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공자께서 제게-”
“정말, 곤란하다니까요.”
“혹시 —영애께서는-”
황궁이 귀족들의 수다로 시끌벅적했다. 성인식이 치러지기 전 벌어진 연회판인 만큼 온 수도의 귀족이 다 모여들었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시종이나 기사, 혹은 연로한 어르신들을 제외하면 말 그대로 모든 귀족이 여기 모여들었다고 들었다.
물론 내가 알고 싶어서 따로 알아본 적은 없었다.
“황제가 참석하는 연회에 빠질 사람들이라면 굳이 비싼 돈 들여서 마음대로 권세도 부리지 못할 수도에 거주하지도 않았을걸요.”
“그래?”
마리아가 하루종일 내 옆에 붙어 그리 궁금하지 않은 TMI를 계속 알려주고 있었다.
한참을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다 물었다.
“그런데, 너는 저기 안 가봐도 돼?”
마리아의 시선이 내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했다. 영애와 공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왁자지껄 떠드는 1층 홀이 그녀의 눈에 비쳤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 떠들만한 것들은 이미 진작에 다 이야기를 나눠뒀어요. 따로 연을 맺어둘 필요가 있는 사람들도 다 분류를 끝내놨고.”
굉장히 사무적으로 청춘남녀들의 즐거운 담소를 평가하는 그녀의 태도에 너 친구 없는 거 아니냐는 나쁜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애초에 사교성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사실, 사교성을 기를 기회도 잘 없었다고 보는 게 맞겠지.
하지만, 그건 그거고.
“네가 안 가면 사람들의 주목을 다른 사람이 가져갈 텐데, 괜찮겠어?”
결국 이 식의 주인공은 마리아다. 황실 주최의 행사에, 황녀가 참가하는데 다른 사람이 주인공이 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최대한 그녀를 띄워주기 위해 이 연회나 식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최대한 신경을 썼을 거다. 문제는 그 당사자가 그걸 누릴 생각 없이 그저 내 옆에 딱 달라붙어 있다는 거다.
“뭐 어때요. 당신도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여기 앉아만 있는데.”
“그건 내가 애초에 이 식과는 상관없는 사람이라 그런거고….”
애초에 이 행사는 올해 성년이 되는 귀족들을 황제가 축하해주는 게 핵심이다. 당연히 올해 열아홉이 되는 사람들이 주연이지 스물이 진작 넘은 나는 덤일 뿐이었다.
애초에 참여하는 것도 성인식이 아니라 식이 다 끝나고 황제를 알현하는 순서에만 참가하는 것뿐이었다.
그런 만큼 식에 참가하는 마리아와는 상황이 달랐다.
“상관없어요. 그런 거.”
물론 마리아는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고 그냥 계속 내 옆에 앉아 있었다.
‘씁, 곤란한데.’
마리아가 돌아다니며 자유시간이 생겼을 때 자연스럽게 저기서 식의 시작을 준비 중인 대주교와 친한 척을 해야 했는데, 이래서야 짬을 낼 수 없었다.
물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그녀는 식이 시작하면 내려가야 했고, 대주교는 처음 식이 시작할 때 애국가 제창하듯 기도로 행사 시작을 알리고 빠져나오는 역할이었다.
그 틈을 노리면 귀족들에게 대주교와 내가 친하다는 소문을 퍼뜨리긴 충분하겠지.
“아무튼, 그래서-”
내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마리아가 다시 TMI를 늘어놓았다. 괜히 주변 사람들이 말을 걸어올 틈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나도 이상한 사람이 꼬이는 것보다는 마리아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훨씬 나았기에 그녀의 말을 받아주었다.
한동안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저 멀리서 누군가 외쳤다.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그 말에 서로 웃고 떠들던 귀족들이 모두 동작을 멈췄다. 다들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인 채 황제의 등장을 기다렸다.
끼이익.
이윽고 홀의 가장 깊숙한 곳, 3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의 꼭대기에서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께 인사를 올립니다.”
우리 근처에서 자리 잡고 앉아 홀로 술을 홀짝이던 재상이 일어나 계단에 다가가 무릎 꿇고 인사를 올렸다. 그를 따라 귀족들도 각각 무릎을 꿇거나 치마를 잡고 고개를 숙였다.
나 또한 마리아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잠시 그 상태로 기다리니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고개를 들거라.”
그렇게 크게 말한 것이 아닐 텐데도, 낮고 중후한 목소리가 건물 전체를 울렸다. 고개를 드니 화려하게 빛나는 복장을 갖춰 입은 황제가 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들 연회는 즐기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황제의 말에 저 밑에서 누군가 호기롭게 외쳤다.
“폐하의 성은이 하펠강을 채우고도 넘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좌중에 웃음이 번졌다. 황제도 한번 피식 웃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하지만 그는 이내 웃음을 거두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까지는 마음껏 즐기거라. 이제 성인식이 끝나고, 내일부터 그대들은 엄연히 한 사람의 성인이자 제국의 귀족으로서 그대들의 의무를 다하고 제국의 번영을 위해 언제나 고민하고 살아야 할 것이니.”
그러자 홀이 다시 한번 조용해졌다. 마리아는 당연한 말을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나를 힐끗 곁눈질하는데, 그게 마치 내게 그래서 너는 뭘 하고 있냐고 묻는 것만 같았다.
괜히 찔려 핑계를 둘러댔다.
“아니, 나도 제국의 안정을 위해 열심히 몬스터도 사냥하고 귀족도 호위하고 다녔어.”
“누가 뭐래요?”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한 마디를 툭 던졌다.
“그래서 약혼도 팽개치고 도망 다닌 건 뭐라고 변명하실 건가요?”
“크흠.”
