챙!
검과 검이 부딪혔다.
전투에는 자신이 있다지만, 첫수부터 상대를 찍어누를 수 있다는 자만 따윈 하지 않았다.
귀족이란 그 태생이 전투에 나서는 이들이었다. 계급이 신분이 되고 신분이 대물림되며 과거와 같은 높은 성취는 사라졌을지언정, 그 잔재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심지어 내가 기사단 부단장 직을 맡고 있는 걸 알면서도 결투를 걸어온 사람이 칼을 쓸 줄 모른다는 가정 따위는 하지 않았다.
“꽤 열심히 수련한 모양인데?”
“귀족으로서 당연한 일일 따름이다!”
욤은 계속 나를 밀어내려 애썼지만, 안타깝게도 힘에서는 내가 우위였다.
“그래도 힘에서 기사를 이기려 드는 건, 좀 괘씸하지 않아?”
“닥쳐!”
챙!
힘 싸움을 벌이는 건 무용하다는 걸 깨달은 그가 강하게 팔을 휘둘러 뒤로 물러나 다시 자세를 잡았다.
보아하니 자세가 아까와는 다른 것이, 이제 본격적으로 그가 배우고 익힌 검술을 활용하려는 것 같았다.
나 역시 그에 맞춰 자세를 잡아주었다.
“어?”
이미 몇 차례 내가 싸우는 걸 지켜본 적 있던 마리아가 의아해했다.
그럴 만했다. 이 자세는 괴물 사냥꾼으로서 배우고 익힌 자세가 아니라, 브란덴 가의 아들로서 기사단에 입소하기 위해 익혔던 검술이었으니까.
보통은 금세라도 튀어 나갈 것처럼 낮게 상체를 숙이고 검을 뉘였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어떤 상황에도 대응할 수 있게 다리를 살짝 벌려 교차로 내딛고, 검은 몸 앞에 비스듬히 세워 들었다.
“…이 자식이, 날 무시하는 거냐?”
욤이 나를 보고는 이를 갈았다.
뭐, 착각할 만했다. 이건 검을 처음 잡은 사람들이 배우는 기초 자세와 거의 비슷했으니까.
하지만, 착각에 대한 대가는 자기 몫이었다.
“받아봐라!”
타닥!
경쾌한 발놀림과 함께 욤은 빠르게 내 앞에 도달했다. 검술을 제대로 배웠는지 검을 크게 휘두르기보다 마력을 담은 움직임으로 비스듬하게 내 등쪽으로 들어왔다.
움직임이 보이긴 했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빠른 움직임이었다.
물론 반응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쪽 역시 마력을 실어 빠르게 허리를 튕겨 몸을 돌렸다. 내가 반응한 것을 본 욤이 바로 검을 거두려 했지만, 그보다 빠르게 내가 먼저 검날로 손잡이 가까운 쪽을 후려쳤다.
깡!
금속 부딪히는 소음과 함께 욤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그 틈에 한 번 더 검을 휘둘러 어깨나 골반 쪽의 갑옷을 쳐내려 했지만, 이번에는 욤이 반응했다.
“…아니, 진짜로. 생각보다 실력 좋은데?”
순수하게 감탄했다.
반응속도야 타고난 영역이라고 해도 무방했지만, 세상 모든 것이 다 그렇듯 반응속도만 좋다고 몸이 거기에 따라주는 건 아니었다. 이 속도로 빠르게 판단을 내리고 움직일 수 있는 건, 오랜 기간 진지하게 훈련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네게 칭찬이나 받자고 연마한 검술이 아니다.”
이번에는 그도 내가 조롱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는지 나름 얌전하게 반응했다.
그 태도로 패배도 바로 인정해줬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이 생각을 내뱉진 않았다.
“이번엔 네가 한 번 받아봐.”
그대로 다시 자세를 잡고 내달렸다.
탁.
