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6화. 하나 된 세계
쿠릉!
심연이라는 차원 전체가 거세게 진동했다. 공기가 찢어지고, 하늘이 갈라진다.
우주의 아득한 저편에서 별로 이루어진 거인이 심연을 내려보고 있었다.
발가르는 저도 모르게 살짝 몸을 떨었다.
어마어마한, 실로 두려울 정도의 위압감이다.
‘이것이…. 어버이의 진정한 모습.’
신(神).
그야말로, 신의 위용.
삐이이이….
아직 새끼용인 로티가 덜덜 떨며 발가르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발가르는 칠흑 같은 기운을 일으켜 로티를 감쌌다.
《잠들어 있거라.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로티는 금방 잠들었다.
발가르는 조심스럽게 로티를 쓰다듬으며 어버이를 바라봤다.
《비 로 소 하 나 가 될 지 어 다ㅡ》
우주 바깥에서 심연을 향해 두 손을 벌린 별의 거인이 괴성을 질렀다.
감히 크기를 헤아리기도 어려운 손이 심연의 끝과 끝을 파고들었다.
쩌적ㅡ! 쿠구구궁ㅡ! 콰르릉ㅡ!
대지가 신음하며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용암이 솟구쳐오른다.
이윽고, 마왕성 전체가 기울기 시작했다.
마왕성만이 기운 것이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기울어지고 뒤틀리며 제 위치를 잃어간다. 지평선은 평행하지 않고 휘어졌으며, 하늘과 맞닿을 듯 치솟고 있다.
별의 거인이 심연 자체를 들어 올리고 있는 것이다.
콰지직ㅡ! 쩌적ㅡ!
굵은 선 하나가 심연의 하늘을 가로질렀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뻗어나가듯, 거대한 균열 하나는 부지불식간에 퍼져나갔다.
그리고 천천히 솟아오른다.
심연의 모든 것들이.
“키에에에ㅡ! 크, 큰일이닭!!”
“멸망! 대재앙! 대공황이다아아칵!”
혼란에 빠진 악마들이 이리저리 날뛰며 시끄럽게 소리쳤다.
눈을 찌푸린 발가르가 손짓하자, 새까만 기운이 넓게 펼쳐졌다.
쩌엉!
“……….”
“……….”
반질반질한 얼음에 갇힌 악마들이 눈동자를 굴렸다. 이제야 조금 조용해졌다.
땅이 치솟고 하늘이 갈라지는 바깥과 달리.
마왕성은 조금 평화로운 듯싶었지만, 그 이유는 단 하나.
발가르의 존재 덕분이었다.
발가르가 사전에 마왕성 전체를 둘러싸고 두꺼운 방어막을 쳐둔 것이다.
‘으, 으음…! 상정한 것 이상의 압력이다.’
마왕성을 둘러싼 보호막이 삐걱거리며 신음했다. 발가르는 다급하게 손을 뻗어 보호막을 더욱 보강했다.
쿠구구구구ㅡ
심연은 느리지만, 꾸준하게 차원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발가르가 보호하고 있는 마왕성을 제외한 곳에 있는 모든 것들이 바스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수천 년을 버텨온 거석이, 꿈틀거리는 거대한 촉수가, 비틀어진 나무에 균열이 가더니.
차원이 이동하는 과정에서 생긴 압력에 짓눌려 천천히 바스러졌다.
발가르는 이 풍경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무시무시한 현상이군.’
온통 황무지뿐이던 심연의 모습이 더욱 평탄해지고 있다.
심연을 뒤덮고 있던 보랏빛 독무가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부의 감정이 쏟아지는 낮은 차원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신호였다.
‘하늘이 보이는군.’
발가르는 보랏빛 독무를 뚫고 한 자루의 창처럼 떨어지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상의 푸르른 창공이다.
《순 리 대 로 될 지 어 다ㅡ!!》
별의 거인이 최후의 포효를 뱉었다.
쿠콰과아아앙ㅡ!!
