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호프부르크.
그녀를 수식하는 말은 다양했다. 제국의 2황녀, 전 황후의 딸, 철혈, 천재 마법사 등 다양한 말이 그녀의 이름 앞에 붙었지만, 그녀와 내가 처음 거래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현 황후와 가장 사이가 좋지 않은 황족.
이것이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이유였다.
“왜 도망가셨었죠?”
“으, 으음.”
하지만 지금 그녀가 나를 쫓아온 건, 그것과는 별로 관계가 없었다. 내가 소개시켜준 기사단이 커튼 사이로 눈이 마주치자 엄지를 치켜세우는 걸 보면 확실했다.
그녀는 성에 차지 않는 것은 물건이든 사람이든 금세 치워버리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2년 넘게 이렇게 계약을 유지한다는 건 나름대로 이들의 실력에 만족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저들이 그녀의 성미를 채워준다는 건, 직접적인 위협으로부터는 충분히 보호해준다는 뜻이었고.
“분명 돈이 필요해서 계약을 맺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래서 제가 특별히 계약금을 10배라도 늘려드릴 의향이 있다고 했는데, 어째서 쪽지 한 장만 남기고 도망가신 거죠?”
“아니, 계약할 때야 급전이 필요해서 가불 땡겨받고 그 대신 호위 업무를 잠깐 맡았던 거고. 계약 끝날 때는 이제 더 돈이 필요하진 않았다니까.”
역시나.
그녀는 그때의 일을 추궁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2년 전, 한창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어째선지 수도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지내던 마리아를 호위하다 떠났던 무렵의 일을.
“그리고, 항상 말씀 드렸다시피 제게 돈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제가 당장 한 푼이 급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야 하는 사정도 아니고, 그때그때 필요한 돈을 구하면 그만이니까요.”
돈에 연연하지 않고 유유자적 돌아다니는 것도 나름의 낭만이니까. 뭐, 안빈낙도를 낭만처럼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생활에 여유가 넘치는 선비나 귀족들이나 할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귀족인데 어쩔 건데.
속으로 킥킥거리며 웃고 있을 때였다. 옆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나는 곧장 등을 펴고 자세를 바로했다.
마리아가 음산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필 타이밍이 맞아떨어져 그녀 위로 그림자가 져 눈동자만 반짝이는 것이 나름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자부하는 나조차 등골이 섬짓할 지경이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내 저택을 떠난 지 한 달도 안 돼서 다른 귀족 영애의 호위 임무를 수락해요?”
“뭐?”
그런 일이 있었던가…?
생각해보면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어디 계약을 맺고 눌러앉을 때를 제외하면 한량처럼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녀 시간을 신경 쓰지 않았기에 이게 전후 사정이 어떻게 돌아갔는지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하, 모르는 척한다 이건가요? 서부의 대삼림을 다녀오자마자 발데크 백작가의 영애를 호위하는 임무를 수락했었던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어딜 발뺌을 하는 건가요?”
“아아, 그때.”
그렇게 말하니 기억났다.
세계수가 존재한다는 말을 듣고 꼭 한 번쯤은 가보고 싶었던 대삼림에 우연히 초대받게 되어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때 자금을 다 쓰고 빈털터리가 돼서 의뢰를 받은 적이 있었지.
“돈이 다 떨어져서 어쩔 수 없었어. 그렇다고 맨몸으로 돌아다닐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렇게 답하던 중,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마리아는 내가 어디서 뭘 했는지 어떻게 아는 거야? 따로 목적지를 정해두고 움직인 기억은 없는데.”
“으흠.”
순간 그녀가 눈동자를 굴려 내 시선을 피했다.
“당신 이야기는 사교계에서도 유명하니까요. 유행에 따라가다 보면 싫어도 알 수밖에 없어요.”
“으음, 그 정도야?”
귀족가 자제가 돈키호테처럼 돌아다니는 일이 워낙 드문 일이라 소문이 퍼졌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 덕에 쉽게 일을 구할 수 있기도 해서 일부러 종종 대도시 근처를 돌아다니기도 했고.
하지만 그게 사교계에서도 퍼질 정도인가? 그런 데 참석해본 적이 없으니 이게 진짠지 아닌지 모르겠네.
내가 내지른 회심의 한 수가 무위로 돌아가자 마리아는 곧장 재반격에 나섰다.
“그보다, 제가 준 돈이 얼만데 그걸 겨우 한 달 만에 다 쓴단 말인가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엇.”
그러고 보면 그랬다. 마리아는 어느 순간부터 내 서비스가 만족스러웠는지 계약금 외에도 적잖은 돈을 주었었다. 돈을 더 줄수록 뭔가 찔려서 서비스도 더 열심히 해줬고, 그만큼 받는 돈도 더 늘어나기도 했었다.
마리아도 황족이라고 그 금액은 겨우 기사 한 명이 돌아다니며 한 달 만에 다 쓰기엔 엄청 큰 비용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돈을 겨우 한 달 만에 다 썼고.
‘정확히 말하면 하루지만.’
