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다니는 동안, 나는 많은 사람을 만났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죽 많이 돌아다녔어야 말이지.
지난 몇 년간 제국을 돌아다니면서 내가 가본 영지가 가보지 않은 영지보다 더 많았다. 때로는 제국 밖으로도 나다니며 여러 사람을 만나 관계를 맺고, 도움을 주고받았다.
공작가란 공작가는 다 들러봤고, 황실과도 관련된 적 있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나라도 갑자기 하늘에서 싼값에 부려 먹을 수 있는 기사단 부단장급 인재가 나타났으면 당연히 도움을 받으려 들었을 테니까.
“아, 아빠, 진짜 이번엔 내가 잘못한 게-”
“빌헬름 폰 브란덴.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거라.”
“옙.”
하지만, 황실과 공작가라는 말을 듣자마자 내가 바로 두 곳을 특정 지을 수 있었다.
황실, 그리고 포메른 공작가.
그 둘이 떠오른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그간 관계를 맺었던 이들 중, 특히 공작가와 황실이 동시에 나온다면 그건 저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워낙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는지 눈에서 빔이라도 나갈 것 같은 아버지의 모습에 말도 꺼내지 못했지만, 나도 혈기 왕성한 나이인지라 여행 도중 이런저런 여성들과 얽힌 적이 있긴 했다.(물론 단언컨대 성적인 관계를 맺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저 둘은 그중에서도 조금 특별했다. 나와 계약을 맺었던 이들 중 유이하게 귀한 집안의 따님께서 직접 거래했던 이들이었으니까.
그들의 공통점은, 자꾸 계약금을 무서울 정도로 부풀리며 나를 붙잡아 두려 했다는 점이다. 그만큼 내 서비스가 마음에 들었던 걸까. 개인적으로는 뿌듯하기도 했지만, 두 번 그 일을 하라면 그건 거절할 거다.
‘뭔가 분위기가 무서웠다고. 그 두 사람.’
마력을 써도 도망치지 못하도록 아버지 손에 들린 채로 끌려가며, 나는 어째서 그녀들이 사람을 보냈을까 고민했다.
나름 잘 나가고 신의 높은 기사단이나 용병대를 소개해주고 나왔으니 실력이 성에 안 찼던 건 아닐 거다. 그들이 무례를 저질렀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나도 염치가 있지 내가 직접 인성교육(육체적)을 해준 이들이었기에 너무 무례하거나 하지도 않았을 거고.
…혹시 전관(?)예우가 들킨 건가?
“진짜 그건가…?”
“뭐?”
“아닙니다!”
그래, 그들은 분명 실력도 확실하고 인성도 확실(하지 않은 놈은 모두 보내주었다)한 이들이었다. 하지만 세상에 어디 그런 이들이 내 주변에만 있을까.
그럼에도 그들을 소개해줬던 것은, 단장들과 나 사이에 보수를 받으면 일부를 내게 송금한다는 내용의 각서가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아니, 나도 먹고살아야 할 것 아닌가.
그렇다고 일을 대충 한 것도 아니고, 분명 기준치는 아득히 초과할 이들만을 소개해줬는데.
“슬슬 도착하겠구나.”
한창 고민하고 있을 때, 아버지의 목소리가 내 정신을 일깨웠다.
“이제 준비하거라.”
“준비? 무슨 준비요?”
아버지는 한쪽 입꼬리를 틀어 올리고 나를 비웃으며 말했다.
“네 엄마가 며칠을 벼르고 있었는지 아느냐?”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
이게 내 미래였다.
“빌―헬―름 칼― 호―엔―베―른―!”
만종이 날 가리키고 있었다.
–
분노로 눈동자가 붉어진(비유가 아니다) 어머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데는 생각보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머니의 화가 금방 풀렸다기보다는, 손님이 이미 와 계시기에 나를 그리 오래 붙들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의 손찌검도 주로 등짝에 몰려 있었다. 기사의 몸뚱아리임에도 등짝이 홧홧할 정도인데, 형님들은 대체 이걸 어떻게 버틴 걸까.