이리저리 비틀리고 신음하며 치솟던 심연이, 온 천지에 울리는 괴성과 함께 거대한 충격이 일었다.
이전까지 잔잔한 파도가 몰아쳤다면, 이번 것은 거대한 쓰나미처럼 온 심연을 뒤흔들었다.
꽈아아아앙ㅡ!
그 여파로 심연의 지층이 마구잡이로 뒤틀렸다.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고, 끊어지고, 가라앉았다.
심연의 곳곳에 거대한 협곡과 절벽이 생겼으며, 높고 낮은 언덕과 산맥이 자라났다.
온통 평야뿐이던 심연의 모습은 순식간에 변화했다.
《끄으윽.》
대지가 뒤틀리고 산맥이 생기는 충격의 여파에서 마왕성 또한 무사하지 못했다.
마왕성을 감싸던 보호막은 산산이 부서진 지 오래였다.
첨탑 수십 개가 무너졌고, 성벽이 쓰러졌다.
《끄, 쿨럭! 끄으으으….》
예상치 못한 충격에 발가르가 입에서 검은 피를 토했다.
《…로티! 무사하느냐.》
삐이이… 코오. 삐이이… 코오.
다행히 로티는 비늘 하나 다치지 않았다. 발가르가 반사적으로 로티부터 보호한 까닭이었다.
발가르가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전부 끝난… 것인가?》
하늘을 우러르던 별의 거인은 사라졌다.
심연을 가득 채우고 있던 보랏빛 독무 또한 보이지 않았다. 짧게 보였던 푸른 하늘 대신, 기이한 붉은 하늘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붉은 하늘이라. 기이하군.》
심연의 대지에서 올라오는 사특한 기운이 하늘을 붉게 물들인 것일까?
어디선가 신선한 바람이 한 줌 불어왔다.
짭짤한 소금 내음을 가득 머금은 바다의 바람.
발가르는 고개를 돌려 바람이 불어온 곳을 바라봤다.
심연에는 호수와 강이 없다. 따라서 바다도 없었다.
《허.》
심연의 한쪽 지평선에는.
이전에 없던 광대한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푸른 바다가 햇살을 눈부시게 반사하며 파도쳤다.
붉은 하늘과 푸른 바다의 대치는 기이한 감성을 자아냈다.
《정말로, 정말로 지상에 와버린 것이구나.》
발가르는 창문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짭짤한 바다의 향기가 발가르의 폐를 가득 채웠다.
《허어…….》
심연의 모습은 이전과 완전히 달랐다.
이전에 없던 언덕과 협곡, 계곡 사이로 붉은 용암이 구불구불 흘렀다. 곳곳에서 비릿한 유황 냄새가 진동했다.
그리고ㅡ
《저 산맥은 도대체 무슨.》
바다를 향해 뻗어진 수평선의 끝.
하늘의 기둥, 아니. 하늘에서 땅으로 뻗어 나온 벽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발가르조차 올려봐야 할 정도의 터무니 없는 태산들이 동그랗게 줄지어 심연을 둘러싸고 있었다.
구름조차 산맥의 중간쯤에서 한번 쉬어갈 정도로 터무니없는 높이였다.
《…그렇군. 지상과 하나 되는 과정에서 생긴 산맥인가.》
발가르는 상황을 이해했다.
심연과 지상이 하나 되는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충격이 발생했다.
심연의 지층이 뒤틀리며 산과 계곡이 생길 정도의 충격이었으니, 지상과 직접 맞닿은 부분에서는 충격의 강도가 더욱 심했을 터.
그 결과로 이렇게 터무니없는 높이의 산맥이 병풍처럼 심연을 둘러싸게 된 것이다.
발가르는 이 상황에 오히려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군. 어설픈 녀석들이 이 땅으로 들어올 일은 없겠어.》
악마들을 통제하는 것은 발가르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몰래 기어들어 오는 녀석들까지 막는 것은 힘들었다. 온종일 심연과 지상의 경계를 지킬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그런데 넓은 바다와 태산처럼 솟은 산맥이 침입자들을 대신 막아주는 것이다.
