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도 이번 부름은 정식으로 황제를 알현하는 것은 아니었다.
“너무 긴장하실 것 없습니다. 일정을 진행하기에 앞서 폐하께서 경을 한 번 만나보고자 하셔서 부른 것이니까요.”
“그렇습니까.”
물론 그렇다고 긴장을 풀 순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이곳은 신분제 사회였고, 황제는 누가 뭐래도 모든 신분의 가장 위에 존재하는 지존이었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어지간한 고위 귀족들조차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최고위 포식자를 만나러 가는데 어찌 긴장을 풀 수 있을까.
급하게 씻고 환복한 후 시종의 안내를 따라 황제가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 별궁은 본궁과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나는 물론이고 시종도 꽤나 발이 빨라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폐하, 빌헬름 폰 브란덴 경이 도착하였사옵니다.”
시종이 말을 마치자 커다란 문 너머에서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들라 하라.”
끼이이이익.
경첩에 기름칠을 잘 해뒀는지 그 크기와 어울리지 않는 작은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미리 외워둔 예법에 따라 고개를 숙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절을 하는 문화는 없었기에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린 채 가만히 기다리자 명령이 떨어졌다.
“고개를 들거라.”
명령에 따라 고개를 들자, 황제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자마자 과연 마리아가 누구의 피를 이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선이 굉장히 굵긴 하지만, 은발과 벽안, 눈매와 진지한 표정 등은 마리아와 비슷했다.
“소문만 들었을 때는 흉터투성이 거한일 거라고 생각했건만, 예상과는 많이 다르게 생겼구나.”
“어어, 죄, 죄송합니다…?”
“되었다. 그저 내 개인적인 감상일 뿐이니.”
황제는 말 그대로 내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었을 뿐인지 금세 흥미를 잃었다. 역시 근위기사단을 항상 곁에 두고 있어서 그런지 내 무용담에는 별로 흥미가 없는 것 같았다.
황제는 그 뒤로 아무 말 없이 턱을 괸 채로 날 내려다봤다. 뭘 해야 할지 몰라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으니 그가 내게 물었다.
“그래서, 별궁에 묵고 있다 했었지.”
“예, 감사하옵게도 마리아 전하께서 방을 내어주신 덕에 별궁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어째선지, 방 안의 기온이 조금 낮아진 것 같았다.
“별궁에서도 가장 안쪽의 내궁에 머물고 있다고.”
“예, 그렇습니다.”
착각이 아니었다. 정말로 기온이 낮아졌다. 시종의 호흡에서 입김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황제의 마력이 기분에 반응해 온도를 낮추고 있었다.
뭔지는 몰라도, 내가 황제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았다.
“어, 그, 폐하?”
“…그곳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그, 그것이, 신은 황궁은 물론 수도 자체가 처음인지라 잘 모르옵니다.”
내 대답에도 황제의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날 노려보고 있었다.
“모른다면 짐이 직접 알려주마. 그곳은-”
“마리아 전하께서 도착하셨습-, 저, 전하, 그렇게 막 들어가시면-!”
쾅.
갑작스레 문이 열리고, 마리아가 뚜벅뚜벅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그녀는 황제에게 인사를 올리고 고개를 들어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봤다.
“다녀왔습니다. 아바마마.”
“…왔구나.”
부녀가 나누는 인사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삭막하기 짝이 없는 대화였다. 그들은 감정 하나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서로를 바라봤다.
“빌은 이만 가봐도 좋아요.”
“빌?”
마리아의 말에 황제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날 노려봤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으니 마리아가 더 강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가도 돼요. 어차피 아바마마께서도 당신에게 볼일이 있어 부른 건 아니시니.”
어째 황제의 시선은 더 매서워진 것 같지만, 황제도 별말이 없고 시종이 앞장서 문밖을 손바닥으로 가리키기에 그를 따라나섰다.
“저녁에 연회가 있을 테니, 그전까지는 가보도록 할게요.”
“어, 알았ㅇ-, 크흠, 알았습니다.”
습관적으로 나오려던 반말을 억눌렀다. 사석에서야 편하게 대화하더라도 엄연히 그녀는 황녀였으니, 예법대로라면 경어로 답해야만 했다. 심지어 황제 앞에서 반말을 했으면, 진짜 큰일이었지.
“그럼, 먼저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밖으로 나섰다.
끼이익.
문이 닫혔다.
“후!”
한숨을 뱉었다.
황제는 황제라고, 별것 아닌 만남임에도 긴장되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
–
별궁으로 돌아오기 무섭게, 나는 마틸다를 불러 도움을 요청했다. 당연히 상경하는 만큼 집에서 이런저런 복장을 챙겨주긴 했지만, 브란덴에서 수도까지 거리가 좀 있는 탓에 가져오면서 다 망가졌을 게 뻔했다.
원래 이런 일은 알베르토가 도와줬지만, 그도 여기 들어오려면 이래저래 절차를 밟아야 하는 탓에 시간이 좀 걸렸다. 아마 며칠은 더 걸릴 것이 분명했으니, 일단 오늘은 그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마틸다 님! 전하께서 오십니다!”
한창 복장을 갖추고 있으려니 시녀 한 명이 달려와 마리아가 돌아오고 있다는 보고를 올렸다.
“실례지만, 전하를 맞이하러 가도 괜찮겠습니까?”
“상관없어. 따지고 보면 내가 도움을 받는 거지 네가 모시는 분은 마리아잖아.”
“양해 감사드립니다.”