약 절반 정도 거리가 남았을 때 뛰어올랐다. 그리고 그대로 검을 쥔 손을 머리 위까지 높이 들어 올렸다.
“하, 멍청하긴! 몬스터들과 어울리다 머리까지 몬스터 수준으로 떨어진 거냐!”
욤은 날 보고는 반대로 발을 강하게 굴러 단단하게 몸을 지지하고 검을 제 몸 뒤로 젖혔다. 내가 거리에 닿는 순간 요격하겠다는 생각이겠지.
“간다!”
일부러 소리쳐 외치고 검을 휘둘렀다. 그에 대응해 욤 역시 곧장 검을 휘둘렀다. 그는 내가 떨어지는 궤적에 맞춰 내 검을 피해 몸을 노리고자 했다.
내가 노린 건, 처음부터 이것이었다.
“뭣…!”
캉!
서로 전력을 담아 휘두른 검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닿을 리 없는 검이 부딪히자 욤이 당황했다.
“어디, 우리 후작가 자제분께서는 검 없이 얼마나 잘 싸우시는 지 한 번 구경해볼까!”
한 박자 빠르게 휘둘러진 검은, 당연히 욤에게는 닿지 않았다.
그러나 애초에 내가 노린 건 내게 대응하기 위해 내질러진 그의 검.
전력을 다해 내리친 내 검과 부딪힌 욤의 검이 그대로 아래로 처박혀 땅속에 검신의 3분의 1 가량이 꽂혔다. 물론 이쪽도 전력으로 내리친 탓에 바로 다시 검을 휘두르기엔 여유가 부족했다.
하지만 그게 내가 무력화되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꽝!
“끄악!”
훤히 드러난 욤의 이마에 강하게 머리를 들이박았다. 심상치 않은 소리와 함께 욤이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안 그래도 검이 바닥에 틀어박힌 상황에 머리를 강하게 얻어맞아 놓고 검을 계속 쥐고 있기엔, 그의 수련은 조금 부족했다.
철퍼덕.
검을 놓친 그가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
‘끝났네.’
더는 볼 것도 없었다. 결투는 내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아직 판결이 내려지지는 않았기에 목에 검을 겨누기 위해 욤에게 걸어갔다.
그런데, 욤은 아직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건 포기한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뭔가 이상해서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자리에 멈춰서 그를 노려봤다.
“칫!”
그가 아쉽다는 듯 혀를 차며 팔을 휘둘렀다.
“이런…!”
팔에 숨겨두고 있던 비수가 날아왔다. 급하게 검을 휘둘러 튕겨냈으나 그 탓에 틈이 생겼다.
그 틈을 이용해 욤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각성제?”
“알아봐도 늦었어!”
그가 꺼내든 건, 제국 동부 너머의 지역에서 각성제처럼 쓰이는 약물이었다. 그 영역을 관리하는 브란덴 가의 기사단 부단장으로서 내가 모를 수 없는 물건이었다.
불법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리 건강에 좋은 물건이 아니라 아버지가 저 약물이 제국에 유통되지 못하도록 노력 중인 걸로 알고 있는데, 저걸 욤이 어떻게 구했는지 의문이었다.
‘결투가 끝나면 물어볼 게 늘었네.’
욤은 각성제를 투여하기 무섭게 곧장 뛰어 검을 회수했다. 분명 단단히 박혀 뽑기 어렵게 만들어두었던 검이었지만 그는 마치 물에서 물건을 건져 올리듯 쉽게 검을 뽑아냈다.
“약물까지 쓰는 거냐?”
“이기기 위해서라면 무엇인들 못 할까!”
정말 진심으로 마리아를 좋아하는 건가?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런 눈치는 아니었는데. 마리아가 그의 이름이 나왔을 때 보이던 반응은, 단순히 꺼려지거나 부담스러운 사람을 볼 때 보일 만한 반응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싫어하거나 혐오하는 존재를 대할 때의 반응이었다. 예를 들면 바 선생이라던가.
