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스크.
돌덩이 같은 가죽엔 맹독이 발라져 있고 메두사의 석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전설 속의 괴물.
아주 유명한 녀석이었다. 죽더라도 적을 최소 두 마리 정도는 데려갈 거 같은 가성비 좋은 이미지가 머리 위에 그려졌다.
내가 아는 바실리스크는 그런 거였다.
그런데, 내가 바실리스크로 진화할 수 있다고?
나쁘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오히려 좋았다.
그런데 그 이유를 납득 할 수 없었다.
게코 도마뱀이 카멜레온이나 다른 도마뱀으로 진화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긴 하지만, 그건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순 있었다.
그러나 이건 경우가 달랐다.
내가 석화 스킬이나 맹독 같은 바실리스크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거다.
그런데 이 특수 진화의 조건은 다름 아닌 질주였다.
빨리 달리는 것과 바실리스크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추측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유를 모른다고 해서 이 기회를 차버릴 멍청한 도마뱀은 아니었다.
나는 주어진 걸 사양하는 바보가 아니니까.
바실리스크 같은 사기 종으로 진화하면 개꿀이지.
나는 선택지를 골랐다.
‘그린 바실리스크.’
벌써 바실리스크가 되는데, 다음 진화에는 드래곤 같은 게 되는 거 아냐?
그런 상상을 하고 있을 때, 내 몸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뚜둑.
우드득.
뼈 하나하나가 요동치고 있었다.
타임 랩스 영상을 보는 것처럼 뼈의 크기가 순식간에 자라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내 뼈들은 새로운 골격을 만들어냈다.
조금 더 커진 덩치. 그리고 길어진 꼬리.
자연히 뼈 위에 있던 조직들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뿌득.
허물을 벗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지만, 어딘가 달랐다.
단순히 죽은 세포가 뜯겨 나가는 게 아니었다.
내 골격에 맞는 새로운 조직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근육 하나하나가 새로이 만들어졌다.
그 위에 덮인 가죽과 비늘은 게코 도마뱀의 것과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로 정교한 것이었다.
새하얀 방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쩍.
방에 일어난 작은 균열.
나는 이 방의 정체를 깨달았다.
내가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 보았던 알이었다.
나는 기다란 발톱으로 알의 균열을 넓혔다.
쩌저적!
그 누구의 도움 없이, 나는 세계를 부쉈다.
[축하합니다! 【그린 게코】가 【그린 바실리스크】로 진화했습니다!]
나는 이제 게코 도마뱀이 아니다.
신화 속의 존재, 그린 바실리스크다.
“게게겍!”
…근데 왜 울음소리가 예전이랑 똑같은 거지?
아냐. 아직 동기화가 안 된 거겠지.
그린 게코가 아닌 그린 바실리스크라는 이름이 보인다.
그리고 날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거미 한 마리도.
“키에엑!”
그래, 나도 반가워.
그런데 얼굴은 좀 치워줄래?
좀 무섭다.
“겍겍.”
고개를 돌렸다.
거미는 내 모습이 달라졌음에도 내가 그 게코 도마뱀이었던 걸 기억하는 거 같았다. 내가 부화할 때까지 기다렸던 건가. 기특하네.
“키오옹….”
녀석은 앞발 두 개를 꼼지락거렸다.
왜 그래.
네가 그러니까 낯설다.
녀석이 세 번째 다리로 나를 툭툭 건드렸다.
뭔가 해서 쳐다봤더니 내 앞에 실뭉치 한 개가 놓여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날벌레였다.
“키옹!”
나 보고 먹으라는 걸까?
녀석은 긴 다리로 실뭉치를 밀었다.
“게게겍.”
주는 선물을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마침 배가 고프기도 했고.
갓 잡아서 그런지, 푸석거리지 않고 입에서 육즙이 터졌다.
웩.
벌레를 꽤 많이 잡아먹었지만, 아직도 맛에 적응하진 못했다.
그냥 배가 고파서 먹는 거지.
그런데, 먹으면 먹을수록 배가 고파져 왔다.
오히려 배 안에 음식물이 들어가니 잊고 있던 공복감을 깨달은 거 같았다.
“키오옹!”
거미는 미리 준비한 벌레들을 내게 건넸다.
나는 녀석이 건넨 벌레들을 입안에 욱여넣었다.
진화한 영향일까, 배가 무지하게 고팠다.
처음 준 것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쓴맛이 느껴졌지만, 그냥 참고 먹었다.
뼈가 자라고 피부가 재구성되었으니 만만치 않은 영양소를 쏟아부은 거 같았다.
어느 정도였냐면, 먹이를 먹지 않았다면 곧 아사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섬뜩했다. 만약 거미가 날 기다리지 않았다면, 나는 꼼짝없이 죽었을 수도 있었다.
다음에 진화하게 된다면 식량을 꼭 비축해 둬야지.
“키엑!”
거미는 계속해서 내게 벌레를 건네줬다.
녀석, 그래도 내가 자기 목숨 살려준 건 아는구나.
입을 크게 벌리고 녀석이 건네준 걸 모조리 삼켰다.
속 안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매운 벌레라도 준 걸까.
이제 어느 정도 배가 찼다.
제일 기대되는 시간이 찾아왔다.
현재 내 상황을 점검하는 시간이었다.
【그린 바실리스크 LV1】
HP:50/50
MP:20/20
레벨이 초기화되었지만, HP와 MP는 오히려 올라갔다.
괜히 진화라고 하는 게 아니었다.
레벨 10이 되면 진화를 올릴 수 있는 거 같다.
물론 거미의 레벨을 보면 꼭 레벨이 10이 된다고 진화를 할 수 있는 건 아닌 거 같지만.
