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전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에 보는군요. 막시밀리안 백작.”
마리아는 단단히 각오를 다지고 응접실로 향했다. 빌헬름이 수색할 시간을 벌어줘야 하는 만큼, 이번 작전에서 그녀의 책무 또한 막중했다.
평소라면 이런 일로 긴장할 그녀가 아니었지만, 함께 움직이는 파트너가 파트너인 만큼 그녀도 심장이 쿵쿵 뛰었다.
하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그, 어쩐 일로 찾아오신 건지 알 수 있겠습니까?”
반면 제국백은 불안함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황실에서 진행하는 자선사업에 대해 제안할 것이 있어서요.”
“그렇습니까…?”
제국백에게 황실은, 특히 황제의 직계혈통은 언제나 대하기 어려운 상사였다. 물론 어느 작위라고 황제가 편하겠냐마는, 제국백은 특히 그랬다. 본래 다른 작위를 갖고 있는 이들이 아닌 이상 제국백이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들이 황제의 총애를 얻었기 때문이다.
슈페 제국백이 황후에게 붙었다고 하더라도 마리아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었다. 황후가 아무리 수도의 귀족들을 많이 회유했다 하더라도, 현 황후의 아들이 확실히 황제가 된 게 아니라면 제국백들은 무작정 그들을 위할 수 없었다.
결국 제국백의 작위를 쥐고 흔들 권리는 황제에게만 있었으니까.
“크흠, 호, 혹시 황제 폐하께서 진행하시는 일입니까?”
“아뇨, 말 그대로 황실의 이름으로 진행하는 일입니다.”
마리아의 말은 백작에겐 의문으로 다가왔다.
‘겨우 이런 일에 왜 황녀가 직접 온 거지?’
조금 의아한 상황에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에 들어갔다.
“이 일에 황실 외에 누가 참여하는지 알 수 있습니까?”
“바오로 대주교께서 참가 의사를 밝혔습니다.”
“헉.”
그러자 백작은 바로 태도를 바꿨다.
“그럼 참가해야지요. 대주교께서 함께하시는 자선사업이라니, 분명 명예로운 일 아니겠습니까?”
세간에는 대주교가 돈에 환장해 뇌물을 받고 술에 절어 산다는 소문도 있지만, 그걸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실제로 대주교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이 많았기에 그런 음해는 잘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리아는 그런 백작의 모습에 한 줄기 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그야 이건 거짓말이었으니까.
‘이거, 돌아가면 정말 대주교를 끌어들여야겠네요.’
자선사업 자체는 거짓이 아니었다. 원래 황실은 자선사업 서너 개는 기본으로 굴리고, 많을 때는 두 자릿수 단위의 사업에 돈을 댔었다. 지금도 여러 사업이 준비되고 있을 테니, 마리아가 하나를 골라 챙겨오면 되는 일이었다.
그걸 다른 이들도 다 알고 있을 테니 그걸 이용하려 했건만, 제국백이 생각보다 의심이 많았다.
“그럼 저 말고 또 누가 참가 의사를 밝혔습니까?”
제국백은 대주교가 참가한다는 말에 군침이 싹 도는지 손을 비볐다.
마리아는 잠시 고민했다. 뭐라고 말해야 백작의 의심을 피할 수 있을까.
‘…그런데, 어차피 앞으로 다른 사람들도 확인해야 하지 않나요?’
그녀의 생각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생각해보니, 어차피 황후 파벌이 뇌물을 받고 있다는 증거를 확보하고 덜미를 제대로 붙들기 위해서는 몇 개의 가문을 더 확인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러면 이것과 똑같은 명분을 대고 그들을 전부 자선사업을 핑계로 끌어들여도 되는 거 아닐까.
결론을 내리기 무섭게 마리아는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슈페 백작에게 처음으로 찾아온 거예요. 제가 주도하고, 대주교께서 함께하시는 자선 사업에 처음 초대하는 회원이 백작이라는 말이죠.”
“제가 처음이라는 건, 아직 저 말고는 합류한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까?”
“앞으로 어떤 사람을 초대할지에 대해 백작이 어느 정도 지분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죠.”
그 말에 제국백의 눈이 빛났다. 귀족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맥이었다. 사교계가 그토록 영향력이 강하고 사교계를 주름잡는 마담이 탄생할 때마다 귀족 사회가 흔들리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지금의 상황도 결국 요약하면 황후 파벌이라는 인맥 집단이 제국 수도를 뒤흔드는 상황이라고 요약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항상 인맥을 잇고 싶지만, 기회가 없는 사람들과 안면을 트는 가장 좋은 기회가 바로 이런 자선단체와 자선행사였다.
여기에 초대할 사람을 고를 권한을 얻는다는 건, 어지간한 물질적 보상보다 더 큰 가치를 갖고 있었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합시다.”
그제야 제국백이 전적으로 마리아의 말을 믿고 대화에 집중을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마리아의 독무대였다.
