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도마뱀아. 이제 이해가 됐느냐.”
백연영은 피 웅덩이에 서서 날 고고히 내려보고 있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너의 몸은 인간과 다르다. 인간이 만든 내공심법은 너와 맞지 않는다. 무공 역시 마찬가지지.”
그야말로 마에 가까운 패도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내가 보여준 걸 따라 하되, 너만의 것으로 바꾸어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개쩐다.
눈이 절로 반짝거렸다.
[「용조수」를 획득했습니다.]
세상에, 용조수라니.
공격기를 배우고 싶다고 그렇게 노래를 불러도 안 주던걸, 저 여자 덕분에 얻게 됐다.
소림 선생님들 알지도 못하고 까서 미안합니다.
저 박치기 공룡 되게 좋아해요.
백연영의 머리카락이 풍성한 걸 보면 용조수를 익혀도 머리카락이 빠지는 부작용 같은 건 없는 거 같았다. 안심하고 사용해도 된다는 말이다.
게다가 백연영이 보여준 구음백골조.
그야말로 절기라고 봐도 좋을 무공이었다.
저 거대한 하얀 뱀을 단 한 번에 죽여버리다니.
슬쩍 내 앞발을 쫙 펼쳐봤다.
저걸 익히면 나도 저 여자처럼 강해질 수 있는 걸까.
물론 한 번 봤다고 구음백골조를 따라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용조수는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작은 뱀과의 사투에서 어설프게 따라 하고, 그것의 완성본을 눈으로 직접 봤기 때문일 거다.
구음백골조 역시 내가 노력한다면 언젠가 쓸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용조수와 구음백골조 둘 다 손으로 펼치는 무공 아니던가.
용조수를 기본으로 단련하여 깨달음을 얻는다면 나도 백연영처럼 강해질 수 있을 거다.
「용조수」
용의 발톱으로 적을 잡아채는 수. 권 장 지의 묘리가 모두 섞여 있어 어떠한 상황에서도 대처할 수 있습니다.
이게 무공이지.
소룡등천보도 꽤 좋은 무공이긴 하지만, 보법이라서 많이 아쉬웠다.
드디어 공격기 다운 공격기가 생겼다.
용의 발톱.
딱 나를 일컫는 거 아니던가.
용의 발걸음에 용의 발톱까지 가지고 있다.
그린 바실리스크에서 그린 드래곤으로 진화하는 게 아닐지 심히 걱정된다.
“겍겍….”
“내 말은 듣고 있느냐?”
듣고 있지.
용조수가 개쩌는 무공이라면서.
공룡을 처음 봤을 때와 비슷한 수준의 감동이 몰려온다.
차이가 있다면 그때의 나는 죽을 뻔했던 거고 지금의 나는 저 무공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는 거다.
백연영은 한숨을 쉬더니, 손을 가볍게 뻗었다.
화르륵.
그녀의 손에서 불이 일어났다.
저 정도 내공을 보여줬으니 저 불은 삼매진화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삼매진화.
또 눈이 번뜩이는 정보였다.
저걸 내가 다룰 수 있게 된다면, 불을 이용한 요리를 해 먹을 수 있다는 거 아닌가?
샐러맨더 같은 걸로 진화할 수도 있을 거고.
…무협 세계관이니까 그런 건 없으려나.
그런데 갑자기 저건 왜 꺼낸 거지?
저 뱀 고기를 구워 먹으려고 하는 건가?
불에 익힌 고기라, 먹을 줄 아는 사람이구만.
옆에 붙어 있다가 몇 조각 얻어먹어야겠다.
백연영은 티타노보아의 사체에 손을 갖다 댔다.
화륵.
삼매진화의 불꽃이 티타노보아의 몸에 옮겨붙었다.
거센 화염이 이무기의 몸을 집어삼켰다.
…이건 먹으려고 불을 붙이는 게 아니었다.
“게게게겍!”
저 아까운 걸 왜 태워!
저 불은 태우기 위한 불꽃이었다.
티타노보아의 레벨은 무려 50이다.
게다가 그 상태에서 진화까지 했다.
저 고기를 한 조각이라도 먹으면 엄청나게 강해질 수 있을 거다.
게임 속에나 나오는 레벨 업하는 사탕과 유사한 존재라는 거다.
잽싸게 백연영의 옆까지 달려갔다.
“겍겍.”
내가 무어라 말해도 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꼬리로 허벅지를 슬쩍 건드렸다.
“작은 도마뱀아. 왜 그러느냐.”
홱 하고 나를 쳐다보는 백연영.
