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요. 그런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죠?”
“흠, 그걸 굳이 말씀드려야 아시는 겁니까.”
마리아의 싸늘한 시선이 그를 향했다. 가끔 저 눈빛을 마주할 때면 나도 종종 소름이 돋는데, 중년의 남성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걸 맞받아쳤다.
아니, 그는 변변한 감정 표출조차 없이 사무적으로 마리아를 쳐다봤다.
상대가 누군질 모르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구야?”
“노만 폰 울름 남작이에요.”
“남작?”
겨우 남작이 저렇게 대담하게 나선다고?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힐긋 살피니 마리아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울름 남작은 제국에서 내려준 작위가 아니에요.”
“그럼?”
“에트루리아 제국 시절부터 이어지는 작위에요. 지금은 차관직을 재수하고 있어요. ”
세상에.
그럼 가문의 역사가 천년을 넘었다는 거잖아. 그럼 납득할 수 있었다. 물론 신분제 사회에서 신분이 절대적이라고 하지만, 원래 전근대사회가 그렇듯 모든 것에는 융통성이 있는 법이었다.
지식인이나 일부 귀족들이 껌뻑 죽는 이상향의 상징, 에트루리아 제국 시절부터 작위가 이어지는 귀족이라면, 작위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었다. 한국으로 치면 삼국시대에 작위를 받은 귀족(군인)이 통일전쟁과 후삼국, 고려를 넘어 조선에 이르러서까지 탁 트인 평지에 놓인 영지와 작위를 지키고 있다면, 그걸 단순한 토호라고 치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공작이나 후작, 백작이라는 작위가 아직 성립하지도 않았던 에트루리아 제국 시절의 작위라면, 남작이라고 마냥 무시할 수 없었다.
거기에 현 조정의 차관이면, 선제후 본인이 오는 게 아닌 이상에야 쉽게 그를 하대할 수 없었다.
“울름 남작을 뵙습니다.”
“혹, 소개를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노만 폰 울름 남작이 내게 물었다.
흠.
평소라면 좋게 받아들였겠지만, 이번만큼은 좀 달랐다. 그야, 에트루리아 제국 시절부터 살아남은 귀족 가문이다. 심지어 그 가주로 수도에서 거주하는 사람이 과연 브란덴 가를 모를까?
물론 우리 가문이 중앙 정계에 연이 아예 없다시피 하긴 하지만, 그건 말단 귀족들에게나 인지도가 적다는 거지 백작급 이상, 혹은 나름 세력 좀 있는 귀족들에게는 이야기가 달랐다.
그야, 선제후 외의 작위로 변경백을 별도로 갖고 있다는 것부터 명확한 이야기였다. 비록 내 가문이긴 했지만, 우리는 유사시 군벌이 되기 제일 좋은 조건을 갖춘 가문이었다.
중앙 정계에 연도 없어서 딱히 미련이 없고, 가문의 기반은 동부에 있다. 우리 가문만의 전투력이 제국과 비교하면 미약하긴 하다지만, 동부의 다른 영주들은 사실상 우리와 친인척으로 연결된 우리의 세력이었다.
제국 동부는, 브란덴 선제후국이라는 그 얇은 실 외엔 사실상 별도의 나라라고 봐도 무방한 곳이었다.
‘물론 진짜 들고 일어났다간 그대로 싹 밀리겠지만.’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렇다고 우리 가문이 정말 제국에 반기를 들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아무렴, 변경백만 군권이 있나. 다른 선제후들은 장식이 아니었다.
브란덴 변경백이 유독 특출난 편이긴 해도, 그래봐야 다른 선제후 겸 공작들 둘을 상대하는 것도 버거울 거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틀림없을 거다.
아무튼, 우리 가문의 입지란 이렇다. 대국적인 시야를 가질 필요 없는 사람들에겐 별 볼 일 없지만, 제국을 경영하는 데 일조하는 사람들에겐 더없이 중요한, 그런 곳.
