좆됐다.
아무리 생각해도 좆됐다.
그리 길지 않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갑자기 무슨 화성에 조난 당한 사람 같은 말을 하고 있지만, 사실이 그랬다. 아니, 어떤 의미로는 조난당한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럼 나는 대놓고 마리아와 그렇고 그런 관계라고 여겨지는 거야?!”
“…지금 마리아라 하셨습니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욤 이 미친 황녀바라기.
내가 그, 아무튼, 입에 담기도 조금 민망한 궁전에 거주한다는 것보다 마리아를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에 집중하는 거냐.
“젠장, 이러면 진짜 꼼짝도 못 하고 마리아에게 발목이 잡혀 버리는데?”
“혹시 마리아 전하의 파트너로 선정되는 데 불만이 있는 겁니까?”
내 반응에 욤이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날 바라봤다.
아니, 그야 당연한 것 아냐?
“그럼, 벌써부터 결혼으로 발목이 묶인다는 데 즐거울 것 같아?!”
“그 나이를 먹고?”
“…크아악!”
이번엔 내가 긁혔다.
그래, 그러고 보면 여긴 시대상이 조금 달랐지. 19살에 성인식을 치르고 거의 대부분 그 직후, 길어도 1~2년 안에 결혼하는 게 보통이었다.
나처럼 스물셋이나 먹고 결혼은커녕 변변한 약혼자도 없이 떠돌고 있으면 이제 슬슬 노총각 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는 세상이었다.
“아니, 아니…!”
하지만, 평균 결혼 연령 30세 이상을 찍던 나라에서 온 내게는 스물셋이면 새파란 애송이라고…! 지구에 살 때는 이 나이에 대학교 졸업요건 못 채워서 교수님들한테 통화 돌리면서 바짓가랑이 붙들고 늘어지고 있었다고…!
물론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말해봐야 미친놈 소리 들을 게 뻔했으니까. 그렇다고 내가 뭐 어찌할 수도 없다. 이 세상 이치가 원래 그랬으니까.
결국 내가 대책 없이 집에서 뛰쳐나와 돌아다닌 것에 대한 일종의 인과응보 같은 거다.
“에휴, 그래. 상대가 누구냐를 떠나서, 나는 애초에 결혼에 대해 생각이 없어. 그래서 불만이다. 그럼 뭐 네가 도와주기라도 할 거냐?”
“그걸 나한테 묻는 건 좀 싸가지가 많이 없는 것 같습니다만….”
…그러고 보니, 얘는 마리아를 두고 나한테 결투까지 걸었던 놈이었지.
“음, 미안하다.”
이건 내가 잘못했네.
빠른 사과에 욤은 한숨을 쉬며 등받이에 기댔다.
“뭐, 그렇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런 인식이 박히는 게 불만이면 그냥 궁에서 나오면 되는 것 아닙니까?”
“나보고 마리아를 먹고 버린 쓰레기가 되라고?”
“…설마-”
“아, 아니라고!”
아무래도 욤 이놈은 볼수록 진짜 순수하게 마리아가 좋아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짓거리를 시도한 건 괘씸하긴 했지만, 원래 이 나이대가 사랑에 눈멀면 가끔 그러기도 하는 거지.
청춘이 별건가. 이런 게 청춘이지.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이 모함만은 못 참았다.
“주님께 맹세코, 마리아와는 한 침대에 누워본 적도 없다고! ”
“…한 방에서 지내본 적은 있다?”
“그거야, 아무래도 예전에 호위로 일한 적이 있었으니 어쩔 수 없지.”
“씁….”
그러나 욤은 해명에도 불구하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계속 나를 바라봤다. 이거야 원, 해명해도 소용이 없겠네.
그냥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로 했다.
“아무튼, 내 이미지도 이미지인데, 마리아의 이미지도 문제잖아. 내가 별궁의 내궁에서 마리아와 같이 지내다 떠났다는 소문이 퍼지면, 마리아는 정부랑 하룻밤을 보내놓고 바람맞은 사람이 되는 거잖아.”
욤이 내 말에 의문을 표했다.
“그곳의 소문이 바깥으로 나오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건 기우가 아닐까 싶습니다만.”
“음…, 그게 말이지.”
뭐,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그의 말이 옳았다. 애초에 불륜이나 정부를 끼고 노는 것을 위한 건물이라면 보안만큼은 더없이 철저할 테니까.
“마리아가, 그걸 숨길 생각이 없어 보이거든.”
확신할 수 있었다.
그걸 숨길 생각이었다면, 황제에게 그렇게 대놓고 보고하지 않았을 테니까.
이미 마리아가 대놓고 아무것도 모르는 날 데리고 별궁을 드나드는 것을 본 사람만 해도 수백명이니, 이미 소문은 애진작에 퍼지기 시작했을 터.