아직 한 명의 정치인으로서 완성됐다고 하기엔 좀 부족하지만, 6위계 마법사로서 가진 높은 지능과 황실 정치에서 살아남으며 체득한 눈치는 제국백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녀가 마련한 함정에 깊게 발을 들이게 만드는 데 충분했다.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던 차였다.
마리아의 눈에, 백작 뒤의 창문 너머 흔들리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저게 뭐죠?’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고개를 든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창문 밖에 대롱대롱 매달린 빌헬름이었다.
“…!”
“-그래서, 음? 혹시 무슨 일 있습니까?”
마리아가 창 쪽을 보며 황당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 백작도 고개를 돌리려 했다.
“으흠! 눈이 피곤해서 잠시 집중을 못 했군요. 저희가 어디까지 토의했죠?”
“허허, 눈 건강은 소중합니다. 벌써 시력이 나빠지면 고생하니 조심하시지요. 아무튼, 여기서부터 이야기하시면 됩니다.”
백작은 싱글벙글 웃으며 다시 계약서 작성에 집중했다.
논의를 진행하며 마리아는 힐끗힐끗 창밖을 살폈다.
대체 뭘 기다리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붙든 채 매달린 빌헬름이 마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마리아를 향해 입가에 손을 올리며 티를 내지 말라 당부했다.
‘그런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요!’
속으로만 대답하며, 마리아는 분통을 터트렸다.
‘대체 당신은 뭘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 의미를 담아 시선을 쏘아 보내자, 그는 어설프게 웃으며 고개만 끄덕이고는 다시 팔을 당겨 위로 올라갔다.
그제야 마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희, 잠깐 쉬었다 이야기하도록 하죠.”
정말,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눈가를 한 번 쓸어내렸다.
-―
다행히 창밖에 매달려 있는 동안 들키지 않고 버티다 집무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메이드의 청소가 빨리 끝난 탓에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심장 떨어질 것만 같았던 경험이었다. 하마터면 들킬 뻔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약간의 흥분도 같이 찾아왔다.
“이거 완전 첩보 액션이잖아.”
뭔가, 도파민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걸리면 인생이 망한다는 생각에 긴장되는 만큼이나 스릴을 느끼니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이것 참, 어지간한 몬스터를 잡을 때도 이렇게 흥분은 안 되는데. 이 맛에 수도 생활 하는 건가.
잡다한 생각과 함께 집무실을 나섰다. 이제는 침실로 향할 시간이었다. 침실은 집무실보다 훨씬 저택 내부에 있었기에 이제부터는 정말 조심하며 움직여야 했다.
“간만에 마력 좀 써보겠네.”
온몸에 마력을 두르고 뒤꿈치를 든 채 움직였다. 나뭇잎이 우거진 수풀 사이를 이동할 때도 소리를 내지 않고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방법을 활용해 조심스레 이동했다.
계단을 오를 때는 숨소리도 잠시 멈춘 채 위층에서도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움직였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하니, 마침내 백작의 침실 근처까지 다가갈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숨을 수 없었다.
“이봐, 황녀님이 왔다는 소식 들었어?”
“그럼 뭐해. 우린 구경도 못 하는데.”
영악하게도, 제국백은 침실 입구로 향하는 길에는 어떠한 장애물도 없도록 복도를 뻥 뚫어놨다. 코너를 도는 순간 침실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 내 몸을 가려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심지어 문 앞에 두 명의 경비병이 서 있었기에, 들키지 않고 침실에 들어간다는 건 아예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창문을 통해 침실로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물론 침실에도 창문이 있긴 하지만, 침실 창문은 정원 방향으로 나 있었다. 그리고 정원은 정문과 이어져 있었고.
바깥으로 들어가려 하면 바로 들킨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내가 생각해둔 방법은, 정면돌파였다.
“크흠.”
헛기침을 몇 번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최대한 노쇠한 목소리가 나도록 목에 힘을 주고, 마력을 동원해 얼굴 근육을 찌푸려 나이가 들어 보이도록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기사 특유의 강건한 육체 탓에 피부 질감까지 따라 할 순 없었지만, 그건 이 복도에 창문이 없이 광원을 촛불로 쓰는 걸로 어떻게든 커버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미리 훔쳐둔 집사복까지 더해, 나는 이 저택의 집사를 연기할 생각이었다.
“후!”
크게 심호흡을 하고 볼을 두어 번 두드려 긴장을 다스린 뒤 발을 뗐다.
허리를 쫙 펴고, 최대한 당당한 걸음걸이로 여기까지 오면서 살핀 집사들의 자세를 흉내 낸 채 움직였다.
“응?”
“누구야?”
경비병들의 눈앞으로 당당하게 걸어갔다. 방문을 향해 다가서자 경비병들이 무기를 내밀어 내 앞을 막아섰다.
“여긴 각하의 침실이다. 집사가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온 거지?”
나는 일부러 표정을 더욱 구긴 뒤 그들의 얼굴을 한 번씩 번갈아 바라봤다. 아무 말도 없이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자 그들은 순간 자신들이 잘못한 건가 싶어 움츠러들었다.