이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면 코너에 몰린 채 라운드를 시작하는 꼴이었기에 대답을 피했다. 마리아는 싱글싱글 웃으며 날 바라봤다.
젠장.
도저히 말싸움으로 이길 수가 없다…!
“거, 좀 있으면 식이 시작할 것 같은데, 이제 슬슬 가봐야 하지 않겠어?”
“또 말 돌린다.”
“…….”
마리아는 기어이 날 K.O 시켰다.
뭐라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고 있으니 그녀는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 말이 맞아요. 슬슬 시작할 때가 됐으니 가봐야겠죠.”
그녀는, 홀을 향해 걸어가다 갑자기 돌아와 내 어깨를 잡고 확 끌어당겼다. 그리고 내 귓가에 속삭였다.
“어디 도망치지 말고 딱 여기서 기다려요. 식만 끝나고 바로 돌아올 거니까.”
“…아니, 진짜 끝까지 네 또래랑 안 어울릴 거야?”
“누가 보면 당신은 뭐 엄청 연상인 줄 알겠어요?”
…정신까지 따지면 아마 여기 있는 대부분보다 최소 2배에서 2.5배까지 될 것 같긴 한데.
아무튼, 굳이 그녀의 말을 거절할 이유도 없기도 하겠다, 어차피 황제를 알현할 순서가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기도 해야 하겠다, 그녀의 말을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알았어. 별일 없으면 여기서 기다릴게.”
“별일 있어도 기다려요.”
“…그건 억지 아냐?”
푸흡.
내 반응이 뭐가 재밌는지, 살짝 웃음을 흘리고는 다시 몸을 돌려 회장으로 향했다.
대체 뭘 하고 싶었던 걸까.
진짜 저 이야기 하나 하려고 일부러 그렇게 얼굴을 들이밀었던 거야?
‘…뭐, 예쁘긴 하니 눈호강이긴 했지만.’
괜히 살짝 열이 올라 냉수를 들이켜고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나는 마리아에게 또 당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내 주변에 있던 적당히 나이가 찬 중장년의 귀족들이 내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이 시선을 알고 있었다. 이거, 아침 드라마를 볼 때 우리 어머니가 가끔 짓던 표정이었다.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렇다고 자리를 뜰 수도 없었기에 계속 냉수만 들이켜며 대주교가 나올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나를 불렀다.
“혹시 빌헬름 경 맞으십니까?”
아마도, 황실의 시종으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평범한 시종은 아니었다. 황제의 전속시종급은 아니더라도, 지금 이 연회장에 돌아다니는 사람들과는 복장의 급이 남달랐다.
“빌헬름 폰 브란덴을 찾는 것이라면, 그건 제가 맞습니다만.”
시종은 내게 용건이 있는 것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께서 빌헬름 경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가장 듣기 싫은 사람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이런 씨발.”
그 이름을 듣자마자 욕이 절로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예?”
“알겠다고 했습니다.”
“어, 어어…, 예….”
시종은 내 말에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헷갈려하며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황궁이라면 당연히 황후도 여기 있겠지.’
황후.
솔직히, 개인적으로든 공적으로든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사람이야말로 황실의 온갖 갈등의 원인이 되는 사람이었다. 이전 황후가 마리아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소천하자 황제는 본래 정부로 있던 현 황후를 황후의 자리에 앉혔다.
문제는, 그가 황제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자 제 아들을 황제로 올리고 싶어 하는 야망을 가졌다는 데 있었다.
당연히 그녀는 전 황후의 아들들은 물론 명목상이라지만 계승권을 갖고 있는 딸들 또한 매우 경계했다. 그것도 마리아가 겪은 숱한 암살 모의 중 배후가 누구인지 잘 모르면 일단 황후를 찍으면 답이라고 해도 될 만큼.
‘선제후가 차기 황제를 선출한다지만, 그건 반대로 말하면 선제후들만 어떻게 구워삶을 수 있다면 장자니 계승 서열이니 하는 문제는 전부 무시해버릴 수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그리고, 매수 외에 선거에서 이기는 또 다른 방법은 다른 유력 후보들을 제거해버리는 것도 있었다. 황후는, 마리아에 대해서는 굉장히 강하게 이 방법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물론 어느 순간부터는 나와 내가 소개해준 기사단이 이런 시도를 완전히 차단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당장 여기 올 때 수상할 정도로 장비가 좋은 산적들의 습격이 있지 않았던가.
하필 그런 사람이 나를 찾고 있었다.
물론, 이 연회장에서 그녀가 대놓고 날 헤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지금 이 연회장은 오직 황제의 명령만을 듣는 근위기사와 황실 마법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제아무리 황후라고 해도 이들을 뚫고 수작질을 부릴 수는 없었다.
그냥, 그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 자체가 꺼려질 뿐이었다.
“빌헬름 경?”
시종이 나보고 빨리 따라오라 재촉했다.
잠시 마리아가 앉아 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조금 전 나보고 여기 앉아 기다리라고 했었지만, 아쉽게도 그걸 지킬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한숨을 푹 쉬고 품에서 만년필을 꺼내 냅킨에 메모를 적어두었다.
‘황후가 불러서 잠깐 다녀올게.’
냅킨을 마리아의 그릇 앞에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봅시다.”
“예, 따라오시지요.”
그를 따라가니, 평범한 귀족들은 올라오지 못하는 3층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이곳은 오직 황제와 그의 심복들, 그리고 그의 친족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우리는 그중에서도 중앙의 뻥 뚫린 천장으로 홀이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한 방으로 들어갔다.
“직접 얼굴 보는 건 처음이지?”
“…예, 처음 뵙는군요.”
여유롭게 차와 다과를 즐기는 장년의 여성, 황후 요안니나가 나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