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과 만나고, 요 며칠간 마리아는 은근 내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같이 밥도 먹고, 종종 티타임을 같이 가지긴 했지만, 전처럼 은근히 날 압박하며 스믈스믈 날 휘감는 듯한 그런 분위기는 잘 내지 못했다. 오히려 눈이 마주치면 휙 고개를 돌리기 일쑤였지.
하지만, 덕분에 한 가지 얻은 건은 있었다.
“마리아, 잠깐 나갔다 올게!”
“네, 다녀오세요.”
전에는 내가 뭐만 하려 하면 꼬치꼬치 캐물었지만, 요즘은 어지간하면 그냥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내가 꼭 마리아의 허락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황궁이고, 내가 집주인 집에 얹혀사는데 나가서 언제 올지 정도는 말해줘야지 싶어 그냥 답해줬었다.
이제는 그런 것도 다 사라진 거고.
“대주교님 계십니까?”
“아, 안에 계십니다.”
몇 번 얼굴 봤다고 낯이 익었는지, 사제분께서 반갑게 나를 맞이해주셨다. 예배실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으니 오래지 않아 바오로 대주교가 찾아왔다.
“시작부터 거하게 계획을 말아먹으신 분 아닙니까. 이리 보니 반갑군요.”
“첫 만남부터 친구들 불러 떳떳하지 못하게 받은 술에 꼴아계시던 대주교님도 며칠 만에 다시 보니 안색이 좋아지셨네.”
하하하.
허허허.
정겹게 인사를 주고받고, 우리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성인식 때는 어디로 가신 겁니까? 그때 저를 만나서 친분을 과시하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황후 폐하께서 부르셔서 자리를 비웠었지.”
“황후께서요.”
대주교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그것참, 귀찮은 일에 엮이게 되시겠군요.”
뭔가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혹시 황후에 대해 아는 거 있어?”
그는 이걸 말해도 될까 고민하는지 잠시 침음을 흘렸다. 하지만 내가 아직 그때의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는 걸 상기시키며 내 머리를 툭툭 두드리자 그는 한숨을 뱉으며 말했다.
“아마 짐작하시겠지만, 제가 약간의, 음, 편의를 제공해드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편의?”
“이 자리까지 올라왔는데, 제가 설마 인맥 하나 없겠습니까.”
“아.”
하긴, 권력에 가까운 사람들을 안다는 건 그 자체로 하나의 재산이지. 일이 잘 안 풀릴 때 슬쩍 우회해서 찔러주면 그것만으로도 갑자기 만사가 형통하는 일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언제나 존재했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었으니 뭐 특별히 다를 게 없었다.
“그리고 일단 한 번 그렇게 도움을 드리고 나면, 그것 자체가 요인이 되어 종종 그분들께 교구 운영에 도움을 받곤 하지요.”
“미사용 술이 그렇게 들어왔었나 보네.”
“…….”
그는 잠시 딴청을 피웠다.
거참, 투명한 사람이다. 그간 해온 일들을 어떻게 숨긴 건지 모르겠네.
“아무튼, 원래는 이걸로 고아원이나 급식소를 운영하는데 들어가는 돈을 다 채우고, 부식과 선물도 꽉꽉 눌러 담고도 남음이 있었단 말입니다.”
“…잠깐, 그럼 성당이 이렇게 화려한 건 원래 그런 거라고?”
대주교는 오히려 나를 이상한 사람 바라보듯 쳐다봤다.
“황급십자교단은 그런 거 안 받아도 돈 많습니다. 애초에 이 성당을 짓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얼만데, 겨우 저 한 사람이 돈 좀 받는다고 이 건물의 화려함이 더해지겠습니까?”
“어, 그런가?”
아니, 그보다 이 말에 더 궁금해졌다.
“성당 짓는 데 얼마가 들었는데?”
그는 내 귓가에 작게 귓속말했다.
“—-―.”
“이런 미친.”
이 돈이면, 제국 동쪽의 왕국들은 그냥 돈으로 후려쳐서 경제식민지로 만들 수도 있을 정도잖아.
어지간한 국가의 연 단위 예산과 맞먹는 수준의 금액에 쇼크를 먹고 눈만 껌뻑거리고 있으니 대주교가 정신 차리라며 눈앞에 손을 흔들었다.
“아무튼, 중요한 건 고아원과 급식소를 운영하는 것과 관련된 이야기지요.”
“아, 그랬지.”
그는 고아원과 급식소를 논하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원래 이곳 팔츠성 안에서 이런저런 일 처리를 중개해주며 보답으로 받던 헌금이 요 몇 년간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황후와 관련이 있다는 거야?”
“정확히는 황후의 파벌이죠.”