그 틈을 노려 파고들었다.
“지금 밑에 황녀 전하가 와계신 건 알고 있겠지?”
자연스럽게, 살짝 건조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목을 긁으며 하대하자 그들은 내가 이 저택의 높은 사람인 줄 알고 정자세를 취했다.
“예, 예!”
“각하께서 전하와 거래를 위해 계약을 맺으시려 하는데, 필요한 자료가 하필 침실에 있다 하시더군.”
“하, 하지만 각하께서 자신이 없을 때는 침실에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래, 알고 있다.”
그들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어쩔 수 없다. 황실과 거래를 하는 만큼, 중요한 내용이 담긴 서류를 옮겨야 하는데, 이미 황녀 전하께서 와 계신데 각하께서 자리를 어찌 비울 수 있단 말이더냐?”
내 설득에 경비병들이 못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물며 그런 귀중한 자료를 옮기는데, 믿을 수 없는 신참들을 보냈다가 자료가 유출되기라도 하면, 오죽 큰일이겠느냐.”
“화, 확실히 그렇습니다.”
대답은 그렇게 하지만, 여전히 경비병들은 영 내키지 않는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이대로는 죽도밥도 되지 않았기에, 나는 도박을 걸어보기로 했다.
“정 불안하다면, 문을 열고 나를 감시하거라. 딱 서류만 갖고 바로 나올 터이니, 너희가 그걸 확인한다면 불안할 일은 없지 않겠더냐.”
물론, 이건 말 그대로 도박이었다. 애초에 나는 그 서류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와중에 한 번에 서류를 가져와야 한다는 건, 어지간한 감으로는 턱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해볼 만한 도박이라고는 생각했다.
어차피 이곳이 아니라도 증거를 수집할만한 곳은 몇 군데 정도 더 있었다. 여기서 실패하면 아쉽긴 하지만, 실패한다고 끝나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아예 선택지조차 없는 주관식 찍기도 아니었다.
“그 정도라면야….”
경비병들은 이 정도가 되어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려주고 지폐 한 장씩을 꺼내 안주머니에 찔러넣어 주었다.
“위험을 감수하는 그대들을 위해 각하께서 건네신 수고비일세. 대신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되네. 알겠나?”
“예, 예!”
경비병들은 주머니에 돈이 입금되자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곧장 문을 열고 길을 비켜주었다.
나는 안으로 들어서 눈짓으로 내부를 빠르게 스캔했다. 과연 비자금과 뇌물에 관련된 서류가 들어있을 만한 곳이 어디일까.
다행히 귀족들 생각하는 것이 다 거기서 거기였기에, 대표적인 선택지 몇 개는 추릴 수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 그 선택지 중 이 침실에 마련된 건 하나뿐이었다.
‘제발 있어라. 제발 있어라. 제발 있어라. 제발 있어라.’
간절히 기도하며 간이 책상으로 향했다. 책상에 딸린 서랍 손잡이를 잡고 한 번씩 작게 흔들어보며 무게와 소리를 살폈다.
정말 다행히, 이중으로 소리가 들리는 서랍이 하나 있었다.
곧장 서랍을 열었다. 겉에서 보이는 것에 비해 서랍의 깊이가 굉장히 얕았다.
‘빙고.’
이 안에 뭔가 있다. 제발 그것이 내가 원하는 물건이길 빌며 서랍을 해체했다. 다행히, 이 비밀 서랍의 조립법은 굉장히 정석적이었기에 금방 서류를 꺼낼 수 있었다.
“찾으셨습니까?”
“음. 찾았네. 이제 나가도록 하지.”
이게 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경비병들이 지켜보는 와중에 내용물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대로 경비병들에게 인사를 받으며 침실을 나섰다. 나는 그대로 모퉁이를 돌기 무섭게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숨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리고, 미소가 절로 흘러나왔다.
—
다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잠입 액션을 찍으며, 마리아가 건네준 일회성 통신기의 버튼을 눌렀다. 한 쌍으로 이뤄진 기기의 한쪽에서 버튼을 누르면 상대방에게 알림이 가는 마법 삐삐가 작동했음을 확인하고, 그대로 저택을 빠져나와 기사단이 머무르는 곳에 도착했다.
“이걸 진짜 해내네요.”
“그럼 실패할 줄 알았냐?”
“맨날 호쾌하게 다 죽이면 암살이니 뭐니 떠들던 사람이 할 말입니까?”
호들갑을 떨며 은근히 나를 디스하는 철십자 기사단의 부단장, 요나스의 낯짝을 밀어내고 마차에 올라타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시간 끌기를 훌륭하게 수행한 마리아가 탑승했다.
“서류는, 확보한 거 확실하죠?
그녀의 질문에 씩 웃으며 서류를 꺼내 들었다.
“물론이지.”
시작이 반이라 했던가.
우리의 작전은, 시작부터 수월하게 반을 먹고 들어갈 수 있었다.