절대 마리아에겐 내가 대삼림 근처의 마을에서 야바위꾼의 도박판을 감탄하며 구경하다가 돈을 다 날렸다고 말할 수 없었다.
나름 기사였고 마력을 쓸 줄도 알았기에 도박꾼들의 수작질은 간파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야바위꾼의 손놀림은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그대로 홀랑 돈을 날려 먹었다.
뭐, 딱히 억울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설마 그 많은 돈을 진짜 한 판에 다 잃을 리가 있나. 나도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하지만 마력도 없이 기사의 눈을 속일 정도의 손놀림을 간파해보겠다고 계속 오기를 부리며 판을 키우다 돈을 다 날려 먹었었다. 마지막 판쯤 가서는 야바위꾼이 땀을 뻘뻘 흘리며 두려워했었지.
물론 지금은 나와 형님 아우 하면서 잘만 연락하고 있다. 알아보니 여동생 치료비를 마련하겠다고 관광객들 등쳐먹고 사는 중이었더라고. 볼일 다 보고 돈을 돌려받으려 미행했다가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냥 선심 써서 치료비로 쓰라고 내줬고.
물론, 사정이 어떻게 되든 내가 그에게 돈을 다 뜯겼던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 탓에 마리아가 줬던 돈이 다 사라진 것도, 그래서 급하게 일자리를 구했던 것도 사실이고.
“…혹시, 사심이 들어가 있던 건가요?”
“으, 으흠.”
답할 수 없었다. 나야 야바위를 통해서라도 여동생을 구하겠다는 그 사람의 마음에 감동해 용서해주었지만, 마리아는 아니었다. 철혈이라는 별명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법과 원칙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뭐라고 변명을 해야 했다. 머리를 맹렬히 굴렸다. 하지만 차마 뭔가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였다.
“멈춰라!”
겁도 없이 황실 인장이 새겨진 육두마차를 막아서는 머저리들이 나타났다.
산적이었다.
산적이 하늘이 내린 동아줄처럼 보인 것은 또 처음이었다.
“잠깐 나갔다 올게.”
“어차피 호위가 있으니까 기다려요. 아니, 기다리라니-!”
탁.
황녀님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황급히 마차 밖으로 나왔다. 뒷일이야, 미래의 내가 알아서 해주겠지.
–
갑작스레 등장한 산적들이었지만, 황녀의 호위대는 딱히 당황해하지 않았다. 분명 오기 전에 확인한 길목에서 산적이 등장한 건 신기한 일이긴 했지만, 산적 따위에 당할 정도로 기사들은 나약하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그들은 곧장 대응을 위해 무기를 꺼내 들고 우선 마차를 둘러쌌다. 마음만 먹으면 저들을 쓸어버리는 건 금방이었지만, 일단 지금 당장 그들이 우선시해야 할 것은 요인 경호였다.
달칵.
하지만, 이내 마차에서 내린 사람의 모습에 다들 전투 태세를 풀었다.
“몇 명이야?”
“쉰 명 정도 됩니다.”
“평범하네.”
빌헬름이 나섰다. 여기 있는 이들 모두 그의 실력을 알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섬기던 이를 잃고 재정 지원도 끊겼지만, 자존심과 오기 하나만 가지고 떠돌던 전직 기사단을 두들겨 패 진짜배기 기사단으로 만들어준 것이 그였으니까.
“마침 잘됐네. 한동안 마차에 틀어박혀 있으려니 몸이 근질거렸는데.”
그는 검을 뽑으며 앞으로 나섰다. 기사단과 달리 강철 갑옷도, 변변한 투구도 없었지만, 누구도 그의 앞을 막지 않았다.
가문의 상징과 기사단을 상징하는 문장이 새겨진 천을 꺼내 두른 그가 산적들에게 물었다.
“우선 묻겠는데, 너희가 누구 앞을 막아섰는지는 알고 있어?”
산적들은 빌헬름의 질문에 낄낄거리며 웃었다.
“무슨 상관인데? 우리가 약탈하고 죽일 놈이 누구인지까지 알아야 하나?”
“상관있지.”
빌헬름은 몸을 낮추고 양손으로 단단히 검을 틀어쥔 채 검의 포인트 부분이 땅에 닿을 정도로 기울였다.
“안에 계신 분이 황족임을 알고도 막은 거라면, 감히 황족 시해를 시도한 녀석들을 내 멋대로 처벌할 수는 없으니 목숨만은 살려놔야 하니까.”
“…뭐-”
푸화악.
산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피가 뿜어져 나오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가장 전면에 서 있던 산적의 팔이 어깻죽지부터 깔끔하게 베여 떨어져 나갔다.
“끄아아아악!”
비명과 함께 쓰러지는 산적을 뒤로하고,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검을 거둬 다시 자세를 잡으며 빌헬름이 나지막이 말했다.
“다음.”
아쉽게도 무력화시킨 이가 두령은 아니었는지, 산적들은 무기를 빼들고 덤벼들었다.
빌헬름은 마력을 담은 검을 휘둘러 한 명씩 적을 베어 넘겼다. 산적들 또한 대응을 시도했으나, 그들의 검은 힘겨루기 한 번 해보지 못하고 튕겨 날아갔다.
