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아가 화령의 외모에 놀라 어찌할 줄을 몰라하는 동안 하린은 화령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네요.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고마워요.”
“머리가 깔끔해져서 그런 걸까요? 옷만 신경 쓰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
“후드도 괜찮지 않나요?”
“괜찮지만! 음.”
후드?
설아는 그 단어를 듣고 화령의 얼굴에서 눈을 떼어 전체를 살폈다.
그러자 몸매를 가리는 펑퍼짐한 후드티와 여유 있어 보이는 청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 설아가 입고 있는 것과 비슷한 옷이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그를 입고 있는 게 화령이라 가벼운 옷차림마저도 분위기 있어 보인다는 것일까.
하린과 인사를 끝마친 화령이 설아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검디검은 그 눈으로 설아를 훑어보고는 사무적인 목소리를 냈다.
“당신이 설아씨인가요?”
“네! 박설아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긴장을 해버린 탓에 설아가 목소리를 높이자 카페 안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모여 들었다.
그를 본 설아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실수했다.
화령님하고 처음 만나자마자 실수를 저질러 버렸어.
어떡하지!?
당혹감에 다음 말을 잇지 못하는 설아에 반해 화령은 그 시선들에 관심도 없다는 듯 자리에 앉았다.
“아직 다른 편집자 분은 안 오셨나요?”
“지금 다 와 가신대요.”
방송을 하는 분이라서 사람들의 시선에 익숙하신 걸까?
그것조차 설아가 대단하다고 여기고 있으려니 저 멀리서 남자 한 명이 급하게 뛰어왔다.
아무리 젊게 봐도 삼십대 중반은 되었을 것 같은 남성은 한 자리에 모여 있는 여자 세 사람을 보고 잠시 굳었다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화령님. 이신가요?”
“네. 박한식 씨?”
“네. 그렇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뇨. 약속시간이 되려면 좀 남았으니까요.”
졸지에 자기 조카 또래의 여자 세 사람 사이에 끼게 된 박한식은 당혹스러운 웃음을 지으면서도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한 자리에 모이게 된 화령과 편집자들은 서로간에 인사를 나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자리의 분위기를 주도한 것은 하린이었다.
“아피스 리그 하이라이트 영상 볼 때마다 엄청나다고 생각했는데 그거 편집하시던 분이라고요?!”
“아하하. 혼을 갈아 넣었죠.”
“와아. 그 팬튜브 운영자가 설아 씨였어요?”
“그 영상은 저도 보고 대단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간 후 번호도 교환했을 무렵 설아는 가족밖에 없던 스마트 폰에 세 사람의 전화번호가 생겨났단 사실에 전율했다.
거기에 그 중 하나는 화령님의 것이라니!
갑자기 스마트폰의 무게가 늘어난 느낌이야.
“그럼 슬슬 일 이야기를 할까요.”
화령은 우선 의례적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돈에 대한 일이라거나.
영상을 몇 개 만들어야 하는지.
채널 운영은 어떻게 할지 같은 것에 대해서 말이다.
프리랜서로 일해본 경험이 여럿 있는 설아나 이 업계에 오래 종사해 온 한식 같은 경우 이런 계약에 대한 지식이 화령보다 더 많았기에 이 이야기는 순조로히 진행됐다.
계약서 작성을 끝마친 후 화령은 여러분에게 처음으로 맡겨야 하는 일은 이거라며 자신의 스마트폰에 저장된 영상을 하나 보여주었다.
“서로 대화하는 소리는 안 나게 해뒀어요.”
그 말을 하는 화령은 어째선지 무척이나 뿌듯해 보였다.
그거 기록된 영상에서 버튼 하나만 누르면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하는 생각이 설아의 머릿속에 감돌았지만 그녀는 괜한 말을 하는 대신 영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괜히 또 실수를 저지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화령이 보여준 영상은 화령과 화령이…
“이거 화룡무인의 천마와 싸운 영상인가요?”
“네. 맞아요.”
화룡무인의 천마라 하면 게임 속 세상에서 절대자 반열에 드는 괴물 중 하나.
그런 사람과 화령님이 싸운 영상이라니.
