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으로 돌아와 마리아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니까, 뷔르템부르크 후작가를 중심으로 일련의 자금 흐름을 추적해보자는 건가요?”
“그렇지.”
마리아는 탁자 위에 펼쳐둔 관계도를 보며 고민했다.
그래, 분명 뷔르템부르크 후작가의 일을 욤을 통해 더 캐묻는 건 어려웠다. 어쨌거나 갈등도 결투로 해결했고, 그걸 제외하면 두 가문 사이에 뭔가 척진 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마리아에 대해 신경 쓰는 것 같긴 했지만, 마리아가 스스로 날 선택했다는 걸 확인했으니 적어도 내게 시비를 걸진 않을 테고, 그럼 굳이 욤과 척을 지면서까지 무리하게 답을 얻어낼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청탁은 원래 일방적으로 이뤄지는 일이 아니었다. 주는 쪽이 있다면 받는 쪽도 응당 존재하기 마련, 상대가 누구인지도 확인했으니, 반대쪽의 뒤를 캐서 답을 구할 수도 있었다.
“욤이 인정한 후작가와 관련된 이들의 목록이야.”
“…욤 공자에게 직접 물었다고요?”
“응.”
“…저 때문에 싸운 사람이랑?”
“결투에서 졌으면 어련히 수긍하겠지.”
“세상에.”
살짝 질린 표정으로 마리아가 날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금방 고개를 돌렸지만.
뭐, 나도 인지하고 있긴 했다. 하지만 수도에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는 걸 어떡해. 내 지인은 전부 변경이나 지방에 있다고.
“아무튼.”
어쩐지 사람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주변에 둘러선 시종과 기사들의 시선이 날 책망하는 것 같아 화제를 전환했다.
“그런데, 막무가내로 파내봤자 조사 범위만 너무 늘어난단 말이지. 의심가는 것 몇 가지를 추릴 필요가 있어 보여.”
“조사의 기본이죠.”
“그런데, 내가 이쪽으로는 아는 게 잘 없단 말이지.”
지구인으로 산 시간도 적지 않고, 이 세계에서도 20년 넘게 살아왔으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사람 사는 생리가 어떤지 정도는 대강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게 절대적으로 부족한 게 있었으니, 귀족들의 생리에 대한 이해였다.
물론 나도 귀족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태생이 귀족일 뿐 생활 환경은 귀족보다는 무인이나 낭인에 가까웠다. 애초에 삼남이라 귀족 가문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혹시 짐작 가는 게 있어?”
그래서 마리아의 도움이 필요했다. 내 주변에서 이쪽으로 해박하고 스스럼없이 상담할 만한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잠시 기다려 주시겠어요?”
마리아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관계도를 노려봤다. 한참 동안 눈도 깜빡이지 않던 그녀가 돌연 손가락을 휘저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짓을 따라 마력이 움직였다.
종이 위에 새겨진 글자가 빛이 나더니, 공중에 글자가 떠올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각 글자는 마리아의 지휘에 따라 움직여 하나의 표를 이뤘다.
“당신이 가져온 관계도를 조금 더 깔끔하게 정리해 봤어요.”
“이것도 마법이야?”
“마방진을 그리는 기술의 응용에 불과해요.”
“내가 마법사를 종종 만나긴 했어도 이런 게 가능한 사람은 본 적이 없는데?”
“…6위계에 도달한 사람이 얼마 없으니까요.”
그녀는 내 칭찬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는 헛기침을 하며 다시 본론을 이어 나갔다.
“으흠, 하여튼, 이건 제가 나름대로 정리해본 거예요.”
그녀는 손가락으로 뷔르템부르크 후작가와 그들과 거래하는 가문들을 가리켰다. 그런데, 그녀가 정리해둔 표에서 가문의 이름은 세 종류로 나뉘어 있었다.
“뭘 기준으로 나눠둔 거야?”
“각 가문의 기반이 어디냐를 기준으로 나눠둔 거예요.”
그녀는 차례대로 왼쪽부터 글자를 반짝이게 했다.
“가장 왼쪽은 지방, 가운데는 수도, 그리고 오른쪽은 양쪽 모두를 신경 쓰는 이들이죠.”
“아하.”
그녀의 말에 다시 한번 리스트를 살펴봤다. 확실히, 왼쪽과 오른쪽에는 내가 아는 가문들도 꽤 보였다. 초대받거나 의뢰를 받은 곳은 별로 없지만, 적어도 지나가며 들려본 곳들은 적잖이 있었다.