욤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
내 걱정은 기우로 끝나지 않았다.
내가 후작저에서 나와 궁으로 출발하자 귀족들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마력을 움직여 그들이 뭐라 떠드는지 집중했다.
“진짜 별궁으로 들어가는 건가…?”
“그냥 파트너로 선택하신 게 아니라 인생의 파트너였다고?”
“이 정도로 시끄러워졌는데도 별도의 조치가 없다는 건, 폐하께서도 동의하신 건가…?”
이미 소문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물론 소문이 퍼진다고 모든 귀족이 그 의미를 파악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귀족들 사이에도 알음알음 별궁의 내부 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퍼져있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정부로 불려가는 이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수도에 사는 귀족이었을 테니 당연한 이야기긴 했다.
“끄응….”
이제는 궁 밖으로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논외였다. 마리아와 나의 평판도 문제지만, 그런 건 나중 일이었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마리아가 가만 안 있을 텐데, 뒷감당을 어떻게 하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내가 궁에서 도망쳐 나가면, 마리아는 반드시 이 일을 사방팔방 시끄럽게 떠들며 어떻게든 나를 붙잡기 위해 난리를 칠 거다. 지난 며칠간 보여준 그녀의 심상찮은 분위기를 보면 분명했다.
물론 거기서 도망칠 자신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소식을 듣고 쫓아올 아버지와 아버지 손에 끌려가 어머니 앞에 도달하는 미래는 피할 자신이 없었다.
“씁, 이제 어떡하지.”
그동안은 속 편하게 적당히 때가 되면 도망치면 그만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임하고 있었다. 솔직히, 그냥 연회 파트너로 데려오는 사이 정도면 중간에 서로 깨져서 헤어지는 일은 흔했으니까.
하지만 동침했다는 소문이 퍼진 순간부터는 달랐다. 이건 자칫하면 황실 모욕죄에 걸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물론 내가 죽지는 않겠다만, 황실과 사이가 틀어진 프리랜서를 고용해줄 간 큰 귀족들은 제국에 별로 없었다.
머리를 써야 할 시간이었다.
머리에 손을 얹고 최대한의 속도로 뇌를 가동시켰다.
‘요점은, 양쪽에 이미지 타격 없이 수도를 벗어나는 것.’
저번처럼 휙 도망쳐버리는 건 불가능했다. 다시 만난 마리아는 저번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실행력이 높아지고 설계가 치밀해졌다. 거기에 제 이미지까지 집어던져 가면서까지 날 붙잡으려 하는 집착이 더해지니, 이건 나도 쉽게 상대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그렇다면 방향을 바꿔야 했다.
누구나 납득할만한 핑계를 대고 수도를 빠져나가는 것이야말로 내가 마리아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문제는, 수도를 벗어날 만한 정당한 사유를 찾기가 힘들다는 점이었다.
‘일단 가족이 부른다는 명분은 배제한다.’
항상 나보고 대체 언제 결혼할 거냐고 묻던 부모님이시다. 그분들께서는 상대가 황녀라는 점에 놀랄지언정 내가 발목이 붙들렸다는 사실에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을 분들이었다.
“…뭐지, 왜 내가 불효자인 것 같지?”
아닌가? 이 세계 기준으로는 실제로 불효자가 맞나…?
아무튼, 가족을 제외한 다른 경우의 수를 살펴봤다. 수도에 연이 있거나 내 소문을 확인한 귀족들은 내 편을 들어줄 리가 없다. 아니, 애초에 그들은 내가 수도를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사실 자체를 이해해줄 리가 없었다.
그나마 어린 시절부터 나를 봐온 포메른 공작가 그라이펜 가문 정도가 있을 텐데, 그쪽은 예전부터 황실과 사이가 좋은 이들이었다.
결국 귀족들을 비롯한 세속 권력들은 내게 도움이 되지 않았-
“잠깐만, 세속 권력?”
순간 머릿속에 번개가 스쳐 지나갔다.
곧장 방향을 바꿨다.
목적지는 궁전 남쪽에 위치한 대성당이었다.
-―
지구의 상식 중 이 세계에서도 통하는 몇 가지를 뽑으라면, 그중 하나는 종교에 대한 것이 있었다.
종교는 언제나 세속 권력을 찍어누르고 자신들이 우위에 서고 싶어 했다. 지구에서 인류의 역사란, 세속 권력이 종교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투쟁의 연속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 세계도 마찬가지였다.
다양한 존재가 존재했지만, 결국 주류를 차지한 종교, 황금십자교가 한때 대륙을 지배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문명이 발전하며 세상의 여러 이치를 인간의 능력으로 재현할 수 있게 되면서 종교의 권위는 점점 세속의 권위에 밀리게 되었다.
