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 여왕.
얼핏 들어본 기억이 있다.
그 유교 드래…. 아니, 인면조가 중얼거리던 말 아니던가.
게다가 앵무새가 말하길, 그 인면조가 새의 왕이란다.
새의 왕이 의식하고 여왕이라는 칭호가 있는 뱀. 최소 인면조에 버금갈 정도로 강할 게 분명하다.
게다가 뱀 여왕을 섬기는 생명체가 있다는 걸 보면 최소 신앙. 아니면 종교까지 가지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말 그대로 왕 같은 존재.
이 밀림의 주인일 가능성이 매우 컸다.
[상태이상: 뱀 여왕의 낙인을 획득합니다.]
【고모도 LV9】
HP: 250/990
MP: 173/410
【상태】
「뱀 여왕의 낙인」
「뱀 여왕의 낙인」
뱀 여왕이 예의주시합니다. 뱀 여왕을 섬기는 자는 그녀의 표식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난 이 존재한테 찍힌 거고.
“게게게겍!”
큰일 났다.
물론 저 낙인이라는 게 객관적으로 보면 해로운 효과는 아니다.
체력이 준다거나, 어떤 제약이 생긴다거나 하는 건 없으니까.
다만 다른 뱀들이 날 알아볼 수 있다는 게 문제였다.
다른 뱀들이 알아봐봤자, 그냥 뱀 아니냐?
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난 이미 뱀이란 종을 초월한 녀석을 봐버리고 말았다.
은룡굴에서 만난 티타노보아.
그리고 그 존재가 진화한, 목 여러 개 달린 괴수.
내가 고모도로 진화한 거처럼, 이곳에 존재하는 생물들은 신화 속에나 나올 영물까지 진화할 수 있는 거 같다.
뱀 여왕의 휘하에 그런 녀석들이 나오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었다.
애초에 성체 티타노보아만 해도 지금의 내게 버거운 상대기도 했고.
그리고 그런 놈들을 총괄하는 뱀 여왕이라는 존재도 무지막지하게 강할 거다.
은룡굴의 그 뱀도 여왕이라는 칭호는 얻지 못했으니까.
내가 살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자.
지금이라도 백연영한테 달려가서 도와달라고 해볼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배를 뒤집으면 연영 펀치로 적을 혼내주지 않을까?
상상 속의 백연영이 보인다.
일격으로 뱀 여왕을 처리하고, 내게 뚜벅뚜벅 걸어온다.
그리고 그녀가 속삭인다.
‘…희야. 이번엔 비늘이 좀 많이 필요하겠구나.’
상상 속의 백연영이 나를 통닭으로 만들어버렸다.
“게겍!”
안돼!
비늘만 뜯기는 건 다행이지, 저런 것도 처리 못 하냐면서 내단을 회수할지도 모른다.
사실 백연영이 어디에 있는지 알 방법도 없었고.
연영 찬스는 패스다.
당연한 소리지만, 정면승부는 무조건 피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뱀 여왕.
그리고 새의 왕.
일단 이 둘의 사이는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가만, 그러고 보니까 새의 왕이 자꾸 용이 뱀인지 새인지 물어봤지.
새의 왕은 뻔뻔하게도 공룡 조류설을 밀고 있다.
그렇다면 뱀 여왕은?
당연하게도 공룡 파충류설을 밀 것이다.
나는 공룡 파충류설의 열성적인 지지자고.
이래 보여도 인면조의 파괴광선에 당하면서도 내 의지를 꺾지 않았다.
이거 잘하면, 뱀 여왕을 구워삶을 수도 있을 거다.
물론 그걸 설명하기도 전에 도마뱀 탕후루가 될 가능성이 더 컸지만.
아무래도 제일은 뱀 여왕을 마주치지 않는 것이다.
이곳에 온 목적인, 기연을 얻고 빨리 떠나는 게 최선이다.
뱀 여왕도 문제였고 새의 왕도 문제였으니까.
“게게게겍….”
파이톤은 스르륵 기어 오더니, 내 다리에 몸을 휘감았다.
빨리 좀 말해주지.
지금이라도 권유 취소 안 되려나?
될 리가 없지.
그런데 이 뱀은 뱀 여왕과 정확히 어떤 관계일까?
그냥 일반적인 신도일까?
그렇다 치기엔 너무 과보호 받은 거 같다.