“그런데, 중앙은 별로 없고 지방에 기반을 둔 이들이나 절충하는 가문이 많은 것 같은데?”
“그게 핵심이죠.”
마리아는 몇 안 되는 수도 귀족의 목록을 지우고 양 사이드의 글자를 키웠다.
“보통 이런 식으로 청탁을 하는 경우는, 문제가 생겼거나 빠른 일 처리가 필요한 경우가 대부분이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중앙에 와서 청탁을 벌이는 사람이, 수도의 주요 인사들이 아니라 지방 인사들을 위주로 청탁을 벌이고 있다니, 뭔가 좀 이상하지 않나요?”
“…그렇네?”
나야 선제후나 나와 친한 가문들, 한번 만난 이들 정도를 제외하면 다른 귀족들의 가문명을 잘 모르니 그러려니 했지만, 확실히 설명을 들으니 그럴듯했다.
중앙에 로비하는데 막상 그 대상이 지방의 유력가들 위주라면, 그건 분명 이상하다고 의심해볼 만했다.
“만약 이게 진실이라면, 의심해볼 건 둘 중 하나예요.”
그녀는 각 가문의 이름을 뭉쳐 두 개의 키워드를 만들어냈다.
“작위를 승계하려 하거나, 혹은 영지에 문제가 발생했거나.”
과연 무엇이 답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상관은 없었다.
이제부터 우리가 그걸 알아보기 위해 움직일 거니까.
-―
덜컹, 덜컹.
마리아가 탄 마차가 귀족가의 저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작전은 숙지하고 있죠?”
마차 안에서 마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론이야.”
이번에는, 나는 마리아의 마차에 타지 않고 움직였다. 오랜만에 그녀를 처음 호위할 때처럼 무장을 갖춘 채 이동했다. 신분은 철저하게 감추기 위해 철십자 기사단의 복장을 입었다.
“네가 제국백을 붙들고 시간을 끄는 동안 내가 물증을 확보한다. 맞지?”
“잘 이해하고 있네요.”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지를 추리고 우리는 곧장 작전을 수립했다.
요는 간단했다. 황후 파벌에 속해 있지만, 그렇다고 마리아를 일방적으로 거절하지 못하는 가문을 하나 골라 방문한다.
제국백이 선택된 이유는, 제국백은 오로지 황제의 선택을 받아 임명되는 작위였기에 황후에게 줄은 댄다 하더라도 황실 사람들에게 밉보이기 어려운 탓이었다.
그렇게 찾아간 제국백의 저택에서 마리아가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간을 끄는 동안, 수행원으로 위장한 내가 잠입해 증거를 확보한다.
말로 하면 쉽지만, 막상 실행하자면 또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중요한 건 내가 어떻게 저택의 보안을 뚫고 잠입하는가였다.
하지만 또, 내가 이런 건 자신이 있지.
인간보다 기척에 수십, 수백 배는 더 민감한 몬스터들을 사냥하다 보면 이런 데는 도가 트기 마련이다.
“슈페 제국백저의 설계도는 외워뒀죠?”
“생각보다 간단하던데. 이런 저택은 구조보다는 보안이 더 문제인데 말이지.”
“보안에 마법을 쓰는 건 적어도 성안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니 걱정 마세요. 수도 방위를 위해 팔츠성 안에서 건물에 마법을 거는 건 황궁 외엔 금지된 행위니까. 마법을 쓴다 해도 자물쇠에 마법을 거는 정도일 거예요.”
그럼 문제는 없었다. 만약 마법을 동원했다 하면, 알림 마법의 위험성 때문에 손도 대기 어려웠겠지만, 겨우 자물쇠에 마법을 거는 정도라면 이야기는 달랐다.
결국 마법은 마력으로 작동되는지라, 마력 소모와 지속을 고려해 작은 물체에 거는 마법은 그 출력도 작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경우는 겨우 저택 짓는 데 쓰기에는 너무 비싼 돈이 들었기에 배제해도 괜찮았다.
“이제 곧 도착하네요. 준비해주세요.”
“알았어.”
헬멧을 푹 눌러써 얼굴을 가리고 기사단 사이에 끼어들었다.
저택에 도착하자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나와 우리를 맞이했다. 먼저 마리아가 탄 마차가 안으로 들어가고, 우리는 별도의 공간으로 안내받았다. 그 행렬의 중간에서 기다리다가, 수풀이 가득한 정원을 지나는 동안 기사단 사람들을 움직여 사람의 벽을 세우고 몰래 대열에서 빠져나왔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자고.’