“역시 강하네요.”
황녀를 호위하는 철십자 기사단의 부단장 요나스가 중얼거렸다.
“본인은 태생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고는 하지만, 브란덴 변경백의 기사단 부단장 자리는 겨우 혈통 좀 잘 타고났다고 거머쥐기엔 너무 중요한 자리니까.”
“…변경백이요?!”
“나도 전하와 계약하고 나서야 알았어.”
기사단장 조피는 마차 쪽을 힐끗 곁눈질했다. 여기 올 때와 황녀, 빌헬름 두 사람이 마차에 있을 때는 절대 쳐지지 않을 것처럼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던 마차 창문의 커튼이 걷혀 있었다.
황녀가 창문을 통해 빌헬름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조피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생각해도, 빌헬름 경이 갑자기 말도 없이 떠났을 때는 정말 끔찍했다.
세상 냉정하고 언제나 차가울 것만 같던 사람이 그릇을 깨부술 정도로 난장판을 만들며 사람을 찾아오라고 소리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한량처럼 돌아다니던 빌헬름의 모습만을 기억하던 조피로서는, 그리고 빌헬름의 소개로 계약한 지 얼마 안 됐던 그로서는 어째서 황녀가 저렇게까지 반응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시녀장에게 물어봤더니, 무려 그 한량이 변경백의 아들 되는 사람이라는 답이 돌아왔었다. 덤으로 역대 최연소로 그 가문의 기사단 부단장 자리를 꿰찬 사람이라는 것도.
물론 지금이야 그런 이유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때는 그런 배경이 있다면 황녀가 그렇게 집착할 만하다고 이해했었다.
…사실 그런 건 아무 상관도 없었다는 게 오히려 자신이 모시는 주군에 대한 두려움을 더욱 키웠다는 건 가슴 속 깊숙한 곳에 묻어두었다.
그때, 빌헬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피!”
“부르셨습니까!”
“이놈들, 단순한 산적은 아니야!”
그의 외침에 철십자 기사단의 눈빛이 달라졌다.
“무기가 지나치게 화려해! 산적 놈들이 강철 검과 제대로 무두질 된 가죽 갑옷을 입고 있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그 말에 모두가 짐작했다. 이건 종종 일어나던 황녀 암살 시도의 일환이다. 상황을 파악하자 그들은 모두 자세를 달리했다.
“마차를 호위할 병력 10명만 남기고 전원 전투에 돌입한다!”
“예, 단장!”
조피의 외침에 기사단이 각자의 역할에 맞게 움직였다.
단순히 적을 죽이는 것뿐이라면 빌헬름 혼자서도 충분했다. 하지만 암살을 시도한 이들이 죽지 않게 제압하는 것이라면 더 많은 인원이 동원되어야만 했다.
‘죽지 않게 제압하는 것’에는 자살을 막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고, 아무리 뛰어난 기사라도 손이 두 개뿐인 이상 이토록 많은 인원을 동시에 통제할 순 없었다.
“와아아아!”
“큭, 젠장, 도망친다!”
이미 절반 이상 빌헬름에 의해 죽거나 무력화된 상황에 철십자 기사단까지 가세하니 산적들, 아니, 암살자들이 견딜 도리는 없었다.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이미 죽거나 자살한 이들, 도망친 이들을 제외하면, 열 명에 가까운 포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빌헬름은 몇 방울 묻은 피를 털어내고 검집에 검을 수납했다.
조피는 그 광경을 지켜보다 급하게 황녀의 호출을 받고 마차로 향했다. 그리고는 황녀로부터 받은 명령을 전달하러 빌헬름에게로 향했다.
“경, 전하로부터의 전언입니다.”
“고맙다는 인사면 됐어. 이 정도야 한 주먹 거리도 안 되는-”
“어차피 기사단이 알아서 할 일에 숟가락 얹어놓고 주접떨지 말고 빨리 돌아오시랍니다.”
“뭣.”
아쉽게도, 이번 동아줄은 만능이 아니었다. 빌헬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마차로 향했다.
마차 문이 열리자 황녀가 아까와는 전혀 다른, 얼굴을 마주 본 이들이 알아서 위압 당할 정도로 날카로운 표정을 한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은, 일단 넘어가 드리도록 하죠. 그럴 때가 아닌 것 같으니.”
그는 황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암살 시도가 있었다지만, 일행의 분위기는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제국에서 황족에 대한 암살 시도야 밥 먹듯이 일어나는 일이었다. 특히 지금의 황후가 그 자리에 오르고 나서는 더더욱.
당연히, 포로들은 변변한 정보를 알고 있지 못했다.
마차는 그 길로 멈추지 않고 수도로 향했다.
“…아직도 이래?”
빌헬름의 질문에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이랬어요. 그나마 당신과 만난 이후로 제가 직접 나설 필요가 없어진 것뿐이지.”
그 말에 빌헬름은,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불안정해 보이던 소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동시에 이번 여정에서 적잖이 시달릴 것만 같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의 예감은 대체로 잘 들어맞는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