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현이 끝나자, 이제 따로 남는 일정은 없었다.
부모님도 딱히 나를 집으로 부르지 않으셨고, 원래는 알현만 끝나면 아직 시간이 남았을 때 제국 너머 동부로 갈 생각이었기에 누군가의 의뢰를 받거나 해둔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건 시간이 넘쳐난다는 뜻이기도 했다.
구태여 시간을 끌 필요도 없었기에 바로 황후와 연관된 사람들을 파악하러 돌아다닐 계획이었다.
하지만 계획이 현실이 되는 일은 없었다.
“후후.”
“…그렇게 즐거워?”
“네, 그렇답니다. 언제나 이런 때가 오길 기다렸어요.”
“그래, 네가 좋다면야….”
나는 마리아의 손에 끌려 팔츠 곳곳을 돌아다녀야 했다.
처음에는 반쯤 끌려가는 마음으로 돌아다녔지만, 시간이 지나 점심 무렵이 지나서부터는 나도 즐기기 시작했다.
“오, 이건 뭐야? 무슨 장식품 같은 건가?”
“아, 그건 사탕이에요. 마법으로 설탕과 과일을 잘게 부숴 조각처럼 만든 거죠.”
“…마법 탕후루?”
“예?”
“아, 아냐.”
과연 제국의 수도답게, 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온갖 현란하고 화려한 사치품과 고급 물건들이 사방에 깔려 있었다. 역시 귀족들이 현역으로 뛰는 시대라 그런지 보석이나 장신구를 세공하는 기술이 정말 미친 듯이 발전해 있었다.
흔히 졸부를 가리켜 품위도 모르고 보석으로 떡칠하고 보는 천것이라 보는 이미지가 왜 생겼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야 평범해 보이는 금 한 덩이로도 이런 정신 나간 예술품을 만들 사람들을 다수 후원하거나 고용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돈 좀 벌었다고 아무튼 비싼 것들을 무작정 사들여 치장하는 게 그리 곱게 보이진 않을 것 같았다.
“그보다, 마법사를 이런 일에 동원한다고?”
“마탑 소속의 마법사 중 연구비가 부족한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일을 하는 걸로 알아요.”
“세상에.”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건, 상인들이 마법사를 고용하는 일이 다 있다는 점이었다.
내 기억 속의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재수는 없고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 놈들이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란 선택받은 소수만이 오를 수 있는 경지였다. 마력을 느끼고 운용할 수 있는 이들도 적은데, 마법사가 될 정도로 마력을 운용하는 경지에 오를 수 있는 이들은 그중에서도 소수였다.
요컨대, 저 잘난 맛에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돈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건 놀라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 마법사들이 귀족도 아니고 돈에 고개를 숙인다고?”
“수도에서 이렇게 좌판을 벌여놓고 장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상인 길드 소속이니까요.”
“허.”
하지만 상인길드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마법과 오러가 존재하는 세계에서, 배 째라고 나오면 진짜 배를 째버리고 역으로 자기들 불리할 때가 되면 역으로 배 째라는 시전하며 꼬우면 힘으로 덤비라고 나오는 귀족을 상대로 정말 배를 쨀 능력을 보유한 그들이라면, 마법사를 고용하는 게 불가능할 것도 없어 보였다.
“진짜, 신기하네.”
하지만 마법사들이 참여했다는 걸 감안해도, 팔츠의 거리는 굉장히 화려했다.
금박이 입혀진 장신구가 노점에서 팔리고 있었다. 저택으로 착각할 정도로 거대한 대장간에서는 쉬지 않고 망치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건어물 가게와 청과점은 무려 마법을 동원해 식품을 수송해와 가공하지 않은 싱싱한 상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여관은 붐비고, 고기 굽고 스튜 끓이는 냄새가 거리로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냄새는 다시 길거리에 파는, 현대에서나 찾아볼 수 있던 간식거리의 향기에 묻혀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잊혔다.
조금 더 들어가니, 시계와 같은 정밀기계와 온갖 고급 의류점이 들어서 있었다.
백화점의 향취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벌써 몇 시간을 걷고 있음에도 시장이 끝나지 않는 것이, 이 구역이 통째로 오직 상행위만을 위해 구성된 곳 같았다.
“항상 번영과는 거리가 먼 곳 위주로 돌아다녀서, 이런 곳은 본 적이 별로 없죠?”
“그러게.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한 번 와볼걸.”
