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으, 목이야.”
점차 저물어가는 노을빛이 베란다를 어스름하게 감싸안는 8월의 초저녁.
부스스한 연갈색 머리카락 사이를 통과한 얇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목의 초커형 차단기를 조심스레 풀어내렸다.
눈알을 도로록 굴려 벽을 훑자, 그 시선은 오후 일곱 시 즈음을 간략하게 나타내고 있는 벽시계에 멈춰섰다.
정확히 세 배의 시간 배속을 자랑하는 가상현실로 인해 시간 감각이 어수선했다.
비록 가상의 아바타가 말했지만, 오랫동안 한 자세를 유지하며 세 시간 가량 소파에 누워있던 탓인지 목이 건조했다.
홈바 버튼을 눌러 안에서 차가운 물을 꺼내어 컵에 따른 그녀 – 하모니는, 그것을 목구멍으로 시원하게 들이키고는 소파에 다시 주저앉는다.
꽤 연락이 와있었다.
그녀에게 다크 존을 추천해주었던 친분이 있는 스트리머 몇 명, 그리고 편집자까지.
화면 너머로 어렴풋이 보이는 내용은 전부 비슷했지만, 가장 먼저 답해야만 하는 사람은 한 명 있었다.
편집자였다.
내용은…아무래도 예상이 갔다.
[러다이트 : 아니 선생님]
[러다이트 : 방송을 하라니까 9시간짜리 액션 영화를 찍고 오셨네]
[러다이트 : 편집자들 과로사로 죽게 생겼어요]
[하모니 : ^^;;]
[하모니 : 미아내요ㅜ 어쩔수없는 사정이ㅠㅠ!!]
이는 실제로 사실이었다.
오직 정면만을 쳐다볼 수 있는 FPS 플레이어와는 달리, 이놈의 VR게임은 다양한 연출을 위해 스트리밍 시 시청자가 다각도로 유저를 확인 가능했다.
이는 즉슨, 편집자가 체크해야 할 편집점이 몇 배로 늘었음을 의미했다.
물론 자체적인 방송 요약 기능이 플랫폼에 내장되어있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러다이트 : 일단 저 말고도 루빈이나 왈츠 같은 애들도 다 달라붙긴 할건데]
[러다이트 : 그러면 아마 이거 편집 끝날 때까지 한 하루이틀 동안은 노가리나 다른 영상들 좀 늦게 올라가지 않을까….]
[하모니 : 헉ㅠㅠ 그정도예요,,?]
[러다이트 : 10분 정도 되는 영상 세네 개 정도로 끊어서 올리자고 협의가 나오긴 했는데]
[러다이트 : 이걸 최우선으로 전부 올리실거면 아마 3~4일 정도?]
[러다이트 : 밤샘하면 더 빨리 올릴 수 있긴 합니다]
손가락이 멈췄다.
이걸 하지 말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말없이 카페인 음료수 기프티콘을 대여섯 개 정도 보내줄까.
유어스페이스 평균 조회수 등등을 감안하면….
굳이 이 시점에서 무리를 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평소는커녕 방송 역사상 전례없는 일이 터진 시점이기도 했다.
첫 영상 정도는 빠르게 뽑고, 그 이후를 기대하도록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모니 : 그러면 이렇게 하면 어때요??]
[하모니 : 3~4부작으로 나눠서 올린다고 하셨으니까 발단 부분만 빠르게 뽑아서 하나 올리고 그 이후 것들은 천천히!]
[하모니 : 접속 / 파티 / 전투 / 기지 도착 같은 느낌으로다가 끊으면 좋지 않을까 하구….]
[러다이트 : 흠]
[러다이트 : 결국 야근확정^0^]
[하모니 :ヾ(。>﹏<。) ]
[하모니 : 뽀나쓰로 어떻게 안될까용..??]
[러다이트 : 어우선생님 바로 작업착수하겠ㅅ븐디ㅏ 충성충성 [ㅡ]7 ]
하이구야.
무심코 입가에 그려지는 호선.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긴 하지만, 역시 돈은 안 되는 것도 되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남은 건 이제…방송 컨텐츠 조정이라든지, 뭐어. 그런 것들일까. 하나의 문제가 일단락되니 이토록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은근슬쩍 배도 꼬르륵거리고.
하지만,
[러다이트 : 근데]
[하모니 : _( :0 」 )_ ?]
[러다이트 : 당사자한테 허락은 맡으셨구여?]
“아.”
클났다.
근래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고, 이런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걸 까먹어버릴 줄이야.
[하모니 : 잠시만요,,!!!!]
[러다이트 : 아휴]
그녀가 그것을 내팽개치고 즉각 플랫폼 연동 앱으로 들어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싶은 편집자의 한 마디를 뒤로 한 채.
-[친구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응?”
당일 습득한 화기 정리 및 실전사격 연습이 끝나고, 막 로그아웃하려던 찰나에 눈 앞에 떠오르는 메시지 하나.
인게임 기준이라 그런지 대략 네 시간 정도 후에 전송된 그것은, 당연하게도 오늘 처음으로 친구를 맺은 하모니가 보낸 것이었다.
꼬리 위치를 정리하고 풀썩 주저앉아 내용을 살폈다.
-[하모니 : 잘 들어가셨나요?? 너무 늦은 것 같지만 이제서야 연락을 드려봐요,,ㅠㅠㅠ]
-[하모니 : 다름이 아니라 이전에 몇 번 말씀을 드렸지만ㅜㅜ,,,제가 트리키에서 방송을 하고 있는데 유진 씨 덕분에 오늘 너무 대박이 났어요!!]
