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전(前) 용사라고요? ( 2 )
따각ㅡ 따각ㅡ
《…….》
“…….”
한 마리의 말과 사내가 길을 걷고 있었다.
유니콘과 이안은 말없이 오랫동안 걸었다.
《크흠. 계약자여. 내가 그리 껄끄러운 것이냐?》
침묵을 견디다 못한 유니콘이 먼저 말을 걸었다.
“…하아. 아뇨. 아주 영광이죠. 무려! 그 소문의! 처녀의 수호자이신 유니콘과 계약을 하게 됐는데요.”
이안의 진심은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유니콘의 행패에 대한 소문은 자자하게 들었다.
‘마음에 드는 처녀를 납치하듯 등에 태워서 일주일 동안 하늘을 날았다고 하던가….’
진정 두려운 점은 그 짓거리가 유니콘의 진심 플러팅이라는 것이다.
자칭 처녀의 수호자였지만, 실상 처녀를 밝히는 변태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정신 바짝 차려야 된다.’
강제적이었다고는 하지만, 이제 이안과 유니콘은 영혼의 계약으로 결속된 상태.
이안과 유니콘은 서로에 대해 책임과 의무가 있었다.
즉, 유니콘의 행패는 이안의 잘못이 될 수도 있다는 뜻.
이안은 허리춤에서 달랑거리는 롱소드를 꽉 잡았다.
‘여차하면 이 검으로….’
아버지가 떠나는 이안에게 정식으로 ‘건네준’ 롱소드였다.
– “아들아. 내가 평소에 하는 말이 있지. 뭔지 기억하냐?”
– “…뭔데요.”
– “녀석, 유니콘 때문에 아직도 꽁해서는.”
아버지는 이안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 “용기는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다. 두려움을 느끼고 그걸 이겨내는 것이, 진정한 용기야.”
– “…그게 뭐가 용기예요.”
이안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한스는 이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무지렁이 농부 한스 또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으니까.
– “뭐. 차차 이해하게 될 거다. 이것만 기억해라.”
한스는 이안의 허리춤에 롱소드를 단단히 묶어줬다.
롱소드는 조금 무겁고, 살짝 거추장스러웠다.
– “너무 무서워서 도망치고 싶을 때가 분명히 있을 거야. 그럴 때면 딱 한 걸음만 앞으로 가라. 딱 한 걸음만 걸으면 된다.”
-“……아버지. 저 그냥 둘째 어머니 얼굴만 보러 가는 거 맞죠?”
마치 전쟁터에 아들을 보내는 듯한 비장함에 이안은 살짝 어이가 없었다.
이 무슨 엄숙함이란 말인가?
– “으음…. 하하! 곧 알게 될 거다. 내가 왜 이렇게 말하는지.”
아버지는 멋쩍게 웃더니 이안의 등을 팡팡 내리쳤다.
‘하여튼 아버지는 가끔 이해하기 어렵단 말이지.’
유니콘과 함께 하는 여행길은 평화로웠다.
하는 행동이 방정맞을 뿐이지 유니콘은 신수다. 그것도 신이 직접 빚은 신수.
어지간한 맹수들은 감히 이빨을 들이댈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는 겁니까?”
《그것도 모르고 따라왔는가?》
“오늘 뭔가 이런저런 일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다 보니….”
유니콘은 조금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이안은 당당했다.
부모님이 전직 용사였다는 것, 둘째 어머니가 있다는 것, 유니콘의 계약자가 되었다는 것까지.
일생일대의 사건이 벌써 세 번이나 일어났는데, 뭐 어쩌란 말인가.
《푸히힝…. 뭐, 그럴 수도 있지.》
유니콘이 뿔로 어느 방향을 가리켰다.
북쪽이다.
《우리는 북쪽으로 갈 거라네. 푸르릉.》
“아. 북쪽. 크로티아 왕국이군요. 좋죠. 거기 날씨가 그렇게 온화하다던데. 둘째 어머니가 거기 사시는구나.”
