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자에 앉자 방 안에는 침묵이 맴돌았다.
나야 애초에 황후와 따로 나눌 이야기가 없었다. 애초에 마리아와 관련된 일로 부딪힌 걸 제외하면, 황후와 나 사이에 접점이랄 것이 없었다.
그래서 의아한 거다.
이 사람은 대체 왜 날 부른 걸까.
한참을 그렇게 기다리고 있으니 황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마리아가 너를 점찍었다고 들었느니라.”
“…예,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 때문인가.
정말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불렀을 리는 없다. 그녀쯤 되는 위치면 궁에서 벌어지는 일의 진위여부를 파악하는 것쯤은 쉬웠을 거다.
그렇다면, 분명 이와 관련해 다른 목적이 있다는 말이겠지.
“네가 그걸 못마땅해한다는 것도 들었다.”
하지만 이건 예상외였다.
적어도 밖에서는 마리아가 내게 달라붙는 걸 거절 없이 다 받아들였었는데? 한탄도 욤이나 바오로 대주교 앞 외에서는 한 적 없고.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별궁에 사람을 심어두셨군요.”
“네가 들어가기 전에 그곳을 이용한 사람이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그래, 그러고 보면 이 사람도 정부 출신이랬지. 그러면 당연히 별궁 내 전각에 머물렀을 거다. 아마도 내가 쓰는 방이 이전에 그녀가 묵던 곳이겠지.
핵심 인물들은 마리아가 원래부터 자신을 따르던 이들로 채워뒀다 하더라도, 원래 별궁 시설 관리를 책임지던 이들까지 전부 갈아치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엄연히 별궁은 황제가 소유한 건물이었다. 개인을 수행하는 이들이면 몰라도 시설 관리는 엄연히 그의 관할이었다. 만약 황후가 그들 중 몇몇을 매수했다면, 내부의 소식을 빼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겠지.
“예, 그렇습니다. 솔직히, 마리아와 결혼하는 게 그리 끌리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겁니까?”
“만약 마리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내 딸’을 소개해줄까 싶어서 말이지.”
하아.
한숨이 절로 나오는 걸 억눌렀다. 결국 이게 문제였나.
“브란덴 변경백령은 지금까지도 그래왔듯 앞으로도 제국의 정치에 관여할 생각이 없습니다.”
마리아가 내게 달라붙는 걸 정치적 동맹이라고 해석한 건가. 물론 마리아도 황녀인 만큼 정치적 목적이 아예 없으리라고 단언하긴 어려웠지만, 솔직히 그것보단 개인적인 이유가 더 커 보였다. 애초에 그녀가 황제 자리에 대단한 집착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하지만, 원래 사람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법 아니라던가. 심지어 이번 일은 충분히 그렇게 해석할 법한 여지도 있었다.
“선제후가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니, 이미 말에 모순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더냐.”
“그래서 지금껏 브란덴 선제후는 언제나 다수의 지지를 받는 자를 차기 황제로 지지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는 제게 따질 것이 아니라 브란덴 변경백을 선제후로 임명한 쪽에 묻는 게 맞지 않나 싶습니다만.”
황후는 노골적으로 불편함을 드러내며 표독한 시선으로 날 노려봤다. 아무래도 내가 완전히 마리아의 편에 설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지.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누가 내 목에 칼 들이밀고 마리아와 황후 중 한쪽 편을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마리아를 선택할 테니까.
하지만, 내 선택과 우리 가문의 선택은 다른 문제였다.
우리 가족이 사이가 좋은 것과 별개로, 가문의 정치적 결정은 나와는 상관없이 돌아갔다. 삼남이란 그런 의미였다.
“…그러면, 내 제안은 거절하는 것이렸다.”
“애초에 그리 가치 있는 제안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황후 폐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든, 그리고 제가 누구와 손을 잡든 브란덴 선제후께서는 언제나와 같은 선택을 하실 거니까요.”
황후의 눈썹이 굼틀거렸다.
“마리아, 그년의 치마폭이 그렇게 좋더냐?”
그 입에서 나온 말은 황후가 하는 말이라기에는 너무 천박했다. 나도 나름 모험가 비스무리한 생활을 하며 여러 모욕적인 언사를 들어본 적이 있긴 했지만, 설마 황후라는 사람 입에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따님께 하는 말씀이라기엔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딸은 무슨, 내 핏줄은 하나도 잇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게 내 딸이란 말이더냐.”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래, 이럴 거라고 생각은 했다. 제아무리 계모라지만, 그래도 모녀지간인데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사람을 죽이려 드는 건 흔치 않았다. 만약 이게 제국 황실 평균이었다면, 제국은 진작 망했을 거다.
어느 때나 권력 다툼은 있었지만, 그건 서로 상대 세력을 회유하거나 요인을 암살하는 정도였지 이렇게 대놓고 상대를 죽이려 들지는 않았다.
이건 아예 상대를 자기 가족은커녕 한 집안 사람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기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짐작한 것보다 그 태도가 불쾌함이 느껴질 정도로 너무 완고했다.
“…아, 그렇습니까.”
더 이야기를 나눠봐야 머리만 아플 것 같았다. 제아무리 황후라지만, 이렇게 대놓고 모욕을 주는 건 본인도 예의를 대접받을 생각이 없는 것이었기에 그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하실 말씀은 제가 황후 폐하의 편을 들어달라는 것이 전부입니까?”