평범한 신도라면 뱀 여왕이 분노할 이유도 없을 거다.
물론 신도를 빼앗아 갔다는 것에 화가 날 수도 있긴 하지만 낙인까지 찍진 않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이 뱀은 뱀 여왕이 꽤 아끼던 신도였을 거다.
무력 때문에 아꼈을 리는 없으니, 다른 이유가 있을 텐데….
혹시 혈연인가?
“히엑!”
그건 아니려나.
그냥 외모 때문에 아끼는 거 같다.
저 정도 외모면 아낄만하지.
동글동글 귀엽게 생겼으니까.
“히에엑….”
꼬리를 배배 꼬는 파이톤.
씁, 왜 얘한테서 투스랑 푸스가 계속 보이는 걸까.
뱀에게 사랑받는 자라는 칭호는 없는데 말이야.
빨리 기연을 얻은 후 이곳에서 나가야지.
오래 있다간 좋지 않은 결말을 맞을 게 분명하다.
에휴, 기연을 찾으러 왔다가 이게 무슨 고생이람.
새의 왕한테도 죽을 뻔했고 뱀 여왕한테도 찍혔다.
내가 얻은 소득이라곤 조금 귀여운 얼굴의 뱀 한 마리.
이번에도 한동안 고생하겠네.
어디서 기연 하나 안 떨어지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쉭쉭이를 쳐다봤다.
영약 같은 거 하나 안 떨어지나?
쉭쉭이를 유심히 바라봤다.
뱀치곤 귀티가 흐르는 쉭쉭이.
이 녀석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어쩐지 사회의 쓴맛을 덜 본 영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뭣도 모르고 밀림으로 출가했는데,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은 거지.
그러다가 도마뱀 한 마리를 만난 거고.
매우, 많이, 아주 빤히 쳐다봤다.
이런 이야기는 보통, 사악한 도마뱀의 혀에 꾀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문에서 꼭꼭 숨긴 기연들을 나쁜 남자에게 다 털어버리는 거지.
“게게게겍….”
내 시선을 느낀 파이톤이 흠칫 놀라 했다.
그래.
역시 뭔가 있구나.
아직 상처가 낫지 않은 부분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아…. 오비랍토르 고기도 혼자 먹었으면 부상도 다 회복됐을 텐데….
“쉬, 쉬익!”
파이톤은 애써 고개를 돌렸다.
“게게게게게겍….”
영약 같은 걸 얻지 못한다면 난 도마뱀 사시미가 되고 말겠지….
[【볼파이톤 lv14】이 고민합니다.]
그렇지.
네가 뭐든 알고 있을 거 같았어.
자, 토해내렴.
[【볼파이톤 lv14】이 매우 고민합니다.]
표정에서부터 ‘난 뱀 여왕이 숨긴 보물을 알고 있어요’라는 느낌이 팍팍 온다.
마음속으로 저울질하고 있겠지.
뱀 여왕과 오늘 처음 본 도마뱀을.
그런데, 보통 이런 이야기의 결말은 못된 남자에게 몸과 마음을 다 주는 걸로 끝나거든.
촤라라락!
다시 한번 용린을 변형해, 쉭쉭이가 더욱 좋아할 만한 모습으로 변했다.
“히에에엑!”
또 깜짝 놀란 파이톤.
[【볼파이톤 lv14】이 심각하게 고민합니다.]
마지막 수다.
쉭쉭아.
지금 알려주면, 당소영보다 서열을 높게 만들어줄게.
[【볼파이톤 lv14】이 당신에게만 알려줄 장소가 있다고 합니다.]
그렇지.
앞으로 네가 서열 3위야.
*
【고모도 LV9】
HP: 412/990
MP: 240/410
【상태】
「뱀 여왕의 낙인」
오는 길에 프로토케라톱스를 사냥할 수 있어 배를 든든하게 채웠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이 밀림은 내 생각보다 더 험난했다.
인면조가 대체 왜 까불고 다녔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거대한 용각류의 머리가 이따금 보였다. 밀림의 거대한 나무로도 그들의 머리를 가릴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인면조도 그냥 한 번 물고 패대기치면 끝날 거 같은데.
싸움은 또 다르려나.
멀리서 파괴광선을 쏘면 어쩔 도리가 없을 테니까.
용각류는 일단 논외로 쳐도, 다른 녀석들도 만만치 않았다.
