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피스 장인 초대석은 엔리의 마이 튜브 주력 컨텐츠 중 하나로.
아피스에서 이름을 날린 사람들을 데리고 와 인터뷰를 하고 그들의 플레이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식으로 진행이 되는 식이다.
평소라면 초대로 온 사람에게 전문적인 설명을 부탁할 테지만.
내일 아라가 할 일은 홀로 외신을 잡아내는 것. 말할 틈이 있을 리가 없다.
이 상황에서 제일 필요한 것은 바로 앞에 있는 남자였다.
데케이. 아피스 전 프로이자 여러 대회에서 해설가로 활동한 사람.
장면을 포착하는 눈도. 고수의 플레이를 해설하는 것도. 거기에 예능까지 가능한 엔터테이너.
만일 데케이가 내일 인터뷰 방송에 합류한다면 분명 방송의 흥행이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화령이 혼자 외신을 잡는 거 해설해 보고 싶지 않아요?”
엔리는 데케이가 고수의 플레이를 해설하는 데 환장한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괜히 사비로 수백 수 천 만원을 들여가며 대회를 여는 괴짜인 게 아니었다.
데키이의 입장에서도 끌리는 제안이었다. 손익을 다 제치고서라도. 아니 돈을 내고서라도 자신이 중계하고 싶은 장면이었다.
천마가 이전에 패배했던 상대에게 다시 도전해 승리를 거둔다니. 시나리오도 괜찮지 않은가.
마음 같아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싶지만 신경 쓰이는 요소가 하나 있었다.
“엔리. 알겠지만 저 지난 번에 화령님한테 ‘개 못하잖아.’ 시전 했잖아요.”
“그쵸?”
“그 후로 사과도 제대로 못 했는데 제가 참여해도 괜찮은 건가요?”
이건 도의적인 문제였다. 당장 그 사과 한 마디를 못 해서 마이 튜브 영상도 못 올리고 있는 마당에 해설이라니.
잘못하면 데케이의 입장이 곤란해질 수 있는 일이었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할지 말지만 말하세요.”
대책 없어 보이는 엔리의 태도가 데케이를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시도도 해보지 않고 물러서기엔 너무도 매력적인 제안이었기 때문에.
만일 아라와 화해하는 데 성공한다면 추후 컨텐츠에 부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저 화령이라는 분을 대회에 끌어들일 수 있다면 분명 재밌을 거야. 저 사람 프로들 사이에서도 절대 안 꿀릴 게 뻔하잖아.
갑작스럽게 나타난 초신성은 대회를 흥행시키는 요소라고.
“할게요.”
“좋아요. 내일 저녁에 바로 할 거니까. 시간 비워둬요. 알겠죠?”
“마침 내일 저녁에 아무 일도 없네요.”
실은 찍어야 할 컨텐츠가 있었지만 데케이는 순식간에 그걸 폐기해 버렸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바로 앞에 있었으니까.
엔리가 다시 방송 소리를 키자 시청자들이 어딜 그렇게 다녀오냐며 원성을 토해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엔리가 내뱉은 발언 때문에 채팅창은 좋은 의미에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내일 저녁 8시에 세계에서 4번째로 삼장로를 쓰러트린 유저인 화령님과 장인 초대석을 하기로 했어요.”
그녀의 한 마디는 채 1분도 지나기 전에 온 커뮤니티에 퍼져나갔다.
*
“여기서 불편한 질문 있어요?”
엔리가 내민 종이에는 오늘 저녁에 물어볼 것들에 대한 것이 정리되어 있었다.
질문의 내용은 여러 가지였다. 내 신변잡기에 대한 것부터 시작해서 삼장로를 쓰러트릴 때 사용했던 무공이나. 평소 싸울 때 어떤 식으로 하는지 까지.
이런 것엔 문외한인 나이지만 그녀가 이걸 신경을 써서 준비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신변에 대한 부분은 가능한 것만 대답해주시면 돼요. 요즘엔 프로 중에서도 자기 신분을 다 안 드러내는 사람이 있을 정도니까. 말 안 해도 신경 안 써요.”
“다 말해도 상관은 없는데.”
이름이 알려진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없다.
무림에서 살적에는 무림 전체에 내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을 지경이었으니까.
이제와 이 세상에서 다시 알려진다 한들 별 다를 건 없다.
이런 내 대답에 오히려 엔리 쪽에서 기겁을 했다.
요즘에 가벼운 마음으로 신변을 드러내선 안 된다며.
이 쪽 업계에서 일을 할 게 아니라면, 아니 이 쪽 업계에서 일을 할 생각이어도 어지간하면 자신을 드러내면 안 된다고.