그런데, 생존력과 적응력에 있어선 정점에 도달했을 사람이, 며칠 전부터 나름 사교계를 뜨겁게 달군 이벤트를 벌인 날 모른다고?
“혹시,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질문은 제가 먼저 한 것 같습니다만.”
“황후 폐하와 관계가 어떻게 되십니까?”
꿈틀.
갑작스러운 질문에, 아주 잠깐이지만 그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그걸 놓칠 내가 아니었다.
“갑자기 황후 폐하에 대한 것은 왜 묻는지 모르겠군.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음, 아닙니다.”
바로 그게 관건이었다. 아무 상관도 없는 상황에 뜬금없이 들이밀어진 질문에 완벽하게 연기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이 반응은, 그게 어떤 방향일진 몰라도 뭔가 있긴 있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그게 어떤 방향일지 판단할 근거는 이미 있었다. 어쩐지 마리아가 영 불편해하는 것, 그리고 나를 상대하는 말투와 마리아를 상대할 때의 차이.
아까는 분명 사람 속을 박박 긁는 데 최적화된 말투를 하던 것과 달리, 지금의 그는 분명 목소리는 거슬리긴 했지만, 어조는 정중했다. 마치 내게는 적의가 없는 것처럼.
그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이었다.
이 사람은, 황후 쪽에 붙은 사람이다.
“그럼 제 소개를 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괜히 이 사람이 날 알면서도 이러는 게 아닐까 기 싸움을 하며 감정을 소모할 필요가 없었다.
“제 이름은 빌헬름 폰 브란덴입니다.”
어차피, 황후의 사람이라는 건 곧 내 적이라는 의미였으니까.
-―
마리아에겐 아쉽게도, 그리고 내겐 다행히도, 울름 남작 앞에서 반지를 나눠 끼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마리아도, 울름 남작도 둘 다 서로를 불편해하는 와중에 나 혼자 희희낙락하는 일은 없었다.
울름 남작이 아니꼬운 건,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몇 번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전하께서는 사인(私人)이 아니십니다. 제국을 위해 마땅히 더 나은 혼처를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그걸 판단할 사람은 울름 남작은 아닌 것 같은데요.”
지극히 무미건조하고 날카로운 태도로 마리아가 울름 남작의 말을 받아쳤다. 하지만 남작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예, 맞습니다. 제가 판단할 문제는 아닙니다.”
그는 마리아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어떤 결정이 제국을 위해 더 유리한 결정일지를 선택할 사람은 많지 않겠습니까.”
마리아는 그의 말에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래요? 누굴 말씀하시는 건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뭐, 여럿 있겠지요. 예를 들면, 황실의 어른이라던가.”
역시, 이놈은 황후의 끄나풀이 맞았다. 제아무리 고대 제국부터 이어지는 남작가라 하더라도 결국 백작가 수준의 대접을 받는 게 한계일 건 자명했다. 물론 백작도 엄청 높은 작위이니만큼 귀족들 사이에서는 고귀한 사람으로 대접받긴 하겠지만, 그거야 귀족들 사이에서의 이야기고.
이 사람이 황제의 측근으로 사사롭게 황제를 알현하기엔 격이 너무 낮았다.
그리고 그 모든 걸 넘어, 이쪽에는 그가 황제의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요? 이걸 어쩌나요.”
마리아 본인이, 황제와 자주 대면하는 사람이었다.
“아버지께서도 저와 빌헬름 경의 결합을 지지해주고 계시는데요.”
“…폐하께서요?”
뭣.
그건 나도 처음 들었는데.
“아니, 당신은 왜 놀라요?”
마리아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아니, 대체 언제 폐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거야? 난 들은 적 없는데?!”
그녀는 내 질문에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한심한 사람을 보는 눈으로 날 잠깐 쳐다봤다.
“황후와 관련된 일을 당신에게 맡겼잖아요.”
“그게 왜…?”
마리아는 잠시 나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호엔베른 가는 가문 내부의 일을 해결하는데 다른 집안의 손을 빌리는 전통이라도 있나요?”