그는 종이 한 장을 가져와 만년필을 꺼내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했다.
“이 원은 팔츠성을, 곳곳에 찍힌 점은 관료 조직을 의미합니다. 실제로는 전부 황궁 근처에 모여있다지만, 대충 알아들으시겠지요?”
“내가 쌈박질로 유명하다고 머리가 나쁜 건 아니거든?”
“크흠.”
그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원 안에 사각형을 하나 그렸다. 그리고 대성당이라는 글자를 써넣고, 몇몇 점에 선을 그어 이었다.
“아무튼, 저는 각 부처의 장차관, 혹은 그 아랫급이어도 하여튼 실권이 있는 사람들과 대부분 안면을 트고 있습니다.”
“원래 종교인들이 친화력 없으면 못 살아남긴 하지.”
“그렇게 쌓은 인맥으로 이런저런 일 처리를 도우며 근근이 헌금을 받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는 대성당 위에 작은 원을 또 하나 그렸다. 그게 뭘 말하는지는 나도 이해할 수 있었다.
“황후가 관료와 중앙귀족들로 이뤄진 파벌을 데리고 전면에 나서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모든 점을 황궁을 향해 이으며 비난조로 불만을 토로했다.
“원래 팔츠에서는 여러 사람이 알음알음 저마다의 방식으로 서로 돕고 있었습니다. 나라의 공무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요.”
“흠.”
“…아무튼, 그렇습니다.”
내가 말없이 빤히 그를 바라보자 그는 괜히 헛기침하며 급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황후 파벌이 그 모든 관계를 파괴하고 자신들에게 줄을 서는 이들의 용무만을 통과시켜주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황제 폐하께서 친람하시는 일에는 감히 그런 짓을 벌이지 못하지만, 이 나라가 폐하의 명령만으로 돌아가는 나라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황제가 손대지 못하는 영역을 자신들이 틀어쥐고 멋대로 국정을 주무르고 있다는 건가. 과연, 황제가 자신의 정부 출신임에도 숙청을 입에 담는 이유가 여기 있었군.
“이제는 정말 하찮은 일들이 아닌 이상에야 저를 통한다 하더라도 일을 진행시킬 수가 없으니, 자연스레 헌금과 기부금이 확 줄어들더군요. 덕분에 고아원 아이들에게 주는 선물과 특식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마지막에 아름답게 포장했지만, 결국 청탁을 받을 수 없게 되자 뇌물이 줄었다는 뜻이었다.
“하, 이거 참.”
선제후를 회유하는 데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 지금 당장 황제가 쓰러진다 하면 황후 태생의 황자가 황제가 될 가능성이 전무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러면 이야기가 또 달랐다.
비록 어머니의 휘광을 빌리긴 했더라도, 아무튼 수도를 완전히 틀어쥐고 있는 것도 능력의 일종이라고 볼 필요가 있었다.
유일한 변수는 아직 어려 전면에 나서지 못하는 황자 본인이 터무니없이 무능한 것 정도지만, 그것도 다른 후보가 없다면 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러니 암살 시도가 끊이질 않던 건가.
“다만, 겨우 이 정도였다면 제가 굳이 황후를 귀찮은 사람이라고 묘사하지 않았겠지요.”
“응?”
바오로 대주교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었다.
“황후는 저조차 자신의 파벌에 끌어들이려고 하더군요. 자신을 지지하면 자신도 황금십자교의 편의를 봐주겠다면서요.”
“…뭐라고 답했지?”
바오로 대주교는, 황궁을 상징하는 원에 X자를 그렸다.
“당연히, 거절했지요.”
그는 고개를 저으며 진절머리냈다.
“왜? 그렇게 하면 적어도 헌금은 넉넉하게 받을 텐데.”
“세상에, 빌헬름 경,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지요.”
그는 제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추기경에 서임 받지는 못했지만, 저도 나름 교세로는 어디 가서 밀리지 않는 팔츠 교구의 대주교입니다. 제 위에는 오직 교황 성하와 주님 외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돈 받고 청탁은 잘만 하던 양반이 이런 말을 하는 게 아이러니지만, 아무튼 말이야 옳은 말이었다.
아니,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은근히 뒤가 구린 면이 있다고는 하지만(그리고 그게 교리상으로 좀 큰 문제긴 했지만), 적어도 그가 인간적으로 엄청나게 타락한 사람이냐고 하면 또 그건 아니었다.
술을 좀 많이 좋아하고 그걸 위해 뇌물을 받긴 하지만, 적어도 신앙인으로서의 일 또한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는 것 또한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종교인이 엘리트 중 엘리트로 손꼽히는 시대에 대주교가 될 정도면 이 정도 신념은 있어야 할 거다.