이제 사족은 잠시 미룰 시간이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자세히 보기를 사용했다.
게코 도마뱀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최강의 도마뱀의 능력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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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바실리스크】
몸길이는 70cm 정도 되지만 꼬리의 길이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무게는 300g 정도로 가벼운 편입니다.
발에 달린 넓은 비늘 덕분에 물 표면을 달릴 수 있으며, 긴 꼬리를 이용해 균형을 잡고 빠르게 이동할 수 있습니다.
물 위를 달릴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예수 도마뱀이라고도 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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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바실리스크잖아.
석화 광선은요?
아니, 적어도 독에 대한 설명은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아니야.
이런 건 바실리스크가 아니야!
[차가운 피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후우.
진정하자.
내 야생의 눈은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않다.
개미가 독을 쓰는 거랑, 마비 침을 쓰는 걸 누락시키지 않았나.
이번에도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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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
「꼬리 자르기LV9」「벽 타기 LV4」「차가운 피 LV2」「포식 LV1」「야생의 눈 LV1」「꼬리 자르기 LV1」「질주 LV7」「은밀 LV2」「마비 저항 LV2」「산 저항 LV4」「물갈퀴 걸음 LV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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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화… 없다?
아냐.
그래도 새롭게 추가된 스킬이 있잖아.
저게 사실 석화의 다른 이름일 거야.
「물갈퀴 걸음 LV1」
물 위를 달릴 수 있습니다.
그럴 리가 없지.
….
이걸 얻다 써먹어.
물 위를 달려서 뭘 할 건데.
이럴 거면 그냥 아르마딜로 갑옷 도마뱀 했지.
게코 도마뱀과 무슨 차이가 있는 거지?
신경질적으로 꼬리를 한 번 휘둘렀다.
촤악!
통통해진 꼬리가 굉장히 얇아져 채찍을 휘두르는 소리가 났다.
얇아진 것뿐만 아니라, 길이도 굉장히 길어졌다.
몸통이 20cm를 넘는다고 하면, 꼬리는 그 두 배는 되는 수준이었다.
이건 꽤 마음에 들었다.
내 주력 무기가 바로 꼬리였으니까.
꼬리 자르기로 시작했고 짧은 팔다리 대신 꼬리를 휘둘러 적들을 상대했다.
그런 주무기의 사거리가 몇 배나 증가한 건 좋은 소식이었다.
이 정도면 석화 부럽지 않지.
…아니, 부럽지 않을 리가 없었다.
입맛이 썼다.
이름이 긴 꼬리 도마뱀 같은 거면 실망하지도 않았을 거다.
왜 하필 바실리스크란 말인가.
이름을 보자마자 수십 개의 계획을 짰는데, 이제 무산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계속 절망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진화는 됐고, 내 기대치에 못 미치긴 하지만 진화 전보다 강해진 건 사실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계획을 세워야 한다.
일단 이 나무 위에서 생활하는 건 이제 끝이었다. 덩치가 커진 탓이었다.
덩치가 커졌다고 해도 꼬리가 대부분이라지만, 오히려 그 탓에 나무 위가 불편했다.
꼬리를 늘어놓으면 주변을 오가는 공룡들의 시선을 끌 게 분명했다.
게다가 물갈퀴 걸음이라는 스킬까지 얻었다.
물가에서 사는 생물일 테니, 그 주변에서 사는 게 맞는 거 같다.
“겍겍.”
네필라야.
난 이곳을 떠날 거야.
“키오옹….”
내 말을 알아듣는 걸까.
녀석은 긴 다리로 내 꼬리를 잡았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키오오오옹….”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겍겍.”
그래도, 성의를 봐서 조금은 더 같이 있을까?
나무 아래로 내려간다고 해도 물가를 금방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레벨이 올라갈수록 덩치가 커지겠지만, 지금 상태는 어찌저찌 여기서 버틸 수 있을 거 같기도 하고.
이왕 이 거미랑 친해진 거,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었다.
우리는 이제 친구라고 불러도 될 사이가 되었으니까.
“키오옹….”
그런데, 너 왜 입에서 침을 흘리고 있니?
“키에엥….”
그 눈빛은 또 뭐고?
내 꼬리에 거미의 침이 뚝뚝 떨어졌다.
녀석은 내 꼬리를 살살 끌어당기고 있었다.
이 미친 새끼가!
나는 단숨에 꼬리를 잘랐다.
“히오오오옹!”
녀석은 먹잇감을 놓친 게 억울한지 긴 다리를 탕탕 두드렸다.
어후. 저 거미를 믿은 게 잘못이지.
여기에 더 있다고 생각한 건 취소다.
도망치면서 고개를 돌려 놈의 마지막 모습을 확인했다.
“키에에엑!”
녀석은 내가 자른 꼬리를 꽉 껴안고 있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빨리 눈치채지 못했다면, 저 꼬리 대신 내가 저기에 있었을 거다.
하마터면 그대로 고치가 될 뻔했네.
[업적 달성.]
깜짝이야.
업적?
이번에는 또 뭘까.
바실리스크라는 이름에 속아 넘어간 나를 위한 업적일까?
[이구아노돈이 놀랄 업적!]
지난번에는 랩터 아니었나?
그것보다 좋은 업적이라는 걸까?
조금 기대가 됐다.
믿었던 거미에게 배신당한 내 여린 마음을 치료해 줄 거다.
[거미는 심장이 없습니다.]
응. 심장이 없다지.
[당신은 그런 거미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응. 사랑을 받았지.
…응? 뭘 받았다고?
[칭호, 「거미에게 사랑받는 자」를 획득합니다.]
이건 또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