…아니면 그냥 내가 기사라 나한테만 힘 조절을 안 하시는 건가?
갑작스레 들이밀어진 빨간약을 고개를 저으며 털어내고는 응접실 문을 열었다. 손님 두 명과 큰형님이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오오, 막시밀리안 형. 오랜만.”
“됐으니까 빨리 앉아.”
형님께서는 갑자기 찾아온 지체 높으신 분들을 상대하느라 긴장했는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나를 맞이했다. 괜히 미안해져 서둘러 형을 대신해 자리에 앉았다.
“황실과 포메른 공작가에서 오신 분들이다.”
형님의 말에 인사를 올리며 상대를 살폈다. 황실 대표로 보이는 사람은 망토를 눌러써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러려니 했다. 이 집안사람들이 비밀스레 움직이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황실 브로치를 달고 있는 걸 보면 아무튼 황실 사람이 맞긴 할 거다.
깊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그 옆 사람에게로 향했다.
“게오르크! 오랜만이네. 이렇게 얼굴 보니 반갑다야.”
포메른 가의 장남이자 내 불알친구인 게오르크였다. 어릴 때부터 친하기도 했고, 둘 다 기사라는 공통점도 있었기에 가족을 제외하면 가장 자주 연락하는(그래봐야 년에 두세 번이지만) 사이였다.
“그래, 오랜만이지.”
짝 소리가 나게 손뼉을 맞잡으며 인사를 나눴지만, 게오르크의 반응이 그리 반가워 보이진 않았다.
이제 보니 눈 밑에 거뭇거뭇하게 다크 서클이 보였다. 기사가 피로에 쩔어들 정도면, 무슨 훈련이라도 있었던 건가?
“그런데 반갑다곤 못하겠군. 너 때문에 내가 프레야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는 아나?”
“프레야가?”
나를 붙잡겠다고 마지막에 난리를 치긴 했지만, 내 기억 속에서 그녀는 항상 차분하고 조신한 소녀였다.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이 그런다니 좀 의외였다.
“그래, 네가 말도 없이 도망치자 길길이 날뛰면서 너를 잡아 오라고 아주 난동을 부렸다. 아버지가 야단치기 전까지 아무도 못 말릴 정도였다고 하면 이해할 수 있겠나?”
“어…, 그 정도로?”
뭐, 말도 없이 사직서만 던지고 도망쳐 나왔으니 뿔이 나기야 했을 것 같긴 한데.
하지만 나도 할 말은 있었다.
“아니, 근데 나는 분명 석 달만 머무르다 갈 거라고 미리 말도 하고 계약도 세 달짜리로 했었잖아. 계약 끝났으니 떠난 건데 그게 왜 내 잘못이야?”
“그거야 당연히-, 아오, 진짜!”
뭔가 할 말이 있었는지 발끈한 게오르크였지만, 결국 말하진 못하고 분을 삭였다. 굳이 말을 꺼내지 않은 걸 보면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아닌 모양이었다.
“아무튼, 내가 여기 온 건 내가 너한테 용건이 있어서는 아니고, 아버지가 너한테 전해드리라고 한 게 있어서야.”
그는 금세 호흡을 가라앉히고 내게 봉투를 건넸다. 겨우 이런 일로 게오르크가 여기까지 온 걸까 싶어 확인하던 중, 나는 보아선 안 될 것을 보고야 말았다.
“어…?”
봉인에 포메른 공작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그러니까, 그라이펜 가의 가주로서가 아니라, 공작으로서 나를 호출했다는 거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공작을 겪어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면 이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을 거다. 그들은 언제나 공작으로서 보내는 서신만을 받아보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와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있는 내게는 이야기가 달랐다.
보통 친분이 있는 사이끼리 자기 작위를 걸고 부르는 경우는 둘 중 하나였다.