그 시선에 흠칫 놀랐다.
솔직히 이 여자가 무서웠다.
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는 그 누가 됐든 무서울 거다.
솔직히 힘만으로 따지면 카이만이나 티타노보아보단 이 여자가 인외의 존재에 가까웠으니까.
그럼에도 티타노보아의 고기는 포기하기엔 너무 아까운 것이었다.
어차피 태울 거면 성능 좋은 시체 청소부가 여기 있기도 하고.
덩치는 조그맣지만 다 먹을 자신이 있었다.
열심히 꼬리를 흔들어봤다.
혹시 아나, 저 고기 조각 하나 던져줄지.
자존심을 챙길 때가 아니었다.
톡톡톡.
“저게 먹고 싶어서 그러는 게냐? 이무기의 고기는 먹을 게 못 된다. 용이 되지 못하고 저렇게 변한 놈이면 더욱더.”
난 십독불침이라 괜찮다고.
…십독으로는 안 되려나?
할 수 없이 손가락만 쪽쪽 빨았다.
삼매진화의 힘은 확실히 대단했다.
평범한 불이라면 저 거체를 태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을 텐데, 금방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그 잿더미 사이에 커다란 구슬 하나가 남아 있었다.
너무나 익숙하게 생긴 물건이었다.
백색이 섞인 검은 구체.
[최상급 내단]
내단. 그것도 무려 최상급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내단이었다.
입에서 침이 흐른다.
“가지고 싶은 게냐?”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저 내단만 손에 얻는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
“욕심이 많구나. 아직 네 몸엔 소화되지 않은 것들이 있는데 어찌하여 이것까지 바라는 게냐.”
소화되지 않은 게 있다고?
추측을 해보자면, 카이만의 내단 조각인 거 같다.
조각이라지만 그 앞에 달린 단어가 무려 상급.
그걸 먹은 순간에도 내공이 늘어난 거 같지는 않았고.
즉, 아직 소화되지 못한 채 내 몸에 남아 있다는 거다.
“본녀에게도 당장은 필요 없는 물건이지만, 쓸 곳이 없는 건 아니지.”
자기가 가져가겠다는 거다.
“게엑….”
자기가 잡았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소리였다.
고기 한 점만 남겼으면 나도 아쉬워하지 않았을 텐데.
“지금의 너에겐 이 내단이 주어져도 소화하지 못할 거다. 더 성장하면 모를까. 다음에 만났을 때 한 번 보도록 하지.”
오.
아직 가능성이 있다는 건가?
“게겍겍.”
그래.
말뿐만이더라도 어디야.
그런데 가만, 다음에 만났을 때?
슬쩍 백연영의 발 위에 올라탔다.
꼬리로 그녀의 종아리와 허벅지를 감았다.
백연영은 나를 물끄러미 내려봤다.
“…뭐 하는 게냐?”
데려가서 키우는 흐름 아니었어?
무협지 속 도마뱀으로 전생했지만 sss급 미소녀에게 주워져 나데나데 당합니다.
이런 전개 아니었냐고.
백연영은 내 목덜미를 쓱 잡아서 떨어트렸다.
고개를 살짝 들고 눈치를 살폈다.
말이 없는 걸 보면 어쩐지 화가 나 보이기도 했다.
그러면 안되는데.
저 여자가 적의라도 품는 순간 나는 죽고 말 거다.
“겍겍.”
어떻게든 협상을 해봐야 했다.
날 데려가달라는 뜻으로 꼬리를 살살 흔들었다.
백연영이 내 겨드랑이 사이를 잡고 번쩍 들어 올렸다.
푸른 눈동자가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도마뱀아.”
그래, 데려갈 마음이 생겼나 보구나!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내 품에서 크는 것이냐?”
…….
무언가 단단한 것으로 머리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사람을 만난 탓일까.
그 대상이 예쁜 여자인 탓일까.
내가 본 그 어떤 존재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탓일까.
어째서 이리 멍청한 생각을 한 걸까.
“도마뱀아. 작은 도마뱀아.”
기억해라.
내가 어째서 이런 동굴의 밑바닥에 떨어졌는지.
“그것이 정말로 너의 염원이더냐.”
도망쳤기 때문이다.
카이만을 이기지 못해 추하게 울며불며 도망갔기 때문이다.
내가 약한 탓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도망가려 하고 있었다.
주먹을 꽉 쥐었다.
도마뱀의 손은 주먹을 쥘 수 없는 구조다.
내 발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피가 뚝뚝 떨어졌다.