나름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고 자부했지만, 이런 곳은 본 적 없었다. 겨우 시장바닥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 시장바닥이 어지간한 마을의 규모를 압도했다. 여기 돌아다니는 인원만 해도 어지간한 지방 영주의 영주성이 있는 고을을 압도하지 않을까.
한참을 돌아다니던 중, 마리아가 나를 데리고 골목길 쪽으로 빠졌다.
“어어, 여긴 시장과는 관련 없는 곳 아냐?”
“쉿, 잠깐 조용히 해주세요.”
“읍.”
마리아의 손가락이 입술에 닿았다. 당황스러운 상황에 머리가 멈춰 아무 생각 없이 그녀의 손에 이끌려 끌려갔다.
마리아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간판은커녕 아무런 표시도 없는 허름한 건물이었다.
“여기예요.”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부실한데. 이 안에 뭔가 있다고 생각하기엔, 외관이 너무 허름했다.
그리고, 그게 굉장히 섣부른 생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세상에.”
판타지를 얕보지 마라, 지구인.
건물 안에 들어서자마자 알 수 있었던 것은, 마법이 존재하는 세상에 공학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다소 무의미해진다는 깨달음이었다.
허름한 외관은 둘째치고, 분명 건물의 크기가 작은 편은 아니었다. 골목길 안이긴 하지만, 한쪽 벽면 전체를 통으로 쓰고 있는 건물이었으니 오히려 유달리 큰 건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건물이, 내부에 들어서니 기둥 하나 없이 탁 트여 있었다. 심지어 지하도 파여 있었는데, 지하는 건물과 상관없이 사방으로 더 뻗어져 나가 있었다.
“대체 여긴 뭐 하는 곳이야?”
비록 마법사는 아니라지만, 한때는 마법을 동경해 이론이라도 열심히 공부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름 마탑의 마법사를 불러 5 위계의 마법까지 공부했음에도 이런 수준의 힘을 낼 수 있는 마법은 본 적 없었다.
4 위계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어야 비로소 마법사라고 불리는 것을 생각하면, 이건 마법사 중에서도 상당히 재능 있고 경지가 높은 이들을 여럿 불러야만 할 수 있는 일임을 알 수 있었다. 아니면 대마법사를 부르던가.
어느 쪽이든 돈으로 해결하려면 문자 그대로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는 일이었고, 권력으로 해결하려 해도 보통 권력으로는 안 됐다.
감탄하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으니 마리아가 나를 이끌었다.
“고대부터 존재하던 건물이에요. 어떤 이유로 세워졌는지는 몰라도, 과거부터 비밀스런 시장으로 쓰이고 있죠.”
“…지하 시장이라고?”
뭔가 불길한 냄새가 풀풀 풍기는데.
경외의 눈빛이 의심의 눈초리로 변하자 마리아가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꺼림칙한 건 아니에요. 존재 자체는 엄연히 공개된 곳이니까.
“그럼 왜 비밀스러운 시장인데?”
그녀는, 내 말에 대답 대신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타올라라.”]
나도 잘 아는, 담뱃불 정도로 요긴하게 쓰이는 점화 마법의 주문이었다.
그러나 마리아의 손가락 위에 나타난 것은, 불꽃이라 하기엔 너무 커다란 불꽃의 회오리였다.
그녀는 손가락을 한 번 까딱여 불꽃을 꺼트리고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마법사만이 입장할 수 있는 결계가 쳐진 곳이니까요.”
그녀의 말에 내 심장이 요동쳤다.
수도 한복판에 존재하는, 마법사만이 들어올 수 있는 비밀시장이라고?
이건 못 참지.
“푸훗.”
마리아는, 그런 내 반응을 예상했는지 웃음소리를 흘렸다.
…살짝 부끄러웠다.
-―
과연, 이곳은 마법사들만의 시장이라는 이름을 쓸 만한 자격이 있었다.
저 지상의 시장에서는 잡화점이 말 그대로 일상생활에 필요한 잡화를 파는 곳이었다면, 이곳은 잡화점조차 격이 달랐다.
잡화점은 온갖 마법 실험이나 작업에 필요한 각종 도구를 팔고 있었다. 비커에서 시작해 마법 반응을 확인하기 위한 도구들까지, 말 그대로 온갖 마법사 전용 잡화를 팔았다.
그런가 하면, 건어물 상점과 청과점은 굉장히 고급 가게로 취급받았다. 식자재를 팔던 지상과 다르게 이곳은 마법을 위한 재료로 쓰이는 물건들을 취급하고 있었다.