“방금 전 네 손으로 거절했으니, 그래. 용건은 끝났구나.”
“착각을 정정해드리자면, 황후 폐하께서는 줄을 대야 할 번지수를 잘못 짚으신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아무리 떠들어봐야 가문의 의사와는 아무 상관 없다는 걸 말씀드려야겠군요.”
그러나 황후는 코웃음 쳤다.
“하, 가문원의 혼사가 언제부터 가문의 결정과 따로 움직였다고. 하다못해 서로 정분이 나서 결혼하는 이들조차 가문이 결사반대하면 헤어질 수밖에 없거늘.”
“…제 말을 전혀 듣지 않으시는군요.”
물론, 황후의 말도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적어도 이곳 팔츠 주변이나 제국의 서부, 남부와 같이 풍요롭고 이권이 복잡하게 얽힌 지역에서는 연애는 자유로울지 몰라도 결혼은 가문의 의사가 어느 정도 반영되긴 했다.
여행을 다니며 안타깝게도 연애 끝에 이어지지 못하고 서로 다른 파트너와 결혼한 이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물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공식적인 배우자를 두고 바람을 피운다는 소문이 있긴 하지만, 난 내가 보지 않은 건 믿지 않았다. 아무튼 본 적 없다고.
하여튼, 그런 풍요로운 지역들과 달리, 인구도, 작물 생산도 썩 만족스러울 정도는 아닌 동부와 북부는 이야기가 달랐다. 이곳은 적어도 귀족들 간에는 이해관계가 그렇게까지 복잡하게 얽히지 않았기에 연애가 결혼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잦았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진짜 서로 원수진 가문이 아닌 이상에야 가문에서 반대하는 일도 잘 없었다.
“들을 필요도 없는 헛소리에 귀를 기울일 이유가 없지 않더냐.”
그리고 황후는 굉장히 이질적인 제국 북동부의 사정에 완전히 무지했다. 말해줘도 이해할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그럼 더 이야기를 나눌 필요도 없었다.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적당히 인사하는 시늉을 하고 뒤돌아섰다.
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으니 뒤에서 황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과연 내 아들이 황제가 되고 나서도 네가 이렇게 기고만장하게 나올 수 있을지 궁금하구나.”
뒤끝이 심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그 말이 담고 있는 함의가 더 내 기분을 건드렸다.
황후가 나를 건드릴 수 있는 방법은, 마리아에게 죄를 씌워 그녀를 처리하며 주변인들을 도매금으로 엮는 것뿐이었다. 애초에 이미 마리아를 상대로 온갖 수작질을 부려온 전적이 있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마리아의 호위를 담당했던 사람으로서 저런 말을 듣는 건 영 불쾌했다.
괜히 반발심이 들어 나도 한 마디를 쏘아붙였다.
“겨우 저 한 사람 어찌하지 못해 지금껏 마리아를 건들지도 못 하던 사람이, 선제후의 보호를 받는 사람은 잘도 건드리시겠습니다?”
그리고 일부러 황후의 속을 박박 긁어놓을 말도 덧붙였다.
“지금껏 선제후 하나 회유하지 못한 정치력으로, 참 잘도 선거에서 이기시겠군요. 건승을 빌어드리겠습니다. 잘하면 만장일치로 패배하는 일은 피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너, 지금 뭐라고 했더냐!”
황후가 벌떡 일어나 나를 노려봤다. 한 번 피식 한쪽 입꼬리를 틀어 올리며 비웃어주고는 방을 빠져나왔다.
안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 들렸다. 한 번 제대로 긁어줬기에 속은 후련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들었다.
저 정도로 고집불통에 세상을 자기 기준으로만 보는 사람이, 과연 이 이후로 내게 아무 짓도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아니, 장담컨데 아마 마리아와 엮어 내게도 뭔가 수작질을 부리려 하겠지. 그러면 곤란했다. 앞으로도 여러 곳을 돌아다녀야 하는 내게 제국 전역에 눈과 귀를 심어둘 수 있는 사람이 나를 노리는 건 굉장히 귀찮은 일이었다.
어쩌면 귀찮은 걸 넘어 정말 위험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아, 맞다. 마리아.”
성인식 자체는 진작에 끝났을 테고, 아마 지금쯤이면 몇 명씩 돌아가며 황제를 알현하고 있을 것이다. 나와 마리아는 가장 마지막 차례였기에 마리아는 자리로 돌아와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고.
서둘러 발을 놀리며 고민했다.
어쩌면, 떠나기 전에 한 번쯤은 황후의 콧대를 눌러놔야 할 필요가 있는 것 아닐까.
그녀가 뒤에서 수작질을 부리는 걸 완전히 차단하는 거야 어려울 수 있어도, 적어도 대놓고 나나 마리아의 목숨을 노리는 것 정도는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이쪽이 철저하게 상대의 위협을 응징할 힘이 있음을 증명하는 거지만, 아쉽게도 그건 어려웠다. 저쪽은 어쨌거나 황후였고, 황제의 권위를 훔쳐 오진 못해도 황후로서 주변에 뿌릴 수 있는 이권을 최대한 활용한다면 나나 마리아가 가진 힘이나 권력은 그녀에게는 턱도 없었다.
무언가, 방법이 필요한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