악마들로 북적거렸다.
벽을 뚫고 날아다니는 부유형의 악마부터, 점액질 형태의 악마, 지네를 닮은 것, 동물 이것저것을 섞은 것 처럼 보이는 악마까지.
심연에 존재하는 모든 악마를 긁어다가 마왕성에 쑤셔 넣은 모양새였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발가르가 휘하에 있는 모든 악마를 강제로 마왕성에 쑤셔 박았으니까.
‘모자란 녀석들이지만, 바깥에 뒀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장담할 수 없다.’
운이 없으면 차원의 틈에 빨려 들어가 영영 허무를 떠돌게 될 것이고, 재수가 좋다면 즉사하겠지.
정말정말 재수가 없다면 지상의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어버이께서 잔뜩 화를 내시겠지.’
발가르는 어버이와의 맹약을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삐이이이ㅡ
《조금 더 자거라.》
삐…….
로티를 다시 재운 발가르는 창문으로 향했다.
쩌적ㅡ 쩍!
심연의 하늘에 커다란 균열이 그어지고 있다. 차원이 무너진다.
《…때가 되었군.》
발가르는 담담히 되뇌었다.
쿠르르르릉ㅡ! 콰과광!!
태산이 무너지는 듯 거대한 소음과 함께, 심연이라는 차원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지가 요동치고, 하늘이 삐그덕거린다. 감당하기 힘든 거대한 존재가 심연에 강림하고 있었다.
심연에 발붙이고 있는 모든 것들이 침묵했다.
《목 도 하 라!》
구름을 뚫고, 하늘을 넘어서, 아득한 우주 저편에 닿은.
별의 거인이 심연을 보며 외쳤다.
《비 로 소 하 나 가 될 지 어 다!》
하나의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려 한다.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정말 엄청나게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
– ‘신선우’님…! 드워프가 자유를 부르짖는 전쟁을 하다니…! 이 무슨…! 자유, 수염… 무기로는 낫과 망치를 든… 으윽? 머, 머리가…! 오푸스 팔락이 아니라 오푸스 마르크스가 되어버릴 것 같은…!! 용과 제공권을 다투는 드워프라니… 이건 정말 개쩌는 상상이 아닐 수 없군요…!! 하지만… 2천화, 3천화를 쓰면 작가가 망가지고 말것입니다…!! 히에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