공적인 이유로 거래를 하거나, 아니면 작위를 앞세워 누굴 조지려 하거나. 그런데 공작이 요새 이름 좀 날렸다고는 하지만 겨우 나 같은 사람과 거래하자고 부를 리는 없으니, 이건 뭔가 내가 공작에게 단단히 잘못한 거다.
‘지, 진짜 내가 뭔가 잘못을 한 건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봉인을 뜯고 편지를 살폈다.
내용은 짧고 굵었다.
[포메른으로 오거라. 지금 당장.]
오싹.
척추를 타고 한기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건 어떻게 봐도 널 조지겠다는 뜻이었다. 뭐, 엄청 심각한 건 아닐 거다. 그런 일이었으면 게오르크가 올 게 아니라 기사단장이 왔겠지. 아버지와 어머니도 이렇게 부드럽게 넘어가진 않았을 거고.
…생각해보니 어머니는 이미 부드럽게 넘어가지 않은 것 같은데.
“혹시 지금 바로 출발해야 하는 거야?”
“일단 아버지는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시긴 했는데.”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두려운 거다.
그런 말이 있다. 친한 사람이 갑자기 내 풀네임을 부르면 진짜 좆된 거라고.
공작이 내 이름을 부르진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삼촌 조카하고 부르면서 지내던 사람이 갑자기 작위를 내세워 날 부르니 당최 무슨 일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혹시 진짜 나를 붙잡아야만 했던 이유가 있는 걸까?
“씁, 그럼 게오르크, 너희만 준비되면 바로-”
“아뇨.”
그때 망토를 눌러쓴 사람이 입을 열었다. 마법을 걸어뒀는지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빌헬름 경은 저희와 함께 가야 해서요. 아쉽지만, 포메른은 나중에 가야 할 것 같네요”
그? 그녀?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망토를 쓴 사람의 말에 게오르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귀하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쪽은 공작이 직접 인장을 찍어 호출하셨습니다. 아무리 황실이라 하더라도 황제 폐하께서 직접 부탁하신 것이 아닌 이상에야 공작의 호출에 우선하진 않을 텐데요.”
그러나 게오르크의 말에도 황족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롭게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들이키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대로에요.”
황족은 찻잔을 내려놓고 품에서 봉투 한 장을 꺼냈다. 나와 게오르크 모두 봉투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말씀드린 거예요.”
봉투 겉면의 봉인에는, 누가 봐도 선명한 황제의 인장이 새겨져 있었다.
“폐하께서 부르셨어요. 빌헬름 경을.”
황제가 날 부른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겨우 내 체급에, 대체 황제가 나를 신경 쓸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내가 이런저런 일을 하긴 했지만, 나와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물론 그걸 전부 한 사람은 나밖에 없긴 하다만, 그게 뭐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겨우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수행 쌓는 기사 한 명을-
“제대로 성인식도 안 치르고 황제에게 얼굴도장도 안 찍고 싸돌아다니며 부모님 속 썩이는 귀족가 자제 낯짝을 한 번 보자고 하시던데요.”
“아.”
“아.”
그러고 보면, 내가 튄 약혼식이 내 성인식 겸 사교계에 얼굴 내비칠 목적으로 생에 처음 상경할 때 이뤄질 예정이었다. 그리고, 보통 유서 깊은 집안 자녀들의 성인식은 황제가 나서서 치러주는 편이었다.
난 그걸 직전에 째고 튄 거고.
이건 그냥 잠자코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게오르크도 차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출발은 바로 다음 날 아침에 이뤄졌다. 게오르크야 어머니께 잘못 걸려 오랜만에 왔다는 이유로 몇 날 며칠을 식고문을 당할 예정이었지만, 나는 황실 덕에 바로 집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황족이 금방 수도로 돌아가야 한다며 오래 머무는 것을 거절한 탓이었다.
짐은 따로 챙길 필요 없었다. 애초에 몇 년간 떠돌이 생활을 한 탓에 짐이라고는 내 무장에 비상식량 정도가 전부였다.