《아니. 더 북쪽.》
“음. 세리트 평원? 거기도 좋죠. 사시사철 푸른 꽃밭이 유명한ㅡ”
《더 북쪽으로 올라가게.》
“…그 위로 가면 설원밖에 없는데요.”
《우리는 그 설원으로 간다네. 이히힝. 몬테그로스. 들어봤겠지?》
“아.”
이안의 얼굴이 까맣게 죽었다.
몬테그로스, 마수의 산을 끼고 있는 천혜의 요새이자 북쪽 끝의 최전방 공국.
용기사 프리가의 고향으로 유명한 도시였다.
“…갑자기 다리가 아픈 것 같아요.”
《푸르르릉. 이러지 말게, 계약자여. 엄살은 안 통하니까.》
유니콘의 뿔이 이안의 등을 쿡쿡 찔렀다.
이안은 마지못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 *
물론 곧장 북쪽으로 향하지는 않았다.
몬테그로스는 북쪽 끝에 있다. 대륙 횡단에 버금가는 여정이 될 것이다.
중간중간 도시와 마을에 들러서 물자를 보충할 필요가 있었다.
“그냥 저를 등에 태워서 날아가면 빠르지 않을ㅡ”
《갈ㅡㅡ!!! 순수하고 순결한 처녀만이 이 몸의 등에 탈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냐!!》
“…….”
이안은 유니콘과 대화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냥 걸어다니는 맹수 퇴치기라고 여기는 편이 이로울 듯했다.
《여기서 가장 큰 도시는 성도가 있지. 그곳으로 가는 편이 좋겠군.》
“오. 성도.”
이안에게도 반가운 결정이었다.
부모님이 전직 용사와 그 동료 아닌가.
부모님의 전성기 시절에 대한 흔적이 무엇보다 많이 남아있을 곳에 간다고 생각하니, 조금 설레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성도에는 데모닉이라는 외할아버지가 있다고 들었다.
‘너무 어릴 때 봐서 얼굴도 기억 안 나지만.’
외할아버지니까 분명 노인이시겠지.
주름도 자글자글하고, 허리도 굽었을 것이다.
어머니를 닮아서 인자한 성격이실지도 모른다.
이안은 기억도 안 나는 외할아버지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여기서 금방이니까 어서 가지.》
이안과 유니콘은 꼬박 이주일을 걸어서 성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안의 식량은 딱 이주일 분량이었다. 아마 한스와 케니스는 이안이 성도에 들를 것을 예상한 모양이었다.
이주일 동안 유니콘은 절대로 이안을 태워주지 않았다.
‘…썩을 말.’
이안은 속으로 유니콘을 씹으며 성도의 검문소에 줄을 섰다.
줄은 빠르게 줄더니 어느새 이안의 차례가 됐다.
“정지. 이름과 목적을 말씀하십시오.”
“이름은 이안입니다. 목적은, 어… 물자를 좀 사려고 왔고요.”
경비병이 삼엄한 눈으로 이안의 짐과 행태를 검사했다.
뒤에 있던 사제의 신성력이 이안의 몸을 한 차례 훑었다.
“어?”
사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안의 허리춤에 걸린 롱소드에서 터무니없는 신성력이 느껴졌다.
“실례지만, 잠시 롱소드를 확인하겠습니다.”
사제의 신호를 받은 성기사가 이안의 롱소드를 바라봤다.
금빛 검날이 검집에서 빠져나오며 황홀한 빛을 흩뿌렸다.
성기사가 소리 질렀다.
“이, 이건! 흑염용왕폭살제 한스 님의 검?!”
“아, 예…. 그 한스라는 분이 저희 아버지인데요. 저한테 직접 주신 검이거든요.”
“하나 된 분 맙소사! 한스 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이십니까?!”
“허어어억! 요, 용사님과 한스 님의 자식이라니!”
“이, 인제 보니까 저 멀리 비처녀 혐…아니. 유니콘도 있잖아!”
“이 검!! 한님께서의 룬 문자가 새겨진 걸 봐서는 진짜가 확실해! 하나 된 분이시여, 맙소사 세상에!!”