설아는 가만 영상이 진행되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를 보고서 처음으로 든 생각은 경이였다.
작금의 설아로써는 감히 경지를 추측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사람의 형태를 한 초월자들이 벌이는 혈투.
누구의 하늘이 더 높은 지를 겨루기 위한 천마들의 대전.
그리고 그 끝에 승리를 거둔 것은 화령이었다.
영상의 시간이 꽤 길었음에도 불구하고 설아는 그 시간 동안 한 순간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무런 작업도 되어 있지 않은 평면적인 대결일 뿐이었지만 천마가, 화령이 지닌 무가 이 영상을 하나의 예술로 만들어 주었으니까.
“이거 제가 편집할게요.”
영상이 끝나자마자 설아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도 않은 채 그리 말했다.
이런 걸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다.
이런 경외를 다른 사람에게 손을 대게 허락해선 안 된다.
이미 훌륭히 빛나는 원석을 더 아름답게 세공하는 과정은 결코 문외한에게 맡길 수 없다.
“이건 저도 좀 욕심이 나는…”
나름 베테랑이라 불릴 정도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영상에 대해 욕심을 지닌 한식이 슬며시 말을 꺼냈지만 설아의 눈동자를 보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눈에 서린 것은 한기마저 느끼게 할 정도로 날선 무언가였던 것이다.
“그럼 이건 설아 씨가 하기로 하고 다음은…”
*
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앞에 둔 하린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작업 과정에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분들이 하시는 걸 보면 대충 툭툭툭툭 하면 멋들어진 결과물이 나오던 데 나는 아무리 고생을 해도 제대로 된 물건이 나오질 않는 걸까.
하린은 신경질 적으로 마우스를 두드리다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켰다.
아아. 역시 난 편집자가 되기엔 아직 실력이 모자란 가봐.
등받이에 기대서 전등의 불빛을 쳐다보던 하린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화령님의 편집자가 되기를 기대했던 건 사실이다.
부족한 실력이지만 화령님과 아는 사이이니 뽑아주지 않을까. 하는 알량한 기대를 지닌 것도 맞다.
애초에 하린이 화령에게 마이 튜브를 하길 권유한 것도 화령의 활약상을 보고 싶단 팬심이 반이었고 나머지 반은 자신이 그 영상을 만들고 싶단 마음이 반이었으니.
그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정작 그 기대가 이루어진 지금 하린의 마음에 깃든 건 즐거움이나 행복보다는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질책이었다.
하린은 프로가 아니다.
영상 편집을 배운 적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봐야 얕은 배움에 불과하다.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게 많고. 가진 것보단 없는 게 더 많다.
아마추어치고는 그럭저럭 괜찮다며 자위를 하곤 하지만 돈을 받고서 일할 수준인가 하면 애매한 게 사실이다.
당장 그녀와 함께 같이 편집자가 된 두 사람을 보라.
한 사람은 아피스 프로 리그에서 매일 같이 한 편의 영화와도 같은 하이라이트 영상을 찍어내던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팬마이튜브를 운영하며 많은 이들의 찬사를 들었던 사람이다.
그에 반해 하린은 어떤가.
그녀는 그저 무경력의 초라한 아마추어일 뿐이었다.
화령님께서는 단순히 아는 사람이라서 뽑은 게 아니라 그럴 만한 자격이 있어서 선정한 거라고 하셨지만.
나한테 실력이라고 할 만한 게 있나?
그런 생각을 하던 무렵이었다.
단톡방에 설아가 영상을 올렸다.
초안이라면서. 한 번 보고 평가를 해달라며.
와. 벌써 편집 작업을 끝내셨단 말야?!
이 영상을 받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 분 잠을 자기는 하는 건가?
이전에 설아가 운영하던 팬마이튜브를 보면서 많이 감탄을 했던 하린은 평가보단 얼마나 대단한 영상이 나왔을 지를 보기 위해 영상을 틀었다.
설아가 만들어 낸 영상은 분명 대단했다.
그 짧은 시간에 이만한 퀄리티를 뽑아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걸 마이 튜브에 올린다면 분명 열광적인 반응이 나올 것이라 하린은 확신했다.