하지만 황금십자교는 여전히 세속 권력을 상대로, 제국과 황제를 상대로 힘싸움을 할 정도의 세력은 갖추고 있었다.
팔츠성 북쪽의 중심을 잡고 있는 황궁의 반대편에 서 있는, 남쪽 중심에 자리 잡은 대성당은 이 시대 종교 권력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계십니까?”
성당의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잠시 기다리니 안에서 사제가 문을 열고 나왔다.
“죄송합니다. 오늘 미사는 이미 끝난지라-”
나는 그에게 오는 길에 챙겨온 동전이 가득 든 주머니를 보여주며 흔들었다. 짤랑짤랑 소리가 나는 주머니에 사제의 시선이 꽂혔다. 나는 그에게 웃으며 물었다.
“혹시 대주교님을 만나 뵐 수 있겠습니까?”
“지, 지금 저를 돈으로 매수하시려는 겁니까? 저는 오직 주님께만 복종하는 황금십자교의 사제입니다!”
“설마요. 그저 제 신실함을 조금 보여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나는 주머니를 조금 열어 내부를 살짝 보여주었다.
황금빛 영롱한 금화의 자태에 사제는 곧장 고개를 숙였다.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는 내 신실함을 바로 이해했는지 나를 곧장 대주교가 묵는 건물로 안내해주었다.
“여기입니다.”
“굉장히 화려하군요.”
“아하하….”
사제는 내 말에 그저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 그럼 저는 대주교님을 모셔 오겠습니다.”
나를 응접실로 안내한 사제가 방을 나갔다. 대주교가 오는 것을 기다리며 어째선지 살짝 가벼워진 주머니를 옆에 두고 방 안을 살폈다. 스테인드글라스는 물론이고, 식기부터 가구까지 무엇 하나 보석이나 귀금속이 쓰이지 않은 것이 없는 사치스러운 광경이 인상적이었다.
이게 성당의 부속시설이라니. 역시 뭐가 됐든 수도에 자리 잡고 봐야 하는 건가. 하긴, 수도에 자리 잡은 대주교좌 성당이라니, 돈이 없는 게 더 이상하긴 했다.
어지간한 귀족가에서도 보기 어려운 사치에 감탄하고 있으니 나갔던 사제가 돌아왔다.
“대주교님께서 오셨습니까?”
“어, 그것이, 대주교님께서 지금 거동이 조금 어려우신 터라….”
횡설수설하며 말하는 그 모습에 나는 위화감을 감지했다.
이거, 뭔가 있다. 그 뭔가가 뭔지는 몰라도, 아무튼 사람들에게 대놓고 드러내기 좀 그런 뭔가가 이 저택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건수를 놓치면 괴물 사냥꾼의 이명이 울었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사제에게 다가갔다.
“아니, 세상에! 대주교님께서 거동이 어려우시다니! 분명 뭔가 사건이 터진 것이로군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어서 안내해 주시지요.”
“아, 아니,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 이건 대주교님께서 앓고 계신 질환 탓에 종종 일어나는 일인지라-”
“이럴 수가! 심지어 질병이라니! 제가 빨리 의료원으로 데려다 드려야겠습니다.”
그렇게 외치며 사제의 양어깨를 손으로 꽉 붙잡았다.
그러니까, 헛수작 부리지 말고 빨리 안내나 해.
그런 의미를 담아 강하게 노려보자 사제는 딸꾹질을 하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쪽입니다!”
그를 따라 위층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나는 매우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코를 찌르는 알코올의 냄새가 2층 복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사제는 덜덜 떨며 어느 방문 앞에 멈춰섰다.
안에서는 코 고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곧장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
코웃음을 칠 수밖에 없었다.
“으에엥? 너넌 또 누구냐….”
방 안의 광경은 처참했다. 십수 명의 사람이 바닥에 널브러져 코를 골고 있었다. 누가 봐도 미사용 술이라기엔 지나치게 고가로 보이는 술병들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안주로 먹은 것들의 잔재가 사방팔방에 흩어져 있었다.
“넌 누구냐니까아아….”
그리고, 대주교가 입을 법한 옷을 입고 있는 중년의 남성이 만취한 상태로 한 가닥 정신을 붙든 채 겨우 버티고 있었다.
그의 앞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거의 슬라임처럼 미끄러져 내려가 허리만 걸치고 누워있는 상황이었기에 이래야 겨우 시선이 맞았다.
그의 뺨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나 황궁에서 나온 사람인데.”
“헉.”
순식간에 취기가 달아난 얼굴로 대주교가 눈을 부릅떴다.
나도 모르게 입가가 히죽 늘어났다.
그날, 나는 아주 성능 좋은 명분 생성용 생체머신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