“아.”
생각해보면, 일이 커지긴 했어도 이 일의 근간은 가문 내의 후계 갈등을 처리하는 일이었다. 황제가 황후를 견제하려는 이유 역시 그런 가문 내의 일을 처리하는데 외부 세력의 손을 빌리려는 행동에 대한 징벌의 개념이었고.
신하들을 모아 움직이는 일이 왜 외부의 개입이냐는 말은 무의미했다.
선제후들이 황제를 선출하는 것부터가 아직 이 나라는 호프부르크 가가 온전히 제국을 소유하는 절대왕정국가가 아니라는 의미였으니까.
“…그렇단 말이지.”
약간 코를 꿰인 것 같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웃어넘길 수 있었다. 황제가 손을 거들었다고는 하지만, 아무튼 약혼식을 진행한 것도 아니고, 결국 마리아가 진행하던 계획에 바퀴를 달아준 것 정도였으니까.
황제도 나름 나를 배려해주는 모양이었다. 그쯤 되는 권력자가 내 발을 묶으려 들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러지 않았다는 건, 그 자체로 충분한 배려였다.
이거, 확실하게 일 처리를 해줘야 할 명분이 하나 늘었는데.
“크흠.”
나와 마리아가 귓속말을 나누는 동안, 갑자기 튀어나온 ‘황제’라는 두 글자에 잠시 스턴이 걸렸던 울름 남작이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했다.
“설령 황제 폐하께서 허락했다 하셔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어도 어떤 분과 결혼하시는 것이 더 좋은 일인가 정도는 확인하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지금 뭐라고 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폐하의 입장에서 판단하기에는 두 분의 결합이 좋아 보일 수 있어도, 제국의 입장에서는 더 좋은 경우의 수가 있을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제국 동부의 대귀족인 호엔베른 가와의 혼인은 나라의 안정을 위해서도 좋은 선택이에요!”
“혹은 폐하께서 마리아 전하를 빌미로 브란덴 선제후와 손을 잡는 것일 수도 있지요.”
“…하.”
마리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전하, 주님께 맹세코 정말 사사로운 욕심 하나 없는 결정이었습니까?”
남작은 그걸 마리아가 할 말이 없어 답하지 못한 것이라 여긴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핑계야 이렇게 저렇게 댈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이 일의 근본이 마리아가 나를 붙잡겠다는 일념으로 벌인 일이라는 것도 분명했다.
그게 떠올랐는지, 마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남작은 그 사실에 흥이 올랐는지 내게로 화살을 돌렸다.
“빌헬름 경이라 했습니까? 당신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브란덴 가는 전통적으로 중앙과 거리를 두기로 유명했지요.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이렇게 황실과 혼담을 나누는 걸 보면, 뭔가 필요한 게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흠.”
일부러 변변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계속 말해보라는 태도로 일관하자 남작은 더욱 신나게 떠들었다.
“이제 와서 당신들이 권력이 부족하다거나 한 건 아닐테지요. 선제후는 사실상 왕이나 다름없는 권력을 갖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아마 상대적으로 낙후한 동부에 대한 지원이라든가, 그런 걸 필요로 하는 것 아닙니까?”
“요새 동부에 개발 사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긴 하지요.”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자 그가 쾌재를 불렀다.
“그렇다면, 저희가 마리아 전하보다 그런 방면으로 더욱 유용한 영애를 소개해드릴 수 있습니다. 가문의 부 자체야 황실보다 못하겠지만, 가문의 사적인 재산을 운용하는 것이니 동부에서 끌어다 쓰기에는 훨씬 유용할 테지요.”
그가 신나서 떠드는 꼴을 보고 있자니, 슬슬 짜증이 올라왔다.
뭐, 그래. 자기들끼리 이래저래 권력투쟁을 하느라 선을 넘는 건 그럴 수 있다 치자. 물론 그 탓에 황제의 눈 밖에 나긴 했지만, 그건 자기네 자업자득이지.