은밀한 이동을 위해 투구와 갑옷을 벗어 땅에 묻었다. 2위계의 마법을 사용해 소량의 흙을 움직일 수 있었기에 작업은 순식간에 끝냈다.
곧장 허리춤 위로 솟은 수풀 사이를 움직이며 저택으로 향했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사용인들의 숙소였다.
결국 저택을 돌아다니다 보면 언젠가는 사람이 돌아다니는 복도를 움직여야 했다. 그때는 차라리 당당하게 움직여야 했기에 복장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남자 사용인들이 이용하는 숙소에서 내 사이즈에 맞는 옷을 꺼내 갈아입었다.
“씁, 좀 끼는데.”
다만, 아쉽게도 내 체격이 이 시대 평균에 비해 좀 큰 탓에 완전 딱 맞는 옷은 없었다. 이래서야 이거 한 번 격하게 움직이면 망가질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작전을 위해서는 감수할 수밖에.
아무튼, 집사복을 걸쳐 입고 저택 내부를 돌아다녔다.
내가 노려야 할 곳은 크게 두 곳이었다.
하나는 슈페 제국백의 집무실이고, 하나는 침실이었다. 청탁에 관한 물증이 보관될 만한 곳은 그 둘 중 하나였으니까.
어딜 먼저 갈까에 대한 고민은 길지 않았다.
“우선은, 집무실부터 가보자고.”
어떻게 생각해도 보안은 침실보다는 집무실이 조금 덜할 것이 분명했다.
소드 익스퍼트의 기감을 살려 모서리와 기둥, 장식 등을 활용해 사람의 기척을 피해 가며 집무실로 향했다.
다행히 집무실 근처에는 사람이 없었다. 여긴 제국백 본인이 없을 때는 사용하지 않는 곳이니만큼 텅 비어있는 모양이었다.
이 근처 꽤 넓은 범위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문고리 앞으로 다가갔다.
당연하지만, 문은 단단하게 잠겨있었다. 자물쇠는 딱히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철사를 활용해 금방 문을 열 수 있었다.
“서류를 어디에 숨겨놨으려나.”
책상 위부터 서랍장까지 전부 열어가며 모든 서류를 일일이 확인했다. 서류는 물론이고 책장에 꽂힌 책들까지 낱낱이 살폈다. 혹시나 비밀공간이 있지 않을까 싶어 뒤졌지만, 아쉽게도 그런 건 보이지 않았다.
“이러면, 침실을 확인해봐야겠네.”
씁, 이럴 줄 알았으면 침실부터 갈 걸 그랬나.
입맛을 다시며 문으로 다가가던 찰나였다.
또각, 또각.
누군가 걷는 소리가 들려왔다.
온몸에 소름이 끼치며 털이 곤두섰다. 정리는 미리 해두고 있었기에 위험한 건 없었지만, 이래서야 들킬 수 있었다.
숨을 곳을 살폈다. 그런데, 하필 집무실에는 마땅히 숨을 곳이 없었다. 제국백의 취향이 미니멀리즘인지, 가구들이 딱 제 기능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외형만을 유지한 탓에 어디에 숨어도 신체의 일부가 겉으로 드러났다.
“흐흥~ 이제 집무실만 청소하면 업무도 끝이네~”
아무래도 메이드가 청소를 위해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았다. 이래서야 제발 집무실에 들리지 않고 지나가길 기대하는 것도 어려웠다.
시간이 없었다. 빠르게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최대한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중, 내 머릿속에 방법이 하나 떠올랐다.
-―
딸칵.
잠긴 문을 열고, 저택의 중견 메이드 안나는 제국백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아직 완전히 신뢰를 얻지 못한 신입 메이드들은 하지 못하는 나름 중요한 업무였다.
“흐흥~”
오늘의 마지막 업무라는 사실에 안나는 콧노래를 흘리며 방에 들어왔다.
“응?”
그런데, 뭔가 위화감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분명 모든 것이 평소와 마찬가지지만, 뭔가, 뭔가가 달랐다.
방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조금 다른 것만 같았다.
“…뭐, 기분 탓이겠지.”
결국 끝내 그 뭔가가 뭔지를 알 수 없었기에 안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이고 청소를 시작했다.
콧노래를 흘리며 정리를 시작한 안나의 뒤로, 살짝 열린 커튼이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