성기사와 사제들이 크게 소리 질렀다.
주변에서 이안의 롱소드를 두고 감탄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안은 얼떨떨했다.
‘…이 검이 그렇게나 대단한 검인가? 그냥 가끔 빛나는 게 좀 신기하긴 하던데.’
자신이 어떤 검을 들고 있는지 잘 모르는 이안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은 그냥 벽에 걸려있던 검을 들고나왔을 뿐이니까!
‘아버지가 가끔 검 쓰는 걸 봤을 때는 날이 엄청나게 잘 들기는 하던데.’
아주 드물게 아버지가 검을 들고 사냥을 나설 때가 있었다.
물론 어머니는 천생 여인처럼 검을 들지 않았고.
“어, 음. 저… 이제 들어가도 되나요?”
“아! 귀하신 분을 두고 이런 실례를!”
성기사가 정중하게 롱소드를 돌려줬다.
주변에서 쏟아지는 눈길과 관심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쏟아졌다.
“이쪽으로 오시죠!!”
성기사는 이안을 검문소 안쪽의 귀빈실로 안내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신다면, 만신전에서 곧장 전용 마차와 편의를 봐 드릴 인물을 보낼 겁니다!”
“…? 아뇨? 그런 건 괜찮으니까 그냥ㅡ”
“아니지! 제가 아예 근무를 잠깐 바꾸고, 직접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성기사는 이안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은 채 달려 나갔다.
말로만 듣던, 동경하고 존경하던 용사님과 한스 님의 자식을 직접 모실 기회라니!
이런 귀한 기회를 놓칠 수 없는 노릇이다!
《푸히히힝! 이런 대접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네, 계약자여. 앞으로 숱하게 보게 될 모습이야.》
창밖에서 유니콘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나는 별로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데.”
검문소에서 받았던 눈길에도 속이 울렁거리는데, 전용 마차에 성기사가 직접 길 안내를 해준다고?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얼른 탈출이나 하자.”
고개를 내밀어 인기척을 살핀 이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안 되겠는데?”
문을 열자마자 부리부리한 눈매의 성기사 3명과 눈이 마주쳤다. 경비가 삼엄했다.
이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로 돌아왔다.
“이 과자 되게 맛있네.”
그렇게 과자나 축내면서 얼마나 있었을까.
콰앙ㅡ!
“우와아악?!”
누군가 귀빈실의 문을 통째로 박차고 들어왔다.
실로 엄청난 박력.
얌전히 과자를 먹고 있던 이안은 영문 모를 등장에 검부터 꽉 붙잡았다.
뭉게뭉게 먼지가 피어오른다.
“네가 이안이냐?”
먼지 속에서 한 사내가 말했다.
스산한 한기, 목소리만 들었을 뿐인데 오한이 느껴졌다.
“그… 그렇습니다만. 누구십니까?”
“질문은 내가 한다. 어머니의 성함은 케니스, 아버지는 놈팽… 한스. 맞나?”
“맞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설마 부모님의 지인일까?
“…그렇군. 나이가 몇이지?”
“……? 올해 성인식을 치렀습니다.”
이안은 올해 17살이 되어 성인식을 치렀다.
“허어. 그렇군. 17살…. 성인식이라. 벌써 그리됐는가.”
사내는 조금 허무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런. 먼지가 심하군.”
사내가 손을 휘둘렀다. 밀폐된 방 안에서 바람이 몰아치더니 먼지가 문밖으로 빠져나갔다.
이안은 그제야 의문의 사내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수려한 은발, 차가운 눈빛, 오똑한 콧대.
약간의 잔주름이 있기는 했지만, 오히려 사내의 중후한 멋을 더해줄 뿐이었다.
‘엄청난 미남…!’
이 정도면 아버지에 버금가는 수준의 미남이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큰 도시는 달라도 물부터 다르구나.
“나는 데모닉이다. 편하게 닉이라고 불러라.”
“어, 음…. 갑자기 애칭을요?”