가령, 청어는 지상의 건어물 가게에서 평범하게 잘 차린 정식집 한 끼 가격보다 조금 더 비싼 값에 팔렸다면, 여기서는 청어 앞에 ‘200년 묵은’이나 ‘천년 묵은 괴물이 사는 심해에서 잡힌’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곁들인 식사 한 끼 값에 팔려나갔다.
반면 보석상은 지상에서와는 달리 가장 하찮은 대접을 받았다. 아니, 오히려 지상에서보다 이곳이 가격이 더 쌌다.
이곳에서는 대부분의 보석상이 말 그대로 아무 세공도 하지 않은 단순한 광물을 파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지상보다 단가가 더 낮았다. 물론 딱 한 군데, 마법사가 관여해 세공한 장신구를 파는 곳이 있긴 했다. 이곳은 농담이 아니라 수도에 집 몇 채 마련할 가격으로 거래됐다.
다만 대장간이나 대장장이들이 물건을 파는 곳은 없었다.
“이건 의왼데.”
“딱히 의외랄 것도 없어요. 마탑에서 활동할 마법사들이 돈이 부족한 건 연구비가 터무니없이 비싸서지, 정말 재산이 부족해서 그런 건 아니니까요. 다들 적당히 주거래하는 대장간 하나쯤은 있어요. 아예 한 명 물고 후원 계약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막힘 없이 척척 설명하는 마리아의 지식에 감탄하며 곳곳을 돌아다녔다.
“후후, 역시 좋아할 줄 알았어요.”
한참을 호들갑을 떨며 돌아다니고 있으니 마리아가 작게 속삭였다. 자기가 하는 말을 숨기려 하면 사일런스를 알아서 걸던 그녀였기에, 이건 내게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티가 많이 나나?”
“이걸 보고 모르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빌헬름이죠.”
“아니, 내가 왜 나와?”
“그냥요.”
그녀는 손가락으로 내 옆구리를 쿡 찌르고 앞서나갔다.
“슬슬 식사나 할까요? 점심시간도 조금 지난 것 같은데.”
그녀의 말에 그제야 나는 내가 아침만 먹고 이 시간까지 돌아다니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시계를 보니 오후 세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점심을 먹기엔 굉장히 늦고, 저녁을 먹기엔 많이 이른 시간이었다.
“이런, 미안.”
“미안할 게 뭐 있어요. 제가 좋아서 따라다닌 건데.”
그녀의 옆에 따라붙었다.
“그런데, 나는 여기를 잘 모르는데.”
“괜찮아요. 제가 잘 아니까.”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나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워낙 이곳이 큰 공간이라 그런지 움직이는데도 몇 분이 걸렸다.
“안녕하십니까.”
“마리아 호프부르크. 예약이에요.”
“네, 바로 모시겠습니다.”
“…예약?”
의아한 이야기에 그녀에게 물었다. 분명 아침에 갑자기 갈 곳이 있으니 따라오라고 해서 따라 나왔건만, 예약이라고 한 걸 보면 진작부터 준비하던 것 같았다.
“제가 아무 준비도 없이 갑자기 어딜 갈 수는 없잖아요?”
“그건 그렇긴 한데…, 그런데, 네 호위 기사들은 전혀 모르던 것 같은데?”
내 기억에 철십자 기사단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외출 선언에 굉장히 당황해했었다. 미리 계획해둔 외출이라면, 걔들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하지만 마리아는 아주 간단하게 이를 논파했다.
“당신이 같이 있는데, 수도에서 호위가 더 필요할까요?”
“…그건, 그런가?”
하기야, 결국 철십자 기사단은 나를 대신해 그녀에게 소개해준 기사단이었다. 나름 실력이 있긴 했지만, 결국 기사단이 움직여서 ‘나’를 대신해준 거니까, 실력 차이가 큰 건 사실이기도 하고.
…이렇게 말하니 논리적으로 빈틈이 하나도 없었다.
이, 이게 맞나?
“이야기 다 끝났으면, 얌전히 따라오세요.”
“으, 응.”
얼떨결에 마리아와 함께 웨이터가 안내하는 룸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반대편에 앉은 마리아의 눈빛이 시퍼렇게 번뜩였다.
그 순간 깨달았다.
‘어라.’
나, 지금 아무도 없는 방에 단둘이 마리아와 남은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