엔리는 몇 번에 걸쳐서 내게 다짐을 받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거면 아예 안 물어 보면 되지 않아요?”
“일단 시늉은 해야 해요. 안 그럼 시청자들이 난리를 치거든요.”
현실의 고단함이 담긴 대답이 돌아와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고생시켜서 미안해요.”
“그냥 도와주는 거 아니에요. 아라 씨 가지고 컨텐츠 하나 만들어 보려고 한 거지.”
허나 그 밑바탕에 깔린 게 호의지 않은가. 내가 재차 감사를 표시하자 엔리가 헛기침을 하면서 말을 돌렸다.
“사람들한테 어그로는 제대로 끌렸거든요? 최소한 만 명 이상은 시청하러 온다고 봐요. 채팅창 난리일 거에요.”
만 명이라니. 말로 하면 쉬워보인다만 그 군세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이전에 홀로 만의 군세 앞에 섰던 때를 떠올렸다. 그것은 인간으로 만들어낸 강이나 다름없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보러 올 거라고? 엔리가 과장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녀의 표정에 장난기는 없었다.
“그렇게 많이 올 거 같아요?”
“최소한이에요. 제가 이런 컨텐츠 한 두 번 해봤을 것 같아요?”
왜 그리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러온다는 말인가. 사람들을 모으길 원한 건 내 쪽이었지만 사람들의 행동이 이해가 가진 않았다.
이 세상의 본인은 천마도 뭣도 아닌 일반인일 뿐인데 뭐가 그리 흥미로운 것일까.
“일이 좀 커진 것 같아서 절 도와 줄 사람을 구했거든요?”
그게 뭐가 문제가 되느냐. 그대에게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다른 이에게 도움을 청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엔리. 자네가 한 일이라면 내 어지간해선 다 이해해 줄 수 있다.
“이게 실력 하나는 확실한데 아라 씨랑 악연이 좀 있어서요.”
“누구길래 그래요?”
“데케이 기억하시죠?”
그 작자를 말하는 건가. 생각이 안 날 리가 없지. 당장 그 자를 사냥하겠다 다짐한 것이 며칠 전의 일인데.
“불편하실 수 있겠지만 이만한 사람이 없어요.”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입술을 두드렸다.
이전에 단언을 해두었으니 엔리가 내 생각을 모르지는 않을 테고.
알면서도 이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은 데케이라는 자가 그만한 인재라는 소리일 터인데.
괜찮겠지. 엔리의 얼굴을 봐서 넘어 가줄 순 있다. 다만 이게 복수를 포기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엔리. 그 사람이랑 연락 돼요?”
“네. 연결해드릴까요?”
“부탁 드릴게요.”
엔리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작은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하고는 내게 스마트폰을 건네줬다.
“여보세”
“죄송합니다!”
데케이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머리를 박았다.
일말의 변명조차 없이 사죄의 말만을 내뱉는 그는 이런 일에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애초부터 저 자를 매장할 생각은 아니었던지라 사죄를 받아줄 수는 있다. 하지만 대가는 치러야하지 않겠는가.
“한 가지 부탁을 들어 주신다면 넘어가 드릴게요.”
“제가 가능한 거라면 뭐든!”
“정말 뭐든지요?”
뭐든 이라는 단어는 쉬이 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 짓궂은 상대를 만나면 곤욕을 치르기 좋거든.
“어. 음. 상식적인 선에서 해주세요.”
“별 거 아니에요. 저랑 십선 한 번 해주세요.”
아피스에는 십선이라는 문화가 존재한다.
대단한 것은 아니다. 두 사람 중에서 열 번의 승리를 먼저 거둔 쪽이 이기는 대련이라고 보면 된다.
“방송을 킨 채로.”
남들이 다 보는 자리에서 데케이를 고이 접어준다면 지난 모욕에 대한 복수는 되겠지.
“그 정도쯤이야! 얼마든지 해드릴게요.”
머잖아 데케이는 자신의 말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내 꽤나 진심을 담아 그를 괴롭힐 셈이거든.
열 번의 대전은 아주 짧으면서도 더없이 긴 시간이 될 것이야.
전화가 끊어진 후 엔리에게 전화기를 돌려주자 그녀가 미소를 흘렸다.
“아라 씨. 방금 짓궂은 얼굴 하고 있었어요.”
“티가 났나요?”
“네. 엄청.”
이런. 얼굴 가죽이 많이 얇아지긴 했나 보군. 한 때는 얼음 같은 인간이라는 소리도 들었는데.
“준비도 끝났겠다. 다시 공부를 해 볼까요?”