“이안. 정말 많이 컸구나. 너는 기억 못 하겠지만, 네가 아주 어릴 때 몇 번 본 적 있었지.”
“아. 부모님의 지인이셨군요.”
데모닉은 고개를 저었다.
지인? 그런 얄팍한 관계일 리가.
“아니. 난 네 외할아버지다.”
“………???”
할아버지?
이안은 데모닉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봤다.
탱탱한 피부에는 약간의 잔주름을 제외하면 어떤 흠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할아버지?
이 얼굴로?
진짜?
“어, 어어어어. 하, 할아버지? 할아버지?? 아, 아니 정말로? 잠깐ㅡ”
이안이 고장 난 태엽처럼 버벅거리기 시작했다.
상상하던 노인의 형태에서 완벽하게 반대되는 존재가 등장해버렸다.
어머니가 외할아버지에 대해 얘기하기는 했다.
성도에 데모닉이라는 이름의 외할아버지가 있다고.
지금은 너희 아빠랑 싸워서 만나러 오지 않는다고.
“…! 저희 아버지랑 싸웠다고 들었는데, 그 이유가 설마?”
이안은 불현듯 깨닫고 말았다.
외할아버지가 아버지와 싸운 이유.
“그래. 너희 애비가 감히… 둘째 아내를 들였기 때문이다. 아주 죽여놨어야 했는데.”
꾸드드드득ㅡ
데모닉이 씹어먹듯 중얼거렸다.
주변에서 무형의 기운이 거칠게 요동쳤다. 이런 기운에 면역이 없는 이안은 속이 뒤집어지는 메스꺼움을 느꼈다.
데모닉은 금방 냉정을 되찾고 신성력을 다스렸다.
오랜만에 만나는 손자 앞에서 추태를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무튼 잘 왔다. 만나서 정말 좋구나.”
데모닉이 이안의 손을 포개 잡았다.
굳은살 가득한 손은 외할아버지의 것이라고 부르기 힘들었다. 이건 전사의 손이었다.
“아하하…. 저, 저도요. 그, 외할아버지?”
“……!!”
데모닉은 무형의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외할아버지! 아아! 이 얼마나 달콤한 울림인가!
“자. 어서 가자. 성도에 왔으니 이것저것 구경도 하고, 푹 쉬어야지.”
“네.”
데모닉은 이안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처참하게 부서진 문의 잔해.
이안은 그제야 의문이 들었다.
“……외할아버지. 그런데 문은 어떻게 부수고 들어오신ㅡ”
이안의 말을 끊고, 저 멀리서 성기사 한 명이 달려왔다
이안을 귀빈실로 안내한 성기사였다.
“으아아아아! 팔라딘님, 데모닉 팔라딘님!! 제발 저에게 기회를!! 용사님의 아드님을 모실 수 있는 기회를ㅡ!!”
데모닉은 이안의 어깨를 감싸며 비릿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나약한 녀석. 패배자에게 두 번의 기회는 없다. 얌전히 물러나라.”
“아아아아아아!! 팔라딘님!! 팔라딘님! 제발 기회를ㅡ!!”
어디선가 달려온 두 명의 성기사가 발버둥 치는 성기사를 강제로 끌고 갔다.
처참한 외침이 복도를 따라 점점 작아졌다.
꿀꺽…
이안에게는 그것이 개미지옥에 끌려가는 미물의 단말마처럼 들렸다.
“…파, 팔라딘이셨어요?”
“몰랐니? 케니스가 말을 안 해줬구나. 하긴, 너희 엄마가 용사에 애비는 사도 겸 전직 팔라딘이니까. 나 같은 뒷방 팔라딘은 별거 아니긴 하지.”
데모닉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이안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전혀 별거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요!!!’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엄청나게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닷…!! 외전은 후일담… 즉, 본편 이후의 소소한 이야기…!! 그야말로 일상, 혹은 모든 것이 끝난 후의 장면들…!!! 이라는 느낌으로 외전이 진행될 것입니다…! 보너스 장면… 혹은 보너스 스테이지라는 말씀이 딱 맞는 것 같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