-[하모니 : 근데 헤어지고 나서 후일담 이야기하느라 진즉 허락을 받았어야 하는데 까먹었어요ㅠ 정말 죄송합니당…///]
-[하모니 : 말이 길어졌는데 혹시 괜찮으시다면 당일 일어난 일을 편집해서 영상으로 올려도 괜찮을까요??]
-[하모니 : 편집한 영상은 요청만 하시면 바로 보여드릴 예정이구요,, 수익 배분은 원하시는 비율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하모니 : 편할 때 답장해주시면 정말 감사드리겠습니당,,,]
-[하모니 : <링크> // <링크> 여기 제 트리키 에어리어랑 유어스페이스 채널 링크에요!!]
“…맞다. 이런 게 있었네.”
스읍.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동안 따로 생각하지 않았던 – 또는, 어쩌면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바로 그 안건이, 이제 코앞으로 닥쳐왔다.
몇 마디 문자를 써서 보내려다가 멈춰선 후, 생각의 늪으로 침잠한다.
만약 신원보호가 필요한 예전이었다면 거부했을지도 모르지만…아니, 생각해보니 크게 다를 건 없나.
잘 무장한 정신병자들과 미친 놈들, 사람 죽이는 데 환장한 놈들, 사람 죽이고 돈을 받는 놈들로 가득한 도시에서, 그나마 우리가 유일한 치안이었으니까.
게다가 나는 신체적으로도 외형적으로도 너무나도 눈에 띄었고, 그 때문에 당시에도 위장 같은 건 꿈에도 못 꿨다.
결국 예전이든 지금이든 상관없이, 특수부대원이라고 하기엔 난 너무 눈에 띄었다.
그런 점에서 미루어보자면 굳이 내가 여기서 거절을 할 이유가 있을까 싶기도 했지만, 아직 걸리는 점도 몇 가지 있었다.
스트리머.
그녀는 자신을 그렇게 밝혔다.
현 시점까지도 규모가 얼마나 큰 방송인지, 얼마나 많은 시청자들이 나와 그녀의 행보를 보고 있었던 건지는 모른다. 아직 보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조금 더 신중히 결정해야만 할지도 몰랐다.
-[유진 : 메시지 확인했습니다]
-[유진 : 잠시만요]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듯한 사이트 링크를 첨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눈 앞으로 떠오르는 두 개의 사이트. 꽤나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홈페이지 내부에는 여러가지 영상들이 잘 정리된 채 업로드된 상태였다.
조회수는….
아니다.
이걸 꼭 확인해야만 하나?
물론 이런 부분까지 신경써야만 하는 게 맞을지도 몰랐지만, 동시에…너무 계산적으로 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행동에 일관성이 없다.
지금 와서 이런 형태로 접근할 거라면, 그녀가 자신을 스트리머라고 소개했을 때부터 철저히 이해득실을 따졌어야지.
물론 그거랑 이거랑은 다른 이야기라고 하면 할 말은 없었지만…
메시지 아래의 V 표식이 푸른 빛으로 물들었다. 이 고양이 역시도 내가 보낸 메시지를 읽었다는 뜻이겠지.
여러 가정들이 동시에 떠올라 머리가 어지럽다.
선악이라는 이분법으로 손쉽게 재단 가능했던 예전과는 다르게, 내가 감당해야만 하는 미지의 영역이 조금씩 늘어난다.
어쩌면, 나는 그렇게 이 세상에 다시금 적응해가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결론은 짧았고 행동은 신속했다.
언제나 그렇듯, 어렵고 새로운 영역에 지속적으로 뛰어드는 건 이쪽의 특기가 아닌가.
-[하모니 : 지금 결정하기 어렵다면 나중에 천천히 연락주셔도 되세요^^!!]
-[유진 : 괜찮아요]
-[하모니 : ????]
-[유진 : 어떤 내용일지 저도 궁금하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일지에 대한 여부를 따지는 건 무의미했다. 언제는 그 모든 것들을 판단하고 행했나.
수락하거나, 거절하거나.
나는 그렇게 하나의 결정을 내렸다.
-[하모니 : !!!!!!]
…이 사람은 빅토르 위고인가.
그래도 그 사람보다는 네다섯 배 정도 길긴 했다.
-[하모니 : 진짜 올려도 되나요????]
-[유진 : 네]
-[하모니 : Σ( ˙꒳˙ )!?]
-[하모니 : 이렇게 시원스럽게 답장받을 줄 몰랐어요,,]
세 개의 점 표식.
상대방이 메시지를 작성하고 있다는 문자였다.
그렇게 잠시간 기다렸을까, 내 눈 앞에 보인 것은 누가 보아도 한국 표준 전화번호 양식이었다.
다시 말해서, 확실치는 않지만 – 이는 그녀의 휴대폰 번호였다.
-[유진 : ??]
-[하모니 : 그래도 돈이 오가는 문제잖아여?]
-[하모니 : 무언가 문제가 있을 때 직접 연락을 주고받을 수도 있어야할 것 같아서ㅎㅎ]
-[하모니 : 추가하신 후 메시지 한 번만 보내주세여!]
…내가 정상적인 대화 절차를 밟고 있는 건지를 확신할 수가 없다.
살짝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런다고 내 손 안에 쥐어진 휴대폰 번호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뭐가 됐든 간에, 이게 깡그리 사라진 내 기존 관계 위로 쌓여질 첫 번째 시작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유진 : 네네]
-[유진 : 올려주시면 나중에 확인할게요]
물론, 이 시점에서 간과하고 있는 게 있었다.
-[하모니 : 감사합니당ㅎㅎ!!]
난 필요한 부분만 전부 신경쓰면, 후폭풍은 그다지 고려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비축분이 필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