《어버이께서는 여기까지 미리 예견하셨는가. 과연…. 어버이의 혜안은 끝이 없구나.》
발가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모습을 감춘 별의 거인은 발가르의 혼잣말에 대답해주지 못했다.
* * * * *
심연이 지상으로 향해 올라오던 때.
지상은 한바탕 거대한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콰르르르릉ㅡ! 꽈릉ㅡ! 쿠콰아앙!
세상이 무너지면 이러할까.
대지가 흔들리고, 하늘이 분노를 토하는 듯했다.
세상 전체를 몰아치는 태풍에 휩쓸린 착각마저 들었다.
“모두 피하시오! 안전한 곳으로 숨으시오!”
“꺄아아악! 어, 얼른 도망쳐요!”
사람들은 문을 걸어 잠갔다. 창문을 단단히 막고, 구석에 웅크려 서로를 의지했다.
온 사방에서 괴물이 으르렁거리는 듯하더니, 땅이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쿠구궁ㅡ! 콰앙! 꽈아아앙ㅡ!!
“으아아앗!”
“다들 머리 숙여! 얼른!”
이러다 하늘이 통째로 무너지는 건 아닐까. 걱정마저 들 정도였다.
쿠르르르…
영원할 것 같았던 땅의 진동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사람들은 먼지를 머리에 묻힌 채 천천히 바깥으로 나왔다.
“…하나 된 분이시여………. 맙소사.”
“끄응.”
바깥에 있는 것 중 멀쩡한 것이 없었다. 밭은 죄다 뒤집어졌고, 포장된 길은 부서졌다. 너저분하게 부서진 것 중에서 멀쩡한 것을 찾는 것이 어려울 지경.
“아. 아…?”
“…저, 저건 도대체 뭐야.”
“으아아아아….”
모든 것이 부서진 처참한 현장에서,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한 곳을 바라봤다.
저 멀리까지 닿은 바다의 끝.
하늘에 닿을 듯 높게 치솟은 산맥이 우뚝 솟아 있었으니.
하얀 구름이 산맥의 중턱에 걸려 수염처럼 보였다.
“워, 워, 원래 저, 저런 곳에 사, 산이 있던가…?”
“예끼, 이 사람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허,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단체로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이 분명하군.”
평생을 작은 마을에서 살아온 청년이 중얼거렸다.
원래 저 방향은 망망대해밖에 없는 곳이다.
바다가 터무니없이 넓어서 세상의 끝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수평선 끝에 길고 높은 산맥이 생겨버린 것이다.
“………정말 엄청난 산맥이군.”
누군가 중얼거렸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없던 바다의 끝에 느닷없이 거대한 산이 자라나다니.
누가 말해주지도 않았지만,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저 산맥을 넘으면 심연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온갖 악마와 기이하고 사악한 것들이 득실거리는 무시무시한 곳.
“끄응. 이봐! 거기 구경만 하지 말고 여기 좀 도와줘!”
누군가 무너진 기둥을 붙잡고 외쳤다. 사람들은 뭔가에 홀려 있다가 깨어난 것처럼 굴었다.
“여기 사람이 갇혀있어!”
“끄으으응. 무, 무거워…….”
깔린 것을 치우고, 길가에 널린 파편을 쓸어낸다.
사람들은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 부산스레 움직였다.
작지만 꾸준하게, 그렇게 살아간다.
널브러진 돌을 치우던 누군가 중얼거렸다.
“새로운 시대가 정말로… 오긴 한 건가?”
새로운 시대의 물살은 그렇게 갑작스럽지만, 아주 천천히 흘러왔다.
누구나 알 수 있는 변화와, 조금씩 달라지는 일상으로.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엄청나게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
이제 곧… 입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주인공이 루트를 삐긋햇더라면… 정말 외신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군요…!! 거야말로 충동과 흥미를 위해 움직이는… 무시무시한 외신…!! 너무 두려운 일입니다…!! 지리산에서 수양 중이신 무당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