“이제는 너도 쉽지 않을 거다!”
쾅!
그가 순간 내 인식보다 빠르게 달려와 검을 내리쳤다.
“큭!”
아까와는 받아칠 때의 충격과 무게감이 차원이 달랐다. 효과가 끝나면 엄청난 탈력과 피로감, 근육 파열로 인한 고통을 안겨주는 물건이라지만, 그 대신 효과가 도는 동안은 신체 능력의 엄청난 향상을 안겨주는 물건인 만큼 효과는 확실했다.
안 그래도 기술적인 성취가 그리 낮지도 않은 사람이라 그런지 깡스펙이 늘어나자 부담감도 확 늘어났다.
챙챙챙!
“하하! 괴물 사냥꾼이니 뭐니, 유치한 별명으로 으스대더니, 너도 별 것 없는 놈이었구나!”
그가 나를 도발하며 마구잡이로 날 밀어붙였다.
이제는 내가 힘 싸움에서 밀리니만큼, 한 번 뒤로 물러나기 시작하니 끝없이 물러나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게 내게는 더 익숙한 상황이었다.
애초에, 괴물 사냥꾼이라는 이명은 겨우 고블린이나 코볼트 같은 잔챙이들을 사냥해서 따낸 칭호가 아니었다. 그 별명은, 트롤은 따위로 만들 정도로 불합리할 정도의 강력함을 가진 몬스터들을 사냥했기에 얻어낸 칭호였다.
그리고, 그놈들을 상대할 때는 언제나 내가 약자였다.
“흡!”
한창 밀리던 중, 뒷발을 강하게 디뎌 땅에 발을 박았다.
쿵!
“크으윽…!”
더는 밀리지 않기 위해 검신을 눕히고 한손으로 검면을 받쳐 욤의 공격을 받아냈다.
“헛수고하지 말고 얌전히 항복해라!”
그의 도발은 무시하고 검에 담긴 마력을 빼내 몸으로 옮겨 담았다. 각성제를 사용한 욤을 상대로는 힘도, 속도도, 기술도 무엇 하나 압도하지 못했기에 어차피 더 높은 절삭력을 위해 검에 마력을 담는 건 의미가 없었다.
이건 상대를 공격할 수 있을 때나 의미가 있는 물건이었으니까.
오히려 몸에 마력을 한계까지 밀어 넣어 강하게 힘을 준 뒤 순간적으로 욤을 밀어냈다.
“어림없다!”
물론 그가 딱히 밀려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건틀릿을 낀 손으로 검날을 쥐고 오히려 손잡이 쪽이 위로 오도록 고쳐 잡는 시간을 버는 데는 충분했다.
“엇.”
“어디 그 머리통까지 강화됐는지 한번 보자고!”
그리고 그대로 손잡이로 욤의 머리를 후렸다.
깡!
투구를 쓰고 있었기에 욤의 머리가 터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철과 철이 부딪혀 났다기엔 너무나 낮고 묵직한 소음과 함께 투구가 움푹 팬 채 욤이 뒤로 넘어졌다. 하지만 전투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각성제는, 정말 더는 육신이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뇌의 전원을 꺼버리기 전까지는 강제로 사용자의 정신을 붙들어두는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이건 그저 충격으로 잠시 몸에 힘이 빠진 것일 뿐이었다.
그가 다시 일어나기 전에 전력을 다해 그의 팔목을 걷어찼다.
뻑!
걷어차인 손이 결국 검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힘을 풀었다. 검이 그의 손에서 빠져나오는 즉시 반대쪽 다리로 이번에는 검을 걷어찼다.
휭휭 돌며 날아간 검이 참관인을 지나쳐 관중들 근처에 박혔다.
참관인은 이것조차 익숙한 듯 눈도 깜빡하지 않고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대체 담이 얼마나 대단한 거야?’