그리고, 그의 말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 있었다.
“좋아, 안 그래도 도움을 청하러 왔는데, 마침 딱 사람을 잘 찾아온 것 같네.”
“…도움이요?”
갑자기 대주교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조금 전 황후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보다 더.
“아무래도 수도에서 떠나는 계획은 좀 미뤄두고, 다른 일을 먼저 처리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지.”
“우선 말씀은 들어보고 결정해도 되겠습니까?”
그 말에 피식 웃었다. 장담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은 반드시 내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황후 파벌을 쳐내고 싶지 않아?”
“그, 그건 황실과 척지겠다는-!”
“폐하께서 내게 제안하신 일이야.”
“전 옛날부터 세속의 탐관오리들이 날뛰는 꼴이 보기 싫었습니다.”
그는 아주 빠르게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
다음날, 나는 뷔르템부르크 후작저로 향했다.
전날 미리 연락을 보내두었기에 곧장 욤과 만날 수 있었다.
“후작께서는 아직도 안 돌아오셨나 보네?”
“음, 아무래도 이번에 확실해 해결해두고 오실 일이 있다고 하신 지라, 좀 걸릴 것 같습니다.”
“흠, 그래?”
그럼 곤란한데.
내가 이렇게 찾아와서 이야기할 수 있을 만한 곳이 이곳뿐이란 말이지.
“혹시, 뭔가 필요한 거라도 있는 겁니까? 돈이라면 곧 상인 길드를 통해 입금될 예정입니다만.”
“아니, 그거랑은 관련 없는 이야기긴 한데.”
욤에게 이걸 말해도 될까 고민했다.
타고타고 올라가다 보면 황후에게 연결될 만큼 큰일이었다. 그만큼 상대의 조직이 크기도 했고. 그런데 괜히 아무에게나 말을 꺼냈다가 이야기가 새어나가면 이만저만 곤란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시간을 끌어도 좋을 게 없다는 것 역시 분명했다.
신중한 것도 좋지만, 반대로 보안에 너무 치중해 시간을 끌어도 꼬리가 밟힐 확률이 늘어났다. 적당히 치고 나가야 할 때는 치고 나가 줄 필요가 있었다.
일단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가 이 일과 관련이 있는지부터 확인해보기로 했다.
“욤.”
“네.”
“혹시 후작 각하의 지시에 따라 다른 가문이나 관료들과 협상을 진행해본 적 있어?”
“예? 예. 한 3년 전부터 실무를 경험해보라며 이런저런 협상이나 거래를 직접 주도한 적이 있긴 합니다.”
이러면, 확실했다.
욤 본인은 모를지 몰라도, 그는 어떤 식으로든 이 일에 관련되어 있었다. 나는 질문에 앞서 자세를 바로했다.
“그럼, 혹시 이 사람들을 만나본 적 있어?”
앉은 자리에서 냅킨 위에 이름 몇 개를 적어 건넸다. 그는 냅킨을 받아들고 이름을 살폈다.
“전부 일을 하면서 한 번씩 만나본 적 있는 사람들이군요. 다만, 이 이상은 가문의 일이라 말씀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가장 바라던 대답이었다.
“아니, 그 정도면 충분해.”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정말로, 이거면 충분했다.
애초에 내가 뷔르템부르크 후작가를 찾아온 이유는 하나였다.
‘뷔르템부르크 후작가라. 제게 가장 많이 기부금을 내신 분들이지요. 특히 요 몇 년 사이에 기부금이 엄청 늘어나고 있었는데,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후작가는, 바오로 대주교 청탁 서비스를 가장 많이 이용하던 가문이었다. 특히 점점 그 횟수가 증가하던 추세였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아예 관계가 끊어졌다고 대주교가 직접 증언했다.
하지만, 그 수요가 어디 가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수요는 분명 황후 파벌에게로 향했을 터.
막연히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알고만 있는 것과 명확하게 조사를 시작할 기준점이 있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제가 듣기로, 후작께서 종종 울름 남작과 어울리신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마침 그와 엮인 이들로 울름 남작이 껴있기까지 하다면 더더욱.
“좋은 참고가 됐어.”
“…벌써 일어나십니까?”
“아쉽게도 요즘 좀 바빠서.”
떨떠름해 하는 욤과 악수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뷔르템부르크 후작가가 적이라는 건 아니었다. 바오로 대주교는 물론이고, 마리아도 이곳이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강한 곳이라고 할 뿐 황후 파벌이라고는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뷔르템부르크 후작가는 백도어였다. 엄청나게 크고 복잡하게 얽힌 개미굴의 중심으로 바로 파고들 수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