한가롭게, 여유롭게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만약 눈앞의 여자가 내게 호의적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녀와 만나기 전에 티타노보아의 성체를 만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카이만에게 쫓길 때 바위틈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오비랍토르가 알 채로 씹어 먹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내가 살아 있는 우연과 우연이 만나 생긴 일이었다.
상대방이 실수를 하여, 운이 좋아서, 타이밍이 좋아서, 성정이 나쁘지 않아서.
이 모든 것에 내 의지는 없었다.
내가 아닌 다른 누가 이 상황에 부닥쳤어도 지금까진 살아남았을 거다.
이 세계는 그리 친절하지 않다.
나보다 강한 상대가 태산처럼 쌓여 있다.
카이만조차 이 여자와 비교하면 초라해진다.
그리고 나는 그런 녀석에게서 도망쳤다.
적어도 그 녀석은 내 손으로 해치워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다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맹렬한 기세로 백연영을 쳐다봤다.
눈에 담은 건 의지의 관철이고 포부였다.
“게겍.”
다시는 도망치지 않겠다.
“후훗.”
내 눈이 잘못된 걸까.
백연영의 얼굴에 표정이란 게 생겼다.
입만 움직이는 거짓 웃음이 아닌, 정말로 즐겁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분명히 봤다.
“갸륵한지고.”
잠깐이나마 미소를 지은 백연영은 나를 땅 위에 놓아주었다.
“작은 도마뱀아. 곧 다시 보게 될 거라는 직감이 드는구나.”
그래.
다시 봐야지.
그때까지 저 내단은 내버려두면 고맙고.
앞다리를 들어 포권을 취했다.
내단을 잘 돌봐달라는 뜻으로.
“아하하! 그 앙증맞은 손으로 무얼 따라 하는 게냐.”
백연영의 웃음이 멈췄다.
한 손은 주먹을 쥐고 다른 손은 쫙 펼쳐, 내 포권을 받아주었다.
“좋구나. 무리해서 은룡굴에 왔는데, 생각보다 많은 수확을 했어.”
은룡굴?
이 장소의 이름이 은룡굴이라는 건가.
“작은 도마뱀아. 너의 작은 그릇을 깨부수는 그 순간이 기대되는구나.”
그 말을 마친 백연영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듯 한순간이었다.
너무 빠른 속도에 눈에 채 담지도 못했다.
저 정도 고수는 보법부터 다르다는 건가.
목표가 생겼다.
백연영.
저 여자가 나의 목표다.
하지만 바로 저 정도 경지에 이르는 건 불가능 할 거다.
그보다 더 작은 목표.
날 이곳에 빠트린 장본인,
피라냐카이만.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내게 남은 건 오직 수련뿐이다.
빛 하나도 안 들어오는 이 깜깜한 동굴에서 카이만을 이길 수 있을 때까지.
벌레의 사체를 씹어 먹으면서 힘을 기를 것이다.
….
…잠깐만 그런데 날 여기서 꺼내주는 거 정도는 괜찮지 않았나?
아니면 입구가 어디인지 알려주는 건 가능했잖아.
설마 내가 이 축축한 동굴 출신이라고 생각한 거야?
나처럼 생긴 동굴 도마뱀이 어딨어!
“게게게겍!”
돌아와 봐!
꺼내주고 나가!
그게 아니면 길이라도!
수련은 바깥에서 해도 되는 거잖아.
아니. 여기선 아무리 강해져봤자 카이만은 못 잡는데.
아까 봤던 이무기처럼 덩치만 잔뜩 커져서 이 동굴에 숨어 있어야 하는 거 아냐?
“겍겍!”
이미 사라진 백연영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사사삭.
다른 존재들이 화답했을 뿐.
백연영과 티타노보아의 전투에서 발생한 굉음.
그리고 압도적인 존재감을 가진 백연영이 사라져서 만들어진 공백.
그것은 강한 힘을 가진 둘이 싸워, 하나가 죽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곳으로 몰려오는 저 벌레들의 생각처럼 말이다.
“…게엑.”
이런 동굴에서 살아남으려면 서로 싸우다 죽은 천적의 사체를 탐할 수밖에 없는 건가.
많이도 몰려오네.
하지만 여기엔 이무기의 사체는 없는걸.
백연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고.
여기 있는 건 작은 도마뱀 하나뿐.
이건 기회다.
날 예전의 그린 바실리스크라고 착각하지 마라.
용조수를 배운 바실리스크.
백연영의 직전제자 그린 바실리스크다.
“게게겍!”
덤벼라, 이 벌레들아.
…그런데 너희 수가 계속 늘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