잠시 그의 깡에 감탄하고 다시 욤에게 집중했다.
제아무리 욤이 각성제를 사용해 일시적으로 나보다 강해졌다지만,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각성자를 상대하는 방법은 적어도 이게 많이 유통되는 저 동부에서는 이미 흔히 알려져 있었다.
이악물고 버텨라.
각성제는 그리 오래 유지되지 못하니, 몇 분만 버티면 상대는 알아서 그 부작용에 의해 나가떨어지리라.
나 역시 그와 똑같은 방법을 선택했다.
“끄, 끄으윽, 빌헬름, 이 비겁한 새끼가…! 정정당당하게 싸워라!”
“…약물이나 쓰는 놈한테 내가 그런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는데?”
일부러 검의 손잡이로 투구를 계속 후려쳐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만들고, 그가 일어서려 할 때마다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욤은 필사적으로 어떻게든 일어서서 전투를 계속하려 했지만, 나도 어떻게든 그를 넘어뜨리려 용을 썼다.
하프 소딩을 이렇게 맛깔나게 활용한 건 나도 처음이었기에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살짝 흥이 올라 조금 더 강하게 때린 감이 있긴 했다.
그리고, 마침내 각성제의 효과가 끝났다.
“끄, 끄어어어….”
갑자기 몰아치는 탈력감과 고통에 넋이 나갔는지, 욤은 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더는 일어서지 못하고 기이한 신음만 흘렸다. 시간이 지나도 그가 움직이지 못하자, 참관인이 다가와 내 팔을 붙잡고 올려주었다.
“승자! 빌헬름 폰 브란덴!”
와아아아아아!
아마 수도에서는 보기 드문 거친 결투였기 때문이었을까. 관중들은 열렬히 내 승리에 환호해주었다.
그리고, 참관인은 뒤이어 우리가 처음에 말했던 소문 중 어느 쪽이 진실인가를 관중들이 보는 앞에서 판결했다.
“따라서, 주님의 참관하에 치러진 신성한 결투의 결과, 욤 폰 뷔르템부르크 경에게 여장하고 수도를 돌아다니는 취미가 있다는 소문은 진실이었음을 선언합니다!”
순간, 뷔르템부르크 후작저에 침묵이 맴돌았다.
“이런…, 씨바알….”
욤의 나지막한 중얼거림과 함께, 저택은 이내 광란에 빠져들었다.
—
서둘러 그 광기에 휩싸인 관중의 무수한 악수(아님) 요청에 잡히지 않기 위해 도망치듯 빠져나온 탓에 미처 벗지도 못하고 있던 갑옷을 벗어 던졌다.
사방이 틀어막혀 안에 갇혀있던 습기와 열기가 한순간에 빠져나와 마차를 채웠다.
“이런, 미안.”
“아뇨, 괜찮아요.”
그때가 되어서야 마리아도 마차에 있음을 깨닫고 창문을 열려 했으나 마리아가 만류했다. 마법으로 처리하려는 건가 싶어 기다렸지만, 그녀는 딱히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혹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싶어 내가 소소하게나마 바람을 일으키는 기초 마법을 사용하려던 차에 마리아가 내게 물었다.
“그런데, 말씀하신 대로 결투에서 승리했으니 제가 선물을 드려야겠네요?”
말투에서부터 의도가 있는 것 같은, 어째선지 굉장히 어둡고 음침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마리아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아니, 분명 약간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마치 귓가에 속삭이는 것처럼 그녀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귓가에 꽂혔다.
뭔가, 위기감이 느껴졌다.
“어, 음, 나는 그냥 소소하게-”
“제가 납득할만한 선물이 아니라면, 정말 제가 원하는 선물을 ‘드릴’ 거예요?”
순간 등골을 타고 오한이 내달렸다.
어째서일까. 분명 결투에서 이겼는데도, 나는 내 인생 최대의 위기를 겪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