다만, 이번에는 나도 말을 탈 수밖에 없었다.
나야 그렇다 쳐도, 황족과 그를 호위하는 일행은 마차와 말을 타고 이동했다. 그렇다고 내가 그들 사이에서 혼자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도 그림이 영 좋지 못했고. 애초에 그렇게 서둘러야 할 여정도 아니었다.
황제가 부르긴 했다만, 그거야 얼굴이나 비추라는 뜻이지 정말 급한 일이 생긴 건 아니었으니까.
“자, 그럼 어디 오랜만에 우리 집 말 상태나 점검해볼까~”
콧노래를 부르며 어떤 말을 탈까 고민하며 마굿간으로 향하던 중, 아마도 황족의 시녀로 보이는 사람이 날 불렀다.
“빌헬름 경.”
“예?”
“이쪽으로 오시지요.”
“어어, 지금 제가 타고 갈 말을 골라야 하는데요.”
시녀는 내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앗, 예.”
무슨 헛소리냐는 말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아무튼 황족의 시녀가 그렇다면 그런 거였다.
시녀 일을 하고 있다지만, 무려 황족의 시녀였다. 그런 역할을 아무에게나 맡길 리가 없었다. 심지어 황족을 곁에서 모시는 걸 보면, 이 사람도 어디서 끗발 좀 날리는 가문 출신일 것이다.
아버지의 영지나 작위 일부를 상속받을 것도 아니고, 그냥 내키는 대로 적당히 기사로 살다가 형님이 아버지 업을 이어받으면 기사단장으로 영전 받아 살 계획인 내 입장에서 함부로 대할 사람은 아니었다.
얌전히 그녀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여기 오르시면 됩니다.”
그녀는, 뭔가 고급스럽고 휘황찬란한 장식이 달린 마차 앞에 멈춰섰다.
“…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이건 황실에서도 굉장히 높은 분이나 탑승할 수 있는 마차 아닙니까?”
“맞습니다. 공작 이상의 귀족들에게만 허락된 육두마차지요.”
그녀의 답변에 내 뇌가 버퍼링이 걸려 연산 처리에 시간이 걸렸다.
그러니까, 저 안에 있는 사람이 공작과 동급, 혹은 그 이상의 의전을 받을 사람이라는 거지?
그런데 내 기억에 황족 중에 그런 대접을 받는 이들은, 황제와 황후, 그리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고귀한 핏줄들 뿐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볼에 경련이 일어났다.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황제가 여기 올 이유는 없었다. 황후도 마찬가지. 태자야 항상 바쁘고, 황제의 다른 자녀들도 겨우 나를 부르기 위한 전령으로 쓰기에는 너무 지체 높았다.
그렇다면, 여기까지 찾아올 만한 사람은 딱 한 명이었다.
벌컥 소리와 함께 마차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망토를 벗은 황족의 모습이 드러났다.
“뭐 하고 있어요? 빨리 안 타고.”
호프부르크 황실의 황녀가 기어이 날 쫓아 이 먼 곳까지 찾아왔다.
그녀는 그 긴 은발을 넘기고 나를 흘겨봤다.
어머니와는 다른 의미로, 나는 숨통이 조여오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얼른 타시지요.”
시녀가 날 밀어 넣었다.
“엇, 자, 잠깐-”
탁.
어어 하는 사이에 순식간에 마차의 안으로 밀려들어 가고, 마차의 문이 닫혔다. 그리 넓지 않은 마차에서, 황녀와 단둘만이 남았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날 노려보았다.
어째설까.
분명 장인이 공들여 만들었을 최첨단 기술이 잔뜩 적용된 고급 마차이건만, 나는 마치 거미줄에 걸린 나비가 된 것만 같았다.
“우리, 할 말이 참 많죠?”
황제의 차녀, 마리아 호프부르크라는 이름의 거미가 날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