그녀는 나가기 전 시녀들에게 명했다.
“너희가 이분의 옷을 고르는 것을 도와드리-”
“그럴 필요 없어.”
거울 앞에서 적당히 내 모습을 살피며 어디 틀어진 곳이 없나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준비가 완전히 끝난 건 아니지만, 어차피 남은 것이라고 해봐야 외투를 입는 것뿐이었기에 이건 나중에 해도 무방했다.
“어차피 마리아도 준비하려면 시간 좀 걸릴 텐데, 그때마저 준비하면 되겠지.”
“하지만.”
마틸다는 워낙 완벽주의적 성향이 강한 탓에 주저했지만, 마리아가 준비하는 데 시간이 걸린단 말에는 그녀도 동의했다.
1층으로 향하니 마리아가 시녀들에게 옷을 맡기며 들어오고 있었다.
“후우….”
“폐하와는 어떻게, 대화가 잘 끝났나 보네.”
“아, 응….”
어째선지 그녀는 볼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경이 여기서 지내는 것에 대해 허락을 받을 수 있었어요.”
그 말에 오히려 내가 더 놀랐다.
“아니, 그럼 폐하께 허락도 안 받고 나를 여기 들였던 거야?”
끄덕.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이 사람 안 본 사이에 엄청 과감해졌네. 예전에는 뭐 하나만 해도 엄청나게 여러 번 확인하고 그랬는데.
뭐, 폐하께서도 허락해주신 걸 보면 별문제 없는 일인 것 같으니 상관없으려나.
그런 것 치곤 폐하께서 반응이 조금 격하셨는데.
뭐, 좋은 게 좋은 거겠지.
“그보다, 아까 연회라고 해서 준비를 하고 있긴 했는데, 정확히 어떤 건지 알 수 있을까?”
일단 마리아가 같이 가자고 하니 별궁에 묵을 수 있게 해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를 겸해 군말 없이 간다고는 했지만, 막상 이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내 질문에 마리아와 마틸다가 그것도 모르면서 간다고 하고 있었냐는 듯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물론 마리아는 금방 표정을 고쳤지만.
“원래 이맘때가 각지의 귀족들이 모여서 폐하의 참관 아래 성인식을 치르는 때입니다. 각지에서 귀족이 모이다 보니 거의 매일같이 파티나 연회가 열리지요.”
마틸다가 마리아를 대신해 설명했다.
“그런데, 황녀가 참가할 정도면 주최자가 꽤 높은 모양이네.”
그녀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뷔르템부르크 후작 각하의 장남이신 욤 공자께서 주최하시는 연회입니다.”
“아, 그 사람.”
미간이 찌푸려졌다. 마리아가 내 표정을 보고 물었다.
“…혹시, 서로 아는 사이신가요?”
“안다면 아는 사이긴 하지.”
아예 초면인 사람은 아니었다. 남부 지역에 영지를 가진 대제후 가문이라 면식이 없을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개인적으로 사이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이게, 사람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귀족적인 성향이 매우 강했다. 귀족으로서 자신이 이끌 사람들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쓰긴 하지만, 동시에 귀족이기에 그들로부터 무언가를 거둬들이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사람이 나쁜 편은 아니었다. 영민들의 목숨을 함부로 빼앗는 편도 아니고, 세금 외의 수단으로 재산을 갈취하거나 하진 않았던 걸 보면 나름대로 선을 잘 지키고 있기도 했다.
다만,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들이 고난과 희생을 감수하는 걸 당연시하는 그 사고방식이 나와 맞지 않을 뿐이었다.
“사이가 나쁘신가요? 분란이 일어날 정도라면, 그냥 참석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그 정도는 아냐. 서로 딱 일면식 정도만 있는 사이라, 사이가 좋고 나쁘고를 따질 것도 없어.”
그리고, 아마 틀림없이 그쪽도 나에 대해 똑같은 감상을 갖고 있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냥, 좀 서로 얼굴 보고 있으면 피곤한 사이. 딱 그 정도지.”
그날 저녁, 우리는 수도에 위치한 뷔르템부르크 후작의 저택으로 향했다. 안에서 형형색색의 불빛이 새어 나오는 대저택이 우리를 맞이했다.
경비가 마차를 막아서고 내게 물었다.
“실례합니다. 성함과 가문명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빌헬름, 호엔베른 가다.”
경비의 뒤에 서 있던 가신이 열심히 서류를 뒤적거렸다. 그러나 목록에는 내 이름이 없었는지, 그는 내 이름을 찾지 못하고 내게 되물었다.
“죄송합니다. 명단에 이름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뭐, 내가 초대받은 것이 아니니까.”
나는 마리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마리아는, 누가 들어도 기분이 나쁜 것이 느껴지는 싸늘한 목소리로 답했다.
“마리아. 호프부르크.”
흡.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 나라에, 호엔베른을 모르는 사람은 많아도 호프부르크를 모르는 귀족은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창밖으로 손을 뻗어 경비의 투구를 툭툭 두드리며 마차의 전면부를 가리켰다.
“앞으로는 묻기 전에 마차 앞에 달린 문장을 잘 살피라고, 경비병 친구.”
“죄, 죄송합니다!”
곧장 길이 열리고, 마차가 다시 움직였다.
하아.
마리아가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기분만큼은 동일했다.
수도에서 연회를 벌인다는 후작가의 경비가 제국 황실의 문장조차 알아보지 못한다니.
이 연회의 진행이 얼마나 엉망진창일지 벌써부터 보이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