그런데, 남의 인생을 마치 자기들 장기말 다루듯 취급하는 저 꼬라지는 굉장히 내 신경에 거슬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보았다.
“일단 묻겠습니다만, 남작께서는, 아니, 남작의 뒤에 계신 분께서는 마리아 전하의 부군으로 누굴 염두에 두고 계십니까?”
“글쎄요. 정해진 건 없습니다만, 궁정백 각하의 아드님이시라거나, 로베르 왕국의 태자라거나, 여러 경우의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 답을 듣고 마리아를 돌아보았다. 마리아는, 내 태도에 굉장히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눈망울로 내 허리춤의 옷자락을 붙잡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마리아, 너는 저 제안을 어떻게 생각해?”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싫어.”
“싫다고 하는군요.”
남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는 가문의 일입니다. 사적인 감정이 어찌 나랏일에 앞설 수 있단 말입니까?”
그의 말은 합리적이었다. 아니, 일견 합리적으로 보였다. 그래, 나라를 이끄는 사람의 입장에서 정략적 결혼은 국가라는 거대한 기계장치를 돌리는 톱니바퀴에 기름칠을 해주는 중요한 요소일 수 있었다.
“글쎄요.”
하지만, 원래 합리라는 건 대부분 자기가 생각했을 때나 통하는 이야기였다.
“애초에 남작께서 말씀하신 것들이 브란덴 선제후령의 입장에서 딱히 매력적이지 않은데,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세상에 모두가 이익을 보는 일은 없었다. 누군가가 이익을 보면, 누군가는 반드시 손해를 보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합리성을 논하면서 내가 손해를 보는 경우는 절대 상정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고루 이익을 본다면, 더 적은 수의 누군가가 그만큼의 손해를 떠안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정말 합리를 논하려면, 우선 내가 생각하고 있는 전제가 맞는지에 대한 탐구부터 시작해야만 했다.
가령, 상대의 재산이 얼마나 되는가라던가.
“동부는, 누군가에게 손을 벌리지 않아도 돈이 썩어 넘쳐서요.”
동부는 낙후됐다.
그래, 이건 나도 부정 못할 사실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건, 동부는 돈이 없어 낙후된 게 아니었다.
애초에 유목민들이 살던 땅을 개간하며 확장한 탓에, 사람이 부족해 인프라를 깔 이유가 없던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제서야 동부에서 개발 사업이 진척되기 시작한 건 그 기반을 깔만한 인구가 모였다는 판단이 내려졌기 때문이었지, 돈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마음껏 돈을 빌리고 죄책감 없이 배를 가를 유대인은 없다지만, 대신 돈이 썩어 넘치는 상인 길드가 존재했다. 그리고, 그 상인 길드가 자신들의 호위를 위해 고용하는 전투원들이 대부분 이 동부 출신 유목민들이었다.
마리아를 비롯해 여러 귀족에게 기사단을 소개해주는 그 인맥이 바로 이 과정을 보고 들으며 튀어나온 부산물이었다.
“그깟 돈 몇 푼 때문에 알지도 못하는 생면부지의 영애랑 결혼하는 것보다, 이미 서로 잘 알고 나름 황실과도 연을 맺을 수 있는 마리아 전하와 결혼하는 게 훨씬 이익인 것 같은데요.”
그는 내 지적에 표정을 잔뜩 구겼다.
“지금 겨우 한 가문의 이익을 위해 제국 전체의 이익을-”
“아까부터 계속 제국의 이익이 어쩌고 하면서 떠드는데.”
그의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이야기를 하며 깨달았다. 그는 황후의 사람인 건 맞지만, 황후의 측근이라 할 사람은 아니었다. 만약 정말 황후의 측근이라면, 내가 얼마 전 그녀와 나눴던 이야기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걸 알고 있다면, 내게 다른 영애를 소개시켜준다는 것과 같은 소리를 할 리가 없었다.