그렇지만. 대단한 것과는 별개로 마음에 걸리는 것도 있었다.
<설아 씨. 잠시 연락 돼요?>
<네. 괜찮습니다.>
“설아 씨.”
“네. 하린 씨. 무슨 일이신가요?”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 지는 모르겠는데 영상 1분 17초 무렵에 집중해야 할 건 다른 부분 아닌가요?”
“…자세히 말해주세요.”
하린은 자신의 생각을 설아에게 설명했다.
이 부분에서 천마가 지닌 의도가 무엇이었을 것이고 그를 보여주기 위해서 집중해야 할 곳은 어디인 지에 대해서.
이 말을 하는 하린은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그녀가 영상에 관해 조예가 깊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무에 대해서는.
최근 몇 개월 간 화령에게 개처럼 구르며 무를 익힌 그녀는 무를 본다는 것에 한해 그 누구보다 뛰어날 수밖에 없었다.
현대의 천마라 불리는 한서우라도 나오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자신이 지닌 지식을 기반해서 나온 하린의 지적에 설아도 반박을 했다.
화룡무인의 고인물이자 최근 무의 이치를 익히며 보는 눈을 개화한 설아다.
무에 대한 자부심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으니 반박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하린이 몇 가지 근거를 들어가며 설득을 하자 이내 침묵하더니 이런 답변을 내놓았다.
“하린 씨의 말이 맞는 것 같네요.”
“이 부분만 그런 게 아니에요. 3분 23초경에 보면.”
하린이 바꾸면 좋을 듯한 부분을 하나하나 지적함에 따라서 점차 설아의 말수가 줄어들었다.
반박을 하고 싶어도 하린이 하는 말 중에 틀린 게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지적이 끝났을 무렵.
“…네. 수정을 해야겠네요.”
설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어라. 말을 너무 강하게 했나.
실수했다.
화령님한테 항상 듣던 대로 말을 해버렸어.
좀 더 부드럽게 할 수도 있었는데.
“저…”
“하린 씨. 지금 영상 만들고 있죠?”
사과의 말을 하기 위해 슬며시 하린이 말을 꺼내려던 순간 설아가 먼저 목소리를 냈다.
“네. 아직 완성은 못했지만.”
“보내주세요. 한 번 보고 피드백 해 드릴 게요.”
“아뇨. 피곤하실텐데 괜찮…”
“보내주세요.”
아직 부족한 걸 남에게 보여주기 껄끄러웠던 하린이지만 결국 설아의 강권에 못이겨 영상을 보내주었다.
통화가 끊어진 후 하린이 긴장된 마음으로 답변을 기다리길 잠시 설아에게서 다시금 통화가 걸려왔다.
“네. 설아…”
“인트로부터 문제에요.”
“네?”
“쉽게 말해줄게요. 이게.”
설아는 독기에 찬 목소리로 영상의 문제점들을 한 가지 한 가지 지적해 주었다.
사실 말이 지적이지 그녀의 말을 요약하면 당신의 영상은 실로 쓰레기 같으니 갈아엎는 게 빠를 것 같은데요 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분명 그건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였지만 하린은 도저히 미소를 지을 수가 없었다.
조언으로 받아들이기에 그 목소리는 너무 날이 서있었던 것이다.
무에 대해 지적을 했다고 이런 식으로 갚는 건가요 설아씨?! 당신 속이 얼마나 좁은 거에요!
“아시겠죠? 이 부분들만 수정하면 그럭저럭 볼만해 질 거에요.”
“네. 참 감사합니다.”
하린이 이를 악물고서 대답을 하자 설아가 통쾌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럼 전 하린 씨가 지적해 준 걸 수정해야 해서 이만 가 볼게요.”
그렇게 통화가 끊어진 후 하린은 이를 악 물었다.
좋아요. 알겠어요.
당신이 말해준 대로 제대로 된 영상을 만들어 내서 한 마디도 못하게 만들어 드릴게요.
이 순간 하린은 자신의 부족함이니 뭐니 하는 생각을 잊어버렸다.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오롯이 하나.
인정받고 말겠단 생각이었다.
Ilham Senjaya님 보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