일부러 엔리의 말을 못 들은 체 했다.
어학당에 다니며 이해할 수 없었던 점 중 하나는 언어뿐만이 아니라 한국에 대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한국어를 배우고 싶었을 뿐이거늘. 어찌 역사를 알아야 한단 말인가.
전생에 공교육을 받았던 몸이기는 하다만 무림에서의 생활을 거치며 그 모든 지식은 초기화 된 지 오래였다.
지금의 나는 막 태어난 아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뇌가 아주 순수하다는 이야기였다.
상식이라는 게 없는 본인에게 공부는 여러 강적과의 싸움보다 버거운 것이었다.
차라리 무가 하나를 없애 버리는 게 더 쉽지 않을까.
“아라 씨. 미루면 더 힘들어질 뿐이에요.”
“조금만 더 쉬면 안 될까요?”
“안돼요. 아라 씨도 저한테 쉬는 시간 안 주셨잖아요.”
복수더냐. 그 날의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것이야?!
엔리. 알아두거라. 복수는 복수를 불러온다는 것을.
내 가르침이 어제 하루로 끝나리라 생각하지 마라. 아직 그대에게 알려줄 것이 산더미 같이 남아있으니.
두고 보자.
“아라씨?”
이 치욕 잊지 않겠다.
*
“커마 그대로 갈 거에요?”
방송 전 엔리의 VR룸에 도착하자마자 엔리가 대뜸 그리 물었다.
“무슨 문제 있느냐?”
“있죠. 지금 아라 씨 현실 외모 그대로잖아요.”
당장 점심 때 본인에 대한 걸 감추라고 했는데 잊었냐며 엔리가 나를 혼냈다.
“그러는 그대도 현실의 외모와 똑같지 않느냐.”
“저야 방송 시작할 당시에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상태였으니까요. 하지만 아라 씨는 다르잖아요.”
나를 걱정해 만류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내 의견은 달랐다.
“엔리. 어차피 사람들은 나를 보고서 아피스의 천마를 따라했다 생각할 따름이다.”
어느 쪽이건 똑같은 나일뿐이지만 방송을 보러 온 이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겠지.
이미 천마 컨셉에 잠식되었다 여겨지는 나다. VR아바타도 천마를 따라 한 거구나 여길 터.
“그으렇겠지만.”
“내 현실의 외모가 이런 거라고 상상이나 하겠느냐.”
“그래도 현실에서 만나면 눈치 챌 수도.”
엔리가 말을 하다가 멈췄다.
“바꾸실 생각 없죠?”
“그렇다.”
천마로서 앞에 나서는 데 가면을 써서야 되겠느냐.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지언정 나만큼은 그걸 허락하지 못하겠구나.
“하아. 나중에 후회하지 마세요.”
고개를 내젓는 엔리를 보며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엔리. 이전에 가면을 만들었던 것처럼 곰방대도 만들 수 있느냐.”
방송이 시작되길 기다리다 문득 손이 심심해 말을 꺼냈다.
“곰방대요? 아라 씨. 담배 펴요?”
“그건 아니다만 일단 줄 수 있겠느냐?”
엔리는 더 이상 묻지 않고 허공의 창을 몇 번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내 앞에 곰방대 하나가 떨어졌다. 장인의 솜씨가 느껴지는 고풍스러운 물건이었다.
안에는 이미 담배 잎이 들어 있었다. 여느 때처럼 삼매진화를 불러내려다 이 곳이 VR속 세상이라는 걸 떠올렸다.
불은 없느냐고 물으려 했으나 엔리는 이미 불을 붙인 성냥을 들고 있었다.
한 모금을 들이키자 희미하게 담배의 맛이 느껴졌다. 이런 것까지 재현되는 것인가.
입 밖으로 연기를 내뱉으니 약간이나마 들떴던 마음이 진정되는 게 느껴졌다.
“담배 몸에 안 좋아요.”
“걱정말거라. 현실에선 건드리지도 않을 테니.”
애초에 난 담배 같은 걸 핀다 해서 나빠질 몸도 아니다. 바란다면 몸 안의 독소를 언제건 빼낼 수 있는 인간이 나니까.
“그럼 지금은 왜 피는 거에요?”
이걸 설명하려면 무림에 있을 적의 이야기를 풀어야 한다만.
해서 유쾌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밝디 밝은 엔리에게 해 줄 만한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고.
그래서 농을 던졌다.
“거. 무어냐. 천마 컨셉이라는 것이지. 어떠냐. 잘 어울리느냐?”
Ilham Senjaya님 보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천이 천을 넘었습니다! 이야기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