대충 정리해보면, 울름 남작은 적당히 가문의 격도 높고, 인지도도 높고, 명망도 있고, 여러 고관대작과 알고 지내는 사람이며, 황후의 파벌에 소속된 사람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황후의 측근도 아니고, 황제와 독대할 만큼의 지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요는 그거다.
“그 제국의 이익이란 놈이 동부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니까요? 언제부터 제국의 이익을 논할 때, 선제후를 빼고 다른 귀족들부터 논하게 됐습니까?”
이 사람이야말로, 직접 황후를 노리지 않고 그녀의 손발을 쳐낼 아주 좋은 건수가 될 법한 사람이라는 말이었다.
-―
“하! 선제후의 아들이라기에 품위를 기대했건만, 아주 이기적이기 짝이 없소이다! 나중에 후회하지 마시오. 나는 이 일을 끝까지 기억하고 있을 테니!”
남작은 씩씩거리며 돌아갔다.
두고 보자는 놈치고 진짜 무서운 놈 없었기에 나는 적당히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화답해주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천박하게 발을 굴러가며 사라졌다.
“…저기.”
마리아가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아까까지와는 다르게 매우 작고 소심한, 옛날의 그녀를 보는 것 같은 태도였다.
“이렇게 되면, 당신은 정말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할 텐데 괜찮겠어요?”
“응?”
“그러니까, 저 사람이 아예 정말로 당신과 제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소문을 낼 테고, 당신이 머무는 곳과 합해지면 정말 말도 안 되는 모함이 밀어닥칠 텐데.”
아, 그런 의미였나.
계속 나를 붙들어두려고 하던 그녀가 오히려 내가 여기에 아예 발목이 잡힐 걸 걱정하고 있으니 살짝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고 갈 필요가 있었다.
“딱히, 상관없어.”
“…네?”
“상관없다고. 그런 거.”
그래, 내가 지금껏 수도에서 벗어나려 용을 쓴 건 분명했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나에 대한 유언비어만을 걱정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런 것 따위에 발목이 잡힐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수도에서 질질 시간을 끌게 된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너라서 이렇게 고민을 하는 것뿐이었으니까.”
상대가 마리아였기에, 그녀의 이미지를 손상시킬 수 없기에 조심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건 그녀가 황녀라서도 아니고, 고귀한 피라서, 귀족이라서 그런 것도 아니다.
그냥, 처음 봤을 때는 언제나 울상이던 사람이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그랬을 뿐이었다.
거기에 자꾸 이상한 놈들이 끼어들어서 마리아의 얼굴을 다시 울상으로 만들려고 난리를 치고 있는 걸 보자니 좀 꼴받았다.
그리고 그놈들이, 내가 마리아에게 휘둘리고 있으니 나를 얕잡아보고 휘두르려 드는 것도 꼴받았다.
“너니까 받아주는 건데, 이 새끼들이 진짜 내가 피라미인 줄 알고 덤벼들잖아.”
마리아니까, 내가 얌전히 휘둘려 주는 것이지, 결코 그 반대가 아니었다. 마리아가 내 목줄을 쥔 게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내가 마리아를 얌전히 따라가고 있으니, 마치 내게 목줄이 채워진 거라고 착각하고 마리아에게서 내 목줄을 뺏으려 달려들고 있었다.
“모르는 건 죄가 아니니까, 앞으로 실례를 저지르지 않으려면 알려줘야지 않겠어?”
교육과정이 좀 아프겠지만, 그거야 내 알 바는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며 마리아를 내려다봤다. 아까 전 나와 울름 남작이 나눴던 대화 탓인지, 그녀는 여전히 불안해하며 내게 바짝 달라붙어 있었다.
이렇게 있으니, 2년 전에 비해 몸은 컸어도 마리아는 여전히 마리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때처럼 그녀의 머리칼을 손으로 슥 빗어 내려주었다.
“그렇지?”
“응….”
마리아는 여전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작게 답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더는 떨림이 들어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