공포새 같은 포식자는 귀엽다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 녀석보다 큰 육식 공룡을 만난 건 아니지만, 초식 공룡들 하나하나의 스펙이 엄청났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저 녀석처럼.
【스테고사우루스 LV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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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고사우루스】
최대 몸길이는 7.5m, 최대 몸무게는 5.3t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검룡입니다.
몸이 길고 통통하며 머리에서 꼬리로 갈수록 몸의 높이가 크게 솟아 올라가는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꼬리엔 뼈로 된 날카로운 가시가 두 쌍 나 있어, 포식자를 무찌르는 데 사용했습니다.
스테고사우루스의 골침은 뼈를 부술 정도로 강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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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녀석은 네임드 중에서 네임드다.
공룡을 잘 모르는 녀석도 이 검룡은 알 정도로 유명한 녀석이다.
뭘 모르고 보면 그냥 흔한 초식 공룡 아니야? 라고, 생각할 테지만.
일단 기본적으로 이 녀석이 코끼리보다 덩치가 컸다.
지금의 나는 말 그대로 발로 한 번 밟히기만 해도 도마뱀 가죽이 되는 거고.
현재 나는 놈과 시선을 마주친 상태였다.
침을 꼴깍 삼키고 놈의 행동을 주시했다.
혹시라도 덤벼들면 바로 대응할 수 있게.
“히에에엑….”
운이 좋은 걸까, 그게 아니라면 나도 입지가 어느 정도 있는 걸까.
스테고사우루스는 나를 몇 초 정도 지켜보더니, 이내 가던 길을 갔다.
하긴, 고모도 정도 됐으면 이 정도 대우를 받아야지.
스테고사우루스가 물러난 후, 쉭쉭이의 안내를 받아 조금 더 걸었다.
검룡이 있던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 거대한 건물이 하나 있었다.
그래, 건물.
은룡굴이나 다른 동굴은 그래도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이 건물은 전혀 자연적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신전. 혹은 사원이라고 부를 만한 곳이었다.
관리는 오랫동안 하지 않았는지, 곳곳에 이끼와 덩굴이 널려 있었다.
거대한 뱀의 조각상이 몇 개 있었고 새 모양의 조각상은 깨져 있었다.
이곳에도 몇몇 초식 공룡들이 살고 있었다.
나를 보고 경계하는가 싶더니 이내 관심이 없다는 듯 제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 서로 건들지 말자고.
이래 보여도 뱀 여왕의 축복을 받는 몸이라고.
저 녀석들이 날 적대했다면 매우 곤란했을 거다.
솔직히 정면에서는 하나를 쓰러트리는 것도 매우 힘들었을 거다.
저 사원을 지키는 수호자도 아니고 왜 저렇게 무섭게 서 있는담.
다들 종도 다르면서.
이해할 순 없지만, 나랑 충돌하지만 않으면 된 거다.
이 장소가 백연영이 말한 기연이라는 게 있는 장소일 거다.
곳곳에 하늘 천 자가 쓰여 있는 걸 보면 아마도 천마신교의 사람이 만든 장소일 가능성이 컸다.
주변에 널부러진 뱀 조각상.
그리고 쉭쉭이가 눈치를 보면서 알려준 장소.
딱 봐도 뱀 여왕과 관계가 깊은 장소일 거다.
여기 있는 물건을 가져갔다간 뱀 여왕이 매우 크게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난 이미 찍혔는데.
그냥 먹고 도망치면 만사 오케이다.
그리고 먹고 죽은 도마뱀이 때깔도 좋은 법이지.
유사시엔 쉭쉭이를 던지고 도망칠 수도 있는 거고.
“히에에에엑!”
농담이야, 농담.
자, 이제 들어가 볼까?
뱀 여왕의 사원으로.
좁은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넓긴 하지만, 막상 보이는 건 없었다.
안은 생각보다 깨끗하네.
철컥.
철컥?
섬뜩한 기분이 들어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피슝!
녹슨 철화살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여긴 이런 곳이구나.
질주를 활성화했다.
용린을 다시 방어적으로 되돌렸다.
소룡등천보를 위해 두 발로 땅을 짚었다.
“히에에엑….”
고작 이런 걸로 정의로운 도마뱀을 막으려고 하다니.
여기는 내가 기둥뿌리까지 털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